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수 원장을 한 번만 더 인용하게 해주신다면, 그 사람들은 결국 가서 그 주정수 원장이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원장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을 보았기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원장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실상 그분이 원생들의 대표를 뽑아다가 평의회라는 기구를 설치한 바로그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거든요. 주원장의 동상은 아마 이 섬이 남아 있는 한 영원히 저들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저 사람들의 두려움은 아마 직접적으로 원장님께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배반에 관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해보오. 자신들의 배반이라는 건 또 뭐요?"
원장은 비로소 조금 기세가 누그러드는 어조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주정수 원장의 동상이란 실상 그 자신이 앞장서 나서서 만들어 세웠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동상 건립은 애초 그가 만든 평의회 위원들 입에서부터 발기 동의가 나온 일이었습니다. 동상은 원생들을 대표하는 평의회 위원 자신들이 스스로 지어바친 것이었단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는 원장님께선 좀 의심스러우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섬에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좀더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이 섬 안에서는 비단 주정수 원장 시대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때라도 그런 일이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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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은 입체시가 시각세계에 무엇을 더해줄 수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는 그것을 만끽한다. 한쪽 눈을 감아도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입체들은 엄청난 변화를 생생하게 인지한다. 이 세계가 공간감과깊이감을 갑자기 잃고 트럼프 카드처럼 납작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우리의 입체시가 더 예리하며, 우리가 주관적으로 더 깊은 세계에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색이나 형태에 더 민감한 사람이 있는것처럼, 우리에게는 입체시가 더 민감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입체시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입체시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하고도 놀라운 시지각적 전략을 이해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시감각 의식과 의식 그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 P139

많은 동물종에게 입체시는 생물학적 전략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포식동물의 눈은 일반적으로 전방 주시형인데, 양안의 시야가 많이 겹친다. 반면에 포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동물들은 눈이 머리 양옆에 있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이 파노라마식의 시야를 확보해주어 뒤에서 다가오는 위험까지도 포착할 수 있다. 귀상어는 무시무시한 포식동물인데, 망치처럼 생긴 머리 모양 덕분에 전방을 향하는 눈이 넓게 벌어져 있다. 실로 귀상어는 살아 움직이는 초입체경이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전략을 갑오징어에게서도 볼 수 있다. 갑오징어는 넓게 벌어진 두 눈이 큰 각도로 파노라마 시야를 갖지만 누군가의 공격을 받을 때는 하나의 특별한 근육이 작동하여 두 눈이 바로 앞으로 몰리면서 양안시로 바뀌어 치명적인 촉수로 공격할 수 있다. - P144

우리 같은 영장류의 전방 주시형 눈에는 다른 기능도 있다. 가운데로모인 여우원숭이의 큰 눈은 어둡고 빽빽한 밀림의 군엽 속에서 죽은 듯움직이지 않는 채로 주위를 명확하게 분간하기 위한 입체시를 가능하게해준다. 착시와 속임수가 넘치는 밀림에서 천적의 위장에 넘어가지 않기위해서는 입체시가 필수불가결하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능수능란 그네를 타는 긴팔원숭이의 공중곡예도 입체시 덕분에 가능한 능력이다. 긴팔원숭이가 외눈박이라면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다. 상어나 갑오징어가 외눈박이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체시는 동물들에게 대단히 유익한 능력이다. 하지만 대가는 따르게 마련이어서 파노라마 같은 넓은 시야를 희생했으며, 양 눈의 협응과 정렬을 위한 신경과 근육 작용이 따로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두 시각 이미지의 시차로 깊이를 계산하는 뇌 기전도 별도로 발달해야 했다. 이렇듯ㅠ자연계에서 입체시는 그저 속임수 장치로 보아 넘길 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능력이 없어도 사는 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점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P145

수의 경험에서 확인되는 것은 성인 뇌에서 시각 영역은 가소성이 커서 양안세포와 회로가 생후 초기의 결정적인 시기에 조금이라도 살아남았다면 한참 뒤에라도 재활성화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상황에서 기억에는 입체시가 거의 혹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을지 몰라도 잠재적 입체시 능력은 존재하므로, 눈의 위치가 적절하게 교정된다면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소생할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일이 50년에 달하는 휴지기 끝에 수에게 일어났다는 점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 P163

그 신경학적 기반이야 어떤 것이든 간에 시각 세계가 확대됨으로써 수에게는 실질적으로 감각기관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인데,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입체시는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있다고 수는 편지에서 이야기한다. "거의 세 해가 지났는데도 새로 얻은 시각이 저에게는 여전히 기쁨과 놀라움을 줍니다. 어느 겨울날이었는데,
매점에서 점심을 간단히 때울 요량으로 강의실 건물을 나섰지요. 그런데 몇 발짝 뛰다가는 바로 멈췄어요. 탐스럽고 촉촉한 눈송이들이 저를 둘러싸고 느릿느릿 떨어지고 있었어요. 저는 눈송이들 하나하나 사이의 공간을 볼 수 있었고, 그 모든 눈송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답게 3차원의 군무를 추고 있었어요. 과거에는 눈이 저보다 조금 앞에 있는 한 장의 평면 안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제 자신이 내리는 눈 속에, 눈송이들 한가운데에 있다고 느꼈어요. 점심도 잊은 채 저는 몇 분 동안 내리는 눈을 지켜보았고, 깊은 환희감에 압도되었어요.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답니다. 특히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말이지요." - P164

암, 어떤 암이 되었건, 암에 걸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순식간에 뒤바뀐다는 뜻이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 순간, 얼마가 되었건 평생 가는 검사와 치료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일상이 앞에 놓여 있으며,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보류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게 된다. 겨울의 첫날인 오늘, 간 기능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 야수가 내 간으로 침투했을까? 그 갈고리 발톱이 내 생명을 움켜쥐고 있을까? 내가 흑색종으로 죽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나는 종양과 흥정했다. 너는 내 눈을 가져라. 꼭 그래야겠다면. 하지만 나머지는 남겨다오. - P174

2002년은 악몽이었다.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그해 함성 속에서 우리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꿈을 이루는순간, 30년을 조이던 긴장의 끈이 확 풀리면서 바로 그 순간 시험에 들었는가 보다. ‘사형수 아버지‘에서 ‘대통령 아버지‘가 되었다. 관객들에게는 드라마틱한 역전극으로 보이겠지만 아이들에게는 현기증이 나는 롤러코스터게임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냉정하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을것이라고 추측한다. 이해는 괴롭고 아픈 일로 점철된 일생 중에서도 가장견디기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어제까지 아버지로 인한 피해자였는데 하루아침에 가해자가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아들들이 아버지의 일생에 불명예를 안기다니. 몇 차례 사선을 넘으면서 힘들게 이 자리에 와 혼신의 힘을 다하는 고령의 아버지를 보면서 어떻게 그런 처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도여러 번 당부했건만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 아들들이 한없이 야속했다.
원대한 꿈을 갖고 모진 고난을 헤치며 대통령이 된 거목 아래서 가족은 늘 외롭게 마련이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의 고민과 아픔에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입 바른 말 잘하기로 유명했던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의 말이 정말 실감난다.
"아버지는 모든 장례식에서 자신이 주검이 되기를 원했고, 모든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되기를, 모든 세례식에서는 아기가 되기를 원했다." - P373

‘주여, 저의 기도가 부족했습니까? 저희가 교만했나요?‘
나는 기도로 나날을 보냈다. 부끄러워 국민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음 날 일정이 많은데 잠을 못 이루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가슴을 쳤다. 셋째에 이어 둘째까지 구속되었을때는 숨이 막혔다. 물 한모금 넘어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리내외는 말을 잊었다. 각자의 서재에서 따로 시간을 보내다 늦은 밤에야 안방으로 갔다. 북악산 기슭의 적막한 관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이었다. 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평생 열심히 읽던 신문을 끊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었다. 어찌 뉴스에 귀를 막을 수 있겠는가. 아들들에 대한 분노를 삼키는 남편을 보며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웠다. 차라리 나에게 ‘당신은 뭐했느냐? 라고 역정을 냈다면 덜 괴로웠을 것이다. 매섭게 추궁을 했더라면 차라리 후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묵했다. 그 대신 남편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의료진은투석을 권했다. 퇴임 후 쓰러지더라도 대통령이 하루 몇 시간씩 투석하느라 누워 있을 순 없었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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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준비된 대통령‘이었던 반면에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대선 4수를 하는 긴 세월 동안 나는 한 번도 내가 영부인이 되면 무엇을 하겠다는상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허락할 만한 주변 조건이 아니었다. 그저 만약에 내게 기회가 온다면 어려운 이웃들과 여성의 권익을 신장하는일을 하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여성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함께하고 평민당부총재를 지낸 오랜 인연의 박영숙 선생, 한신대 김성재 교수 등과 의논했다. 아동과 여성을 위한 일을 큰 방향으로 정했다. 경제 위기로 인해 굶는아이가 많다고 했다. 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서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봉사 단체인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과 딸들에게 희망을 주는 ‘여성재단‘은 이렇게 태어났다.
나는 제2부속실 인사를 하면서 지역과 종교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집권 1년 동안 본관 제2부속실에는 호남 출신이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전혀 없었다. 나는 모태 신앙으로 기독교인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비서실 소속 제2부속실이었으므로 공사를 분별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었다. 청와대 직원들은 이런 현상들을 거의 혁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 P327

그는 회담을 앞두고 특사로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국정원 원장에게 특별 주문을 했다.
"김 위원장을 만나거든 인물 연구를 해 오세요."
임 원장의 보고는 놀라웠다. 국제 정세에 밝고 영특하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주입된 ‘망나니‘와는 판이한 인물평이었다.
김 위원장이 말했다.
"힘들고, 두려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도덕이있고 우리는 같은 조선 민족입니다. 절대 섭섭하지 않게 할 테니 염려하지마십시오.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데 우린 2박 3일간 대답을 줘야 합니다."
그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차렸다. 그러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을 서슴없이 터뜨렸다. 나는 그가 버거운 대화 상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들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가슴에서 서러움이 물안개처럼 자욱하게감돌았다.
당신들과 교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지난 30년간 우리가 얼마나힘들고 두렵고 무서운 세상을 살았는지 알기나 하시나요. - P337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이 베르게 위원장에게 질문했다.
"수상을 위한 로비가 있었는가?"
"있었다."
"어떻게?"
"주지 말라는 반대 로비가 있었다."
심지어 4월 총선 유세장에서는 아직 받지도 않은 노벨상을 두고 한나라당이 네거티브 캠페인을 벌였다. 그것도 모자라 낙선한 원외위원장들이 노벨상 수상 저지 원정 시위를 떠났으니 이를 부끄러워서 차마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심지어 수상이 결정된 후에도 정치권과 일부 언론에서는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수상식 참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마음 약한 수행원들이 자진해서 비행기를 타지 않는 해프닝도있었다.
우리는 12월 8일 가족, 그리고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동지들을 초청해 대한항공 특별기를 타고 노르웨이 오슬로로 향했다. 12월의 북유럽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낮임에도 거리는 한밤중이 어두웠다. 사계절이분명하고 낮과 밤이 확연한 우리가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인지 새삼 감사했다.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시상식장의 꽃은 주로 해바라기였다. 햇볕정책의 상징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있었다. 국왕이 오찬을 주최하고 저녁에는조수미 씨가 출연한 축하 콘서트가 열렸다. 다음 날 스웨덴 스톡홀름으로가 스웨덴 의회에서 연설하고 13일 스웨덴 국왕 오찬에 참석한 뒤에 귀국했다.
끈질긴 로비설 제기로 인해 노벨 위원회 게이르 룬데스타드Geir Lundestad사무총장이 KBS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비합법적인 로비는 없었다‘고 밝혀야 했다. 그럼에도 끝내 한나라당이 평화상 반납 주장까지 하자 노벨 위원회는 ‘매우 무례하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참다못해 나선 이들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교민들이다. 이들은 노벨상이 로비로 좌우되는 상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이후로 한국인들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국이라면 넌더리를 내고 있다." 과학 분야에서 심심찮게 수상하는 이웃 일본은 스톡홀름에 상설 연락사무소를 두고 일본인 과학자들의 업적을 홍보하는 데 주력한다. 즉 그들은 합법적인 로비를 상시적으로 하고 있다. 비교하기 서글프지만 우리가 본받아야할 부분이 아닌가. - P346

나는 소록도를 두 번 방문했다. 주민자치회장이 ‘영부인 방문‘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세대는 한센병을 문둥병이라고 하여 가혹하게 소외시킨 마음의 빚을 지니고 있다. 나는 흔쾌히 가기로 했다. 소록도 가는 길은 무척 멀었다. 비행기로 광주까지 간 후에 거기서 다시 헬리콥터를 타야 한다. 그러기로서니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는 한하운 시인의 <소록도 가는 길>만큼이나 힘들겠는가.
한센병은 전염되지 않는 병원균이다. 더 이상 환자가 발생하지 않아서1992년 종료가 선언되어 사회의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지금 그곳에 있는 분들은 손이 뭉그러지고 실명의 후유증을 앓는 고령층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소록도를 찾은 첫 대통령 부인이 되었다. 1984년 5월 이곳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보다 무려 15년도 더 늦은 때였다. 2000년 5월에 내가 방문했으니 그들은 오래 기다려온 대통령 부인이 반갑고, 또한 그동안의 삶이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 나는 그들의 뭉그러진 손을 붙잡고 함께울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나에 대한 언론 보도는 냉혹했다. 소록도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했다. 오히려 <동아일보>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나는 본의 아니게 길을 막히게 한 주범이 되었다. 성남에 있는 서울비행장 가는길에 경찰에서 교통 통제를 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과거의 ‘미행‘만큼이나 ‘경호‘가 불편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삼엄한 경호로 인해 오히려 민폐를 끼칠까 염려해 삼간 일도 종종 있었다. 대통령 부부 경호는 논스톱이 원칙이라고 한다. <동아일보>의 그 보도는 내가 왜 길을 나섰는지, 행선지는 어딘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날 길이 막혀 짜증이 났던 시민들이 팔순 가까운 대통령 부인이 소록도 가는 길이었음을 알았다면 ‘아, 그랬구나‘ 하고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 P354

이러한 날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에 감사한다. 길고 험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남편과 한 몸이 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며 굳건히 잘 걸어온 날들이었다. 남편의 평생 소원인 한민족의 평화가 빨리 정착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또한 나의 지극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대한민국이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따뜻한 사회가되기를.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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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청문회는 시민들의 항쟁을 유발한 발사 명령을 누가 했는가 하는 진상 규명이 초점이었다. 남편도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그 밖에 신현확(국무총리), 정웅(제31사단장), 이희성(계엄사령관), 최규하(대통령), 정호용(특전사령부 사령관) 등이 증언대에 섰다. 관련자들이 아직 권력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발포는 자위권 행사라는 적반하장의 변명들이 버젓이 나돌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헤집어지는 아픔이었다. 소득이라면 청문회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무관심했던 많은 국민이 그 실상의 일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사실상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1989년 12월 31일 그는 국회에 출석해 증언대에 섰다. 예견된 것이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비껴갔고 자신의 통치 행위에 대한 해명성 답변으로일관했다. 열쇠를 쥐고 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시종 침묵했다. 14시간의증언 중 정작 전두환 씨의 증언은 2시간여에 불과했다. 분노의 감정만으로는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 P289

1990년 1월 22일, 전날부터 눈이 많이 내려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저녁 9시 뉴스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청와대 접견실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제3당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제4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나란히 선 긴급 기자회견 모습이었다. 3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든 것이다. 바로 그날 저녁 박태준 민정당 대표위원이 초청한 상임위 경제과학위원회 위원 부부 만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합당 이야기는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남편도 전격적인 합당 발표를 사전에 몰랐던 모양으로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정계 개편 소문은 1989년 여름부터 솔솔 불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대통령은 야당 총재들과 만남이 잦았다. 이보다 앞서 정계 개편 구도를 기확한 사람으로 알려진 박철언 정무장관으로부터 김원기 원내총무 채널을통해 남편 역시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을 보장하겠다는 언질이 있었다고 했다.
"대통령은 국민이 시켜주는 것이지 누구로부터 보장받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야당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집권할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시험에 들지 않았다. 남편은 자서전 구술 작업을 하면서 파란만장했던 지난 인생에서 이 대목을 회고할 즈음 감회에 젖어 말했다.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습니까! 원칙을 지키지 않고 지혜롭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 P293

통치에 익숙한 집권당은 여소야대의 불편함을, 김영삼 총재는 제2야당이라는 불명예를, 김종필 총재는 군소 야당의 비애를 각각 견디지 못해 한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각각 꿈이 달랐을 것이다. 민정당은 집권 연장을, 김영삼은 대권을, 김종필은 내각제를 추구했을 것이다. 이 동상이몽을 노태우는 ‘역사적 사명‘, 김영삼은 ‘하나님의 뜻‘, 김종필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했다. 좀 불편하더라도 여야가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견제할 것은 견제하면서 국민이 선택하고 명령한 정당 구도를 노태우 대통령이 끝까지 유지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지 않았을까. 권위적이지 않으며 기다릴 줄 아는 그분의 성품이 역사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는데 아쉬운 대목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약속한 ‘중간 평가‘를 제1야당 당수가 유보시키고 야당이 여당의 도움을 받아 여성들의 염원인 가족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 P294

그러나 정작 단식투쟁으로 쟁취한 두 차례 지자체선거는 참패였다. 두어가지 원인이 있었다. 강경대군 사망 사건과 정원식 총리 밀가루 봉변 등과격해지는 운동권에 대한 국민들의 냉담한 시선이 야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한 것이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한 원로 두 분의 우려도 매우 컸다. 그는 몹시 당황하고 난감해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젊은 투사들 사이에서 드러났던 현실 대응에 대해서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별로 없어 냉담했다. 세계의 정치개혁 운동사에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큰 공통점이 있다. 즉,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념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을 지나치게 정밀화, 세밀화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이다.
- 리영희

안기부, 언론도 모르는 사이에 지하 골방에서 하룻밤에도 몇 명씩 약관 20세 나이의 운동권 지도자들이 탄생했다. 대여섯 개의 가명을 바꾸어가며 사용하는 그들의 사회적, 역사적 실천에 대한 ‘비평‘은 대학가와 공단 주변을 넘나들며 엄청난 학습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급격히 마르크스주의레 경도되는 것을 깊이 염려했다.
-문익환 - P295

김대중-김영삼-정주영-권영길, 야당의 오랜 동지가 여당으로 나오고 재벌 총수와 노조 대표도 출마한 대선이었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보았으며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관권, 금권, 언권 어디에서도 약세였다. 그즈음 독재가 물러간 자리에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으니 바로 거대 언론이었다. 그들 일부 언론은 펜을 칼같이 썼다. 이 일부 언론의 노골적인 여당 지지에 정주영의 국민당이 광고지면을 통해 공공연한 비밀을 폭로했다.
"언론계에는 김영삼 장학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신문·방송에 영향력을 심고 있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닙니다."
이 역시 민주사회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뉴 DJ 플랜‘ 전략을 세워 대응했다. 오랫동안 굳어진 ‘강경한 DJ‘ 이미지를 혁신하려는 취지였다. 그는가만히 있어도 왠지 엄숙하고 근엄해 보인다. 젊은이들에게는 무섭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실 그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는 웃을 때시골 사람처럼 순박해 보이고 때로 어린이같이 천진해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가능하면 자주 많이 웃으라고 충고했다. 특히 유세 중 목소리를 높일 때 표정이 굳어지니 톤을 낮추고 천천히 말하도록 권했다. 그가 톤을 높일 때가 문제였다. 얼굴이 굳어지고 급하게 말하면 사투리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사투리를 쓰지 말 것을 주문한 전문가의 조언에는 한두 번해보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투리도 쓰지 말라면 내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1992년 11월 인촌 김성수 선생동상 제막식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그냥 웃으면서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묘소를 참배하고 화합의 메시지를 천명했다. 이때부터 텔레비전에 출연할때 여자처럼 화장을 했다. 지금은 대통령 후보들이 다 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화장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1971년 대선부터 주장해온 텔레비전 토론을 이번에도 제안했다. - P299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이었다. 김기춘 법무부 장관 주재로 12월 11일 새벽 주요 기관장들이 선거 대책 모임을 갖고 ‘지역감정을 유발해서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자고 모의했다‘는 폭로였다. 대화를 담은 녹음 테이프의 녹취 내용과 참석자들의 면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산시장과 경찰청장, 안기부 지부장, 기무사 지부장, 교육감, 검찰 지검장,
상공회의소 회장 등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집합시켜놓고 법무부 장관이란사람이 한 말이다.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 발전에는 긍정적이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 어쩌고 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읍시다.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좀 노골적이어도 괜찮지, 뭐. 아마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도 양해••••••.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확실히 김영삼 씨는 특이한 분이었다. 우리 같으면 백번 사죄할 대목에서 그는 자신을 떨어뜨리기 위한 공작이며 자신이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고 펄펄 뛰었다. 주요 언론 또한 사건의 본질을 놔두고 곁가지 불법 녹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김영삼 41%, 김대중33%, 정주영 16%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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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룩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체포될지 모른다는 긴박함에서 연금 해제로 반전된 상황을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제임스 릴리가 《아시아 비망록>(원제는 중국통China Hands)에서 밝히고 있다. 레이건 친서가 완벽히 준비해놓은 계엄령을 무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친서가 도착한 것은 17일이었으나 청와대는 면담을 거절했다. 딘롭정치 담당 참사관이 의분을 터뜨리며 싸워 19일 오후 2시 단독으로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날 우연히 한미연합사 사령관(윌리엄 리브시William Livsey)을 오찬 자리에서 만나 ‘친서 전달 예정 사실을 알리고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을 동원하지 말라‘고 강조할 뜻을 알렸다.
아무 말이 없어 동조라고 생각했다.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서울에 와있는 가장 높은 장군과 외교관까지 의견 일치를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전 대통령은 90분 면담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언제나 활기에 차있고 대화를 독점해왔는데 이날은 깊은 고뇌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는 미국의 안보 공약을 재확인하면서 한국대통령의 평화적 정권 교체 공약에 대한 격찬을 잊지 않고 한국의 계속적인 정치 발전을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한 정치 탄압 관리를 처벌하고 자유 언론을 신장하라고 권했다. 전 대통령이 친서를 읽은 다음 나는 계엄령 선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레이건 대통령의 우정 어린 친서 내용을 보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그에게 각인시켰다. - P273

한편 6.10 대회를 앞둔 하루 전날 연세대 출정식의 맨 앞줄에 참여했다가 직격 최루탄을 맞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했다. 그는 6월 항쟁이 진행되는 걸 지켜보고, 그리고 그 성공에 안도했던 것일까? 이한열은 6월 항쟁이 저물고 온 국민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때 스물두 살의 젊음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이 9일 ‘애국학생 이한열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연세대에서 거행되었다. 학생, 시민, 정치인, 재야 단체 등 10만여 명이 교정을 가득 메웠다.
남편은 아침 일찍 연세대로 출발했다. 나는 집안일을 보고 나중에 합류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이한열의 어머니와 문익환 목사였다. 추도사릴레이 마지막 순서는 전날 진주교도소에서 석방되어 방금 진주에서 올라온 문 목사였다. 그는 연단에 올라 목숨을 던진 젊은이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목 놓아 불러 26명을 초혼했다. 교정은 오열의 바다가 되었다. "전태일열사여! (・・・) 김상진 열사여! (・・・) 김종태 열사여! (・・・) 김세진 열사여!
(···) 박종철 열사여! (··…) 이한열 열사여!" 마지막으로 ‘이한열 열사‘를 부르자 허우적허우적 연단으로 올라간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절규했다.
"이제 다 풀고 가거라. 엄마가 갚을란다. 한열아!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부모는 죽어 청산에 묻고 자식은 죽어 어미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던가. 오, 어머니! 어머니의 외침에 교정은 모든 게 얼어붙은 듯 일시에 적막해졌다. 그리고 이내 천지가 떠나가는 듯한 오열이 덮쳤다. 소복 차림의 이애주 교수는 이한열어 쓰러진 자리인 교문 앞에서 살을 풀어 부활하는 춤을 바쳤다. 그 얼마나 오랜만의 현장 참여인가. 남편은 지팡이를 짚은 채.
나는 관절염으로 무거운 다리를 끌고 행렬과 함께 갔다. 앞줄에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이 나란히 서고 나는 이태영 선생 등과 바로 뒷줄에 섰다. 여성들은 민가협 회원들과 함께 머리에 삼베 수건을 쓰고 행렬 뒤를 따랐다.
거리 가득 만장을 펄럭이며 도도히 흐르는 장례 행렬은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장관이었다. 신촌 로터리에서 노제를 지낼 때는 30만 명이던 햄렬이 서울시청에 이르자 10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선두가 시청앞 광장에도착했음에도 장례 행렬의 후미는 아직 연세대 교정을 빠져나오지 못하고있었다.
행진 중간에 뉴스가 나왔다. 정부는 김대중, 김상현, 문익환, 예춘호, 백기완 등 2,335명의 사면복권을 발표했다. 박종철이 던진 불씨 하나가 빈들의 불길로 번진 그 민주화 들불은 이한열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타올랐다. 박종철은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한 영남의 아들이고 이한열은 광주가낳고 기른 호남의 아들이다. 6월 항쟁의 성격을 이보다 더 잘 웅변하는 현상이 있을까? 이 거룩한 두 죽음은 역사를 창조했다. 그들은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 온 들판에 풍성한 민주화의 열매를 선사했다. 박종철은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이한열은 망월동 5·18 묘역에 잠들어 있다. 이 두 청년은 1980년대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목숨과 미래를 던진 젊은이들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대중의 동의를 얻어낸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 이 나라 민주주의의 영웅이다.
남편의 나이 이제 62세, 박정희가 18년 집권하고 운명한 나이다. 그러나그는 이제야 출발선에 다시 선 것이다. 나역시 자유로워져 1987년 7월부터는 다이어리가 존재한다. 나는 그동안 압수 수색이 두려워 기록을 하지않고 살았다. 사화가 많았던 조선 시대에 글을 숭상했으면서도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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