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빛을 느끼기 위해서 그림자가 필요하듯, 빈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체가 필요하다. 역으로 추론해 보면, 물체가 만들어지면 동시에 빈 공간도 부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건축 행위는 일차적으로는 물체를 만드는 것이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 다. 단순히 물체만 만드는 것은 조각이다. 건축이 조각과 다른 점은 건축은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물체를 만드는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건축물이라는 물체를 만들고 그 물체가 만든 빈 공간을 인간이 사용한다. 빈 공간을 프레임하기 위한 물체를 만드는 일은 엄청나게 큰 에너지와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하고, 크게는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사람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 P32

 전 지구적으로 바람이줄어들었다는 것은 비로소 농사지을 만큼 기후 조건이 좋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빙하기가 끝나면서 온도가 올라가자 물이 부족해지는 지역이 생겼다. 대표적인 곳이 중동 지역이다. 이곳은 빙하기 때는다른 추운 지역과 달리 기온이 적당해서 먹을 것이 많고 식물이 잘 자라는 지역이었다. 빙하기가 끝나는 시점인 기원전 1만 년 전 이전의 아라비아반도는 오늘날과는 달리 수목이 무성하고 호수와 습지가 많은땅이었다. 고대의 에덴동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에덴동산의 위치를 찾는 다큐멘터리에서는 에덴동산의 위치를 중동 페르시아만 바닷속 침수 지역으로 결론 내리고 있다. 하지만 에덴동산 같던 이곳의기온이 올라가면서 점차 물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생겨났다. 그런데 전화위복으로 이러한 기후적 제약은 최초의 문명이 발생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제공했다.
물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물을 구할 수 있는 강으로 모여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강 주변으로 단위 면적당 인구 밀도가 높아졌다.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식물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모여 살게 되면서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사냥감과 채집할 수 있는 열매들이 인구수에 비해서 턱 없이 부족해졌다. 수렵과 채집만으로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인간은 단위 면적당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통 수렵 채집을 통해서 한 사람이 먹고살려면 가로 세로 각각 1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인 100만 제곱미터의 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을 하게되면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5백 제곱미터의 땅만 있으면 된다. 수치상으로는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땅의 면적이 2천 분의 1의 면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는 과거 수렵 채집 때 1명이 사냥을 하면서 먹고살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2천 명이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농업은 좁은 땅에서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그래서 배가 고팠던 인간은 수렵과 채집보다는 인공적으로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농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최초의 문명인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 P40

그런데 특이하게도 농업은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곤충인 개미 중에서 중남미 열대 지방에 서식하는 잎꾼개미 Leafcutterants들은 잎을 잘라서 버섯을 키워 먹는 농업을 한다. 이파리를 잘게 잘라서 효소 성분이 있는 자신들의 배설물과 섞어 버섯균류를 재배하는것이다. 버섯균류는 잎꾼개미의 주 식량원이다. 국립생태원 초대 원장인 최재천 교수에 의하면 인간은 농사를 지은 지 1만 년밖에 안 됐지만, 잎꾼개미는 2500만 년 동안 농사를 지어 왔다고 한다. 인간과 개미의 특징은 둘 다 좁은 지역에 많은 개체 수가 사는, 단위 면적당 개체수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단위 면적당 개체 수가 많은 종이 모두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개미와 인간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농업 기술은 고밀도 군집 생활을 하지 않는 집단에서는 나오지 않는 기술인 것 같다. 농업을 통해서 개미처럼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하게 된 인간은 개미처럼 사회 내에 신분 계층을 가지게 되었다. 개미 사회에 여왕개미가 있듯이 인간 사회에 왕이 생겨났고, 두 사회모두 하층부에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계급이 있다.
벌도 개미처럼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하는 곤충이다. 하지만 벌은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 이유는 벌은 날개를 가지고 멀리까지 빨리 갈수 있기 때문이다. 느리게 걸어야 하는 개미는 갈 수 있는 영역이 좁다. 반면에 벌은 날개 덕분에 넓은 면적에서 빠르게 꽃의 꿀을 수집할 수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를 직접 짓지 않고도 고밀도 군집 생활이 가능했다. 그래서 별 중에는 농사짓는 종이 발견되지 않는다.  - P42

언어를 통한 뇌의 병렬연결은 단위 면적당인구수가 늘어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수렵 채집 시기에 10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수십 명이 살았다면, 건조해진 기후 때문에 강가로 모인 사람들은 10제곱킬로미터에 수만 명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수십 개의 PC를 병렬로 연결하는 것보다 수만 개의 PC를 병렬로 연결한 컴퓨터가 훨씬 더 강력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수만 명이모여 살게 되면서 집단 지능이 커졌고 자연스럽게 문명이 발생했다. 문명 발생의 필수 조건은 ‘도시‘ 형성이다. 인류 최초의 도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만들어진 ‘우루크Uruk‘라는 도시다. 기원전 3500년경에 만들어진 우루크는 성벽 안쪽 면적이 6제곱킬로미터였는데 그 안에 5만명이 살았다. 이 정도의 인구 밀도는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공간적 상황이다. 5만 명의 뇌가 언어를 통해 병렬로 연결되면서 상업 활동이 늘어났고 새로운 종교들도 발생했다.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하게 분업됐고, 사회 계층도 왕족, 귀족, 종교인, 군인, 상인, 농부, 노예 등으로 점점 더 세분화되었다. 지구 온난화는 인류가 농사를 짓게 했고, 강가에 고밀화된 도시를 만들게 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은 문명을 만들었다. - P44

그런데 문제가 있다. 건조 기후대는 전염병에는 강하지만 물이 부족하다. 물이 없으면 인간이 모여 살 수가 없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은 특이하게도 강이 남북으로 흐르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두 문명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의 하구이면서 건조 기후대에 위치한 문명이다.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같은 거대하고 긴 강은 상류와 하류의 기후대가 다르다. 강의 상류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빗물이 강을 따라서 하구의 건조한 지역에 다다르게 되면 사람들은 전염병 없이 그 물로 농사를 짓고 마시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자연이 만들어 준 천연의 상수도 시스템이 되었다. 덕분에 최초의 문명 도시 우루크는 남북으로 흐르는 강 하구의 건조 기후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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