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5월 14일 김근태와 닌청련 회원들은 광주항쟁 4주년을 앞두고 버스 두 대로 광주로 내려가 오후 2시 망월동 묘소에 분향하고 추모식을 거행했다. 김근태는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라는 추모사를낭독했다.
추도식을 마친 일행은 광주 금남로에서 스크럼을 짜고 <5월의 노래>를 부르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많은 광주시민들이 지켜본 이날의 시위는 이후 광주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에 새로운 불씨를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민청련은 서울로 올라와 5월 19일 오후 서울 홍사단에서 ‘5월과 민족의 혼‘이라는 주제로 광주민주화운동 추모식을 거행했다.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진혼굿과 더불어 광주항쟁의 사진·판화전도 열었다. 또 광주시민 학살 사진과 함께 수기와 일지 등을담은 자료집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제작 배포했다. 광주학살 사진 전시와 자료집 발간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날 추모식이 끝난뒤 경찰이 들이닥쳐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30여 명의 참석자가 부상을 당했다. - P86

김근태는 이 성명에서도 밝혔듯이 민주화운동 조직과 단체가 "특정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개인 우상화를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는 5공 시대 최초로 공개적인 반정부 단체를 이끌면서, 청년민주화운동의 리더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정 개인의 명망에 단체가 귀속되는 것을 한사코 막았고, 그 전범을 보였다. 그리고민주화운동가들의 겸손한 처신을 강조했다.
실제로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이 실시될 때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영삼이 민청련의 투쟁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김근태 의장에게 종로 출마를 종용했는데, 김근태는 민청련의 성과를 자기 혼자서 차지할수 없다는 것과, 아직 청년운동의 역할이 남았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하기도 했다. 그의 언행일치와 겸손함이 묻어나는 ‘비화‘다 - P91

민청련은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고, 김근태와간부, 회원들은 전위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민청련의 투쟁이 강화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가중되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집행부의 연행 횟수가 늘어나고,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는 경우도 잦았다. 정부는 각 부문운동 단체들과 연대투쟁의 발원지가 민청련이라는 사실을 알고 강도높은 탄압을 자행했다.
1985년 10월 14일 민청련 지도위원(계훈제 · 백기완 • 이우정• 고은·김병걸 등 32인)들은 ‘민청련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다 모든 민주 세력과 더불어 민청련 파괴음모를 저지할 것을 결의하며‘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민청련 탄압· 파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우리 지도위원들은 전두환 정권에게 엄숙히 경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애국적인 학생. 노동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 중 극히 일부분만을뽑아서 용공으로 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난 2년여 동안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민청련을 학생들의 배후로 조작하여 탄압하려는 한심스런 작태에 우리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배후 및 용공조작이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을 탄압하려는 명분의 조작일 뿐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단계적으로 분리, 탄압하려는 간교한 술책임을 직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그것은 전체 민주화운동권에 대한 군사독재정권의 전면적 파괴공작의 명백한 신호로 간주하고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공동대처를 모색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전두환 정권에게 간곡히 충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하고 광주민중학살을 비롯한 자신의 과오를 분명히 시인하면서 스스로 퇴진하는 길만이 민족사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 P99

김근태가 주도하는 민청련은 그동안 금기시되어 그 누구도 꺼내지못했던 문제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전두환 책임 추궁‘을 이슈화한 것이다. 그리고 겸양과 포용 정신으로각급 부문운동 그룹과 연대하여 5공 정권과 대결하면서 전두환 세력을코너로 몰았다. 그렇지 않아도 2.12 총선과 제12대 국회에서 야당의활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청년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를 찍었다.

총선의 패배로 휘청거리던 5공 정권은 점차 활성화되어가는 학생, 재야, 민중운동의 도전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다시 탄압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타깃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의 연결고리인 민청련이었다. ‘학원안정법‘을 통과시키려다가 국내의 반발과 미국의 불승인으로 철회돼, 정치적 위신이 실추된 전두환 정권은 그 제물로 민청련과 김근태를 선택한 것이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김근태 전 의장을 서부경찰서에서 구류 만기일인 9월 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참혹한 고문을 했다." - P100

뒷날 김근태는 자신을 체포해온 이 자들에 대해 "무슨 열정에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이라고 회상했다. 그만큼 이들은 외견상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순수하다는인간의 본성을 믿었다. ‘수심(獸心)을 간직한 인면(人面)‘만 본 것이다.

백남은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 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하였으나, 몰려서이기도 하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고요. 아직 한참 남은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 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은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 거부를 잘한다지, 여기서도 할 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습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 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하였다" 하자 "그렇다면 그 몸으로 견딜 수가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하였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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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러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 김근태는 고문이 시작될 순간의 심경을 이렇게 그렸다. 그는 낭만파 시인이었다. 그리고 순간,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에 갇혀 고문당한 유대인들을 떠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 P110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이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을 고문하고 집단학살하면서 고전음악을 듣거나, 일요일에는 오페라 구경을 가자고 가족과 약속했듯이, 한국의 고문 기술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왈츠를 듣거나, 군대 간 아들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 대학 진학을앞둔 자녀 문제 등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6백만 명의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다는 점에서 ‘악의 평범성‘을 지적했다. ‘악의 평범성‘은 히틀러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한국에서도 벌어진 현상이었다.
김근태는 1985년 9월 4일부터 22일 동안 10차례에 걸쳐 상상하기어려운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를 고문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되는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1세) 군을 고문으로 죽였다.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이 고문살해범이다. 김근태가 그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에라도 야수적인 고문이 근절되었다면 박종철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 P111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는 내면의 외침에,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히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을 할 수는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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