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보안관 역할과 그 강자가 위협에 직면했을 때 약자로부터받는 지원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지는 뻔하다. 암놈과 그 새끼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1인자 수놈은 장차 라이벌과의 권력투쟁에서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1인자수놈의 보안관 역할은 호의라기보다 의무에 가깝다. 1인자로서의 지위는 이같은 의무에 달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에룬의 몰락은 그가 라윗이나 니키의 공격으로부터 다른 구성원들을 효과적으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로도 설명될 수 있다. 라윗의 행동도 그와 같은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다. 라윗은 암놈들을 공격하거나 이에룬의 면전에서 암놈들에게 거만을 떨면서, 암놈들로 하여금 이에룬에게 지원을 요청해봤자 별 볼일이 없다는 점을 시위했던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에 성공하고 나자 그는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서 스스로 보호자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던 것이다. - P185

라윗의 선택은 침팬지 사이의 우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를 웅변하고 있다. 일찍이 라윗은 이에룬과 암놈들에 대항하기 위해 니키와 결탁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뒤집어서 니키에 대항하기 위해 이에룬과 암놈들을 자기편으로 만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놈들을 향한 니키의 공격은 라윗 자신의 권력투쟁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그래서 라윗은 가끔 암놈들을 공격하는 니키를 응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라윗은 니키와 암놈들 사이에 끼어들고, 때로는 서로 충돌이 벌어지기 전부터 개입했다. 니키가 털을 세우고 암놈들에게 접근해서 조금씩 몸을 흔들면서 정말로 공격하려 들 때 라윗은 니키의 옆이나 앞에 서서 감히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 어떤 때는 니키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갈 때까지 라윗의 주먹질과 발길질은 계속되었다. 니키에 대한 라윗의 태도가 경직되면서 둘 사이의 충돌도 잦아졌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암놈 때문이 아니라 이에룬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둘 다 왕년의 지도자인 이에룬과 접촉하기를 바라던 터여서 서로가 어느 한쪽이 이에 곁에 앉는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 P187

8월이 되자 삼각관계의 형태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니키와이에룬 모두 예전에 비해 라윗에게 덜 굴욕적이고, 자주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리더인 라윗이 그들 중 한쪽에게 과시 행동을 해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에룬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맹렬하게 라윗을 공격하면 니키는 라윗을 위협하듯 털을 곤두세우며 이에룬 편을 들었다. 니키는 다른 두 수놈을 분리시키는 데 점차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라윗은 니키의 그런 시도를 중단시키려고 애썼지만 니키가 위협을 계속할 경우 이에룬은 라윗 곁에서 멀어지려고 했고, 라윗은 이런 행동에 속수무책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제 세력 균형은 2인자와 3인자의 연합 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1인자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위협을 의미했다. 전례 없던 불안감이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6주가 지나서 대규모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 이르기까지 몇 주 동안 먼저 니키가, 다음에는 이에룬이 라윗에게 ‘인사‘하는 것을 중단했다. 그리고 이 두 수놈들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진짜 연합을 이뤘다. 이연합은 그로부터 꼬박 3년이 지난 1980년까지 유지되었다. - P191

그로부터 며칠은 라윗에 대한 음모의 분위기가 팽배했다. 라윗이암놈이나 새끼들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 두 마리의 모반자는 하나가 되어 조금 떨어진 사육장 구석에 앉아 있었다. 호릴라만이 그들과 빈번하게 접촉을 가졌다. 우리는 호릴라가 니키에게 빈번히 키스하는 데에 주목했다. 라윗은 가끔 호릴라가 두 라이벌에게 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거나 과시 행위를 했지만 공격하지는 않았다. 지난 겨울호릴라는 이에룬에 대해 한결같은 지지를 보냈기 때문에 그녀가 이에룬의 동맹 파트너인 니키에게 충성심을 보인다 해도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호릴라와 호릴라의 친구인 마마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었다.
수놈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마마와 다른 암놈들은 니키를공격해서 쫓아버렸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에룬과 호릴라가 니키를지켜주었다. 그런 경우에 호릴라는 여러 암놈들을 공격했지만 마마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마치 마마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일은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호릴라의 행동이 마마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어버렸지만 마마는 호릴라에 대해 어떤 보복도 하지않았다. 마마와 호릴라 사이의 우정이 대단히 깊었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이 전혀 다르다고 해서 우정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들두 암놈 사이의 충돌은 단 한 번도 목격된 적이 없다.
니키는 항상 마마 곁에 붙어 있는 라윗에게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접근했다. 그는 목덜미의 털을 세운 채 그들과 마주 앉은 뒤에는 도발적으로 ‘후우후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해서 용기를 북돋운 니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나 막대기를 집어던지기 시작하면 암놈들도 공세를 취한다. 그러나 라윗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 자신의 지원자들의 등뒤를 지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적대적인 2인조세력에 대항해 승리할 여지가 거의 없음을 이미 분명하게 계산하고 있는 듯했다.
일주일 만에 니키는 다시 왕좌에 복귀했다. - P206

서양 과학자들은 동물의 사회행동을 연구할 때 전통적으로 경쟁, 세력권, 우열관계 등에 주로 초점을 맞춰왔다. 1922년 노르웨이의 셸드럽-에브(Schjelderup-Ebbe)가 암탉 사회에서 먹이를 쪼아 먹는 순서를 발견한 이래로 서열 지위는 사회구조의 주요 형태로 여겨졌다. 그래서 원숭이와 유인원에 대한 연구에서도 개체들을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인 순위를 매기려는 시도가 오랫동안 주를 이뤘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있었다. 바로 일본의 영장류 학계에 소속된 연구자들은 혈연과 우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개체들을 수평적으로 분류해 그것을 거미줄과 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표현했다. 이 거미줄망은 중심부와 동심원을 이루며 점점 커지는 주변부로 구분됐다. 그들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어떤 개체를 받아들이는 정도라든가, 그 개체가 어느 혈연집단에 속해 있는가 하는 따위에 흥미를 가졌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서구적 시각은 영장류 사회를 ‘사다리(ladder)‘ 개념으로 파악하려고 한 데 비해, 일본의 연구자들은 ‘그물망(network)‘ 개념으로 파악한 셈이다. 우리가 이들 두 가지 접근방식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왜 안정된 우열관계가 사회 시스템의 평화를 보장하는 부분에만 영향을 미치는지 분명해질 것이다. 새끼들의 성장으로 인해 사회적 유대가 확립, 방치, 혹은 파괴되는 ‘수평적‘ 발전은 일시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수직적 요소, 즉 위계서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 P212

라윗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도 역시 패자를 지원했다. 그는 암놈들의 지원을 받았고 평판도 상당히 높아져 암놈들은 이에룬보다 그에게 자주 ‘인사‘를 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런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즉, 리더는 질서를 유지해주는 대가로 집단 구성원들로부터 지원과 존경을 받는데, 이와 동일한 현상이 두 번째 정권 교체에서도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크게 달라진 점은 이런 자질이 지도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평화를 수호한 대가로 광범위한 존경을얻은 것은 니키가 아니라 그의 연대 파트너인 이에룬이었다. 이런 상황전개가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 마리의 개체가 공식적인 지배와 이런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룬과 라윗은 단독 지도자였던 데 반해, 니키는 다른수놈과 지도력을 ‘공유‘했던 것이다.
치안 유지는 이에룬의 몫이었다. 이에룬과 니키가 서로 간의 다툼에 개입한 많은 경우들을 제외하면 이에룬이 집단 내에서 벌어진 싸움에 개입해 약자를 도운 비율은 82퍼센트였던 반면, 니키는 22퍼센트에 불과했다(1978년~1979년). 니키는 1인자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승자를 지원했다. 니키가 권력의 정상에 오른 직후에는 이에룬이 아주 효과적으로 니키에게 저항했기 때문에 니키가 실질적으로 집단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를 들면, 젊은 지도자인 니키가 털을 세운 채 두 암놈 간의 충돌에 개입하려 들거나 실제로 개입했을 때,
이에룬은 즉각 니키를 공격해 쫓아버렸고, 간혹 이 과정에서 두 암놈들의 응원을 받기도 했다. 1979년이 되어서도 니키가 완전한 지배권을 획득할 수 없었던 이유는 치안을 유지하려는 니키의 노력을 이에룬이 방해한 탓이었다. - P222

니키의 디위은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이키와 비교하면 리에룬과 라윗은 암놈들의 협력 덕분에 전능에 가까운 권력을 누렸던 셈이다. 니키의 지도력과 구질서와의 중요한 차이는, 니키가 야심 많은 타인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인간 세계에서도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유의 리더가 갖는 상대적 무력감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아래 《군주론> 인용문에서 ‘귀족‘
을 ‘서열 높은 수놈‘으로, ‘평민‘을 ‘암놈과 새끼들‘로 고쳐서 읽어보라. 그러면, 우리는 니키의 ‘군주권‘이 두 전임자의 ‘군주권‘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귀족의 원조를 받아 군주권을 얻는 것은 평민들의 지원을 받아 군주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스스로를 군주와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군주는 원하는 대로 그들을 지배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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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더 물러나고, 혼자라도 완벽하게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그날 달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봤지? 난 이렇게 내 개와 함께 숲속을 달리고 있어. 즐겁고 건전한 활동, 내가 행복하게 독립적인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야‘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엔도르핀의 도시를 그러다가 속도를 줄여 느긋하게 걸으며, 호숫가에서 어슬렁거렸다. 나는 작대기를 집어서 던졌고, 개가 그걸 물고 헤엄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기분이 밝아지고, 빛이 돌아왔다. 차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난 할 수 있어. 이렇게 내내 혼자 지내면서도 이 시간을 즐길수 있어. 그리고 내 손을 내려다본 순간, 내가 어디선가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간의 궤도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면 꼭 이렇다. 시각이 왜곡되고, 방향을 잃은 듯한, 내 나름의 방식으로 살짝 미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달리는 동안 손에 열쇠들을 쥐고 있었는데, 멍하니 넋이 나간 상태에서, 슬금슬금의기소침해지는 상태에서, 그것들을 그냥 떨어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차 열쇠, 집 열쇠, 모든 열쇠를 찾는 걸 도와줄 사람은아무도 없었다. 여벌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거기 혼자 있었다.
고독의 즐거움과 고립의 절망감. 이 이미지는 며칠 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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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

속삭임은 두 주째, 혹은 세 주째쯤에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렇게 지적한다. ‘너 요즘 혼자 보내는 시간이 엄청 많구나. 안 그래?‘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맘 편한 일이야. 그렇지? 보호받는느낌. 안전한 느낌이 들잖아.‘
마지막으로 이렇게 유혹한다. ‘더 이 편안하고 고독한 상태를더 이어가자. 바깥세상은 무섭고 위험이 가득해. 그러니까 그냥 여기 있자. 혼자서 안전한 곳에‘
이것은 고립의 목소리, 설득력 있고 음흉한 목소리다.
나는 이 목소리를 많이 듣는다. - P15

우리는 고립을 지리와 상황의 결과로 여기곤 한다. 혼자가 된과부, 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다 자란 여자, 그는 고립된 사람이다.
늙고 쇠약한 사람, 아예 물리적으로 바깥세상에 나갈 수 없는 사람, 그들은 고립된 사람이다. 하지만 고립은 또한 마음의 상태일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다. 칩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선택을 결정짓는 상태인 것이다. 마치 당신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고립으로 추락한다. 어둡고 비자발적인 추락은 가속이 붙어, 내가 저지하기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나는 혼자 있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연속 열 번이나 열다섯 번이나 스무 번쯤 하고 나면, 더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P16

지금 마흔여섯인 그레이스는 여전히 금요일 밤에 혼자 닭 요리로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서 보내는 날이 많다. 하지만 걱정은누그러졌다. 그를 은둔으로 몰아넣었던 두려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누그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예전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풍요로운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데다가 생계가 되어주는 일을 갖고 있다. 좋은 심리치료사 덕분에 자신을 훨씬 더 잘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에게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즐긴다는 사실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그 시간에서공허함이 아니라 뿌듯함을 느끼는 능력도 더 기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독과 고립의 차이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가 늘 분명하거나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두 상태가 늘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고독은, 내 경험상, 자칫하면 미끄러지는 경사로다. 처음에는 안락하게 느껴지지만, 종종 아무런 경고도 자각도 없이 훨씬 더 어두운 것으로 변신할 수있는 상태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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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고르기, 눈길 맞추기, 평화 협정, 중재 등을 생각하면 화해라는 주요 테마가 우리의 큰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행동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분명 집단생활을 파괴할 우려가 있는 여러 세력에 대한 건설적인 균형추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화해 행동에 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960~1970년대에 걸쳐 인간이나 동물의 공격적인 행위에 대한 연구에는 막대한 연구비가 투여되었지만 그 행위가 어떤 식으로 종결되는지에 대한 연구에는 무심했다.
나는 침팬지 간의 화해에 있어 한 가지 측면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에룬과 라윗이 벌인 주도권 다툼의 종결과 밀접하게 관계되기 때문이다. 바로 화해의 전주로서 양자에 의해 행해지는 공동 과시(joint displaying)라는 현상이다. 우열관계의 상태를 테스트하는 방법인 공동 과시 현상은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 라윗은 몇 주 동안이나 이에룬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으며 상황이 어느 쪽으로 전개될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즉, 그와 같이 복종적인 행동을 않는다는 사실은 역으로 우위를 나타내는 셈이었다.  - P171

라윗이 처음으로 허세 부리기에 성공한 것은 49일째였다. 그 뒤로는 이런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지만 그런 역전극은 아주 서서히 진행된 과정이었다. 이에룬과 라윗은 몇 주에 걸쳐 서로가 서로에 대해 허세를부렸다. 그들은 모두 굴욕적인 낮은 지위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그 결과 종종 화해 과정이 아슬아슬하게 굴러갔다. 한번은 라윗이 이에룬의 정면으로 다가가자 이에룬은 박치기로 라윗의 가슴을 강하게 들이받으면서 대결의 불문율을 짓밟아버린 적이 있었다. 라윗은 이에 항의하는 괴성을 지르면서 도망쳤다. 반면 어떤 때에는 라윗이 규칙을 어기기도했다. 이에룬이 접근해오자 라윗은 뒷걸음질치며 멀리 떨어졌고, 그러자 이에룬은 깽깽 소리를 지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다른 놈에게 달려가 짧은 포옹으로 안도감을 회복한 뒤 라윗 쪽으로 돌아왔다.
라윗이 점차 우위적인 행동을 하게 된 전체 과정의 마지막 주에 드디어 이에룬이 굴욕적인 행동을 보였고, 결국 갈등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 또한 화해의 맥락 속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새로운 진척 상황을 많이 관찰했다. 즉, 싸움의 말단부에서 접촉을 시도하는 쪽은 늘 이에룬이었다. 라윗은 이에룬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는 곧 라윗이 화해의 제안을 수용할 준비를 하기 전에 이에룬이 몇 가지 노력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때면 이에룬은 라윗 쪽을 향해 보통의 ‘인사‘하는 소리와 아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부드러운 소리로 혼자 웅얼거렸다. 그 당시에 나는 이 세 가지 현상, 즉 접촉이 필요한 쪽과 접촉을 거부하는 쪽, 그리고 혼자 웅얼거리는 ‘인사‘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있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들의 갈등 후반부를 면밀히 검토한 다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화해 교섭의 개시는 이런 부드러운 ‘인사‘를 수반하지 않으면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런 마지막 국면에서 패한 쪽은 접촉에 대한 필요성이 너무 커서, 이긴 쪽은 패한 쪽을 상대로 거드름을 필 수 있었다. 승자는 존경을 표하는 헐떡거림 (웅얼거리는 부드러운 ‘인사‘)을 듣지 않으면 패자 쪽과 어떤 접촉도 일체 거부한다. - P173

공갈의 결과 최초의 모호한 ‘인사‘는 새로운 수놈 강자의 등을 향하게 마련이다. 멀리 가버리는 강자는 부드러운 헐떡거림이 들릴 때만 멈춰서 앉기 때문이다. 이처럼 적대자의 등을 향해 ‘인사‘를 하는 현상은 72일째까지 계속되었고, 그때서야 마침내 이에룬이 처음으로 라윗의 얼굴을 향해 아주 분명하게 헐떡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최초의 진정한 ‘인사‘라고 여겼고, 우위를 다투는 지루한 과정의 마침표였다.
그 후로 라윗과 이에룬 사이의 충돌과 과시 행위는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이 집단은 보기 드문 평화를 만끽했다. 2주일이 지나자 어제의 라이벌이었던 이들은 석 달 만에 다시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함께 노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니키, 단디, 마마, 거기에 파위스트나 이미도 주변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노닥거렸다. 어른 암놈들이 좀처럼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는 아주 낯선 풍경이었다. - P174

하지만 언제나 이런 공평한 개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한놈, 혹은 어느 집단의 편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한번 라윗의 정책은 달라졌다. 그는 ‘승자의 지지자‘가 아니라 ‘패자의 지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패자의 지원자‘란 가만 두면 질 게 뻔한 놈의 편을 드는 제3자를 뜻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니키가 암버르를 공격하면 라윗이 끼어들어서 암버르가 니키를 쫓아버리도록 도왔다. 라윗의 지원이 없었다면 암버르는 결코 니키를 물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라윗의 개입이 별 뜻 없이 아무렇게나 이뤄졌다면, 당연히 절반은 패자를 돕고 절반은 승자를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라윗은 1인자 자리에 오른 뒤에는 약자 쪽과의 결속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집단의 두목이 되기전에는 35퍼센트만 패자를 지원했지만 왕좌를 차지한 뒤로는 이 수치가 69퍼센트로 증가했던 것이다. 이런 대조는 라윗의 태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게다가 1년 뒤에는 패자에 대한 라윗의 지원이 86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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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5월 14일 김근태와 닌청련 회원들은 광주항쟁 4주년을 앞두고 버스 두 대로 광주로 내려가 오후 2시 망월동 묘소에 분향하고 추모식을 거행했다. 김근태는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라는 추모사를낭독했다.
추도식을 마친 일행은 광주 금남로에서 스크럼을 짜고 <5월의 노래>를 부르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많은 광주시민들이 지켜본 이날의 시위는 이후 광주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에 새로운 불씨를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민청련은 서울로 올라와 5월 19일 오후 서울 홍사단에서 ‘5월과 민족의 혼‘이라는 주제로 광주민주화운동 추모식을 거행했다.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진혼굿과 더불어 광주항쟁의 사진·판화전도 열었다. 또 광주시민 학살 사진과 함께 수기와 일지 등을담은 자료집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제작 배포했다. 광주학살 사진 전시와 자료집 발간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날 추모식이 끝난뒤 경찰이 들이닥쳐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30여 명의 참석자가 부상을 당했다. - P86

김근태는 이 성명에서도 밝혔듯이 민주화운동 조직과 단체가 "특정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개인 우상화를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는 5공 시대 최초로 공개적인 반정부 단체를 이끌면서, 청년민주화운동의 리더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정 개인의 명망에 단체가 귀속되는 것을 한사코 막았고, 그 전범을 보였다. 그리고민주화운동가들의 겸손한 처신을 강조했다.
실제로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이 실시될 때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영삼이 민청련의 투쟁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김근태 의장에게 종로 출마를 종용했는데, 김근태는 민청련의 성과를 자기 혼자서 차지할수 없다는 것과, 아직 청년운동의 역할이 남았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하기도 했다. 그의 언행일치와 겸손함이 묻어나는 ‘비화‘다 - P91

민청련은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고, 김근태와간부, 회원들은 전위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민청련의 투쟁이 강화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가중되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집행부의 연행 횟수가 늘어나고,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는 경우도 잦았다. 정부는 각 부문운동 단체들과 연대투쟁의 발원지가 민청련이라는 사실을 알고 강도높은 탄압을 자행했다.
1985년 10월 14일 민청련 지도위원(계훈제 · 백기완 • 이우정• 고은·김병걸 등 32인)들은 ‘민청련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다 모든 민주 세력과 더불어 민청련 파괴음모를 저지할 것을 결의하며‘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민청련 탄압· 파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우리 지도위원들은 전두환 정권에게 엄숙히 경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애국적인 학생. 노동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 중 극히 일부분만을뽑아서 용공으로 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난 2년여 동안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민청련을 학생들의 배후로 조작하여 탄압하려는 한심스런 작태에 우리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배후 및 용공조작이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을 탄압하려는 명분의 조작일 뿐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단계적으로 분리, 탄압하려는 간교한 술책임을 직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그것은 전체 민주화운동권에 대한 군사독재정권의 전면적 파괴공작의 명백한 신호로 간주하고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공동대처를 모색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전두환 정권에게 간곡히 충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하고 광주민중학살을 비롯한 자신의 과오를 분명히 시인하면서 스스로 퇴진하는 길만이 민족사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 P99

김근태가 주도하는 민청련은 그동안 금기시되어 그 누구도 꺼내지못했던 문제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전두환 책임 추궁‘을 이슈화한 것이다. 그리고 겸양과 포용 정신으로각급 부문운동 그룹과 연대하여 5공 정권과 대결하면서 전두환 세력을코너로 몰았다. 그렇지 않아도 2.12 총선과 제12대 국회에서 야당의활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청년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를 찍었다.

총선의 패배로 휘청거리던 5공 정권은 점차 활성화되어가는 학생, 재야, 민중운동의 도전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다시 탄압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타깃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의 연결고리인 민청련이었다. ‘학원안정법‘을 통과시키려다가 국내의 반발과 미국의 불승인으로 철회돼, 정치적 위신이 실추된 전두환 정권은 그 제물로 민청련과 김근태를 선택한 것이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김근태 전 의장을 서부경찰서에서 구류 만기일인 9월 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참혹한 고문을 했다." - P100

뒷날 김근태는 자신을 체포해온 이 자들에 대해 "무슨 열정에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이라고 회상했다. 그만큼 이들은 외견상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순수하다는인간의 본성을 믿었다. ‘수심(獸心)을 간직한 인면(人面)‘만 본 것이다.

백남은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 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하였으나, 몰려서이기도 하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고요. 아직 한참 남은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 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은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 거부를 잘한다지, 여기서도 할 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습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 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하였다" 하자 "그렇다면 그 몸으로 견딜 수가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하였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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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러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 김근태는 고문이 시작될 순간의 심경을 이렇게 그렸다. 그는 낭만파 시인이었다. 그리고 순간,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에 갇혀 고문당한 유대인들을 떠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 P110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이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을 고문하고 집단학살하면서 고전음악을 듣거나, 일요일에는 오페라 구경을 가자고 가족과 약속했듯이, 한국의 고문 기술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왈츠를 듣거나, 군대 간 아들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 대학 진학을앞둔 자녀 문제 등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6백만 명의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다는 점에서 ‘악의 평범성‘을 지적했다. ‘악의 평범성‘은 히틀러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한국에서도 벌어진 현상이었다.
김근태는 1985년 9월 4일부터 22일 동안 10차례에 걸쳐 상상하기어려운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를 고문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되는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1세) 군을 고문으로 죽였다.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이 고문살해범이다. 김근태가 그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에라도 야수적인 고문이 근절되었다면 박종철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 P111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는 내면의 외침에,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히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을 할 수는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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