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미명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닐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곳의 풍경은매일 좋구려. 거친 시멘트 선, 건물의 사나운 직각이 시야를 찢고 들어오지만 거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는구려. 때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담장 훨씬 위로 까마득하게 치솟아 올라간 20여 년 이상 묵은 나무들이그렇게 정답게 다가올 수가 없소. 마치 머리를 기웃거리며 아는 체하고 내 방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오. 거칠 것 없이 시원하게 크면서도 미루나무처럼 본때 없이 그리하여 허전하고 허망하게 기다란 그런 모습이 아니고, 희끄무레한 새벽하늘을 뒤로하고 약간씩 구불구불텅 틀면서 다시 올라가고 그러다가 줄기를 내어 함께 위로 솟구쳐 오른, 빙 둘러쳐진 나무들 모습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지는구려. 여기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한과 한숨이 저렇게 나무를 굽이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오. 당신과 만나서 살아온 지난날들이 미명에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저 나무처럼 여겨지는구려. 짧지 않은 세월을 저렇게쭉 밀고 올라왔고, 그러면서 정답고 또한 구불텅한 굽이와 옹이도 없지않았던 세월이었지요. - P225
다음은 생전에 김병곤의 셋방을 찾아가서 함께 민청련 일을 하자고제안하던 날,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쏠쏠했던 심정을 그린 글인데, 집안 풍경 묘사 속에 그 복잡한 감정이 잘 녹아 있는 글이다.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원효로의 어디쯤인가, 창고 같은 2층에 병곤이가 살 때였습니다. 마루엔 애들 기저귀가 치렁치렁 걸려 있었고, 문숙 씬 식사준비한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옆구리가 걸리는 듯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뭐 대단한 계획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봉급 받아서 뭣인가 해보려고 하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대책 없이 그렇게 떠나는 병관이가 과연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권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흔들렸습니다. 그날 문숙 씨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앉아 있다가 옆걸음을 쳐 나왔던 것이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 P227
김근태는 출소 직후 《월간 말》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그동안 줄기차게 제기해온 정권교체를 위한 ‘민주대연합론‘을 개진했다. 옥중에서오랫동안 고민해본 결과 야당의 일각까지 가세한 수구 세력을 깨는 데는 민주대연합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민주연합의 내용은 사회과학적으로는 기층민중과 중간 제계층, 그리고민족적 입장의 자본가가 상호 동맹세력으로 재배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상적으로는 재야와 제도야권의 결합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 운동의 현 단계 전략적 목표인 자주 · 민주·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운동의 상호 대치선은 외세와 국내 지배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재야와 제도야권의 연합세력을 한편으로 하는 대립으로 돼야 하며 이럴 때 어느 정도승산 있는 싸움이 가능하다. 따라서 재야 세력은 비제도권에서 자신의 본대를 꾸리고 이 본대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일부가 제도권에 들어가 제도야당 내부에 교두보를 확보하며, 이러한 민족민주 세력의 의원단이 의회에서 민중적 대의를 널리 알리고, 대중운동을 엄호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전까지 주장해온 이른바 ‘제도야당의 민주연합당으로의 개변‘을 의미하는 것이다. - P239
결국 1987년 대선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재야에 대해 국민들도 지지를철회해버렸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중이 공적 영역에서의 책임을 철회하고 사적 이해관계의 축으로 옮겨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파시즘의 물적 기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광역선거전후 나타난 무서운 침묵과 정치적 무관심은 유신 중후기의 공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난해 평민 · 민주당의 통합으로 일부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대선 승리의 묘수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또 이대로 가면 패배한다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마지못해서 후보를 선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대연합의 최대주주인민주당의 김대중 대표는 이러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배세력이 조장한 지역패권주의에 의해 분열된 대중의 힘을 이끌어내려면 이런 교착국면에서 지도자의 도덕적인 결단과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대중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승리하는 민주대연합이 이루어져 수권의 준비가 다 이루어졌다는 일체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선 대선 승리를 위한 김대중 대표의 자기희생이 결국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 P241
김근태는 1992년 10월 재야인사들과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위한 국민회의‘(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보수대연합 함대인 민자당은 5, 6공의 모든 자원, 심지어 박정희의 유산까지 동원하여 정권 재창출에 혈안이 되었다. 반면에 초라해진 민주당은 다시 김대중을 내세워 혈투를 전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수언론·검찰·관료 · 재벌이 총동원되고, 부산복집기관장회의를 통한 관권개입은 물론, 나중에 드러났지만 재벌에서 3천억 원을 김영삼에게 지원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금권선거를 치렀다. 김근태는 1992년 9월 17일 <정세연구>지의 초청을 받고 ‘9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방향‘이라는 주제의 대담을 가졌다. 대선 정국에서 이번에도 야권은 분열되고, 심지어 과거 학생운동과 재야의 지도자급 인사중에 민자당 후보 진영에 참여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 대담에서 김근태는 재야 단체의 문제점으로 급진적 관념론과 세력관계에 대한 올바르지 평가를 꼽고 이어서 몇 가지 문제를 더 제기했다.
우리가 유리할 때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리한 시기로 반전되는 상황 속에서 굉장히 많은 희생을 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에서 공격할 때는 사상자가 별로 발생하지 않지만 후퇴할 때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공격할 때는 사기가 충천하고 대오를 갖추어서 공격하는 데 반해, 후퇴할 때는 오합지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시급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대오를 제대로 갖춰내지 못한다면 사상자가 굉장히 많이 발생할 것이고, 후퇴하는 대오 속에서 지배세력의 공격 앞에 동요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내부에서 반복해서 위기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 합니다. - P242
김근태의 관심은 재야민주 세력을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묶는 작업이었다. 과거 일부 재야인사들이 진보정당운동에서 보여준 실패를 돌아보면서 제도정치권과 재야 세력의 조직적인 연계와 통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여러 날 동안 준비한 끝에 마침내 이를 위한 1단계 작업이 이루어졌다. 1994년 4월 23일 오후 충정로 동아일보사 18층 대강당에서 4백여명의 재야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최고지도부인 공동대표단에는 종교계 원로와 재야원로 5명을 선출했다. 가톨릭 대표 김병상 신부, 개신교 대표 김상근 목사, 법조계 대표 한승헌 변호사, 재야여성 대표 김희선 전국연합자주통일위원장, 불교계 대표 조계종 개혁의 핵심인 지선 스님, 그리고 이 단체를 오랫동안 준비해온 김근태가 각각 선임되었다. 김근태는 실질적인 상임대표였다. 대변인에는 천정배 변호사가 임명되었다. •••••• 김근태는 ‘국민회의‘ 출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1992년 대선 후 상황정리가 우선 필요했다. 첫째, 1992년 국민회의는 대선 패배로 무너졌고, 전국연합이나 기층민중운동 진영에서도 변화된 상황에 대한 논의가 합의되지 않았다. 둘째, 평가 결과 폭넓게 꾸리는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리고 민중 중심의 공감대를 가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셋째, 김영삼 정권이 민중의 기본권 문제,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정리했다. - P247
개혁이 지배적인 언술이 된 것은 김영삼 정권 성립 이후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는 ‘개혁‘이라는 슬로건 속에는 시대정신이 관철되고있는 측면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 양 측면은 반드시 상호배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립이 존재하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당면 요구로서의 진정한 ‘개혁‘을 보다 힘차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이 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될 때, 우리는 비판적으로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조건상 그리고 힘의 관계로 볼 때 지금 추진하고 있는 개혁 이외에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는 전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함축이 그 속에 담길 텐데 과연 그럴까? ‘개혁‘이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것은개혁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기보다 그것을 오히려 제한하고 망상적인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 P251
간디가 가는 길이 있고 네루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재야운동은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의 길이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사회운동의 길은 간디의 길이고 정치운동의 길은 네루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은 서로 다르지만지원하고 협력하는 길입니다.
김근태는 이제까지 걸어온 간디의 길에서 네루의 길로 접어들었다.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이 다른 것 같지만 그 목표와 지향은 다르지 않다. 김근태의 말을 더 들어보자.
물론 내 개인적으로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을 동시에 다 갈수는 없지요. 나는 이제 네루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간디의 길을 가는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고 함께할 생각입니다. 국민회의(재야단체인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인용자)에서 김상근 목사님과 함세웅 신부님을 상임대표로 하고 저를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뽑은 것도 간디의 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인정한 것이지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도덕적 정당성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김근태는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에 대해 많은 고심을 했다. 그리고해방 뒤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지도자가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여겼다.
위대한 영혼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며 전국을순회하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을 벌일 때, 위대한 현실주의자 네루는간디의 그 숭고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간디에게는 간디의 길이, 네루에게는 네루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평양으로 떠나시던 김구 선생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사진 속에서 선생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만일 그때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인물이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우리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으리라고생각합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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