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가장 위대한 직선은 곡선처럼 보일 것이며, 가장 위대한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다. 가장 위대한 이미지는 형태가 없다"고 말했다. 동양 철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善 중 하나는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인데, 동양인들은 노자 사상과 같은 생각에 근거해서 정원을 디자인할 때 곡선을 사용했다. 그러한 동양적인 개념의 영향을 받아, 픽처레스크 정원 디자이너들은 정원 내에 동양식 정자를 짓고, 기하학적인 직선을 깨고 자연스러운 곡선을 도입했으며, 정원 내에 더 많은 빈 공간을 만들었다.  - P188

미스는 서양 건축에 철골이라는 새로운 재료로 만든 기둥식 구조를 적극 도입함으로써 기존에는 찾아보기 힘든 성격의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의 건축은 기둥과 지붕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며, 벽을 구조로부터 해방시킨 건물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동양의 나무 기둥을 철골 기둥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건축이 동양의 전통 건축과확실하게 다른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창문에 유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동양 건축에는 창호지로 만든 창문이 달려 있었다면, 미스는 철골 기둥 구조로 벽이 필요 없어지자 벽이 있던 자리에 유리를 사용하여 내부와 외부를 극적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그의 건축은 한마디로 ‘나무 기둥을 철골 기둥으로, 창호지를 유리창으로 바꾼 건축 공간이었다. 기본 구성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동양의 구법을 따르면서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철과 유리라는 재료를 적극 도입하여 새로운 문화적 변종을 만든 사람이 미스 반 데어 로에다.  - P239

르 코르뷔지에 근대 건축인터넷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근대 건축의 5원칙‘이 나온다. 근대 건축의 5원칙은 근대 건축이라면 가질 법한 다섯가지 특징을 코르뷔지에가 정리해 놓은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소개한다면, 1. 필로티, 2. 옥상 정원, 3. 자유로운 평면, 4. 자유로운 입면, 5. 리본 수평창이다. 하나씩 설명해 보자. 우리나라의 요즘 빌라 건물을보면 기둥에 의해서 건물이 위로 들려 있고, 그 아랫부분을 주차장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공간이 필로티다. 근대 건축에는 그러한필로티 공간이 있다는 게 첫 번째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인 옥상 정원은, 기존의 전통 건축에는 방수를 위해서 경사진 지붕을 만들어야 했는데 근대 건축에서는 철근콘크리트라는 재료를 사용하면 튼튼한 구조체이면서 동시에 방수가 되어서 경사 지붕 대신 평평한 지붕을 만들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평평한 옥상을 정원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원리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과 같은 방수 재료가 제대로 개발되지못해서 처음으로 옥상 정원을 적용한 ‘빌라 사보아‘의 경우 비가 새는바람에 건축주에게 소송 걸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는 옥상 정원을 가능하게 해 준다. 세 번째 원칙인 자유로운 평면은 철근콘크리트 기둥으로 건물을 만들었기때문에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서 벽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다보니 평면도의 벽들은 자유롭게 각층마다 다른 곡선으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났다는 얘기다. 네 번째 원칙인 자유로운 입면이란, 마찬가지로 철근콘크리트 기둥 구조로 만들어지면서 벽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보니 건물의 입면 벽체를 마음대로 뚫거나 휘게 디자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섯 번째 원칙인 리본 수평창은 창문을 가로로 길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을거다. 서양 건축에서는 수천 년간 벽식 구조로 건물을 지어 오면서 창문은 항상 세로로 길게 만들었다. 벽이 지붕을 받치는 구조체이기 때문에 벽에 창문을 가로로 길게 뚫으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근콘크리트 기둥으로 건물을 받치게 되면서 벽체가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창문을 가로로 길게 뚫을 수 있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5번
‘리본 수평창‘은 4번 ‘자유로운 입면‘의 하위개념이어서 ‘근대 건축의 4원칙‘이면 충분했으나, 코르뷔지에는 고전 건축 원리들이 주로 ‘5원칙‘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억지로 하나를 더해서 5원칙으로 만든 것이다. - P240

 이처럼 역사상 뛰어난 생각은 모순되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화합시키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미스와 코르뷔지에가 한 일도 이와 같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산업혁명의 시대로, 새로운 재료와 기술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다.
동시에 이들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공간 압축이 이루어지고 다른 지역의문화를 일상에서 접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세대이기도 했다. 과거에도 장거리 여행을 통해서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마르코 폴로 같은 상인들이 「동방견문록」을 쓰던 시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이들은 상업을 주업으로 하던 사람들이었고, 직접 그 지역에 가야지만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국제 무역을 하는 상인들만 그런 문화적 체힘이 가능했다. 하지만 식민지와 산업화의 시대를 살았던 미스와 코르뷔지에는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고도 쉽게 다른 지역의 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대에 살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산업화가 만든 새로운기술도 접했다. 두 거장이 이룬 업적은 ‘새로운 기술‘과 ‘다른 지역의 문화유전자‘를 섞은 것이다. 그들은 공간의 구축 방식으로 기둥 구조라는 동양의 수천 년 된 아이디어를 사용하고 거기에 최신 철골이나 철근콘크리트 기술을 합쳐서 새로운 근대 건축의 장을 열었다.
미스와 코르뷔지에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명의 건축가가 유럽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유럽은 무역을 통해서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유럽은 산업혁명의 발생지로 산업화기술이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 조건상에서 수입된 동양의 문화 유전자와 유럽의 기술 혁명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미스와 코르뷔지에의 공간이다.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시작부터 19세기까지의 문화 교류가 있었기에 20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 P272

20세기 전반부가 동서양 공간의 이종 교배 1세대라고 한다면 20세기후반부는 이종 교배 2세대가 나온 시대다. 요즘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빌딩들이 다 비슷하게 지어져 있다. 뉴욕, 두바이, 서울, 방콕, 상하이, 도쿄의 현대식 건물은 모두 네모난 상자 모양에, 유리창이 많고 고층으로 지어진다. 이렇게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양식으로 지어지는것을 ‘국제주의 양식‘이라고 한다.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축물의 대부분은 국제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미스 반 데어 로에와 르 코르뷔지에가 동서양의 건축 공간을 융합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공간을 선보였지만 그 이후의 건축은 국제주의 양식이라는 획일화된 공간으로 귀결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역 문화를 배재한 상태에서 철근콘크리트, 엘리베이터, 유리 같은 기술만 적용했기 때문이다. 앞서서 설명한 미스와 코르뷔지에 역시 철골 구조, 철근콘크리트, 유리 같은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그들의 건축에 도입했다. 하지만 그 둘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적 요소까지 융합했기에 새로운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창조는 문화와 기술 두 마리 토끼를 잡았을 때 만들어진다. 문화적 요소의 융합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술적인 부분만 적용하면 다양성이 소멸된다. 21세기 문화 다양성의 멸종 문제는 기술적 요소만 도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 P277

루이스 칸은 1965년 12월 멕시코시티를 여행하면서 멕시코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an이 디자인한 별다른 식재를 사용하지 않은 소박한 정원을 방문했다. 이 정원에 깊은 인상을 받은 루이스 칸은 자신이 진행중이던 ‘소크 연구소‘ 건설 현장에 바라간을 초대해 중정에 대해 비평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라간은 캘리포니아 라호이아에 있는 ‘소크 연구소 현장에서 "이 공간에 나무나 잔디 대신에 돌로 포장된 중정을 만드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소크 연구소‘의 입면으로 하늘을 갖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바라간은 칸에게 비움을 통해서 진정한 자연을얻으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칸이 만들려고 했던 나무가 심긴 정원은 인공의 자연인 반면, 바라간이 이야기한 비워진 중정을 통해 얻는하늘은 진정한 자연이다. 칸은 바라간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유명한나무 한 그루 없이 비워진 ‘소크 연구소‘ 중정을 만들었다. 마치 료안지의 ‘선의 정원‘에서 나무를 없애고 모래와 돌로만 구성된 명상의공간을 만들 수 있었듯이, 칸 역시 ‘소크 연구소‘에 빈 공간을 만듦으로써 도가식 정원이 주는 침묵을 얻을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불변永遠不變의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는 것은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노자 도덕경」 1장, 남만성 역) - P290

이런 복잡한 진입로는 일본 전통 건축의 공간 구조적 특징이다. 일본 전통 건축은 그 안에서 경험하는 사람에게 기대감을 극대화하고 긴장감을 주기 위해 진입로를 특별하게 디자인해 왔다. 예를 들어서, 다도를 하는 방은 집에서 가장 구석에 위치하며, 그곳에 가기 위해서 보통은 ‘로지 Roll‘라고 불리는 정원을 통해서 가게 되어 있다. 이 정원을통과하면서 방문객은 몇 개의 문을 거쳐야만 했다. 일본이 이런 디자일을 하는 이유는 귄터 니츠케 Gunter Nitschke의 ‘시간이 돈이고, 공간이 돈Tinc is Money - Space is Money‘이라는 글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이미 전작에서 자주 설명했지만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이처럼 단순하고 명료하게 설명한 것은 없기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같이 공간이 넘쳐 나는 지역에서는 시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시간 거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건축이 발전해 왔다고 한다. 고속도로가 대표적인 예다.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동하는 시간을줄이기 위해서 발전한 건축 시스템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 같은 섬나라에서는 공간이 부족하고 시간은 오히려 남는다. 이런 경우에는공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쪽으로 건축이 발전해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같은 면적의 공간이라도 이동 시간을 늘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면 많은 기억이 남게 되고, 따라서 공간이더 넓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일본 전통 정원의 경우, 좁은 공간을 넓게 인식되게 하려고 분절되고, 회전하고, 돌아가는 식의 장치를 만들어서 시간을 지연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같은 공간이라도 실제보다 더 넓게 인식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 P3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김근태는 국회의원 시절 세비와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는성금으로 지구당을 관리하고 의정활동을 했다.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는 ‘GT클럽‘이라는 자발적인 팬클럽이 조직되어 어느 정도 지원을 받게 되었다. 미약하지만 나름대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분들이 돼지저금통을 모아서 전달해주신 취지는 "김근태 너무 상처받지 마라, 우리가 있다. 함께 가자." 이런 뜻이라고 본다.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꼭 옛날 군사독재 시절 데모하고 피신할 때 "우리 집에 와서 숨어라"고 성원해주던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가슴에서 눈물이 난다. 물론 그것이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을 대신할 만한 액수는 못 된다.
나는 정치자금을 정말 투명하게 해야 하고 투명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선 보상이 따르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재정 보조를 중앙당으로 하지 말고 국회의원들한테 해줘서 투명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국고보조를 그만큼늘리는 매칭펀드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P308

김근태가 재야에서 반유신. 반공 투쟁을 통해 재야의 대표 주자로성장하고 있었다면, 노무현은 법조활동과 야당의 정치활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고난의 젊은 날을 보냈으면서도순수한 품성을 지닌 ‘비정치적인 정치인‘이었다.
이들은 잠재적인 라이벌이면서도 서로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걸어온길이 다르고 정치적 환경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질곡의 삶을 헤쳐오면서도 따뜻하고 진솔한 품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 등 닮은 데가 많았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노무현은 김근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근태 의원 때문에 나는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감격한 적이 있다. 1992년8월, 그날은 그의 석방 환영회였다. 당시까지 나는 김 의원과 각별한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민주화운동을 함께해온 동지의 심정으로 그자리에 참석했던 터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김 의원은 나를 가리켜 "이시대의 의인이요, 정치적 희망"이라며 당시 모였던 재야의 쟁쟁한 인사들앞에서 소개를 했다. 

김근태는 평소 치밀하고 신중한 태도와 함께 아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런 그가 노무현에게 "이 시대의 의인이요, 정치적 희망"이라 표현한 것이다. 의례적인 답례이긴 하지만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느낀 ‘정제된‘ 언사였다.  - P312

노무현은 이어서 "가장 원칙적이면서도 조직을 위해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분, 음모적이지 않고 책략에만 매달리지 않는 재야의 지도자"라고 김근태를 평했다. 이 말은 주객을 바꾸어 노무현에게도 들어맞는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심정적‘으로 통했다. 다시 노무현의 말이다.

살다 보면 괜히 좋은 사람이 있다.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인데, 내게 특별히 잘해주거나 각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신뢰감이 가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김근태 의원이 바로 그런 분이다. 정치인은 욕심이 많다.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턱없는 욕심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만약 내가 김근태처럼 신중하고, 치밀하고, 의젓한 이미지를 갖고 싶어 한다면 너무 큰 욕심을 낸다고 사람들이비난할까 무섭다. 
만약 우리나라의 미래를 앞두고 그와 내가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일대일카운터파트가 되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될까.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한번해봄 직한 욕심이고 상상이지만 무척 행복할 것 같다. 서로 주어진 결과에 기꺼이 승복하고 나아가서는 적극 지지할 수 있는 그런 신뢰가 분명한관계라고 단언한다. 혹은 다자간의 경쟁이 되면 제일 먼저 찾아가 "우리같이 합시다"라는 이야기를 마음 터놓고 할 것 같다.

노무현의 이 같은 바람은 실제로 3년 뒤에 이루어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제16대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선의의 라이벌로 그리고 노무현정부의 수장과 각료 관계로 이어졌다. - P3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패널 - 당내 개혁 세력이 지난 1년 동안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 김 부총재는 김 대통령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김근태 -민주화운동 세력이 국민 대중으로부터 평가받으면서도 전폭적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군사독재의 폭압이 심했을 때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계승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는 꿈이 필요했다. 꿈은 관념적이다. 관념성을 동반한 꿈은 실제적인 그림을 그리지못하는 측면이 있다.
두 번째는 탄압이 심할 때는 인격의 연속성이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모든 힘을 발휘해 저항해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방을철저히 부정할 수밖에 없다. 파괴적인 권위주의 세력 아래서 고통 받은사람들 가슴 속에는 상처가 남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자기정화 노력이 필요하다. 억울하지만 그렇다.
DJ와 내가 차별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더 외곽에서 돌게 될지도 모르겠다(웃음). 우리 정치의 다음 단계 모습은 정책노선에 따른 재결집이될 것이다. 이것이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누가 또는 어떤 집단이 해낼 것인가가 문제다. 현재 우리 정치는 최고의 리더십을 빼놓고는각종 정보가 집중되지 않기 때문에 판단과 모색의 범위가 상대적으로협소하다. 이를 제도화하는 것은 다음 단계 리더십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 P295

패널 김 부총재는 자신에게 반인권적 고문을 자행했던 이근안 전 경감을 이제는 용서하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용서하고싶더라도 고문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김근태 날씨가 안 좋으면 감기몸살이 쉽게 찾아온다. 그때 고문의 후유증이다. 우선은 원한이 나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자신 네 번에 걸쳐 도합 7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해봤다. 그 피신 생활자체가 굉장히 고통스럽다. 사실상 처벌이다. 이근안 씨가 만 10년을 피신하면서 겪은 고초는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세 번째는 이근안 씨도 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서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였다. 이 세가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남아공의 만델라처럼 진실로 화해했으면 한다. 그리고 국민의 대표를 자임하는 정치인으로서 과거에 대한 복수로 한계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서였다. - P298

다시 강준만의 지적이다.

나는 김 부총재의 경우 친화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건 그의 겸손과 성실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보진 않는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용되는 ‘친화력‘의 정체에 대해선 깊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기자들에게 술은커녕 밥 한 끼 사지 않아 욕을 먹는정치인들이 적잖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정치인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해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기자들로부터 욕먹게 마련이고 또 그런 부정적인 평가는 언론에 그대로 반영돼 대중의 인식에도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모든 걸 원칙대로 하려는 정치인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반면능력과 윤리에 상당한 문제가 있어도 술 잘 마시고 마당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건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는 문화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런 문화를 거스르면서 리더가 될 수는 없으니 이게 바로 딜레마라는 것이다. - P3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동양 건축의 주요 기본 요소들은 기둥, 지붕, 낮은 담장이라는 세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동양의 건축 공간은 이 세 가지가 구획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요소들의 가치는 바둑판 위의 돌처럼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마치 중국 한자에서 기본 글자들의 상호 위치에 의해서 그 의미가 새롭게 창조되듯이 위의 세 가지 건축 요소는 주어진 자연 조건 안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동양 건축에서는 건축물들이 대지 위에 구축되어 가면서 다양한 형태의 정원들이 만들어지는데, 빈 공간을 많이 만들어 내는 편이 이기는 바둑의 규칙과 노자의 ‘비움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건축물을 바라본다면 동양 건축에서의 정원과 마당이 어떻게, 왜 만들어지는지 이해될 것이다. - P141

동양의 산수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원경遠景과 근경近景 사이에 중경中景을 그려 넣는 대신 여백으로 처리한다. 그림에 따라서 안개가 낀 모습으로 중경을 지우기도 한다. 이 같은 방식은 건축에서도 나타나는데, 동양 건축에서 자주 사용되는 낮은 높이의 담장이 그 역할을 한다. 낮은 담장은 내 대지 바로 앞에 있는 중간의 경치를 지워 버리고 가까이에 있는 정원과 멀리 있는 풍경인 산만 보이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건물 내부에 위치한 관찰자의 투시도상에서 시각적인 여백을 가져오게하는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도가 사상을 반영한 ‘선의 정원‘에서는 나무를 심은 정원 대신 땅을 비우고 모래만 깐 정원을 도입해서 더 많은 빈 공간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양의 이러한 디자인은 수학적 황금 분할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된다. 서양 건축과 미술에서는 황금 분할의 역할이 큰 반면, 동양 건축과 미술에서는 만들어진 구조물보다 빈공간 혹은 여백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 P147

극동아시아 문화는 유교가 지배적이었다. 사후 세계보다는 현생을 더중요하게 생각하고 땅 위에서의 현실 삶에서 충忠이나 효孝 같은 관계를 중요시했다. 기둥 구조를 써서 기둥과 기둥 사이로 주변 환경이 잘보이는 동양의 건축은 땅과 연결되어서 집을 짓는 개미처럼 주변 환경과의 관계성이 중요시되는 건축의 성격을 띤다. 반면에 유럽은 이집트, 그리스, 기독교에서 공통적으로 사후 세계, 이데아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위로부터 오는 형이상학적 원칙을 중요시했다. 이들은 땅과는 관련 없이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관념적으로 무에서 새로운 법칙을 만든다. 이러한 문화적인 특징은 주변의 아무런 영향 없이내재된 법칙에 의해서 허공에 집을 짓는 벌과 비슷하다. 서양의 공간은 주변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 자족적이고 자기 완결적이기 때문에 벌집처럼 기하학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피라미드‘나 ‘판테온‘도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자족적인 법칙에 의해서 디자인되었다. 그리고 그 법칙은 수학적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렇게 서양의 종교적공간은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P153

‘판테온‘과 ‘석굴암‘은 유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첫째 ‘판테온‘은 비워진 공간에 위로부터 빛이 떨어지는 공간이다. ‘판테온‘은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인 ‘만신전‘이어야 했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신의 조각상을 둘 수 없었다. 그래서 공간을 비우고 빛으로 채웠다. 반면에 불교사찰인 ‘석굴암‘은 불상을 가운데에 두었다. 이보다 더 큰 차이점은 ‘판테온‘은 밖에서 보면 건축물로 보이지만, ‘석굴암‘은 건축을 마친 다음에 흙을 쌓아 덮어서 건물을 지워 버렸다는 점이다. 이것이 석굴암‘
이 특별한 가장 큰 이유다. 건축에서 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벽이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서 공간을 구획하는구축을 통해서 만드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땅이나 바위 같은 덩어리를 파내어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 세트로되어 있는데, 건축 설계를 한 김대성은 ‘불국사‘를 만들 때는 첫 번째 방식인 구축의 방식으로 만든 반면, ‘석굴암‘은 굴을 파내는 방식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석굴암‘도 석재로 구축하면서 만들었지만,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건축물을 흙으로 다시 덮어서 굴처럼 만들었다. 김대성은 ‘석굴암‘이 땅을 파내어 만든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것 같다. 이 같은 디자인은 ‘석굴암‘을 ‘음‘의 공간인 빈 공간으로만 만들려 한 김대성의 의도가 보인다. 건물의 외양이 보이게 되면 ‘양‘의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양의 공간은 이미 서측에 있는 ‘불국사‘에 완성되어 있다. - P160

그렇게 유럽인들은 동양을 동경하게 되었고, 중국과 일본은 그 대표적인 대상 국가가 되었다. 지금도 해외에서 바라보는 두 나라에 대한 시각은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수준이다. 그 이유는 중국과 일본은 도자기를 수출한 나라였고, 우리나라는 높은 수준의 도자기를 만들었지만 수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출은 그렇게 중요하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1970년대 이후 수출 주도형 산업을 육성했기에 지금의 한류가 가능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류가 성공적인 것은 삼성 핸드폰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1999년 미국NBC 방송의 인기 아침 프로그램에서 삼성 핸드폰은 물에 넣었다가 꺼내도 작동한다는 시연을 하고 나서부터 한국은 첨단 기술의 이미지를갖게 되었다. 문화를 팔기 위해서는 첨단 제품이 필요하다. 1970년대 우리가 <6백만 달러의 사나이> 같은 미국 드라마에 심취했던 것은 제2차세계 대전의 원자폭탄과 1969년의 아폴로 우주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1세기의 첨단 제품이 스마트폰이라면 수백 년 전에는 도자기가 그 역할을 했다. - P173

도자기를 통해서 중국식 문화가 서양에 전파되었다. 유럽은 계속해서 중국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당시 중국 왕조는 이를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척했고 도자기 대금으로 받은 멕시코산 은으로 현재의 우리가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을 복원했다. 당시 도자기 생산은 황실에서 독점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청와대가 삼성 반도체 공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징더전景德鎭이라는 중국의 도자기 생산 주요 기지가 있었는데 가마가 1천 개 있었고, 연간 400만 개의 도자기를 생산할 정도였다. 하지만 1601년 징더전 도기공들의 노사 분규를 시작으로 1675년 만주 반란군에 의한 파괴 등 17세기 들어서 여러 차례의 민란으로 징더전의 도자기 공장은 점차 파괴되었다. 서양의 도자기 수입 회사는 중국을 대체할 도자기 공급선이 필요했고, 그 기회를 틈타서일본이 도자기 수출의 교두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이 이렇게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보다 상업이발달한 데는 건축적인 이유가 있다. 전작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설명했듯이 일본은 지진 때문에 온돌이라는 난방 시스템을 쓰지 못했고, 덕분에 목조 건축이지만 2층 이상의 주거를 지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고밀화된 도시를 만들 수 있었고, 덕분에 주변에 물건을 사 줄 사람이 많아서 상인들이 돈을 벌수 있었으며 이들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한계층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온돌 때문에 단층짜리 집만 짓고 살았던 조선은 고밀화된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주변에 물건을 사줄 사람이적었기에 상업이 발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5일장을 통해서만 상업 행위가 이루어졌다. 매일 시장이 열리는 사회와 닷새에 한 번 시장이 열리는 사회는 화폐 통화량에서 5배의 차이가 난다. 화폐 통화량이 5분의 1이 되면 상업으로 새롭게 돈을 벌 기회도 5분의 1이 된다. 5일장의 사회에서는 상인이 성장할 수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회 계층의 순서는 ‘사농공상‘으로, 상인이 가장 대우를 못 받았다. 조선은 국운을 바꿀 만한 엄청난 도자기 수출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높은 인구밀도의 도시가 없었고 그에 따라서 제대로 된 상인이없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일본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다. - P1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비키니 옷장에서 티셔츠 한 장을 꺼냈다. 티셔츠로 식칼을 둘둘 말아 가방에 넣었다. 무릎은 꿇지 말았어야 했다. 무릎을 꿇으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 태도, 희망을 향해 다가가려는 태도가 나를 희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 같았다. 병신이 되지않으려다 상병신이 되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을 상상했다.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였다. 무차별하게 흙을 긁어쥐던 순간처럼, 아무 곳에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순간에야만 그러잡을 것이 생기리라는 희망이었다. 교문을 지나올 때 교문을 통과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저들 중누군가는 분명 창문에 매달려 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비웃어주길 기대했다. 아이들이 내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밥 위에 가래를 뱉고, 화장실에 가둬버리길 기대했다. 아이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샤프심이 아니었다. 사뿐하고 안전하게 추락할 수 없었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떨어져 깨져버리는 묵직한 수박처럼 완전히 깨어질 때에만 시원함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야 찾아올 강렬한 수치심을 떠올리면 짜릿했다. 수치심의 끝에서만 나는 식칼을 꺼낼 것이다. 식칼을 꺼내기 위해 더 큰 수치심이 필요했다. 회복이 불가능한 병신이 되어야 했다. - P124

아람은 가끔씩 식판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가끔씩 아람은 소영의 반에 가서 소영과도 급식을 먹었다. 책가방에는 식칼 한자루가 늘 있었지만,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식칼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나 혼자였고, 그 식칼을 무서워하는 것도 나 혼자였다.
화장실에 가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면 예전처럼 졸음이 오기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선생이 던지는 농담에 아이들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최악의 병신이 될 희망은 점점 사라져갔다. 가짜 희망들이 몸을 간질였다. 웃지 않은 것 같았는데 입이 먼저 웃었다.
병신이 된 후에도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이 진짜 병신이었다. 급식으로 특식이 나오는 날에는 기분이 나아졌고, 엎드려 잠이 들었을 때 등에 떨어지는 햇살은 포근했고, 아람이 가끔은 괜찮은 아이로 느껴졌고, 하루하루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이 되는 일에도 실패한 최악의 병신이 되어갔다.
칼을 꺼낼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다시 집을 나갈 용기도 사라졌다. 학교를 박차고 떠날 용기도 먼 밖까지 가보고 싶다는 꿈도 사라졌다. 나에게조차 나는 투명해져갔다. 그런 나를 편안해하기 시작했다. - P130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나는 이제 읍내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읍내동을 벗어나고싶었던 나의 소원도 이상한 방식으로 도래해 있었다. 언제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쉽게 녹아 사라지진 않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은, 함박눈이었다. ■ - P1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