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사람들은 입체시가 시각세계에 무엇을 더해줄 수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는 그것을 만끽한다. 한쪽 눈을 감아도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입체들은 엄청난 변화를 생생하게 인지한다. 이 세계가 공간감과깊이감을 갑자기 잃고 트럼프 카드처럼 납작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우리의 입체시가 더 예리하며, 우리가 주관적으로 더 깊은 세계에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색이나 형태에 더 민감한 사람이 있는것처럼, 우리에게는 입체시가 더 민감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입체시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입체시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하고도 놀라운 시지각적 전략을 이해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시감각 의식과 의식 그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 P139
많은 동물종에게 입체시는 생물학적 전략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포식동물의 눈은 일반적으로 전방 주시형인데, 양안의 시야가 많이 겹친다. 반면에 포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동물들은 눈이 머리 양옆에 있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이 파노라마식의 시야를 확보해주어 뒤에서 다가오는 위험까지도 포착할 수 있다. 귀상어는 무시무시한 포식동물인데, 망치처럼 생긴 머리 모양 덕분에 전방을 향하는 눈이 넓게 벌어져 있다. 실로 귀상어는 살아 움직이는 초입체경이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전략을 갑오징어에게서도 볼 수 있다. 갑오징어는 넓게 벌어진 두 눈이 큰 각도로 파노라마 시야를 갖지만 누군가의 공격을 받을 때는 하나의 특별한 근육이 작동하여 두 눈이 바로 앞으로 몰리면서 양안시로 바뀌어 치명적인 촉수로 공격할 수 있다. - P144
우리 같은 영장류의 전방 주시형 눈에는 다른 기능도 있다. 가운데로모인 여우원숭이의 큰 눈은 어둡고 빽빽한 밀림의 군엽 속에서 죽은 듯움직이지 않는 채로 주위를 명확하게 분간하기 위한 입체시를 가능하게해준다. 착시와 속임수가 넘치는 밀림에서 천적의 위장에 넘어가지 않기위해서는 입체시가 필수불가결하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능수능란 그네를 타는 긴팔원숭이의 공중곡예도 입체시 덕분에 가능한 능력이다. 긴팔원숭이가 외눈박이라면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다. 상어나 갑오징어가 외눈박이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체시는 동물들에게 대단히 유익한 능력이다. 하지만 대가는 따르게 마련이어서 파노라마 같은 넓은 시야를 희생했으며, 양 눈의 협응과 정렬을 위한 신경과 근육 작용이 따로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두 시각 이미지의 시차로 깊이를 계산하는 뇌 기전도 별도로 발달해야 했다. 이렇듯ㅠ자연계에서 입체시는 그저 속임수 장치로 보아 넘길 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능력이 없어도 사는 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점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P145
수의 경험에서 확인되는 것은 성인 뇌에서 시각 영역은 가소성이 커서 양안세포와 회로가 생후 초기의 결정적인 시기에 조금이라도 살아남았다면 한참 뒤에라도 재활성화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상황에서 기억에는 입체시가 거의 혹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을지 몰라도 잠재적 입체시 능력은 존재하므로, 눈의 위치가 적절하게 교정된다면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소생할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일이 50년에 달하는 휴지기 끝에 수에게 일어났다는 점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 P163
그 신경학적 기반이야 어떤 것이든 간에 시각 세계가 확대됨으로써 수에게는 실질적으로 감각기관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인데,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입체시는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있다고 수는 편지에서 이야기한다. "거의 세 해가 지났는데도 새로 얻은 시각이 저에게는 여전히 기쁨과 놀라움을 줍니다. 어느 겨울날이었는데, 매점에서 점심을 간단히 때울 요량으로 강의실 건물을 나섰지요. 그런데 몇 발짝 뛰다가는 바로 멈췄어요. 탐스럽고 촉촉한 눈송이들이 저를 둘러싸고 느릿느릿 떨어지고 있었어요. 저는 눈송이들 하나하나 사이의 공간을 볼 수 있었고, 그 모든 눈송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답게 3차원의 군무를 추고 있었어요. 과거에는 눈이 저보다 조금 앞에 있는 한 장의 평면 안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제 자신이 내리는 눈 속에, 눈송이들 한가운데에 있다고 느꼈어요. 점심도 잊은 채 저는 몇 분 동안 내리는 눈을 지켜보았고, 깊은 환희감에 압도되었어요.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답니다. 특히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말이지요." - P164
암, 어떤 암이 되었건, 암에 걸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순식간에 뒤바뀐다는 뜻이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 순간, 얼마가 되었건 평생 가는 검사와 치료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일상이 앞에 놓여 있으며,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보류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게 된다. 겨울의 첫날인 오늘, 간 기능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 야수가 내 간으로 침투했을까? 그 갈고리 발톱이 내 생명을 움켜쥐고 있을까? 내가 흑색종으로 죽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나는 종양과 흥정했다. 너는 내 눈을 가져라. 꼭 그래야겠다면. 하지만 나머지는 남겨다오. - P174
2002년은 악몽이었다.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그해 함성 속에서 우리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꿈을 이루는순간, 30년을 조이던 긴장의 끈이 확 풀리면서 바로 그 순간 시험에 들었는가 보다. ‘사형수 아버지‘에서 ‘대통령 아버지‘가 되었다. 관객들에게는 드라마틱한 역전극으로 보이겠지만 아이들에게는 현기증이 나는 롤러코스터게임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냉정하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을것이라고 추측한다. 이해는 괴롭고 아픈 일로 점철된 일생 중에서도 가장견디기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어제까지 아버지로 인한 피해자였는데 하루아침에 가해자가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아들들이 아버지의 일생에 불명예를 안기다니. 몇 차례 사선을 넘으면서 힘들게 이 자리에 와 혼신의 힘을 다하는 고령의 아버지를 보면서 어떻게 그런 처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도여러 번 당부했건만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 아들들이 한없이 야속했다. 원대한 꿈을 갖고 모진 고난을 헤치며 대통령이 된 거목 아래서 가족은 늘 외롭게 마련이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의 고민과 아픔에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입 바른 말 잘하기로 유명했던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의 말이 정말 실감난다. "아버지는 모든 장례식에서 자신이 주검이 되기를 원했고, 모든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되기를, 모든 세례식에서는 아기가 되기를 원했다." - P373
‘주여, 저의 기도가 부족했습니까? 저희가 교만했나요?‘ 나는 기도로 나날을 보냈다. 부끄러워 국민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음 날 일정이 많은데 잠을 못 이루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가슴을 쳤다. 셋째에 이어 둘째까지 구속되었을때는 숨이 막혔다. 물 한모금 넘어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리내외는 말을 잊었다. 각자의 서재에서 따로 시간을 보내다 늦은 밤에야 안방으로 갔다. 북악산 기슭의 적막한 관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이었다. 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평생 열심히 읽던 신문을 끊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었다. 어찌 뉴스에 귀를 막을 수 있겠는가. 아들들에 대한 분노를 삼키는 남편을 보며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웠다. 차라리 나에게 ‘당신은 뭐했느냐? 라고 역정을 냈다면 덜 괴로웠을 것이다. 매섭게 추궁을 했더라면 차라리 후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묵했다. 그 대신 남편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의료진은투석을 권했다. 퇴임 후 쓰러지더라도 대통령이 하루 몇 시간씩 투석하느라 누워 있을 순 없었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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