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준비된 대통령‘이었던 반면에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대선 4수를 하는 긴 세월 동안 나는 한 번도 내가 영부인이 되면 무엇을 하겠다는상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허락할 만한 주변 조건이 아니었다. 그저 만약에 내게 기회가 온다면 어려운 이웃들과 여성의 권익을 신장하는일을 하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여성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함께하고 평민당부총재를 지낸 오랜 인연의 박영숙 선생, 한신대 김성재 교수 등과 의논했다. 아동과 여성을 위한 일을 큰 방향으로 정했다. 경제 위기로 인해 굶는아이가 많다고 했다. 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서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봉사 단체인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과 딸들에게 희망을 주는 ‘여성재단‘은 이렇게 태어났다. 나는 제2부속실 인사를 하면서 지역과 종교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집권 1년 동안 본관 제2부속실에는 호남 출신이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전혀 없었다. 나는 모태 신앙으로 기독교인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비서실 소속 제2부속실이었으므로 공사를 분별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었다. 청와대 직원들은 이런 현상들을 거의 혁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 P327
그는 회담을 앞두고 특사로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국정원 원장에게 특별 주문을 했다. "김 위원장을 만나거든 인물 연구를 해 오세요." 임 원장의 보고는 놀라웠다. 국제 정세에 밝고 영특하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주입된 ‘망나니‘와는 판이한 인물평이었다. 김 위원장이 말했다. "힘들고, 두려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도덕이있고 우리는 같은 조선 민족입니다. 절대 섭섭하지 않게 할 테니 염려하지마십시오.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데 우린 2박 3일간 대답을 줘야 합니다." 그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차렸다. 그러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을 서슴없이 터뜨렸다. 나는 그가 버거운 대화 상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들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가슴에서 서러움이 물안개처럼 자욱하게감돌았다. 당신들과 교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지난 30년간 우리가 얼마나힘들고 두렵고 무서운 세상을 살았는지 알기나 하시나요. - P337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이 베르게 위원장에게 질문했다. "수상을 위한 로비가 있었는가?" "있었다." "어떻게?" "주지 말라는 반대 로비가 있었다." 심지어 4월 총선 유세장에서는 아직 받지도 않은 노벨상을 두고 한나라당이 네거티브 캠페인을 벌였다. 그것도 모자라 낙선한 원외위원장들이 노벨상 수상 저지 원정 시위를 떠났으니 이를 부끄러워서 차마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심지어 수상이 결정된 후에도 정치권과 일부 언론에서는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수상식 참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마음 약한 수행원들이 자진해서 비행기를 타지 않는 해프닝도있었다. 우리는 12월 8일 가족, 그리고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동지들을 초청해 대한항공 특별기를 타고 노르웨이 오슬로로 향했다. 12월의 북유럽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낮임에도 거리는 한밤중이 어두웠다. 사계절이분명하고 낮과 밤이 확연한 우리가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인지 새삼 감사했다.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시상식장의 꽃은 주로 해바라기였다. 햇볕정책의 상징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있었다. 국왕이 오찬을 주최하고 저녁에는조수미 씨가 출연한 축하 콘서트가 열렸다. 다음 날 스웨덴 스톡홀름으로가 스웨덴 의회에서 연설하고 13일 스웨덴 국왕 오찬에 참석한 뒤에 귀국했다. 끈질긴 로비설 제기로 인해 노벨 위원회 게이르 룬데스타드Geir Lundestad사무총장이 KBS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비합법적인 로비는 없었다‘고 밝혀야 했다. 그럼에도 끝내 한나라당이 평화상 반납 주장까지 하자 노벨 위원회는 ‘매우 무례하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참다못해 나선 이들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교민들이다. 이들은 노벨상이 로비로 좌우되는 상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이후로 한국인들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국이라면 넌더리를 내고 있다." 과학 분야에서 심심찮게 수상하는 이웃 일본은 스톡홀름에 상설 연락사무소를 두고 일본인 과학자들의 업적을 홍보하는 데 주력한다. 즉 그들은 합법적인 로비를 상시적으로 하고 있다. 비교하기 서글프지만 우리가 본받아야할 부분이 아닌가. - P346
나는 소록도를 두 번 방문했다. 주민자치회장이 ‘영부인 방문‘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세대는 한센병을 문둥병이라고 하여 가혹하게 소외시킨 마음의 빚을 지니고 있다. 나는 흔쾌히 가기로 했다. 소록도 가는 길은 무척 멀었다. 비행기로 광주까지 간 후에 거기서 다시 헬리콥터를 타야 한다. 그러기로서니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는 한하운 시인의 <소록도 가는 길>만큼이나 힘들겠는가. 한센병은 전염되지 않는 병원균이다. 더 이상 환자가 발생하지 않아서1992년 종료가 선언되어 사회의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지금 그곳에 있는 분들은 손이 뭉그러지고 실명의 후유증을 앓는 고령층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소록도를 찾은 첫 대통령 부인이 되었다. 1984년 5월 이곳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보다 무려 15년도 더 늦은 때였다. 2000년 5월에 내가 방문했으니 그들은 오래 기다려온 대통령 부인이 반갑고, 또한 그동안의 삶이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 나는 그들의 뭉그러진 손을 붙잡고 함께울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나에 대한 언론 보도는 냉혹했다. 소록도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했다. 오히려 <동아일보>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나는 본의 아니게 길을 막히게 한 주범이 되었다. 성남에 있는 서울비행장 가는길에 경찰에서 교통 통제를 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과거의 ‘미행‘만큼이나 ‘경호‘가 불편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삼엄한 경호로 인해 오히려 민폐를 끼칠까 염려해 삼간 일도 종종 있었다. 대통령 부부 경호는 논스톱이 원칙이라고 한다. <동아일보>의 그 보도는 내가 왜 길을 나섰는지, 행선지는 어딘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날 길이 막혀 짜증이 났던 시민들이 팔순 가까운 대통령 부인이 소록도 가는 길이었음을 알았다면 ‘아, 그랬구나‘ 하고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 P354
이러한 날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에 감사한다. 길고 험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남편과 한 몸이 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며 굳건히 잘 걸어온 날들이었다. 남편의 평생 소원인 한민족의 평화가 빨리 정착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또한 나의 지극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대한민국이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따뜻한 사회가되기를.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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