이상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청군이 11시~11시 30분의 어느 시점에 도해를 개시하자, 잠시 후 봉림대군 일행이 갑곶을 떠나 강화부성으로 달려갔다. 청군의 선봉 병력은 순식간에 갑을장악하고 이내 성으로 진격하여 남문 밖에 진을 쳤다. 봉림대군과 함께 성으로 돌아온 김상용은 절망감에 휩싸여 남문 위에 쌓아둔 화약에 불을 붙여자결했는데, 그 시각은 12시 30분경이었다.
다섯째, 청군이 갑곶에 상륙한 이후 육상에서 벌어진 전투에 관한 것이다. (갑)의 『인조실록』 정월 22일 기사에 "중군 황선신은 수백 명의 군사를이끌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자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는 말이있었다. 황선신과 관련하여, 이민구는 (을)에서 "본부의 중군 황선신이 광성으로부터 비로소 육군 113명을 이끌고 왔다고 하여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황선신은 강화부성이 아니라 장신이 주둔하고있던 광성으로부터 올라왔고, 그의 병력은 113명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갑)의 『인조실록』 정월 22일 기사로 돌아가 보면, 황선신의 패전다음에 곧바로 청군이 강화부성 밖에 진을 쳤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민구의 기록에서도 황선신의 패전 이후 강화부성으로 몰려가면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는 청군에 맞서 싸운 조선군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않는다. 조익의 경우에는 황선신 부대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김경징이 강화부성에서 데리고 나간 무사들이 겨우 70~80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을 따름이다. ) 나만갑은 「기강도사」에서 당시 강화부성의 군사가 수백 명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적었다고 했으나, ) 『인조실록과 이민구의 목격담에서는 "수백 명은커녕 그 존재가 아예 언급되지 않았고, 조익의 기록에서는 그 숫자가 훨씬 더 적었다. 앞에서 이미 고찰했듯이, 당시 강화부성과 갑곶 일대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 P202

이처럼 조석·조류가 조선 수군의 동태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면 청군 역시 염하수로를 건널 때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는 위에서 소개한 광해군 11년 우의정 조정의 상주에서 "만약 선체가 작은 병선이라면 적을 막는 데 쓸 수 있다"는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있다. 염하수로에서는 작은 크기의 배가 오히려 군사적 효용이 더 크다는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홍타이지 또한 조대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아군의 비선(飛船)은 가볍고 날카로워 운전[旋轉] 이 편리하고 빨랐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배들이 막지 못했다고 자랑하여, 132) 이 점을 강화도 작전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비선" 이라는 표현 자체가 청군의 작은 배들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경쾌한 기동력을 갖추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만, 청군의 배들이 염하수로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수 있었던 데에는 배의 크기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단서는 (정)의 도르곤 보고에 보이는 "(배 위에) 서서 상앗대질을 하며"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 P216

남급의 [강도록]에는, 청군의 도해 직전 상황에서 임선백(任善伯)이 봉림대군에게 "적(賊)의 배는 가볍고 빠르기가 (마치) 날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의 전선은 조수가 물러날 때 움직이기 어려우니 전적으로 주사에만 기댈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갑곶의 진해루(鎭海樓) 아래 좁고 험한 곳에 포진하여 상륙하는 적과 혈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강도록]은 이 장면에 앞서 임선백이 강화부성의 남문 수비를 맡았다고 하고서는, 난데없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다가 뱃사람에의해 구조되어 살아났다고 하면서 갑곶 현장의 봉림대군 앞에 그를 등장시키고 있다. 임선백의 등장은 아무래도 허구적 장치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염하수로에서 "조수가 물러날 때에는 조선 수군의 전선들이 청군의 도해를 저지할 수 없다는 말 자체는 허구적 장치를 빌려서 정축년 정월 22일의 ‘교훈‘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후 조선 조정이 강화도해안의 요해처에 목책(木柵)의 설치를 추진한 것도 그날에 얻은 ‘교훈‘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만시지탄을 자아낼 따름이지만 말이다.  - P219

그러나 남한산성은 청군의 전투력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청군의 입장에서는 굳이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공성전을 서두를 필요 자체가 없었다. 남한산성의 식량이 떨어지면 조선군은 굶주림에 지쳐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할 터였기때문이다. 청군은 그때까지 느긋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당시 남한산성의 식량은 늦어도 이월 20일경이면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 작전 태세를 완성한 청군이 만약 이월 하순까지
‘고사(枯死) 작전‘을 지속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참극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은 남한산성의 식량이 떨어지기 훨씬 전인 정축년 정월 30일(1637년 2월 24일에 끝이 났다. 이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을 포기하고 삼전도로나와 홍타이지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고사 작전이 청군의 입장에서 가장 유리할뿐더러 충분히 실행 가능했다는 점에 비추어보자면, 병자호란이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고사하기 전에 막을 내린 것은오히려 뜻밖의 결말이었으며 조선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할만하다. - P222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어떻게 해서 이런 방식, 즉 의외로 일찍 그리고 조선의 종묘사직과 인조의 왕위가 그대로 유지되는 방식으로 막을 내리게되었던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정축년 정월 30일 인조의 남한산성 성 경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조의 출성은 홍타이지가 내건 종전 조건을 받아들인 결과였고, 홍타이지가 그런 종전조건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 전인 정월 20일의 일이었다.
정월 20일 새벽 청군은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에 홍타이지의 국서 한 통을전달했다. 이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가 출성하고 척화신 두세 명을 박송縛送하기만 하면 전쟁을 끝내고 철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려 있던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파격적이고 관대한 조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로써 인조가 이 두 가지 조건을 수용하여 단지 두세 명의 척화신을 포박하여 보내고 그 자신이 남한산성에서 나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제시한 두 조건은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 수용하기 곤란한 것이었다. 신료의 대다수가 척화를 주장한 터에 두세 명만을 희생양으로 골라 사지에 밀어 넣는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조의 출성은 더욱더 수용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성을 나갔다가 자칫 배신이라도 당하면 어찌할 것인가? 조선 조정은 옛날 송나라 휘종과 흠종이 겪었던 참극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조선 조장으로서는 인조의 출성만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했다.
홍타이지의 정월 20일자 국서에 대하여, 인조는 다음날 바로 청군 진영에 답서를 보냈다. 답서의 첫 문장은 이랬다. "조선국왕 신(臣) 이종(李(宗)이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삼가 상서합니다." 정월 19일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까지만 해도 "조선국왕이 대청국관온인성황제께 삼가 상서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신 이종"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답서에서는 인조가 자신을 "신"이라고 칭하면서 성과 이름을 그대로썼다. 이뿐만 아니라 홍타이지를 "폐하"라고 불렀다. 완전한 칭신(稱臣)의 서식이었다. 그 대신에 인조는 자신의 출성과 척화신의 박송없이 군사를 물려달라고 간청했다. 홍타이지의 조선 침공이 궁극적으로 인조의 칭신 거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인조의 완전한 칭신으로 전쟁의 발발 원인은 일단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청 측은 두 조건, 특히 인조의 출성은 반드시 관철시켜야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인조는 정월 24일 청군 측에 전달한 국서에서도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척화신 두세 명을 포박해서 보내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한발물러섰다. 당시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가 있던 홍익한을 척화신의 대표로 거명했고, 나머지 척화신은 청군의 철수 후에 색출해서 보내겠다는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청 측은 더 이상 양보하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국서의 접수조차 거부하면서 인조의 출성 수용을 압박했다. 협상은인조의 출성 문제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정월 26일에 이르러 조선 조정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청군 측에서 이미 나흘 전인 정월 22일에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사실을통고한 것이다. 청군은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과 윤방 등의 장계를 증거로,강화도에서 사로잡은 환관 나업과 진원군 이세완을 증인으로 제시했다. 당시 강화도에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원손 및 두 대군이 피난을 가 있었다. 인조는 설사 남한산성이 무너지더라도 강화도만 버틴다면 나라가 멸망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화도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농성을 접고 출성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 P223

여기서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이 식량 부족에 시달렸듯이 청군 또한 군량확보에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제2장에서 엄동설한의 한겨울이 홍타이지가 구상한 공격전략의 실현에 최적의 계절이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겨울철이 군량의 현지 조달에 유리한 시기라는 점도 감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전쟁이 다 그렇지만, 특히 병자호란처럼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총력전이자 적국 땅 깊숙이까지 쳐들어가는 장거리 원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물자, 특히 군량의 보급이었다. 수만 명의 병력이 몇 달 동안 먹어야할 군량은 확보하기도 수송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 골치 아픈 문제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 전쟁을 일으키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약탈을통한 군량의 현지 조달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가을걷이 이후는 조선의 관아나 민간의 비축 식량이 연중 가장 풍부한 때이므로 약탈에 의한 군량 조달에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 P226

그러나 정월 17일 상황의 일대 반전이 일어났다. 청군이 단 하루 만에 태도를 180도 바꾸어 먼저 적극적으로 협상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그들은 갑작스럽게 남한산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신 파견을 요구했다. 전날의 만남에서 확인한 잉굴다이의 태도로 볼 때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승정원일기』는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음을 전한다

인조: "호인(胡人)이 와서 (우리 사신을 불렀다고 들었는데, 무슨 의도인지
"알겠는가?"
홍서봉 : "어제는 느긋느긋한 마음을 극도로 보이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갑작스레 와서 (사신을 내보내라고) 청하니, 필시 저들에게 급한 일이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이날 청 측의 난데없는 사신 파견 요구는 홍타이지의 국서를 전달하기위한 것이었다. 정월 17일의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의 정월 13일 자 국서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인조에게 출성하여 투항하든가, 아니면 어서 결전을 벌이든가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언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이 시점에서는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냈다는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홍타이지와 인조 간 국서 왕래, 즉 대화의 물꼬가열린 셈이기 때문이다. 정월 16일 접촉 때 잉굴다이의 태도로 보건대 청측은 대화의 의사가 없었다. 또한 정월 16일 심양으로 보낸 서신에서도 홍타이지는 다음 날 조선 측에 회답 국서를 보낼 의사를 비치지 않았다. 따라서 정월 17일의 갑작스러운 회담 제안과 국서는 분명 청 측의 돌연한 태도변화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 P244

인조의 출성 문제로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정월 25일, 잉굴다이와 마푸타는 "국왕이 만약 출성하지 않을 것이라면, 사신은 절대로 다시 오지 말라"고하며 조선 측의 출성 결단을 압박했는데, 이때 그들은 황제가 이튿날 귀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황제가 귀국해버리면 협상에 의한 종전 가능성,
바꾸어 말하자면 ‘질서 있는 종전‘의 가능성도 사라질 터이니 결단을 서두르라는 의미였다. 이튿날 황제가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청군이 급기야는 조선 측에 대놓고 시간이 없다면서 성화를 부리기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 이튿날인 정월26일의 접촉에서도 최명길이 황제는 언제 돌아갈 예정이냐고 묻자 청 측에서는 곧 귀국할 것이라고 답했다. 인조가 출성을 결심하고서 보낸 정월 27일의 국서에서 황제의 귀국이 임박했다고 하기에 서둘러 투항을 결정한 것이라고 특필(特筆)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 P253

그러나 분명 홍타이지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으로 인해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군사적 측면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 될 만한 후보를 찾을 수 없다면, 그 후보는 비군사적 측면에서 찾지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고찰에 근거하건대, 홍타이지로 하여금 전쟁을 서둘러 끝내게 만든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할 것이다. 첫째, ‘사건‘은 병자호란 동안 조선 땅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사건‘은 홍타이지에게 전쟁 계획의 변경을 강제할 만큼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 ‘사건‘은 홍타이지뿐만 아니라 청의 왕공들 대부분이 조선 땅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 이유도 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병자호란 기간, 즉 병자년 십이월과 정축년 정월에 관한 한, 청 측의 기록에서는 후보로 상정할만한 비군사적 ‘중대사건‘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청 측의 기록에서 16일 이후의 약 보름 동안은 홍타이지가 인조와 주고받은 국서의 전문 인용과 강화도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다. 정월 23일 외번몽고의 일부를 두만강방면으로 출발시켰다는 유일한 예외를 제외하면,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진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강화도 작전을 지휘한 도르곤과 두두를 제외하면, 홍타이지나 왕•버일러의 동정도 전혀 드러나지않는다. 청 측의 기록은 마치 이 기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침묵‘을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청태종실록』처럼 나중에 편찬된 사서에서 이런 종류의 ‘침묵‘은 간혹 ‘은폐‘를 위한 것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서의 은폐 대상이 될 만한것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의 후보를 찾아보면 어떨까? 즉, 청의 사서에서 은폐한 사실이 확인되는 종류의 사건으로서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조건 가운데 일부라도 충족하는 것을 후보로 상정해보자는 말이다.
이러한 발상에서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당시조선에서 널리 유행하던 전염병인 ‘마마‘, 즉 천연두(smallpox)이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보듯이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때의 후금군이 조선의 천연두에 쫓겨 귀국을 서둘렀다는 사실을 ‘은폐‘한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연두는 만주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홍타이지에게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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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보았듯이 병자호란 전야 조선의 방어전략은 정묘호란의 역사적교훈에 규정된 성격이 짙었다. 그렇다면, 서울 "직도"에 대한 우려를 망각하는 데에도 정묘호란의 경험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즉위 초까지만 해도인조는 적의 서울 "직도"를 우려했고, 이괄의 난 때 반란군의 서울 "직도"로 큰 낭패를 보았다. 그럼에도 인조 대의 조선 조정이 적의 서울 "직도"를 심각하게 우려하는 모습이 사라져버린 시기는 공교롭게도 정묘호란 이후이다.
그렇다면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정묘호란 발발 전의 조선 조정은 광해군 대이든 인조 대이든 간에 아직 후금군의 침공을 경험하지 않은 덕분에 서울 "직도까지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에는 후금군의 침공을 실제로 경험한 탓에 오히려 상상력이 제약되고 말았다. 즉,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의 역사적 교훈에 ‘매몰‘된 나머지, 적의 서울 "직도" 가능성을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 위험을 과소평가하여 안주 등지의 방어 태세만으로 마음을 놓게 되었를 것이라는 말이다. - P114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해명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바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있던 조선군의 동태 문제이다. 개전 초기의 며칠동안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은 서울을 향해 질주하는 로오사, 도도, 요토 등의 부대를 저지하지 못했다. 앞장에서 밝힌 대로, 그것은 청군의 통과작전과 조선군의 산성 입보가 낳은 복합 효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개전 초기의 며칠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까지 지나간 뒤라면, 그들의 뒤를 쫓아 내려올 수 있지 않았을까? 예컨대, 당시 조선군의 최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의주의 임경업이나 안주의 유림은 왜 서둘러 남하하지 않았는가? 만약 그들이 서둘러 남하했다면, 인조가 십이월 18일의 교서에서 말한 것처럼, 병력이 5,000명도 되지 않았던적의 "고군"을 앞뒤에서 협격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개전 초기 서울을 급습한 청군의 세 부대가 지나간 뒤 조선군은 왜 즉각 그들의 뒤를 쫓아 남하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각 지역의 거점 방어가 평안도 황해도 지역 조선군이 사전에 부여받은 임무였다는 사실이다. 군사를 움직이라는 상부의 이동명령 없이 자의적인 상황 판단에 따라 방어 지역을 이탈하는 것은 군율위반이었다는 말이다.
예컨대 정축년 정월 평안병사 유림이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출격하겠다는 평안감사 홍명구를 만류하면서 내세웠던 이유는 조정의 명령이 없었다는것이었다. 의주의 임경업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줄곧 백마산성에 머무르며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근왕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도 인조가 임경업에게 출격을 명한 사실은 보이지 않으므로 이는 역시 그가 사전에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결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P125

 정묘호란의 경우와 비교할 때,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진군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로 병진‘과 ‘시차 진군‘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양로 병진‘이란 청군의 진군로가 두 갈래였다는 의미이다. 청 측의 기록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처음 심양을 떠날 때부터 전군(全軍)을 우익과 좌익의 두 갈래로 나누었다. 여기서 좌우는 남면(南面)하는 군주를 기준으로 하는 방위 개념이다. 동서남북의 방위로 말하자면, 좌익의 진군로는 동로, 우익의 진군로는 서로가 된다. 지금까지 언급된 청군의 여러 부대는 모두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서쪽 진군로를 따라 남하했으므로 서로군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좌익의 부대는 동쪽의 무순(撫順) 방면으로 난 길로 심양을 떠나 압록강 북쪽의 관전을 거쳐 조선의 창성 땅으로 진입했으므로 동로군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홍타이지는 팔기만주 · 팔기몽고 가운데 정백기, 양백기, 정람기의 병력과 외번몽고 좌익의 병력으로 동로군을 구성하여, 도르곤과 호오거에게 그 지휘를 맡겼다. 동로군에 속하지 않은 정황기, 양황기, 정홍기, 양홍기, 양람기와 외번몽고 우익은 당연히 서로군으로 편성되었다.  - P131

결과적으로 서로를 따라 남하한 청군은 전후 여섯 부대가 각각 시차를두면서 남하한 셈이었다. 전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는 비록 같은 날 서울에 도착했지만, 분명 진군을 함께하지는 않았으므로 도착 시각은 달랐을 것이다. 후군의 부대들은 처음에 중군과 마찬가지로 단일 대오로 이동했지만, 홍타이지가 십이월 26일에 하달한 명령에따라 두 부대로 나뉘었다.
청군의 양로 병진과 시차 진군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조선군의 기동에큰 영향을 끼쳤다.  - P132

조정으로부터 근왕령을 받지도 않았거니와, 유림으로서는 청군의 시차진군 작전 때문에 후군이 모두 통과할 때까지 안주성을 지키는 데 전념하지않을 수 없었다. 설령 조정으로부터 출격 명령을 받았다 한들 안주를 떠날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 P134

나중에 홍타이지가 정축년 칠월 26일 명의 장수 조대수(祖大壽)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선의 군사들을 살펴보니, 비록 말 위에서의 전투 능력은 없었지만 법도를 어기지 않았으며 보병전과 조총전에 뛰어났다"고 하여 조선군의 역량을 인정한 것도151) 결코 빈말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축년 십이월 인조에게 보낸 칙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버텼다면 인조도 목숨을 잃고 조선의 종묘사직도 끊어졌을 터인데, 그 경우 자신이 설령 조선의 백성들을 위무하려들었더라도 전쟁과 이산(離散)의 여파로 끔찍한 비극이 벌어져 결국 "동방의 한 나라가 끝내 파괴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선의 백성들이 자신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칙서의 취지는 알량하게도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조의 결단을 자신이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군의 강고한 저항 의지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홍타이지가 이런 식의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리라. - P162

그런 강화도가 병자호란 때의 청군에게는 단 하루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오늘날 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널리 공유되고 있는 통설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특히 검찰사(檢察使)김경징(金慶徵)과 강도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의 안일, 무능, 비겁 등한심한 작태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재(人災論)‘이다. 하지만 몇 년 전 이러한 통설적 이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강화도 함락 과정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사료적 근거는 기본적으로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수록된 기강도사(記江都事)인데, 거기에 자세히 묘사된 김경징의 한심한 작태는 김경징의 부친 김류와 나만갑의 악연을 고려할 때 곧이곧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사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은 김경징에게 강화도 수비의 군사적 책임을맡기지 않았으며, 전후의 김경징 처형 결정도 군사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윤리적 차원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화도 함락의 군사적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전력 차이, 즉 청군이 병력과 무기- 대표적으로 홍이포-에서 현격한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하며, 여기에 우월한 수군 전력에 의지하여 청군을 해상에서 저지한다는 것이 조선군의 구상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 P167

이처럼 강력한 대포였기에, 『인조실록에서는 청군이 쏜 홍이포 때문에 "(조선의 수군과 육군이 허둥지둥하며 감히 접근하지 못하자, 적(賊)이 빈틈을 타고 급히 (염하수로를 건넜다"고 했고, (B)의 도르곤 보고도 조선 수군의 전선 40여 척이 "우리가 홍이포와 장군포를 쏘자 견디지 못하고 위아래로 흩어져 도망쳤습니다"라고 하여, 홍이포가 청군의 강화도 상륙작전에서 막대한 위력을 발휘한 것처럼 썼다. 선행 연구에서도 이러한 사료기록에 근거하여 당시 청군의 전력 구성에서 홍이포의 존재를 강조했다. 그러나 강화도 작전에서 청군이 홍이포를 투입하여 거둔 실전 효과를 따져보면, 조선 측에 가한 심리적 충격의 효과는 강력했을지 몰라도, 실제 물리적 타격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추정하는ㅜ이유로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청군이 강화도 작전에 투입한 홍이포의숫자가 결코 많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청군이 강화도 작전에 투입한 홍이포는 겨우 3문 수준에 그쳤다. - P190

현재 4문의 실물이 남아 있는 숭덕 8년(1643) 주조 "신위대장군(神威大將軍)"의 경우를 보면  청군의 홍이포는 구경이 13~14.5센티미터, 포신이264~305센티미터, 무게가 3,600~4,000근에 달했다. 이 시기 조선군의 화포로는 16세기 중엽 주조의 천자총통(天字銃筒)이나 지자총통(地字銃筒)이 현존하는데, 전자는 구경 11~13센티미터, 길이 90~130센티미터, 무게300~400킬로그램[500~667금]이고, 후자는 구경 10센티미터, 길이 80~90센티미터, 무게 70~150킬로그램 [117~250)이다.71) 이처럼 홍이포는 그 크기에서 조선군의 화포를 압도했으며, 크기만큼이나 사거리도 길어서 최대 사거리 약 9킬로미터, 유효 사거리 약 2.8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홍이포등장 이전 동아시아에서 위력이 가장 셌던 화포로 알려져 있는 불랑기(佛狼機) 대포의 유효 사거리도 약 1킬로미터에 불과했으니, 당시 홍이포의 위력은 말 그대로 막강했다고 할 수 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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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괜찮아. 난 아빠를 무서워했었어.
손가락이 희고 여위어서 빨갛게 벗겨진 끝부분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채영의 손.
- 아빠는 나를 무척 귀여워해. 근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내가 아빠 마음에 안 들 거라고 생각하곤 했거든. 요즘은 사람들이 나를 안좋아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같은 거 안해. 그냥 아무도 날 안좋아한다고 생각해버리는 편이 나아.
-뭐야, 엄마보다 더 특이하잖아.
퍼즐 한 개를 한 손에 쥔 채 태수가 채영을 아리송하다는 듯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채영의 마음, 나는 알 것도 같은데.
신민아씨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을 겁내게 돼. 나에 대한 무슨 권력 같은 게 그사람한테 생기는 거야. 말이 되니? 근데 그런 게 있긴 있거든.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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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 책은 2013년 12월 28일 <한겨레>에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의 내력에 대해 쓴 글부터 2014년 12월 22일 <한겨레>에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하여 쓴 글까지 1년간 쓴 글 열 편을 모은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2012년 12월 19일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2년 차에 해당하는 기간에 부정기적으로 쓴 글들이다. 이 1년간 정말 엄청나게 크고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했고, 전시작전권의 회수가 사실상 포기되었고,
또다시 조작 간첩 사건이 터졌다. 누구는 ‘유신공주‘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가 유신 시대로 회귀했다고 그러고 또 누구는1958년 진보당 해산을 떠올리며 자유당 시절로까지 돌아갔다고 그랬다.
역사학은 분명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역사학자가 서 있는 자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일 수밖에 없다.  - P5

세월호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옷 바람으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기막힌 모습을 우리는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많이 보아왔다. 어쩌면 저 징글징글한 모습을 되풀이해서 또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악마‘라 불린 선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이 너무도 많았다. - P17

전향자들의 단체인 보도연맹을 관리했던 대표적인 공안 검사 정희택 역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는 인민군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였기에 땅굴을 파고 권총을 몸에 지닌 채 77일을 쪼그려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정부가 환도하자 지팡이를 짚고 법무 장관 이우익에게 인사를 갔다. 장관이 살아 돌아온 정희택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이제부터 잔류파에 대해서는 부역 여하를 막론하고 수사해서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정희택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지팡이로 장관의 책상을 내리치며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을하고 애국 시민을 유기한 채 도망간 자는 누구인가. 당신들이야말로 한강의 남쪽 강가에서 잔류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허가를 얻은 후에 들어왔어야 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승만의 거짓 녹음 방송에 앞서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즉흥시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던 모윤숙도 피난을 가지 못했다. 모윤숙은 9월30일 경무대에 가서 이승만을 만나자 분한 생각이 가슴에 북받쳐 넥타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하며 "할아버지, 도대체 나를 부려먹고 막판에는 방송을 시키고 혼자만 살려고 피난 가기예요?" 하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대통령 넥타이에 매달리고 장관 책상을 지팡이로 후려치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당대 최고의 우익 인사였기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 P28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줬다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내건 조봉암이 내건 구호는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였다."
피해대중이 누구겠는가. 바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며, 억울하게 부역자로 몰려 처벌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에게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그를죽인 뒤 편안하게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1958년 7월 2일에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진보당 사건 1심 선고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조봉암은 예상을 깨고 간첩죄 부분은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만을 유죄로 인정하여 정역 5년 형을 언도받았다. 재판장은 유병진, 부역자 처벌의 부당성을 깊이 고민했던 바로 그 판사였다.
7월 5일, 법원에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300여 명의 청년들이들이닥쳐 "빨갱이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죽여"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유병진은 간신히 법원을 빠져나와 친구인 ‘반공청년단장‘ 신도환의 집에 몸을 숨겨야 했다.
이승만 정권은 주동자 5명을 긴급 구속했지만 금방 풀어주었다. 이 반공청년들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일제가 키운 군국소년들이었다. 정작 일본에서는 패전후 미군이 군국소년들의 머릿속에서 군국주의 물을 빼는 작업을 벌였지만, 분단된 한국에서 미군은 그런 제스처를 취하지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군국소년들은 군인이 되어 전쟁을 치렀고, 전쟁이 끝난 후 반공청년이 되어 "빨갱이 판사를 타도하라"며 법원에 난입했다. 박정희 시절, 이들은 향토예비군이 되어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 ", "싸우면서 건설하자" 등을 외치며 병영국가 건설과 유신과업수행에 앞장섰다. 그들은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없었다. 김대중 빨갱이, 노무현 빨갱이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가스통 할배‘, ‘애국 할배‘가 된 1950년대 반공청년 세대는 요즘도 <PD수첩> 무죄, 미네르바무죄, 강기갑 무죄, 한명숙 무죄, 유우성 무죄 같은 판결을 쏟아내는 법원을 찾아가 "빨갱이 판사 타도하자"를 외치며 팔십청춘을 불태우고 있다. - P36

분단과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몰아닥친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친일파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분단과 전쟁을 신분세탁의 찬스로 받아들인 데에서 친일파 중의 친일파인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 나부랭이들의 반민족적, 아니 반인간적인 민낯이 드러난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분단과 전쟁 때문이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권력을 공고히 했는가. 가만있으라 거짓 방송하고 다리 끊고 도망갔다가 돌아와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부역자로 잡아 죽이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것이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공안 권력의 출생의 비밀이다. 그 후예들이 지금껏 대한민국을지배하고 있다. 공안 권력은 대한민국 수구 세력의 중추이다. - P39

 백사 이항복의 자손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 후예이자 8만 석을 거두는 대부호였던 이회영의 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해방된조국에 살아 돌아온 것은 막내 이시영뿐이었다.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해 죽었고, 형제들 중 가장 많은 돈을내놓은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8만석이라면 삼성, 현대 같은재벌은 아닐지라도 ‘황제 노역‘ 했다는 토호보다는 훨씬 큰 재산이었다 할 것이다. 그 재산을 바쳐 이회영 형제가 한 일이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교과서에야 독립군 양성기관이라고 우아하게 처리가 되겠지만, 독립군 양성기관에 들어간청년 중 상당수는 집에서 부리던 종들이었다. 남자들이야 돈내고 거창한 독립 방략을 세우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했겠지만, 조선에 있을 때 뜨르르하던 대갓집 마나님들은 새벽같이일어나 만주 칼바람을 맞으며 집에서 부리던 종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버선을 기웠다. 이게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보수의 참모습이다. 한 사회에서 온갖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그 사회가 침몰해갈 때 자신이 설 자리를 알아야 한다. - P44

 이 땅에서진짜 사라진 것은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우익이었다. 남북협상을 중간파가 했다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보면 백범 김구는 극우, 우사 김규식은 합리적 우파나 잘해야 중도우파 정도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다리 끊고 도망갈 때 서울에남았다가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등의 인사들이 양심과 부끄러움과 합리성을 지니고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질 줄아는 우익 인사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청산하자고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익 중에서 백범은 암살되고, 나머지 지도급 인사들은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학살당하고 부역자로 처벌받으며 낙백해버렸다. 우익이라면 당연히 민족을내세워야 하는데, 이 땅의 자칭 우익들은 삼일절에도 성조기들고나오는 부류들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는 바지만,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 보수였다. 극우파 김구의 수행비서였던장준하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서자 공산주의자와 무슨 협상이냐며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떨어져 나왔고, 이승만정권의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이 직책상 당연히 좌익 전향자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자 좌익들에게 관대하다며 이범석과도 갈라선 강골 극우파였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사상적 배후 함석헌,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절 우익 정도가 아니라아예 미군 장교였던 문익환과 박형규, 반탁학련이라는 극우파학생 조직의 행동대장이었던 계훈제, 7년간 국군 장교로 복무한 리영희, 반공포로 김수영, 유학생의 열에 아홉이 미국에 잔류하던 시절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납북당한 것을 잊지 않고 군에 복무하기 위해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백낙청 등등은어느 모로 보나 보수의 가치를 충실히 지킨 양심적인 인물들이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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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각 지역의 방어 거점은 대개 산성이었다. 병자호란 전야 조선의 산성 거점 방어전략은 과거의 전쟁 경험에서 얻은교훈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 조선은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의 경험을 통해 사방이 훤히 트인 평지에서 적의 강력한 기병과 정면 승부를벌여서는 승산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지의 성곽 또한 청군의 공격을 막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성 작전 능력을 갖추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성 작전 경험이 풍부했다. 조선은 정묘호란때 그 사실을 직접 체험했다. 동시에 조선은 산성이나 험준한 산악 지형의 전술상 이점을 십분 활용한다면 그들과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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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각 지역에 산성을 신축·보수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게다가 산성 거점 방어전략은 단지 전술상의 이점만 고려한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의 안전까지 시야에 넣은 것이었다. 이 또한 정묘호란 때 적의 살육과 약탈로 일반 백성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사실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 P78

여기서 주의할 점은, 조선 조정이 오로지 산성 거점 방어전략에만 매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일차 방어선이자 주력 방어선이었던 안주와 영변에는 유사시 성곽을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간다는 입보入保 전략이 적용되지 않았다. 두 곳은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영변의 철옹산성은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였지만, 안주성은 평지에 입지한 성곽이라 방어가 어려웠음에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 위치한 까닭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인식했다. 당시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던 유림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안주성 방어의 책임을 맡겼던 것도 안주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전야 조선이 세운 유사시 방어전략의 근간은 뭐니 뭐니해도 역시 조정의 강화도 파천播遷이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각 지역 군민이 산성으로 입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조선 조정 또한 강화도로 입보한다는 구상이었다는 말이다. 강화도 파천의 목적은 물론 전쟁의 장기화였다. 즉, 조선의 방어전략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구전持久戰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원정군에게 점점 더 불리해지기마련이다. 특히나 조선이 구상한 강화도 거점 지구전 전략은 청의 원정군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안성맞춤이었다. 기병 위주의 북방 민족에게 해상에 입지한 강화도는 공격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 P79

이처럼 정묘호란의 경우 인조는 적군이 황주까지 왔다는 소식에 파천을결정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 강화도에 도착했다. 만약 병자호란 때에도 똑같이 움직일 요량이었다면, 일차. 이차 방어선이 모두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이벌어진 뒤에야 비로소 파천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병자년의 경우에는 아예 전쟁 발발을 기다릴 것 없이 일찌감치 강화도로 파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었으므로, 황주마저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정묘호란의 사례를 참고하건대 단 사나흘의 말미만 확보하더라도 강화도로의 파천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 P81

청군이 안주에서 개성까지의 약 600리를 진군하는 데 걸린 시간은아무리 길게 잡아도 만 사흘을 넘지 않았던 셈이다. 평균적으로 파발마 속도의 절반을 상회하는 엄청나게 빠른 진군 속도였다.
청군의 가공할 침공 속도를 잇따라 전한 12~14일 사흘간의 장계에 문자그대로 패닉에 빠졌을 조선 조정의 모습은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십이월 14일 오전 조선 조정은 겨우 빈궁을 비롯한 왕실 가족 등을 먼저 강화도로 떠나보냈을 따름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인조와 소현세자는 숭례문까지 왔다가 적군이 이미 연서역(延曙驛) [오늘날의 은평구 역촌동]을 지나 홍제원(弘濟院)에 이르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강화도로 가기는 글렀다고 판단하여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인조는 이제야 막 얼음이 얼어 아직은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던 한강의 얼음길을 허둥지둥 말을 타고 건넜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은 어둠이 깔린 초경(初更) 무렵이었다. 그나마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최명길과 이경직(李景稷)이 단 한 명의 비장(神將)과 함께 홍제원으로 나아가 청군 측의 마푸타(Mafuta)[조선 기록의 ‘마부대(馬夫大)]와 협상을 벌이며 시간을 벌어준덕분이었다. - P87

먼저 일차적 요인이다. 홍타이지가 세운 공격전략에서 개전 초기의 작전목표는 조선의 심장부인 서울을 곧바로 기습하여 인조를 서울 도성에 가두는 것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작전이었으므로 ‘전격 작전‘이라고 부를만하다. 이러한 전격 작전의 성패는 청군이 얼마나 빨리 서울에 도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즉, 진군 속도가 생명이었다. 진군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물이라는 자연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홍타이지가 엄동설한의한겨울이 오기를 기다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의주-서울의 대로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던 조선군과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정묘호란 때처럼 중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면 서울 도착 시간이 늦어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했기 때문일까? 홍타이지는 ‘통과 작전‘ 내지 ‘패싱 작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전을 구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이후서울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방어 거점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는작전이었다.
다음으로 이차적 요인이다. 전격 작전을 세운 홍타이지는 작전 목표의 실현을 위해 고속 진군과 통과 작전을 구사했다. 하지만 청군이 고속 진군과 통과 작전을 구사한다고 해서 그들의 작전 목표가 자동적으로 달성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압록강으로부터 서울까지는 약 1,200리나 되는 거리였다. 만약 중간에 조선군이 청군의 진로를 가로막기라도 했다면, 서울의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는 데 필요한 며칠의 말미를 확보할 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인조의 강화도 파천을 저지하기에 충분할 만큼 빠르게 진군했는데, 그것은 조선군이 산성으로 입보한 탓에 대로를 질주하는 청군을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P89

실제로 병자년 사월 이후 전쟁 발발 직전까지 조선과 청나라 간에 외교적접촉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병자년 사월 나덕헌과 이획을 사실상 추방할때, 홍타이지는 나덕현과 이획의 무례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 측이 형제 맹약을 파기하려고 한다며 강력히 비난하는 국서를 건넸다. 그러나 나덕헌일행은 황제를 칭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차마 조선 조정에 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숙박했던 통원보(通遠堡)에 국서를 버려두고 귀국했고, 단지 국서의 내용을 베낀 장계를 서울로 보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조선은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의 접수를 일단 거부한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전혀 이로울 것이 없는 전쟁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병자년유월, 조선 조정은 정묘년 이래의 맹약을 깬 적이 없다는 취지의 문서를 의주로 보내어 청나라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는 나덕현 일행이 장계로 보고한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에 대한 반박이었지만, 청나라 측의 접수 거부로인해 문서의 전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인조는 ‘척화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심양에 역관(譯官)을 파견했다. 조선의 역관 일행은 병자년 시월 말 심양에 도착했지만, 청나라에서 접수를 거부한 탓에 가져간 문서도 전달하지 못하는 등 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정식 사신의 파견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격론을 벌인 끝에 십이월 4일 추신사(秋信使) 박로가 서울을 출발했다. 그러나 박로가 서울을 떠난 십이월 4일은 홍타이지가 이미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한 뒤였다. - P90

조선에서도 만약 홍타이지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시기는 강물이 어는 결빙기일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얼어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약탈을 하고 달아나는 여진인들의 행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익히 경험한 바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의 병자년 십일월 기사만 보더라도 "얼음이 언 뒤"라면 언제 적의 침공이 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조선 조정의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결빙기에 전쟁을 벌이기로 한 홍타이지의 결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빙기 중에서도 언제였느냐가 문제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결빙기였느냐, 아니면 한강의 결빙기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조선 전기 여진인들의 침공을 경계해야 했던 계절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결빙기였다. 정묘호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넌 날짜는 정묘년 정월 13일이었다.  이 날짜를 보고 그냥 요즘 달력의 ‘1월13일‘을 떠올린다면, 정묘년의 후금군 역시 한겨울에 쳐들어왔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정묘년 정월 13일은 1627년 2월 28일이었다. 정묘호란은 기본적으로 양력 3월에 진행된 ‘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단 압록강은 여전히 결빙기였기 때문에 후금군은 얼음길로 강을 건넜다. 하지만 적어도 대동강 이남의 강들은 이미 얼음이 녹은 뒤였다.
병자호란 때의 청군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정묘호란 때보다 거의 두 달이 앞서는 1637년 1월 3일(병자년 십이월 8일)이었다. 한반도의 1월은 겨울의 한복판이다. 압록강은 물론이고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도 모두 얼어 있었다. 청군 선봉대가 서울에 도착한 병자년 십이월 14일에는 한강에도 얼음길이 열렸다. 그들이 겨우 엿새 만에, 그리고 이틀 뒤인 십이월 16일 청군의 증원 병력 두 부대가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강이얼어 있었던 덕분이다. 홍타이지는 서울을 최단 시간에 직격하는 데 필요한 자연 조건이 형성되는 시기를 골라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 P93

홍타이지가 전쟁의 초기 판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승부수를 던진 것은 심양을 떠난 다음 날인 십이월 3일의 일이었다. 이날 홍타이지는 마푸타와 로오사(Loosa)에게 300명의 병력을 맡기면서, "상인을 가장하여 밤낮 없이달려가 조선의 왕이 사는 왕경(京) 성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이 300명은 ‘전봉(前鋒:gabsihiyan cooha)‘ 이라고 불리던 부대로 청군 중에서도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경무장의 최정예기병이었다. 로오사는 당시 전봉대신(前鋒大臣:gabsihiyan coohai amban), 즉 전봉 부대의 사령관으로, 일찍이 ‘숑코로 바투르(Songkoro Baturu)‘라는 일종의 전쟁 영웅 칭호를 받은 용맹한 장수였다. 조선의 기록에 ‘마부대‘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하는 마푸타는 ‘용골대(龍骨大)‘, 즉 잉굴다이(Ingguldai)와 더불어 홍타이지의 사신으로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길잡이역할을 겸해서 청군의 최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인다. - P95

그들의 진군 속도야 어쨌든 간에, 만약 십이월 14일의 조선 조정이 그날 서울에 들이닥치고 있던 청군이 겨우 수백 명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패닉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것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이런 종류의 ‘만약‘을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군의 작전이 조선 조정의 착각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즉,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소수 정예의 전봉 병력을 상인으로 가장하여 은밀하게 침투시킨 홍타이지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말이다. 요즘의 전쟁에 빗대자면, 홍타이지는 공수 부대를 안주에 낙하시킨 것과 다름이 없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 P99

 그러나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개전 초기 로오사 선봉대가 거둔 성과는 엄밀히 말해서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인조를 서울 도성에 묶어둔다는 당초의 작전 목표를 100퍼센트 실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오사 선봉대가 일단 인조의 발을 묶어두면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가 도착하여 포위망을 구축한다는 것이 홍타이지의 원래 계획이었다. 서울 도성은 성벽의 대부분이 평지에 입지했으므로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가 일단 포위망을 구축한 뒤에 전 병력을 서울에 집결시켜 공격에 나선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다는 심산이었을것이다.
반면에 남한산성은 험준한 산악 지형에 입지한 천혜의 요새였다. 성벽가까이 공성 장비를 가져다 대기조차 쉽지 않았다. 설사 전 병력이 집결한다고 해도 당장 공격해서 함락시키리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에대한 공성전은 자칫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인명 손실만 늘릴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남한산성처럼 공성 자체가 어려운 산악 요새에 대해서는 포위망을단단히 구축하고 수비 측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서울 도성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망 구축과 유지에는 서울 도성보다 훨씬 더많은 병력이 요구되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홍타이지가 전쟁이 끝난 뒤 로오사에게 인조의 남한산성 입성을 저지하지 못한 군사적 책임을 물은 것도충분히 이해가 간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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