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룩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체포될지 모른다는 긴박함에서 연금 해제로 반전된 상황을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제임스 릴리가 《아시아 비망록>(원제는 중국통China Hands)에서 밝히고 있다. 레이건 친서가 완벽히 준비해놓은 계엄령을 무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친서가 도착한 것은 17일이었으나 청와대는 면담을 거절했다. 딘롭정치 담당 참사관이 의분을 터뜨리며 싸워 19일 오후 2시 단독으로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날 우연히 한미연합사 사령관(윌리엄 리브시William Livsey)을 오찬 자리에서 만나 ‘친서 전달 예정 사실을 알리고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을 동원하지 말라‘고 강조할 뜻을 알렸다.
아무 말이 없어 동조라고 생각했다.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서울에 와있는 가장 높은 장군과 외교관까지 의견 일치를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전 대통령은 90분 면담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언제나 활기에 차있고 대화를 독점해왔는데 이날은 깊은 고뇌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는 미국의 안보 공약을 재확인하면서 한국대통령의 평화적 정권 교체 공약에 대한 격찬을 잊지 않고 한국의 계속적인 정치 발전을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한 정치 탄압 관리를 처벌하고 자유 언론을 신장하라고 권했다. 전 대통령이 친서를 읽은 다음 나는 계엄령 선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레이건 대통령의 우정 어린 친서 내용을 보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그에게 각인시켰다. - P273

한편 6.10 대회를 앞둔 하루 전날 연세대 출정식의 맨 앞줄에 참여했다가 직격 최루탄을 맞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했다. 그는 6월 항쟁이 진행되는 걸 지켜보고, 그리고 그 성공에 안도했던 것일까? 이한열은 6월 항쟁이 저물고 온 국민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때 스물두 살의 젊음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이 9일 ‘애국학생 이한열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연세대에서 거행되었다. 학생, 시민, 정치인, 재야 단체 등 10만여 명이 교정을 가득 메웠다.
남편은 아침 일찍 연세대로 출발했다. 나는 집안일을 보고 나중에 합류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이한열의 어머니와 문익환 목사였다. 추도사릴레이 마지막 순서는 전날 진주교도소에서 석방되어 방금 진주에서 올라온 문 목사였다. 그는 연단에 올라 목숨을 던진 젊은이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목 놓아 불러 26명을 초혼했다. 교정은 오열의 바다가 되었다. "전태일열사여! (・・・) 김상진 열사여! (・・・) 김종태 열사여! (・・・) 김세진 열사여!
(···) 박종철 열사여! (··…) 이한열 열사여!" 마지막으로 ‘이한열 열사‘를 부르자 허우적허우적 연단으로 올라간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절규했다.
"이제 다 풀고 가거라. 엄마가 갚을란다. 한열아!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부모는 죽어 청산에 묻고 자식은 죽어 어미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던가. 오, 어머니! 어머니의 외침에 교정은 모든 게 얼어붙은 듯 일시에 적막해졌다. 그리고 이내 천지가 떠나가는 듯한 오열이 덮쳤다. 소복 차림의 이애주 교수는 이한열어 쓰러진 자리인 교문 앞에서 살을 풀어 부활하는 춤을 바쳤다. 그 얼마나 오랜만의 현장 참여인가. 남편은 지팡이를 짚은 채.
나는 관절염으로 무거운 다리를 끌고 행렬과 함께 갔다. 앞줄에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이 나란히 서고 나는 이태영 선생 등과 바로 뒷줄에 섰다. 여성들은 민가협 회원들과 함께 머리에 삼베 수건을 쓰고 행렬 뒤를 따랐다.
거리 가득 만장을 펄럭이며 도도히 흐르는 장례 행렬은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장관이었다. 신촌 로터리에서 노제를 지낼 때는 30만 명이던 햄렬이 서울시청에 이르자 10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선두가 시청앞 광장에도착했음에도 장례 행렬의 후미는 아직 연세대 교정을 빠져나오지 못하고있었다.
행진 중간에 뉴스가 나왔다. 정부는 김대중, 김상현, 문익환, 예춘호, 백기완 등 2,335명의 사면복권을 발표했다. 박종철이 던진 불씨 하나가 빈들의 불길로 번진 그 민주화 들불은 이한열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타올랐다. 박종철은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한 영남의 아들이고 이한열은 광주가낳고 기른 호남의 아들이다. 6월 항쟁의 성격을 이보다 더 잘 웅변하는 현상이 있을까? 이 거룩한 두 죽음은 역사를 창조했다. 그들은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 온 들판에 풍성한 민주화의 열매를 선사했다. 박종철은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이한열은 망월동 5·18 묘역에 잠들어 있다. 이 두 청년은 1980년대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목숨과 미래를 던진 젊은이들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대중의 동의를 얻어낸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 이 나라 민주주의의 영웅이다.
남편의 나이 이제 62세, 박정희가 18년 집권하고 운명한 나이다. 그러나그는 이제야 출발선에 다시 선 것이다. 나역시 자유로워져 1987년 7월부터는 다이어리가 존재한다. 나는 그동안 압수 수색이 두려워 기록을 하지않고 살았다. 사화가 많았던 조선 시대에 글을 숭상했으면서도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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