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렇게 멀리서는 과거가 좀 더 부드러워 보인다. 덜 고통스럽고 더 인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날 밤 아버지와 내가 식탁에 앉아서 테이프를 녹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계셨고, 나는 포도주잔을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앉아 있었다. 우리가 둘다 서툴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둘다 불완전하고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나마 투병 기간 내내 서로에게 곁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회와놓친 연결감과 이런저런 후회도 떠오르지만, 무엇보다도 크게 느끼는 것은 일종의 평온함이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노력했어. 마지막에는,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했어. 이런 감상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평화도 있었다. - P192

금주한 지 일 년 뒤에 다시 마시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그 무렵은 뿌연 안개가 걷히고 앞으로 해야 할 어려운 일이 드러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술을 끊는 일은기차 사고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좀 비슷하다. 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일어나서,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다 머리가 맑아지고 트라우마가 잦아들면,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잔해를보며 서 있게 된다. 저 기차에서 내린 나는 이제 누구지? 이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거기까지 어떻게 가지? 이것은 겁나는 시기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는사실을 자주 상기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기인 건 맞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이기도 하다고.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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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토록 깊이 동일시하는 건 드문 일일것이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딸에게 수많은 부정적 감정을 자극할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라는 사람, 딸이라는 사람, 서로 상대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모습, 그 사이를 잇는 선들은 서로 교차하고 엉클어지고 겹쳐지기 일쑤다.
하지만 모녀 관계가 얽히고 설킨 관계가 되기 쉬운 게 그 때문이라면, 역시 그 덕분에 모녀 관계는 유달리 풍성한 관계가 될 수있다.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란 딸의 내면에 있는 로드맵 혹은 거울이다. 우리와 어머니와의 관계에는 우리가 평생 배워온 교훈들, 우리가 과거에 걸어오다가 계속 걷기로 결정했거나 포기하기로 결정한 길들이 반영되어 있다. 여자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일이나 연애 문제든,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입고 어떤 친구들을 사귈까하는 문제든,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문제든 다소나마 자신의 결정을 어머니의 결정에 견주어 평가해보기 마련이고, 어머니의 노력들이 어떻게 어머니를 형성하거나 제약했는지, 강화하거나 약화했는지 따져보기 마련이다.
몇 주 뒤에 나는 서른다섯이 된다. 인생의 중대한 결정들을 내려야 할 시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나는 그 거울이, 지도가, 나를 짜증 나게 만들던 통화들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아직은 내가 혼자서 해낼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기억만으로는 부족하다. - P150

어머니가 즐겨 하신 말씀 중에 "인생은 드레스 리허설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술을 끊기 전 몇 달 동안 나는 저 말을 수시로 떠올렸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인생의 힘든 순간들을 겪어내는 데 술에 지속적으로 의지하면, 삶의 모든 일이 현장이 아닌 연습인 양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여름에 밤이면 밤마다 전화를 붙들고 애통해할 때, 나는 실제로 애도한 게 아니라 애도를 연습한 것이었다. 희석된 고통은 직면한 고통과 결코 같지않다. 술과 자신감의 방정식, 술과 불안의 방정식도 마찬가지다. 칵테일 파티에서 마티니로 얻은 세련됨은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서 내면으로부터 얻은 세련됨과 결코 같지 않다.
성인이 된 뒤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밑바탕에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무슨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고,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렸고, 내게 맞는남자나 직업이나 신발, 옷, 헤어스타일 따위가 휙 하고 나타나서 나를 바꿔주기를 기다렸다. 내가 행복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외부에서 내게 주입해주기를 기다렸다.
술이 사실은 그 구속적 패턴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
내가 나아가기 위해서 디뎌야 할 고통스러운 걸음들을 디디지 않아도 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술을 끊고서야 비로소 든 생각이었다. - P155

거식증은 당신을 잡아당긴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늘 술이 있듯이, 거식증도 늘 거기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 같다. 그 힘은내가 약할 때, 혼란하거나 산란하거나 통제력을 잃었다고 느낄 때, 음식에 대한 경직성을 대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새로운 의식들로부터 너무 멀어졌을 때, 나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할 때 가장 세어진다. 그럴 때, 그 힘은 안전한 안식처처럼 나를 꾄다. 나는 별의별 이유로 굶어보았다. 내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무엇이라도 통제하기 위해서, 분노와 불안을 마비시키기 위해서, 고통을 표현하는 대신 내보이기 위해서, 남들 눈에 띄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역설적으로) 돋보이기 위해서, 한 가지 일에서라도 철저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물론 그 일이란 마르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어쩔 수 없다. 지금도 가끔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 거식증은 자신을 제약하는 일, 외로운 일, 고통스럽도록 단조로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는 훌륭한 수단이기도 하다. 뼈와 모서리로 이루어진 딱딱한 벽 뒤에 숨는 일이다. - P180

나는 이 외로움과 오래도록 친밀하게 지내왔다. 가끔은 내가이 외로움을 타고난 게 아닐까, 나 자신이 남들과 다르거나 뭔가 부족해서 세상과 떨어진 존재라고 강하게 느끼는 이 감정을 타고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릴 때 어느 봄날에 내 방에 앉아서 창밖에서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이름붙이지 못했던 어떤 기분을 느꼈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것은세상에 참여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세상은 저 창밖에서 나 없이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데 나는 거기 참여할 능력이 없거나의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늘 친구가 있었고 지금도 있고 그것도 많다. 하지만 내가 겪는 외로움은 현실의 상황이나 논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내 안에 산다. 작고 끈질긴 악마 같은 그것은 가장 고요한 순간에, 그러니까 계획 없는 저녁이나 일요일 아침 같은 때 활개를친다. 그것은 공허감이다. - P184

이런 것들은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리고 나는 외로움을 앞질러 달아나는 데 급급하여, 이 질문들에 답할 기회를 회피해왔다. 물론 가끔씩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새 신발의 치유력을 열렬히 증언하는 바다. 하지만 더 큰 질문들을 피하기만 했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돈을 펑펑 쓰면서 종종거릴 때, 보통은 내가 평범한 일요일을 계획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느낌이 강화될 뿐이다. 그래서 그날, 나는 잠시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일에 착수했다. 몇 달 동안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생각만 했던 커튼을 직접 만들어서 걸었다. 할 일을 해치웠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이 일로 새삼스럽게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내게는 절망감에 맞서 싸울 자원이 있다는 사실, 내 시간을 잘 쓰고 내 영혼을 잘 돌볼 능력이 있다는 사실, 외로움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독한 일요일이었지만, 결국에 외로운 일요일은 아니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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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미명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닐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곳의 풍경은매일 좋구려. 거친 시멘트 선, 건물의 사나운 직각이 시야를 찢고 들어오지만 거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는구려. 때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담장 훨씬 위로 까마득하게 치솟아 올라간 20여 년 이상 묵은 나무들이그렇게 정답게 다가올 수가 없소.
마치 머리를 기웃거리며 아는 체하고 내 방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오. 거칠 것 없이 시원하게 크면서도 미루나무처럼 본때 없이 그리하여 허전하고 허망하게 기다란 그런 모습이 아니고, 희끄무레한 새벽하늘을 뒤로하고 약간씩 구불구불텅 틀면서 다시 올라가고 그러다가 줄기를 내어 함께 위로 솟구쳐 오른, 빙 둘러쳐진 나무들 모습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지는구려.
여기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한과 한숨이 저렇게 나무를 굽이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오. 당신과 만나서 살아온 지난날들이 미명에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저 나무처럼 여겨지는구려. 짧지 않은 세월을 저렇게쭉 밀고 올라왔고, 그러면서 정답고 또한 구불텅한 굽이와 옹이도 없지않았던 세월이었지요. - P225

다음은 생전에 김병곤의 셋방을 찾아가서 함께 민청련 일을 하자고제안하던 날,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쏠쏠했던 심정을 그린 글인데, 집안 풍경 묘사 속에 그 복잡한 감정이 잘 녹아 있는 글이다.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원효로의 어디쯤인가, 창고 같은 2층에 병곤이가 살 때였습니다. 마루엔 애들 기저귀가 치렁치렁 걸려 있었고, 문숙 씬 식사준비한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옆구리가 걸리는 듯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뭐 대단한 계획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봉급 받아서 뭣인가 해보려고 하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대책 없이 그렇게 떠나는 병관이가 과연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권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흔들렸습니다. 그날 문숙 씨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앉아 있다가 옆걸음을 쳐 나왔던 것이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 P227

김근태는 출소 직후 《월간 말》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그동안 줄기차게 제기해온 정권교체를 위한 ‘민주대연합론‘을 개진했다. 옥중에서오랫동안 고민해본 결과 야당의 일각까지 가세한 수구 세력을 깨는 데는 민주대연합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민주연합의 내용은 사회과학적으로는 기층민중과 중간 제계층, 그리고민족적 입장의 자본가가 상호 동맹세력으로 재배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상적으로는 재야와 제도야권의 결합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 운동의 현 단계 전략적 목표인 자주 · 민주·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운동의 상호 대치선은 외세와 국내 지배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재야와 제도야권의 연합세력을 한편으로 하는 대립으로 돼야 하며 이럴 때 어느 정도승산 있는 싸움이 가능하다.
따라서 재야 세력은 비제도권에서 자신의 본대를 꾸리고 이 본대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일부가 제도권에 들어가 제도야당 내부에 교두보를 확보하며, 이러한 민족민주 세력의 의원단이 의회에서 민중적 대의를 널리 알리고, 대중운동을 엄호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전까지 주장해온 이른바 ‘제도야당의 민주연합당으로의 개변‘을 의미하는 것이다. - P239

결국 1987년 대선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재야에 대해 국민들도 지지를철회해버렸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중이 공적 영역에서의 책임을 철회하고 사적 이해관계의 축으로 옮겨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파시즘의 물적 기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광역선거전후 나타난 무서운 침묵과 정치적 무관심은 유신 중후기의 공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난해 평민 · 민주당의 통합으로 일부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대선 승리의 묘수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또 이대로 가면 패배한다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마지못해서 후보를 선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대연합의 최대주주인민주당의 김대중 대표는 이러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배세력이 조장한 지역패권주의에 의해 분열된 대중의 힘을 이끌어내려면 이런 교착국면에서 지도자의 도덕적인 결단과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대중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승리하는 민주대연합이 이루어져 수권의 준비가 다 이루어졌다는 일체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선 대선 승리를 위한 김대중 대표의 자기희생이 결국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 P241

김근태는 1992년 10월 재야인사들과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위한 국민회의‘(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보수대연합 함대인 민자당은 5, 6공의 모든 자원, 심지어 박정희의 유산까지 동원하여 정권 재창출에 혈안이 되었다.
반면에 초라해진 민주당은 다시 김대중을 내세워 혈투를 전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수언론·검찰·관료 · 재벌이 총동원되고, 부산복집기관장회의를 통한 관권개입은 물론, 나중에 드러났지만 재벌에서 3천억 원을 김영삼에게 지원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금권선거를 치렀다.
김근태는 1992년 9월 17일 <정세연구>지의 초청을 받고 ‘9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방향‘이라는 주제의 대담을 가졌다. 대선 정국에서 이번에도 야권은 분열되고, 심지어 과거 학생운동과 재야의 지도자급 인사중에 민자당 후보 진영에 참여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 대담에서 김근태는 재야 단체의 문제점으로 급진적 관념론과 세력관계에 대한 올바르지 평가를 꼽고 이어서 몇 가지 문제를 더 제기했다.

우리가 유리할 때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리한 시기로 반전되는 상황 속에서 굉장히 많은 희생을 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에서 공격할 때는 사상자가 별로 발생하지 않지만 후퇴할 때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공격할 때는 사기가 충천하고 대오를 갖추어서 공격하는 데 반해, 후퇴할 때는 오합지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시급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대오를 제대로 갖춰내지 못한다면 사상자가 굉장히 많이 발생할 것이고, 후퇴하는 대오 속에서 지배세력의 공격 앞에 동요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내부에서 반복해서 위기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 합니다. - P242

김근태의 관심은 재야민주 세력을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묶는 작업이었다. 과거 일부 재야인사들이 진보정당운동에서 보여준 실패를 돌아보면서 제도정치권과 재야 세력의 조직적인 연계와 통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여러 날 동안 준비한 끝에 마침내 이를 위한 1단계 작업이 이루어졌다.
1994년 4월 23일 오후 충정로 동아일보사 18층 대강당에서 4백여명의 재야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최고지도부인 공동대표단에는 종교계 원로와 재야원로 5명을 선출했다. 가톨릭 대표 김병상 신부, 개신교 대표 김상근 목사, 법조계 대표 한승헌 변호사, 재야여성 대표 김희선 전국연합자주통일위원장, 불교계 대표 조계종 개혁의 핵심인 지선 스님, 그리고 이 단체를 오랫동안 준비해온 김근태가 각각 선임되었다. 김근태는 실질적인 상임대표였다. 대변인에는 천정배 변호사가 임명되었다.
••••••
 김근태는 ‘국민회의‘ 출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1992년 대선 후 상황정리가 우선 필요했다. 첫째, 1992년 국민회의는 대선 패배로 무너졌고, 전국연합이나 기층민중운동 진영에서도 변화된 상황에 대한 논의가 합의되지 않았다. 둘째, 평가 결과 폭넓게 꾸리는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리고 민중 중심의 공감대를 가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셋째, 김영삼 정권이 민중의 기본권 문제,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정리했다. - P247

개혁이 지배적인 언술이 된 것은 김영삼 정권 성립 이후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는 ‘개혁‘이라는 슬로건 속에는 시대정신이 관철되고있는 측면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 양 측면은 반드시 상호배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립이 존재하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당면 요구로서의 진정한 ‘개혁‘을 보다 힘차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이 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될 때, 우리는 비판적으로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조건상 그리고 힘의 관계로 볼 때 지금 추진하고 있는 개혁 이외에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는 전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함축이 그 속에 담길 텐데 과연 그럴까? ‘개혁‘이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것은개혁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기보다 그것을 오히려 제한하고 망상적인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 P251

간디가 가는 길이 있고 네루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재야운동은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의 길이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사회운동의 길은 간디의 길이고 정치운동의 길은 네루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은 서로 다르지만지원하고 협력하는 길입니다.

김근태는 이제까지 걸어온 간디의 길에서 네루의 길로 접어들었다.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이 다른 것 같지만 그 목표와 지향은 다르지 않다. 김근태의 말을 더 들어보자.

물론 내 개인적으로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을 동시에 다 갈수는 없지요. 나는 이제 네루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간디의 길을 가는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고 함께할 생각입니다. 국민회의(재야단체인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인용자)에서 김상근 목사님과 함세웅 신부님을 상임대표로 하고 저를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뽑은 것도 간디의 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인정한 것이지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도덕적 정당성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김근태는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에 대해 많은 고심을 했다. 그리고해방 뒤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지도자가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여겼다.

위대한 영혼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며 전국을순회하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을 벌일 때, 위대한 현실주의자 네루는간디의 그 숭고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간디에게는 간디의 길이, 네루에게는 네루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평양으로 떠나시던 김구 선생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사진 속에서 선생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만일 그때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인물이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우리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으리라고생각합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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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빛을 느끼기 위해서 그림자가 필요하듯, 빈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체가 필요하다. 역으로 추론해 보면, 물체가 만들어지면 동시에 빈 공간도 부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건축 행위는 일차적으로는 물체를 만드는 것이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 다. 단순히 물체만 만드는 것은 조각이다. 건축이 조각과 다른 점은 건축은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물체를 만드는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건축물이라는 물체를 만들고 그 물체가 만든 빈 공간을 인간이 사용한다. 빈 공간을 프레임하기 위한 물체를 만드는 일은 엄청나게 큰 에너지와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하고, 크게는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사람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 P32

 전 지구적으로 바람이줄어들었다는 것은 비로소 농사지을 만큼 기후 조건이 좋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빙하기가 끝나면서 온도가 올라가자 물이 부족해지는 지역이 생겼다. 대표적인 곳이 중동 지역이다. 이곳은 빙하기 때는다른 추운 지역과 달리 기온이 적당해서 먹을 것이 많고 식물이 잘 자라는 지역이었다. 빙하기가 끝나는 시점인 기원전 1만 년 전 이전의 아라비아반도는 오늘날과는 달리 수목이 무성하고 호수와 습지가 많은땅이었다. 고대의 에덴동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에덴동산의 위치를 찾는 다큐멘터리에서는 에덴동산의 위치를 중동 페르시아만 바닷속 침수 지역으로 결론 내리고 있다. 하지만 에덴동산 같던 이곳의기온이 올라가면서 점차 물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생겨났다. 그런데 전화위복으로 이러한 기후적 제약은 최초의 문명이 발생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제공했다.
물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물을 구할 수 있는 강으로 모여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강 주변으로 단위 면적당 인구 밀도가 높아졌다.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식물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모여 살게 되면서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사냥감과 채집할 수 있는 열매들이 인구수에 비해서 턱 없이 부족해졌다. 수렵과 채집만으로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인간은 단위 면적당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통 수렵 채집을 통해서 한 사람이 먹고살려면 가로 세로 각각 1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인 100만 제곱미터의 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을 하게되면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5백 제곱미터의 땅만 있으면 된다. 수치상으로는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땅의 면적이 2천 분의 1의 면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는 과거 수렵 채집 때 1명이 사냥을 하면서 먹고살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2천 명이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농업은 좁은 땅에서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그래서 배가 고팠던 인간은 수렵과 채집보다는 인공적으로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농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최초의 문명인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 P40

그런데 특이하게도 농업은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곤충인 개미 중에서 중남미 열대 지방에 서식하는 잎꾼개미 Leafcutterants들은 잎을 잘라서 버섯을 키워 먹는 농업을 한다. 이파리를 잘게 잘라서 효소 성분이 있는 자신들의 배설물과 섞어 버섯균류를 재배하는것이다. 버섯균류는 잎꾼개미의 주 식량원이다. 국립생태원 초대 원장인 최재천 교수에 의하면 인간은 농사를 지은 지 1만 년밖에 안 됐지만, 잎꾼개미는 2500만 년 동안 농사를 지어 왔다고 한다. 인간과 개미의 특징은 둘 다 좁은 지역에 많은 개체 수가 사는, 단위 면적당 개체수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단위 면적당 개체 수가 많은 종이 모두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개미와 인간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농업 기술은 고밀도 군집 생활을 하지 않는 집단에서는 나오지 않는 기술인 것 같다. 농업을 통해서 개미처럼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하게 된 인간은 개미처럼 사회 내에 신분 계층을 가지게 되었다. 개미 사회에 여왕개미가 있듯이 인간 사회에 왕이 생겨났고, 두 사회모두 하층부에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계급이 있다.
벌도 개미처럼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하는 곤충이다. 하지만 벌은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 이유는 벌은 날개를 가지고 멀리까지 빨리 갈수 있기 때문이다. 느리게 걸어야 하는 개미는 갈 수 있는 영역이 좁다. 반면에 벌은 날개 덕분에 넓은 면적에서 빠르게 꽃의 꿀을 수집할 수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를 직접 짓지 않고도 고밀도 군집 생활이 가능했다. 그래서 별 중에는 농사짓는 종이 발견되지 않는다.  - P42

언어를 통한 뇌의 병렬연결은 단위 면적당인구수가 늘어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수렵 채집 시기에 10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수십 명이 살았다면, 건조해진 기후 때문에 강가로 모인 사람들은 10제곱킬로미터에 수만 명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수십 개의 PC를 병렬로 연결하는 것보다 수만 개의 PC를 병렬로 연결한 컴퓨터가 훨씬 더 강력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수만 명이모여 살게 되면서 집단 지능이 커졌고 자연스럽게 문명이 발생했다. 문명 발생의 필수 조건은 ‘도시‘ 형성이다. 인류 최초의 도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만들어진 ‘우루크Uruk‘라는 도시다. 기원전 3500년경에 만들어진 우루크는 성벽 안쪽 면적이 6제곱킬로미터였는데 그 안에 5만명이 살았다. 이 정도의 인구 밀도는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공간적 상황이다. 5만 명의 뇌가 언어를 통해 병렬로 연결되면서 상업 활동이 늘어났고 새로운 종교들도 발생했다.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하게 분업됐고, 사회 계층도 왕족, 귀족, 종교인, 군인, 상인, 농부, 노예 등으로 점점 더 세분화되었다. 지구 온난화는 인류가 농사를 짓게 했고, 강가에 고밀화된 도시를 만들게 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은 문명을 만들었다. - P44

그런데 문제가 있다. 건조 기후대는 전염병에는 강하지만 물이 부족하다. 물이 없으면 인간이 모여 살 수가 없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은 특이하게도 강이 남북으로 흐르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두 문명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의 하구이면서 건조 기후대에 위치한 문명이다.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같은 거대하고 긴 강은 상류와 하류의 기후대가 다르다. 강의 상류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빗물이 강을 따라서 하구의 건조한 지역에 다다르게 되면 사람들은 전염병 없이 그 물로 농사를 짓고 마시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자연이 만들어 준 천연의 상수도 시스템이 되었다. 덕분에 최초의 문명 도시 우루크는 남북으로 흐르는 강 하구의 건조 기후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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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죄책감이 평범하고 오래된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죄책감과 사랑을 본능적으로 하나로 엮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이것이 삶임을 깨닫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모두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라 더 쉬워진다는 신화를 믿으며 자라는데(그리고 이것은 진짜 신화일 뿐이다), 나이 드는 부모의 모습만큼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다. 실제로는 우리가 나이 들수록 잃은 것이 많아진다. 점점 더 크고 버거운 과제가 나타난다. 실수를 되돌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부모의 죽음을 생각해보는 일이 겁나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끝나면, 우리의 순수의 시대 중 후반부의 한 단계도 끝난다. 그분들이 언제까지나 거기 계시진 않을 것이다. 우리 삶이 더 간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P123

그야 정확히 말하자면 다행스럽다기보다는 마음이 좀 가볍다는 기분, 한시름 덜었다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병은 사람을 망가뜨렸고, 잔인했고, 지켜보기 참혹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병으로 죽을 때는 애도 과정의 상당 부분이 기억과 안도라는 기묘한 순환으로 전환되는 듯싶다. 당신이 이따금 그 참혹함을 떠올렸다가는 이내 그 일이 끝난 것이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느끼는 것이다. 꼭 다 끝났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이미지에 몸서리치고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는 것이랄 수 있다. - P126

그렇긴 하지만, 상실은 우리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지금까지 여덟 달 동안아버지가 여전히 곁에 계시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품고 지냈던 것같다. 아버지가 장기 휴가를 가신 거라고, 아니면 어디 멀리 요양하러 가신 거라고 느꼈고, 그런 감정은 지금 황동 상자에 담겨서 아버지 서재에 놓여 있는 아버지 뼛가루에 내가 막연히 집착했다는 사실로 드러났다. 나는 뼛가루를 내 집으로 가져가서 뭐랄까 보살펴드리고 싶었는데, 그 바람은 아버지가 아직 여기 계시고, 아직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아직 내 행동을 알고 계시다는 느낌과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없다. 크리스마스에 갓난이 조카의 기저귀를 가는 언니를 서서 지켜볼 때 나를 휩쓸고 간 감정이 그것이었던 것 같다. 같은 방, 전혀 다른 이야기. 아홉 달 전에는 슬픔의 장소였던 곳이 지금은 기쁨과 새 시작의 장소였다. 그러니 그때 본 아기의 모습은 내게 연속성을 일깨워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무력함이 아기의 무력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버지를돌보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볼 것이다. 아버지는 갔지만, 아기는 여기 있다.
언니는 기저귀를 다 간 뒤 아기를 포대기로 감싸고 울음을 달랬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울었다. 앞으로 펼쳐질 생을 눈앞에둔 작은 아기를 위하여, 그리고 그제야 내가 정말로 떠나셨다고 느낀 아버지를 위하여. - P127

애도는 얼마 뒤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정말이다. 내 어머니는 지난 4월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하고 11일 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올여름을 대부분 얼빠진 상태로 보냈다. 멍했다. 얼떨떨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금 극심한 공황에빠졌다.
"좀 어때? 좀 괜찮아졌어?" 사람들이 이렇게 물으면, 나는 십중팔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다.
"엉망이야."
"끔찍해."
"아니. 더 나빠졌어. 더 안 좋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지만, 대개의 사람은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맨처음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죽음을 끔찍하게 지독하게잘못 다룬다. 상을 당한 사람에게 주는 휴가는 보통 사흘. 그 후에도 6주쯤은 사람들이 당신을 조심조심 대하고,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대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신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애도 기간은 끝난다. 이후에는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하루에 세 번씩 빨개진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다시 정상적으로 행동하고정상적으로 느껴야 할 듯한 압박이 든다.
나는 이게 싫다. 가끔은 길 가는 사람들을 잡아 세우고 말하고싶다. "우리 부모님이 죽었다고요. 부모님이 알겠어요?" 너무 많은걸 억누르고 삼켜야 한다. "정말 우울해요." 몇 주 전에 내가 남자동료에게 이렇게 말하자, 그는 멍청히 나를 보면서 말했다. "왜요?" 그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놀란 기색이 있었다. 우울해요? 왜? 나는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 P130

그럴 줄은 알았지만, 결국 이렇게 집 이야기를 쓰는 날이 오고말았다. 부모님 집에서 세간을 빼내고, 가족의 38년 역사에 다름없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서 추려내고, 그럼으로써 상실의 또 하나의 의례를 마무리하는 날이.
으윽. 나는 줄곧 이 일이 두려웠다. 작업 자체도 두려웠고 그작업에 대해 글을 쓰는 행위도 두려웠다.
지난 3년 동안 내 글을 꼬박꼬박 읽은 독자라면 알 텐데, 나는상실에 대해서 아주 많이 썼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1992년 4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1993년 4월), 오빠와 언니와 내가 부모님 없이 맞은 첫 크리스마스에 대해서(1993년 12월), 아버지의 뼛가루를 묻은 일에 대해서(1994년 5월), 어머니의 뼛가루를 묻은 일에대해서(1994년 5월), 이런 상실을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나가는 길고 구불구불한 과정에 대해서. 치유의 과정에 대해서.
그런 글을 쓰는 것은 그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 내게 벌어진 일과 그에 대한 내 감정을 세부적으로 적어서 활자로 고정해두는 행위가 내게는 늘 유용했다. 그것은 꽃을 책에 끼워서 압화로 간직하는 일, 혹은 추억의 기념품을 특별한상자에 보관하는 일과도 좀 비슷하다. 일단 세부를 보존해두면,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덜고서 다른 일로 삶을 채우며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집 전체를 비우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것은 세부를 상자에 꽉꽉 담아서 쓰레기장으로 실어 보냄으로써 말 그대로 그것을 없애버리는 일이다. 이 과정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프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이 싫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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