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은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그것은무슨 뜻일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생리적 욕구이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항상 무엇인가를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욕망이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라고 자크 라캉은 말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욕망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바라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을타자가 욕망하는 미끼로서 제공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타자의 성적 욕망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 P56

사실 부모와 자녀로만 이루어지는 작은 규모의 가족 형태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가족 형태다. 핵가족이 근대 이후 생긴 가족의 형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과거 농경 생활에서도 가족 단위는 핵가족을 이루면서 주변에 친척들이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에 재산이많거나 권위가 높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러 식솔들을 거느리고 확대가족을 꾸릴 수 있었던 반면 가난한 농민의 경우 대부분 핵가족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형태상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핵가족의 성격은근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부부의 성격이 낭만적 사랑을 중심으로 바뀌면서 가족 안에서 남녀의 역할이 다르게 규정되었다. 이전에는 부부 모두 생산적 활동에 종사했다면, 이제 남편은 가족을 위해 바깥에서 돈을버는 역할을 책임지고, 아내는 생산적 활동에서 분리되어가정을 돌보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역할분리가 모든 계층의 여성에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근대이후에도 노동자와 빈민 계급의 여성은 여전히 생산 활동에종사해야 했다. 그러나 그 여성들도 이상적 여성상에 따라서 남편과 자녀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역할이 요구되었다. - P84

이러한 변화는 주거공간의 구조 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는 한 방에 여러 사람이 함께 자는 것이 흔한일이었고,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묵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 부부만의 침실 공간이 중요하게 인지되고,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따로 지내는 것이 훈육을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이처럼 부부간의 관계를중시하는 방식의 가족 구성은 일터나 작업 공간의 공적 세계와 부부와 가족의 사적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을 출현시켰다. 이 변화 속에서 가족은 주변 세계, 즉 친족이나 공동체와는 점차 분리되게 되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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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 권력 체계는 근대 사회 권력의 특징으로, 현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미세한 몸짓, 특정한 말투, 신체 등 우리의 모습은 결국 스스로 규율하고 감시하는체제 속에 놓인다. 이것은 외부의 강제나 억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각 제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내면화하게 된다. 학교나 가정에서의 교육, 종교나 주변 환경에서의 교류 등을 비롯해 사람들 간의 크고 작은 만남을 통해 사회 구성원은 알게 모르게 사회화 과정을 거치고 그 속에서 규율을 학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사람들은 감시자의 시선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감시한다.
감시의 주체가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강제나 억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사회제도 속에 자연스럽게 스스로가 감시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가령 뚱뚱한 몸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사회가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시선을 느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스스로 몸이 이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위축되며 자신의 몸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떠한 비판이나지적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혐오의 태도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눈을 갖게 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미시적으로 일어나는 규율 권력이다. - P54

규율 권력 개념은 권력에 대한 통상적 관점을 무너뜨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권력을 공적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곧 청와대나 의회, 행정부, 대법원 같은 곳이야말로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고, 권력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반면 푸코는 근대 이후 권력이 작동하는 실제 영역은 감옥과 병원, 학교, 가정, 군대, 공장과 같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이 영역에서야말로 개인들이 특정한 신체로서 훈련되고 제조되기 때문이다. 규율 권력은 궁극적으로 체제에 복종하고 훈련된 신체, 즉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체는 한편으로 경제적으로 효용을 높일 수 있는 몸이 되며, 정치적으로는 체제에 반항하지 않는 순응하는 몸이 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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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촛불을 들고 다가서면

그냥, 사는 이야기를 적었어요.

이 책을 소개해달라는 청이 오면 어떻게 운을 떼야 하나 오래 고민했어요. 대단한 문학적 발견 같은건 없고요, 제가 올 일 년 동안 보고 겪고 느낀 것들에 관한 기록이에요. 너무 사사로워서 실망하실지도모르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저는 숨을 고르는 척 당신의 눈빛을 살필 거예요.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어깨는 한껏 움츠러들고 공연히 손톱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겠죠. 그런데도 당신이 아직 기대의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면 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이어갈 것입니다. - P5

자연스레 생각은 평소 내가 품어온 ‘작은‘ 소망들로 이어졌다. 2021년 1월 기준, 나의 작은 소망들은 이러하다. 산미가 강하고 꽃향기가 나는 진한 라테한 잔. 겨울에 접어들며 잎 끝이 누렇게 말라버린 반려식물의 안위. 가격 대비 품질이 좋고 포근한 겨울외투 한 벌.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지만 쉽지 않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생각해보니 나의 작은 소망들은 정말로 까다로웠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기는 소망의 크고 작음을 분별하는 것 자체가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크든 작든 하나의 소망에는 그 소망을 가로막는 심리적 물리적 장애물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길항‘은 바로 그러한 싸움을 뜻하는 단어다. 이쪽의 우리가 간절해질때 저쪽에서도 충돌할 채비를 한다. 쉽게 가질 수는없을 거야. 시간의 횡포도 견뎌야 하고 인간이라는 한계에도 맞서야 할걸. 그렇게 애석해할 거 없어. 그건 세상의 구성 원리거든. 밀물과 썰물, N극과 S극,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을 봐. 버티어 대항하는 힘은어디에나 반드시 있어.
정말 그렇다. 지금이 있기에 그때는 더욱 환하거나 어두워지고, 저곳이 있기에 이곳은 특별하거나 사소해진다. 한 방향으로만 뻗어가는 힘이나 목소리는 금세 상하거나 차게 식기 마련이다. 싸움도 둘이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혼자 하는 싸움이더라도 사실은 혼자 안의 둘이 싸우는 것처럼. - P16

 그중 봄에 꽃이 피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식물마다 꽃이 피기까지 필요한 온도가있는데 봄이 되면 식물들이 몸 안에 온도를 ‘저금‘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저금한 온도가 가득 차면 비로소 꽃이 피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그 즉시 노트를 열어 메모했다. 언젠가 내 안에서 이야기로 풀려나올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열량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생육 일수의 일평균기온을 적산한 것? 사전이 설명하는 적산온도는 실용적인 의미가 강하다. 반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적산온도는 경직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온도를 저금한다는 말. 모든 존재가 꽃이라면, 나의피어남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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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의 영성이 꽃처럼 피어나면 그 꽃들이 모여서 문명을이루고 하느님의 나라가 그 위에 세워지는 평화의 구도를 뮈텔은 아직도 이 황잡한 세상에 펼 수가 없었다. 적개심에 가득찬 자에게 평화를 말할 수는 없었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한 천주교인의 죄악에 뮈텔은 상심했다. 백 년이 넘는 박해의 세월을 견디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순교의 피 위에 세속의 거점을 겨우 확보한 조선 교회가 또다시 세속 권력과 충돌한다면 교회의 틀이 위태로워질 것을 뮈텔은 걱정했다. 뮈텔은 자신의 걱정을 신부와 신도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 해도 더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 P185

정대호는 김아려와 두 아이를 어디에 얹혀주어야 할 것인지를생각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하얼빈에 아이가 둘 딸린 젊은 여자를 의탁시킬 연고처는 없었다. 조선에 있는 안중근의 두 동생들과 편지로 의논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이 무슨 생각으로 처자식들을 하얼빈으로 불렀는지 정대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대호는 안중근의 처자식을 데리러 평양에 갔다가 며칠을 주색잡기로 소일하고 10월 23일에야 평양을 떠났는데, 안중근이 총을 쏘기 전에 처자식들을 데려와서 만나게 해주었다면 안중근이 총을 쏠 수 있었을까를 정대호는 생각했다. 안중근을 위해서나 그의 처자식을 위해서나, 총을쏜 후에 그의 처자식들이 하얼빈에 도착해서 안중근이 총을 쏘기 전에 처자식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잘된 일이지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대호는 마음이 편해졌다. - P199

김아려는 이토가 이미 죽었으므로 남편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던 이 년 전에, 남편은 돌아올수 없을 것으로 김아려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하자 결정은 사실처럼 굳어졌다. 미조부치는 첫번째 신문을 간단히 끝냈다. 미조부치는 이틀 후에 안중근의 다섯 살 난 장남 분도를총영사관으로 데려와서 진술을 청취하고 기록했다. 총영사관의여직원이 김성백의 집으로 가서 분도를 데려왔다. 김아려는 따라오지 않았다. 미조부치는 청취서에 진술인을 ‘장남 모某,  다섯살‘이라고 썼다.
미조부치는 분도에게 안중근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분도가 안중근의 사진을 보면서
-이것은 나의 아버지다.
라고 말했다고 미조부치는 청취서에 기록했다. 분도가
-어머니가 나를 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다.
라고 말했다고 미조부치는 기록했다. - P201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사전에 공판 방청권을 발행하고 방청권이 없는 자는 입장을 허가하지 않았다. 방청권을 얻으려면 인적사항을 모두 등록해야 했다. 입장자들은 주소, 성명을 기입한이름표를 달도록 했다. 방청인들은 품위 있는 옷을 입어야 하고, 신발은 구두와 조리草履만을 허용하고, 모자, 외투, 장갑을 착용할 수 없으며 어린이를 데리고 들어올 수 없도록 했다. 복장 불량자는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법원은 거듭 강조했다. 이번사건의 공판에서 문명한 국가의 법정 모습을 세계에 과시하라고 고등법원은 지시했다. 구내식당이 있으나 자리가 모자랄 것이므로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라고 법원은 고지했다.
방청객이 몰려서 법원은 1호 법정의 내부를 정리해서 좌석을촘촘히 들여넣었다. 방청객은 법정 복도까지 가득찼고, 방청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건물 밖에서 피의자들을 실은 마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러시아, 일본, 청, 영국의 외교관들과 정부 관리, 법률가들이법정 앞자리에 앉고, 그 뒤로 가슴에 훈장을 단 육군 해군 장교들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부인들이 앉았다. 요정 마쓰노야의여주인이 연극 구경을 취소하고 하녀들을 데리고 왔다. 여순의이름난 게이샤들이 들어올 때 방청객들의 시선이 몰렸다. 신문기자들은 맨 앞자리 기자석에 모여 있었는데, 가십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은 일반 방청객 속에 섞여 앉았다. - P225

안중근과 우덕순은 법정 안 중앙 통로를 지나갔다. 203고지의 승전 이후에 머리채를 203 고지 모양으로 틀어올려서 뒷목을 드러내는 헤어스타일이 일본 상류 여성들 사이에 유행했다. 203고지 스타일로 머리를 꾸민 남작 부인과 어깨에 숄을 걸친 장군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어서 수군거렸다. - P226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하겠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정••••••  - P238

국선변호인 미즈노는 피고인의 범행은 세계의 대세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며, 피고인이 일본 같은 문명국에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이러한 오해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토 공의 진정이 피고인에게 스며들지 않았고, 의붓어머니가 아무리 자애를 베풀어도 자식이 그 생모를 그리워하는 심정은 인지상정이라고 미즈노는 안중근을 변호했다.
넓은 도량과 깊은 동정심을 가지신 이토 공은 자신을 해친 범인에 대해 극형을 가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피고인을 극형에처한다면 이토 공은 지하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이고, 이것은 돌아가신 이토 공을 경모하는 길이 아니라고 변호인 미즈노는 말했다. 이 같은 취지는 우덕순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미즈노는 변론을 마쳤다.
논고와 변론은 이틀에 걸쳐서 길게 이어졌다. 안중근은 피고인석에 앉아서 잠자코 들었다. 검찰관은 안중근의 범죄가 무지와 오해의 소치이며 이것이 살의의 바탕이라고 말했고, 변호인은 이 무지와 오해는 동정할 만한 것이고 감형의 사유가 된다는취지로 말했다.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인의 변론이 가지런하게 잇닿아서 서로를 꾸며주고 있었다. - P239

황해도 산골 마을에서, 겨울이 오는 소리는 가랑잎이 바람에몰려가는 소리와 밤중에 어둠 속을 울리는 다듬이 소리였다. 차가운 공기가 팽팽해서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가랑잎은 메마른 소리로 버스럭거렸고, 다듬이 소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어져나갔다. 마을 끝에서 잦아들던 다듬이 소리는 어느 집에서인지 다시 살아나서 이웃집의 소리를 끌어가며 마을 안으로 들어왔고, 흘러나갔다. 개들도 소리를 이어나갔다. 덩치 큰 개들의소리가 깊게 울렸고 작은 개들은 높고 가파른 소리로 짖었다. - P242

처자식을 하얼빈으로 불러들였다면, 안중근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끝내 제 갈 길을 가겠구나, 라고 그때 빌렘은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면서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무언가 속에 있는 말을 참고 있는 듯하던 안중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안중근의 젊음은 거칠어 보였다. 안중근은 신심이 깊었으나 그의 심성과 언동은 신앙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았고 교회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서 섭리하시고, 교회의 울타리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빌렘은 안중근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말을 한다 해도 심어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빌렘도 말을 머뭇거렸다. 안중근의 신심이 더욱 무르익어서 스스로 알게 될 날이 있기를 빌렘은 그날 기도했었다.
이토가 하얼빈역에서 총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빌렘은 그 범인이 안중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안중근은 돌아올수 없고, 불러들일 수 없는 자리까지 간 것이었다.
빌렘은 마을 사람들의 침묵의 밑바닥에 깔린 두려움과 설렘을감지하고 있었다. 초겨울의 빈 들을 산책하는 저녁에 논둑길에서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은 빌렘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으나 말을 섞지 않았다. 범인이 청계동의 안중근이고, 빌렘에게 세례 받은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에 마을의 침묵은 깊어졌다. 마을 사람들의 눈과 귀는 신부의 입으로 쏠려 있었다. - P244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전보를 받고, 뮈텔은 백 년 전에 처형당한 천주교인 황사영의 죽음을 생각했다.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달아나다가 캄캄한 산골의 옹기굴 속으로 숨어들어가서 북경 주교 구베아에게 보내는 문서를 썼다. 황사영은비단 보자기 한 장에 일만 삼천여 자를 썼다. 황사영은 순교와박해의 실상을 소상히 기록하고 서양 나라의 선박 수백 척과 군사와 대포로 조선 조정을 협박해서 천주교인을 죽인 죄를 물어야 한다고 구베아 주교에게 호소했다. 훗날 이 글은 백서 帛書라고 불렸다.
황사영은 토굴에서 체포되었다. 황사영은 몸이 여섯 토막으로잘려서 거리에 버려졌고, 일족은 멸문되었다. 황사영은 스물일곱 살에 죽었다.
뮈텔은 조선 조정의 문서 창고를 뒤져서 황사영의 보자기글원문을 찾아내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본국으로 보냈다. 황사영의글을 번역하면서 뮈텔은 이 천둥벌거숭이의 몽매함에 한숨 쉬었고 순수한 신앙의 열정에 목이 메었다.
안중근은 자신에게 영세를 베푼 사제를 향해서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는 황잡한 말을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서 이토를죽였는데, 황사영은 서양 군함을 몰고 와서 국가를 징벌해달라고 북경의 주교에게 빌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양극단에서 마주서서, 각자의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되었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 황사영에서 안중근에 이르는 백 년 동안 두 젊은이의 국가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갔다. 황사영은 서양의 군함을 부르다가 몸이 토막나서죽었는데, 황사영이 죽임을 당한 후에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이 또죽임을 당했고, 천주교인을 길라잡이로 세운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서강까지 올라와서 국가를 겁박하고 강화도를 약탈했으니,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 P250

-어려운 일이지만 그 길밖에 없다. 길이 빤히 보일 때는 이생각 저 생각 하지 말아라. - P258

안중근과 빌렘의 접견을 허락함으로써 일본은 얻을 것이 크지만 안중근이 명분을 철회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부를 보낸다면 교회의 입장이 거북해진다는 것을 뮈텔은 빌렘에게 설명해줄 수없었다. 고위직에게는 아랫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는 고민이 늘있었다. 뮈텔은 빌렘에게 보내는 답장을 속달우편으로 부쳤다.

‘출장 불가‘를 알리는 뮈텔의 답장을 받은 다음날 빌렘은 여순으로 떠났다. 여순으로 가는 기선은 닷새에 한 번씩 진남포에서출항했다. 운항 날짜가 맞았다. 진남포 부두에서 빌렘은 명동대성당의 뮈텔에게 전보를 쳤다.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저는 여순으로 갑니다. 빌렘 - P264

-도마야, 네가 나를 부른 마음과 내가 너에게 온 마음이다.
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선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것을 알고있었다. 너의 마음을 말해라. 옥리들이 있으니, 작은 소리로 말해라.
안중근은 입을 열지 않았다. 빌렘이 재촉했다.
-말해라, 도마야. 내가 먼저 말하는 것보다 네가 먼저 말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느냐.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재판에서 이토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 신부님.
빌렘이 말했다.
-너의 말은 다만 말일 뿐이다. 인간의 행위는 몸과 마음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너의 말은 뉘우치는 자의 마음이 아니다. 너는 너의 마음의 진실을 말하라. 뉘우침의 힘으로 새로워져라.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지 않고 말했다.
-제가 이토를 죽인 일을 뉘우친다면, 제가 이토를 죽이는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만일 이 사업에 실패해서이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저는 이토를 죽이려는 저의 마음을 뉘우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부님.
-그것은 세속의 마음이다. 뉘우침이 아니다.
-그것이 저의 진심입니다.
-너의 마음의 깊은 곳에 또다른 마음이 있을 것이다. 말하기힘들어도 그것을 말해라.
안중근은 눈을 감고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안중근이 말했다.
-이토를 쏠 때, 이토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준했습니다. 쓰러뜨리고 나서, 신부님께 세례 받던 날의 빛과 평화가 떠올랐습니다.
-그 평화가 너에게 다가오고 있다. 계속 말해라. 도마야. 너는 1907년에 조선을 떠나서 대륙으로 갔다. 그후에 네가 한 일을 다 말해라. 옥리들이 입회해 있으니 작은 소리로 말해라. 다말해라. 모두 다 말해라.
안중근이 몸을 앞으로 굽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빌렘이몸을 앞으로 굽히고 들었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사형수의 머리와 사제의 머리가 가까워졌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숨소리처럼 들렸다. 옥리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끊기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빌렘은 침묵 속에서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전옥이 면회 시간 종료를 알렸다. 옥리가 안중근을 다시 포승으로 묶어서 감방으로 데려갔다.
- P272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해주고 나서 빌렘은 황해도 신천으로돌아와 있었다. 3월 26일 저녁에 빌렘은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7일 아침에 빌렘이 신자들을 소집했다. 안중근의 문중 사람들과 마을의 신자들이 청계동성당에 모였다.
빌렘은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를 베푼 일을마을 신자들에게 말했다. 빌렘은 ‘나의 시체를 하얼빈에 묻으라‘는 안중근의 유언을 신자들에게 전했다. 안중근의 시체는 하얼빈으로 가지 못하고 여순감옥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빌렘은전했다.
빌렘은 신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 P280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그의 몸은 대의와 가난을 합쳐서 적의 정면으로 향했던 것인데, 그의 대의는 후세의 필생筆生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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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덕순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있다.
-말해라.
-자네 처자식이 하얼빈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 정말인가?
며칠 전에 평양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지금쯤 장춘을 지나고 있지 싶다.
-부인이 애들 셋을 데리고 오는가?
-둘이다. 큰애는 수녀원에 맡겼다고 한다. 내가 이토를 쏘고나면 처자식들이 조선 땅에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러들였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나?
-그것은 확실치 않다.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언제 자리잡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오래된 것 같기도 하다.
-자네가 이토를 쏘고 나면 처자식들이 하얼빈에서도 살기가어려울 것 아닌가.
-그렇다. 그렇지만 조선 땅에 둘 수는 없었다. 내 처자식들은 처한 형편 속에서 살게 된다. 어렵지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게 궁금했냐?
-처자식 얘기를 꺼내서 미안하다. 그만 자자. - P157

안중근은 총을 쥔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아직은 나타나지않은 표적을 향해서 안중근은 조준선을 정렬했다. 눈동자, 가늠자. 가늠쇠로 이어지는 일직선 위에서 시선이 떨렸다.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실탄이 총구를 떠나는 순간 조준선은지워졌고 총의 반동이 손바닥과 어깨에 걸렸다. 비틀린 조준을다시 회복하고 나면 표적은 다시 안개 속에 묻혔다.
방아쇠를 당길 때,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홀로 독립된 생명체였다. 둘째 마디는 언제 당겼는지도 알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스스로 직후방으로 작동해서 총알을내보냈다. 그러므로 이토를 조준해서 쏠 때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절망감과 복받침, 그리고 표적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전쟁과 침탈과 학살과 기만의 그림자까지도 끊어버리고 둘째 마디의 적막과 평온을 허용해야 할 것이었다. - P159

저것이 이토로구나•••••• 저 작고 괴죄죄한 늙은이가•••••• 저오종종한 것이••••••
안중근은 러시아 군인들 틈새로 조준선을 열었다. 이토의 주변에서 키 큰 러시아인들이 서성거려서 표적은 가려졌다. 러시아인과 일본인들 틈에 섞여서 이토는 이동하고 있었다. 이토는 가물거렸다.
안중근의 귀에는 더이상 주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러시아인들 틈새로 이토가 보였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탄창에 네 발이 남았을 때, 안중근은 적막에서 깨어났다.
••••••나는 이토를 본 적이 없다••••••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
안중근은 다시 조준했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찰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알았다. 이토 주변에 서 있던 일본인 세 명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몸으로 덮쳤다. 안중근은 외쳤다.
-코레아 후라
안중근은 쓰러지면서 총을 떨어뜨렸다. 탄창 안에 쏘지 못한한 발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의 몸을 무릎으로눌렀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철도 가에서 묶였다. - P166

이은은 얼굴이 하얘졌다. 이은이 소리쳤다.
-아니, 뭐라고?
시종이 이은을 부축해서 의자에 앉혔다.
-왜 그랬다더냐?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이은은 정신을 수습해서 서울의 황제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토 태사가 오늘 아침 아홉시에 하얼빈역에서 조선인의 손에 피살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직 공식 발표는 없지만, 폐하께서 일본 황실에 직접 위문하시기 바랍니다.
이은은 깊이 상심했다. 강하고 또 너그러운 스승 이토가 왜 조선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지, 조선은 무엇이고 일본은 무엇이고, 어째서 조선이 따로 있고 일본이 따로 있으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어떤 일이 있는 것인지 이은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이토의 부재는 조선과 일본 전체의 부재처럼 느껴졌다.
이은은 군복을 벗고 누웠다. 그네타기도 당구치기도 요지경놀이도 하지 않았다. 시종이 슬퍼하는 이은의 양태를 메이지에게 고했다. 메이지가 궁인을 보내서 이은을 위로했다.
-전하의 슬픔은 인륜에 따른 것이로되 지금은 학업에 전념할 때다. 슬픔을 과도히 하지 마라. - P169

조선 팔도는 고요했다. 순종은 그 고요의 바닥이 두려웠는데.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순종은 살길을 생각했다. 조선의 살길과황실의 살길과 백성의 살길은 겹치고 또 부딪치면서 복잡하게얽혀 있었다.
살길은 슬픔에 있었다. 이토를 죽인 조선인의 범행은 황실과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황실의 지주이며 황태자의 스승인 이토공작이 서거한 지극한 슬픔과 그 범인이 극악한 인간말종이라할지라도 한국 황제의 신민이라는 참담한 두려움을 속히 내외에공포하고 조선의 슬픔으로 일본의 분노를 위로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살길은 저절로 떠올랐다.
순종은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다.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위로를 보냅니다.
순종은 전문에서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차마 한국인이라고 쓰지 못하는 심정을 메이지가 헤아려주기를 순종은바랐다. 순종은 가나가와현 오이소에 살고 있는 이토의 정실 우메코에게도 별도의 전문을 보냈다. 순종은 황실의 모든 잔치를 폐했고, 서울에 사흘 동안 가무음곡을 금했다. 순종은 도쿄에서 이토의 영결식이 열리는 시간에 서울 장충단에서 거국적 관민추도회를 열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순종은 이토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순종은 대신과 관리들과 민간인 대표들을 거느리고 통감부로 가서 이토의 빈소에 조문하고 조위금 십만원을 전했다. 문은 덕을 널리 펼침이고 충은 국가에 헌신한다는 뜻이라고 순종은 이토에게 내린 시호의 뜻을 한국 통감 소네에게 설명했다. 소네는 듣고, 말하지 않았다.
순종의 슬픔의 의전은 화려하고 엄숙했다. 그 슬픔이 위기를모면하려는 가식이라 하더라도 가식이 자극하면 진짜 슬픔과 구말하기 어려웠고 구별하기가 어려워지니 마음이 편안했다. 메이지는 감사한다는 진보를 보내왔다. 메이지의 답신은 짧았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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