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청문회는 시민들의 항쟁을 유발한 발사 명령을 누가 했는가 하는 진상 규명이 초점이었다. 남편도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그 밖에 신현확(국무총리), 정웅(제31사단장), 이희성(계엄사령관), 최규하(대통령), 정호용(특전사령부 사령관) 등이 증언대에 섰다. 관련자들이 아직 권력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발포는 자위권 행사라는 적반하장의 변명들이 버젓이 나돌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헤집어지는 아픔이었다. 소득이라면 청문회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무관심했던 많은 국민이 그 실상의 일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사실상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1989년 12월 31일 그는 국회에 출석해 증언대에 섰다. 예견된 것이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비껴갔고 자신의 통치 행위에 대한 해명성 답변으로일관했다. 열쇠를 쥐고 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시종 침묵했다. 14시간의증언 중 정작 전두환 씨의 증언은 2시간여에 불과했다. 분노의 감정만으로는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 P289
1990년 1월 22일, 전날부터 눈이 많이 내려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저녁 9시 뉴스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청와대 접견실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제3당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제4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나란히 선 긴급 기자회견 모습이었다. 3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든 것이다. 바로 그날 저녁 박태준 민정당 대표위원이 초청한 상임위 경제과학위원회 위원 부부 만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합당 이야기는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남편도 전격적인 합당 발표를 사전에 몰랐던 모양으로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정계 개편 소문은 1989년 여름부터 솔솔 불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대통령은 야당 총재들과 만남이 잦았다. 이보다 앞서 정계 개편 구도를 기확한 사람으로 알려진 박철언 정무장관으로부터 김원기 원내총무 채널을통해 남편 역시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을 보장하겠다는 언질이 있었다고 했다. "대통령은 국민이 시켜주는 것이지 누구로부터 보장받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야당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집권할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시험에 들지 않았다. 남편은 자서전 구술 작업을 하면서 파란만장했던 지난 인생에서 이 대목을 회고할 즈음 감회에 젖어 말했다.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습니까! 원칙을 지키지 않고 지혜롭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 P293
통치에 익숙한 집권당은 여소야대의 불편함을, 김영삼 총재는 제2야당이라는 불명예를, 김종필 총재는 군소 야당의 비애를 각각 견디지 못해 한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각각 꿈이 달랐을 것이다. 민정당은 집권 연장을, 김영삼은 대권을, 김종필은 내각제를 추구했을 것이다. 이 동상이몽을 노태우는 ‘역사적 사명‘, 김영삼은 ‘하나님의 뜻‘, 김종필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했다. 좀 불편하더라도 여야가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견제할 것은 견제하면서 국민이 선택하고 명령한 정당 구도를 노태우 대통령이 끝까지 유지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지 않았을까. 권위적이지 않으며 기다릴 줄 아는 그분의 성품이 역사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는데 아쉬운 대목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약속한 ‘중간 평가‘를 제1야당 당수가 유보시키고 야당이 여당의 도움을 받아 여성들의 염원인 가족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 P294
그러나 정작 단식투쟁으로 쟁취한 두 차례 지자체선거는 참패였다. 두어가지 원인이 있었다. 강경대군 사망 사건과 정원식 총리 밀가루 봉변 등과격해지는 운동권에 대한 국민들의 냉담한 시선이 야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한 것이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한 원로 두 분의 우려도 매우 컸다. 그는 몹시 당황하고 난감해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젊은 투사들 사이에서 드러났던 현실 대응에 대해서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별로 없어 냉담했다. 세계의 정치개혁 운동사에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큰 공통점이 있다. 즉,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념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을 지나치게 정밀화, 세밀화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이다. - 리영희
안기부, 언론도 모르는 사이에 지하 골방에서 하룻밤에도 몇 명씩 약관 20세 나이의 운동권 지도자들이 탄생했다. 대여섯 개의 가명을 바꾸어가며 사용하는 그들의 사회적, 역사적 실천에 대한 ‘비평‘은 대학가와 공단 주변을 넘나들며 엄청난 학습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급격히 마르크스주의레 경도되는 것을 깊이 염려했다. -문익환 - P295
김대중-김영삼-정주영-권영길, 야당의 오랜 동지가 여당으로 나오고 재벌 총수와 노조 대표도 출마한 대선이었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보았으며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관권, 금권, 언권 어디에서도 약세였다. 그즈음 독재가 물러간 자리에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으니 바로 거대 언론이었다. 그들 일부 언론은 펜을 칼같이 썼다. 이 일부 언론의 노골적인 여당 지지에 정주영의 국민당이 광고지면을 통해 공공연한 비밀을 폭로했다. "언론계에는 김영삼 장학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신문·방송에 영향력을 심고 있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닙니다." 이 역시 민주사회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뉴 DJ 플랜‘ 전략을 세워 대응했다. 오랫동안 굳어진 ‘강경한 DJ‘ 이미지를 혁신하려는 취지였다. 그는가만히 있어도 왠지 엄숙하고 근엄해 보인다. 젊은이들에게는 무섭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실 그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는 웃을 때시골 사람처럼 순박해 보이고 때로 어린이같이 천진해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가능하면 자주 많이 웃으라고 충고했다. 특히 유세 중 목소리를 높일 때 표정이 굳어지니 톤을 낮추고 천천히 말하도록 권했다. 그가 톤을 높일 때가 문제였다. 얼굴이 굳어지고 급하게 말하면 사투리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사투리를 쓰지 말 것을 주문한 전문가의 조언에는 한두 번해보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투리도 쓰지 말라면 내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1992년 11월 인촌 김성수 선생동상 제막식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그냥 웃으면서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묘소를 참배하고 화합의 메시지를 천명했다. 이때부터 텔레비전에 출연할때 여자처럼 화장을 했다. 지금은 대통령 후보들이 다 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화장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1971년 대선부터 주장해온 텔레비전 토론을 이번에도 제안했다. - P299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이었다. 김기춘 법무부 장관 주재로 12월 11일 새벽 주요 기관장들이 선거 대책 모임을 갖고 ‘지역감정을 유발해서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자고 모의했다‘는 폭로였다. 대화를 담은 녹음 테이프의 녹취 내용과 참석자들의 면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산시장과 경찰청장, 안기부 지부장, 기무사 지부장, 교육감, 검찰 지검장, 상공회의소 회장 등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집합시켜놓고 법무부 장관이란사람이 한 말이다.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 발전에는 긍정적이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 어쩌고 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읍시다.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좀 노골적이어도 괜찮지, 뭐. 아마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도 양해••••••.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확실히 김영삼 씨는 특이한 분이었다. 우리 같으면 백번 사죄할 대목에서 그는 자신을 떨어뜨리기 위한 공작이며 자신이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고 펄펄 뛰었다. 주요 언론 또한 사건의 본질을 놔두고 곁가지 불법 녹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김영삼 41%, 김대중33%, 정주영 16%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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