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야기는 연이은 성공이 아니라, 처절한 실패에서 나옵니다." 스퇴프가 말했다. "비록 로알 아문센이 남극에 먼저 도달했지만, 노르웨이를 제외한 세계가 기억하는 사람은 로버트 스콧이죠.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어떤 승리보다도 워털루 전쟁의 패배를 먼저 떠올립니다. 세르비아의 국가적 지존심은 1389년의 코소보폴레 존투에 바탕을 두는데, 세르비아가 터키에게 대패한 전투였죠. 그리고 예수를 보십시오! 죽음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예수의 상징은 무덤 밖에서 양손을 치켜든 모습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시종일관 예수의 처절한 패배를 더 선호해 왔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포기하기 직전의 모습을요. 우리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언제나 실패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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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가끔은 단 한 마리의 모기가 우리의 평온을 깨뜨린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어둠 속에서 앵앵거리는 모기 한 마리. 막 잠이 들려는 찰나에 나타난 모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이 솟구치는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어두운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러도, 손뼉을쳐서 잡으려 해도 소용없다. 잠은 이미 달아났고 잠을 자기도 글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켜고 귀찮게 구는 모기가 어디에 있는지 찾는다. 일상에서 사소하게일어나는 불쾌한 일이나 오해, 불화 등도 이런 모기와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이런 일들은 늘 반복되지만 쫓아낼 수도 없고 순식간에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작은 일을 크게 과장하지 말라"는 충고도 더 이상 소용없다.
- P13

불쾌한 감정은 일단 처음에는 언짢은 일에 대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우리가 그러한 감정을 겪지 않으려고 하거나 되도록 피하거나 빨리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정상이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감정을 타인앞에서 숨기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이 바람직한지 바람직하지 않은지, 혹은 정당한지 부당한지 구별하는 법을배워왔다. 이는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소위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억누르면 중요한 기본욕구에 접근하는 통로가 막히고 마는 것이다.
모기를 코끼리로 만들면, 다시 말해 일을 크게 부풀리면 감정적으로도 힘들고 이러한 감정을 설득력 있게 현실적인 계기와 연결짓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계기를 완전히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
으로 치부한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부적절하거나 수치스러우며 당황스럽고 병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30

겉보기에 사소한 일로 생겨나는 불쾌감을 우리는 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까? 대답은 단순하다. 우리가 본질적인 원인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과거 어딘가에 존재하며, 대부분 기억 속에서 거의 잊힌 경험의 층 아래에 감춰져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왜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는지, 다시 말해 우리가 왜 이렇게, 혹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그저 단면적으로 인식하는 건 지극히 정상이다. 자연에 의해 그렇게 정해졌다. 우리가 만약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중요한 모든 기억과 그 연관관계를 영원히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고는 매우 과중한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뇌가 이를 자동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 P32

가정과 규칙은 근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한다. 다시말해 우리가 무엇을 인지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고 기대할수 있는지, 각각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별적인 가공 패턴과 행동 패턴, 즉 우리가특정한 상황에 직면할 때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도식 shema형성한다. 도식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친근하게 인지하도록 도와주며,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방향을 잡기 위해 필요한 기반이다. 도식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는 온갖 경험의 총합으로 만들어진다. 또한 도식은 역할 모델(우리는 생애 초기에 일정하게 접촉하는 인물을 모방하면서 학습한다)을 통해 형성되며, 과거에 우리가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떤 반응법을 배웠는지 그 방식을 반영한다. 긍정적인 경험과 부정적인 경험이 도식 안에서 가공되고 저장된다.
- P33

경험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기처럼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기본욕구가 침해되었음을 알려주는 징조라고 판단하지 못한다.
- P35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종종 그냥 넘어가고 싶어 하는 단순한, 하지만 감정적으로 무거운 일상의 상황이다.
이 상황을 그 이전의 경험과 연관시켜 관찰하면 보다 명확한 모습이 드러난다. 현재의 불쾌감은 과거에서 울리는 메아리와 같다.
따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에 빠지면 먼저 곰곰이 생각해봐야 그 의미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기본욕구를 인식할 수 있다. 단순한 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흥분이 반복되는 것은 그 감정이 빙산의 일각임을 암시한다. 본질적인 부분은 감춰진 상태에서 그저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부족하다. 이 문제에 객관적으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풀리지 않는 부분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아주 사소한 계기로 매우 불쾌한 감정 상태에 빠진다면 이는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과거와 현재에 뒤섞여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감정이 깨어나고 과거의 가공 패턴이 활성화된다. 과거의 패턴은 현재 삶에서 우리의 욕구 충족을 촉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한다.
- P43

예를 들어 좋아하는 사람의 애정이 식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애쓴다. 또한 소외감을 빨리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 먼저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이 두 패턴은 간혹 장점도 있지만,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문제로 이어질수 있다.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문제 해결 전락은 오래 지속된다. 또한 과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매우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협이나 불안을 느낄 때 주저하지 않고 과거의 방법을 다시 사용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 P44

• 한 아이가 다른 형제자매에 비해 자신이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느껴서 화를 내고 분노한다. 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아. 매번 그렇게 질투 좀 하지 마라!"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진정시킨다.
• 한 학생이 아침에 배가 아파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금방 괜찮아질 거야"라면서 아이를 달랜다.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데 반 친구들이 나를 놀릴것 같아서 무서워." 어머니는 회사에 가야 할 시간이라 마음이 조급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는 없잖아!"

첫 번째 예시에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감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 예시에서는 아이의 감정 표현이 무시되고 어머니의 (지나친) 요구와 결합된다. 만약 아이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반복적으로 막을 경우아이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 감정은 정당하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나 다른 애착인물의 부정적인 판단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적어도 아이가 그들과 거리를 두기 전까지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이 아이가 인지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꼬리표를 내재화하고, 경우에 따라서 이는 평생 지속된다. 그 결과 자신의 감정 세계, 나아가 자신의 기본욕구에 접근하는 통로가 지속적으로 가로막힐 수 있다. 따라서 익숙한 길을 점검하는것은 매우 유익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감정 반응은 우리를 중요한 욕구로 이끌어주는 이정표가 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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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선수들처럼 맞는 대로 휘청거려야지. 저항하지 마. 일의 어떤 부분이 조금이라도 신경을 건드린다면, 건드리게 내버려둬.
어차피 막아낸다 해도 오래가지 못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인 다음 댐처럼 풀어놔. 벽에 금이 갈 때까지 담아두지 말라는 말이야."
- P264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아무도 그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리는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처럼 그 사건이 공기 중에 감도는 걸 느꼈다. 천둥소리는 가까워질 수도 있고, 가까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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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처음 벌어졌을 때는 그것이 대단한 변화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침팬지 같은 다른 영장류, 몇몇 원숭이, 그리고 매력적인 베록스시파카 여우원숭이 등도 때때로 두 발로 걷는다. 하지만 우리처럼 습관적으로 두 발로 걷는 것은 온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수많은 보완적 조정을 초래했다. 온몸의 뼈 하나, 근육 하나까지 변화를 면치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불분명하고, 아무리 부차적이고, 아무리 간접적이거나 희미하게 연관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모든 부속은 걸음걸이의 큰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바뀌어야 했다. 생물이 생활방식의 큰 변화를 겪을 때마다. 그러니까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고, 뭍에서 물로 돌아가고, 하늘로 가고, 지하로 갈 때마다, 이와 비슷하게 대대적인 재편작업이 벌어졌을 것이다.
몸에서 뚜렷한 변화만을 떼어내 따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어디에나 변화의 영향이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축소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수백 수천 가지 영향이 미쳤고, 영향들의 영향이 또 미쳤다. 자연선택은 영원히 우리를 미세조정하고 손질한다. 위대한 프랑스 분자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브(François Jacob)의 표현대로 영원히 "땜질"한다.
- P489

코알라의 주머니는 캥거루의 주머니처럼 위로 열리지 않고 아래로 열려 있다. 나무에 매달려 살아가는 동물로서는 좋은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 역시 역사의 유물인 탓이다.
코알라는 웜뱃을 닮은 선조로부터 유래했다. 웜뱃은 땅파기 선수들이다.

(웜뱃은) 터널을 파는 굴착기처럼 큼직한 발에 흙을 잔뜩 담아 마구 휘두른다. 그런 선조의 주머니가 앞으로 열려 있었다면, 새끼들의 눈과 이빨에는 시도 때도 없이 티끌이 끼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머니는 뒤로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생물이 나무로 올라갔다. 아마도 신선한 식량 공급원을 찾아나섰을 것이다. 이때 ‘설계‘가 함께 따라갔다. 바꾸기에는 너무 복잡했던 것이다.
- P491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박테리아에서 유래한뒤, 우리 눈에 보일 만큼 큰 생물체가 이 땅에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수십 억 년에 걸쳐 상보적인 화학 묘기를 연마해왔다. 둘 다 그화학적 기술 때문에 다른 세포에게 납치된 셈이고,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을 만큼 큰 생물들의 크고 복잡한 세포 속 세포액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엽록체는 식물세포 속에서, 미토콘드리아는 식물세포와 동물세포 속에서 말이다.
식물의 엽록체가 포획한 태양에너지는 복잡한 식량사슬의 바닥에놓인다. 식물의 에너지는 식량사슬을 통해서 곤충 같은 초식동물로전달되고, 그곳에서 다른 곤충, 식충동물, 늑대나 표범 같은 육식동물로 전달되고, 또 그곳에서 독수리나 쇠똥구리 같은 청소동물로전달되고, 결국 마지막으로 곰팡이나 박테리아 같은 분해자로 전달된다. 식량사슬의 매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약간의 에너지가 열이되어 빠져나가고, 나머지 에너지는 근육 수축 같은 생물학적 과정들을 추진하는 데 사용된다. 태양이 처음 입력해준 에너지 외에는새로운 에너지가 더해지지 않는 것이다. 심해의 열수구(熱水口)에 살면서 화산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특이한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생명을 움직이는 모든 에너지는 결국 식물이 잡아낸 햇빛에서 온다.
- P499

나뭇가지들이 땅 위에 거의 펼쳐질 정도로 둥치가 짧아지더라도 나무가 얻는 광자에는 전혀 손실이 없고, 더구나 막대한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늘을 향해 높이 줄기를 밀어올리느라고온갖 비용을 지르는 걸까?
나무의 타고난 서식지는 숲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무는 같은 종이는 다른 종이는 경쟁자 나무들을 누르기 위해서 키를 키우는 것이다. 공터나 정원의 나무는 둥치 바닥까지 풍성하게 가지들이 나 있다고 해서 착각하지 말자. 군대 교관이 사랑해마지않는 둥글둥글한 모양의 나무가 등장한 것은, 그것이 현재 공터나 정원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즘 보는 것은 ‘빽빽한 숲‘이라는 자연적 서식지를 벗어난 나무들이다. 산림수의 타고난 모양새는 키가 크고, 둥치가 노출되어 있고, 대부분의 가지와 잎은나무 꼭대기에서 광자 빗줄기의 예봉을 받아내는 천개에 몰려 있는 형태다. - P500

무기경쟁은 진화적 시간에서 펼쳐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현재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치타 개체와 가젤 개체의 경쟁과 혼동해서는안 된다. 진화적 시간에서의 경쟁은 실시간 경쟁을 위한 도구를 구축하는 경쟁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략이나 속도로 상대를능가하기 위한 도구가 양쪽의 유전자풀에 갖춰져가는 과정이다. 두번째로 명심할 점은, 개체가 포식자에게서 도망칠 때 자신과 같은 종의 경쟁 개체들을 앞지르기 위해서 달리기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러닝화와 곰에 관한 이솝우화급 유명한 농담은 아주 옳은 이야기다. 치타가 한 무리의 가젤을 쫓기시작했을 때, 가젤에게 중요한 것은 치타를 앞질러 달리는 게 아니라 제 무리의 느린 가젤들을 앞질러 달리는 것이다.
무기경쟁이라는 용어를 이해하고 보면, 숲의 나무들 역시 무기경쟁에 돌입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개별 나무들은 바로 옆에있는 이웃 나무들보다 태양에 더 가까이 가려고 경쟁한다. 오래된나무가 죽어서 천개에 빈 공간이 생기면 경쟁이 특히 심해진다. 늙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온 숲에 메아리치면, 그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묘목들은 그 소리를 신호탄 삼아서 실시간 경쟁에 돌입한다.(물론 우리 동물들의 실시간보다야 훨씬 느리다), 아마도 선조들의 진화적 무기경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유전자, 즉 더 빠르고 높이 자라는 유전자를 갖춘 나무가 실시간 경쟁의 승자가 될 것이다.
숲 속 나무들의 무기경쟁은 대칭적 경쟁이다. 양측이 천개에서의공간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놓고 다투기 때문이다. 한편, 포식자와먹잇감의 무기경쟁은 비대칭적이다. 공격 무기와 방어 무기 사이의경쟁이기 때문이다. 기생생물과 숙주의 무기경쟁도 마찬가지다. 놀랍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한 종의 수컷과 암컷,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무기경쟁이 있다.
- P507

인식했던바, 자연선택은 한 개체군의 경쟁 개체들 사이에서만 선택을 한다. 개체들의 경쟁 때문에 개체군 전체가 멸종을 향해 달음질치더라도, 자연선택은 미지막 개체가 죽는 순간까지 줄기차게 가장경쟁력 있는 개체를 선택한다. 자연선택은 최후의 일각까지 가장경쟁력 있는 유전자를 선호함으로써 개체군을 멸종으로 몰아갈 수있고, 그 유전자를 최후에 멸종할 운명으로 만들 수도 있다.
- P516

찰스 다윈은 시인이 아니었지만, 《종의 기원》의 마지막 문단은 시적인 크레센도가 돋보인다.

따라서 자연의 전쟁으로부터,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할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 즉 더욱 고등한 동물이 직접 생성되어 나온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최초에 소수의 형태 혹은 하나의 형태에 갖가지 능력을 지닌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졌다. 행성이고정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영원히 돌고 도는 동안, 이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가 진화해 나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 P526

 자연선택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무작위적인은 변화들을 체계적으로 포착하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긴 시간에 걸쳐 아주 조금씩 그것을 축적하여, 결국 진화로 하여금 불가능과 다양성의 산을 오르게 한다. 그 산의 높이와 넓이에는 한계가 없는 듯하다. 그 비유적인 산을 가리켜 나는 ‘불가능의 산‘ 이라고 부른다. 자연선택이라는 불가능의 펌프는 생물의 복잡성을 ‘불가능의산‘으로 밀어올린다. 이것은 태양의 에너지가 물을 진짜 산 위로 끌어올리는 것과 비슷한 통계적 작업이다. 자연선택이 국지적으로나마 통계적으로 가능한 방향을 거슬러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방향으로 밀어주기 때문에, 생명은 더욱 복잡하게 진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태양으로부터 그칠 줄 모르고 에너지가 공급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P550

창조론자들은 종종 파스퇴르의 실험과 같은 것들을 자기네에게 유리한 증거로 끌어다 말한다. 그들의 잘못된 논리는 이렇게 흐른다. "자연발생은 오늘날 어디에서도 관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명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윈의 1871년 발언은 이런 식의 비논리에 대한 예리한 응수였다. 생명의 자연발생은물론 극히 드문 사건이다. 하지만 한 번은 일어났던 사건이다. 최초의 자연발생이 자연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하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하든 말이다.  - P553

우리가 아는 최고의 자기복제 분자는 DNA다. 우리가 흔히 보는 발전된 생물체들에서 DNA와 단백질은 깔끔하게 서로를 보완한다. 단백질 분자는 탁월한 효소지만 서툰 복제자고, DNA는 정확하게그 반대다. DNA는 삼차원 형태로 접히지 않으므로 효소로 기능할수 없다. DNA는 활짝 열린 직선 모양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제자이자 아미노산 서열 지정자로서 안성맞춤이다. 단백질 분자는착착 접혀서 ‘닫힌‘ 형태이기 때문에 서열 정보가 ‘노출되지‘ 않고,
따라서 정보가 복사되거나 읽힐 수 없다. 단백질의 서열 정보는 복잡하게 꼬인 단백질 내부에 묻혀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다란 DNA 사슬은 서열 정보가 노출되어 있으므로, 주형으로 쉽게 기능한다.
생명 기원의 딜레마란 이런 것이다. DNA는 복제할 수 있지만, 복제 과정을 촉매하기 위해서 별도의 효소를 필요로 한다. 단백질은 DNA 형성을 촉매할 수 있지만, 정확한 아미노산 서열을 규정해주는 DNA가 있어야 한다. 초기 지구의 분자들은 어떻게 이 강고한 결합을 끊고 자연선택을 개시했을까? 여기에 RNA가 등장한다.
RNA는 DNA와 종류가 같은 폴리뉴클레오티드 분자다. RNA는 DNA의 네 가지 암호 ‘문자‘에 상응하는 암호를 지닐 수 있고, 실제로 살아 있는 세포에서 DNA의 유전 정보를 다른 장소로 운반해 쉽게 사용되도록 하는 역할을 맡는다. 먼저 DNA가 주형으로 작용해 RNA 암호 서열을 조립하면, 그 RNA를 주형으로 사용해서 단백질서열이 조립된다. DNA에서 곧바로 단백질이 조립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바이러스들은 아예 DNA가 없고, 대신 RNA를 유전 분자로 갖고있다. RNA가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정보를 옮기는 일을 전적으로 담당한다. - P556

생물학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눈길을 돌리는 어디에나 초록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활짝 피어 번성하는 계통수의 한가운데에 작은 가지로 자리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먹고, 자라고, 썩고, 헤엄치고, 걷고, 날고, 땅을 파고, 몰래 다가가고, 추격하고, 도망치고, 앞질러가고, 앞질러 속이는 무수한 종들에게 우리가 둘러싸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보다 적어도 열 배는 많은 초록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움직일 에너지가 없을 것이다. 포식자와 먹잇감, 기생생물과 숙주가 끝없이 증강하는 무기경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다윈이 이야기한 ‘자연의 전쟁‘과 ‘기근과 죽음‘이 없다면, 무언가를 바라보는 능력을 지닌 신경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다. 그것은 마을 유일의 게임, 지상 최대의 쇼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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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의 외모는 여러 종류의 큰 어류들과 닮았다. 그중 하나인 만새기 (Corppierta hipturnis)는 실제로 가끔 ‘돌고래‘ 라고 불린다. 만새기와 진짜 돌고래는 바다 표층에서 날래게 사냥을 하는 생활방식에 알맞도록 둘 다 유선형 몸통을 갖고 있다. 그들의 수영 기술은겉보기에는 비슷할지 몰라도 서로 빌려온 것은 아니다. 세부 사항들을 살펴보면 금세 차이가 드러난다. 둘 다 주로 꼬리로 가속을 하지만, 만새기는 다른 물고기들처럼 꼬리를 옆으로 흔드는 반면에,
진짜 돌고래는 꼬리를 상하로 흔든다. 포유류의 과거를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것이다.
도마뱀과 뱀은 척추를 옆으로 흔들며 이동했던 선조 어류의 습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땅에서 수영한다‘고도 할 수 있다. 말이나 치타가 달리는 모습을 이와 대비시켜 보라. 이 포유류들도 물고기나 뱀처럼 척추를 굽혀서 가속을 하지만, 옆으로가 아니라 위아래로 구부린다.
포유류의 족보에서 어떻게 이런 전이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재미있는 질문이다. 어쩌면 중간 단계가 있었을 것이다. 개구리처럼 어느 방향으로도 척추를 거의 굽히지 않는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악어는 보통의 파충류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뱀처럼 걷지만, 위로 펄쩍 뛸 수도 있다(무시무시하게 재빠르다). 물론 포유류의 선조가 악어와 닮지는 않았겠지만, 우리의 중간 단계 선조도 악어처럼 두 가지 자세를 함께 취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수는 있다.
- P398

오스트레일리아의 근사한 유대 포유류 동물상에 관해서는 동물의지리적 분포를 다룬 장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여기서 지적할 점은,
유대류의 동물 각각이 세계 다른 곳을 점령한 ‘태반류(즉 유대류가 아닌) 포유류의 상응하는 동물 각각과 수렴 진화했다는 것이다. 왼쪽그림에 소개된 유대류들은 태반이 있는 상대 동물(즉 태반류 중 같은 ‘업종‘에서 살아가는 동물)과 전혀 같지 않다. 외모상의 특징부터 다를때도 있다. 그래도 대체로 인상적일 정도로 서로 닮았고, 그러면서도 창조자가 빌려오기를 했다고 볼 만큼 많이 닮지는 않았다.
유전자풀에서 유전자가 성적으로 섞이는 것은 유전적 발상을 빌려주거나 공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적 재조합은 한 종에만 국한되므로, 유대류와 태반류 포유류 등 서로 다른 종을 비교하는 것이 목적인 이 장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다. 흥미롭게도, 박테리아들 사이에서는 고차원적인 DNA 빌려주기가 성행한다. 박테리아들은 (상당히 관계가 먼 균주들끼리도) 자유분방한  난교를통해서 DNA 발상을 교환한다. 이 과정을 유성생식의 전 단계라고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발상 빌려오기 기법은 박테리아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 같은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는 주된 방법이다.
종종 이해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변형‘ 이라는 말로 그 현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 P403

이 장을 시작하면서 나는 박쥐와 사람의 팔을 예로 들어 ‘상동성‘을 소개했다. 단어의 특이한 용법을 고집하면서, 골격은 같지만 뼈들은 다르다는 표현도 썼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톰슨의 변형 작업을 통해서 상동성 개념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한 기관을고무판에 그린 다음, 그것을 왜곡해서 다른 기관으로 만들어낼 수있다면, 그때 두 기관(가령 박쥐의 손과 사람의 손)을 상동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수학자들에게는 이런 상황을 지칭하는 용어가있다. 위상동형(homeomorphic)‘이다."
- P416

선조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기능을 공유하기 때문에 생긴 닮은꼴에 대해서는 ‘상사성‘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되었다. 가령 박쥐의 날개와 곤충의 날개는 상사기관으로, 박쥐의 날개와 사람의 팔 같은 상동기관과는 관계가 다르다. - P417

왜 아니겠는가? 윗슨과 크릭이 일으킨 분자생물학적 혁명의 결론은 바로 DNA는 DNA라는 것이었다. DNA는 그것이 사람의 DNA인지 침팬지의 DNA인지 사과의 DNA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DNA 조각은 자신과 상보적인 조각이기만 하면 무엇과도 행복하게짝을 짓는다. 그렇지만 결합력까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DNA 단일 가닥은 제 정확한 짝과는 단단하게 결합하지만, 그와 비슷한 다른 단일 가닥과는 좀 더 느슨하게 결합한다. DNA ‘문자(윗슨과 크릭의 염기)‘들 중에서 상대 가닥의 문자와 짝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결합이 약해지는 것이다. 군데군데 이빨이 나간 지퍼와 비슷하다.
다른 종의 가닥끼리 결합했을 때, 그 결합 강도를 어떻게 잴까?
우스울 정도로 단순한 방법이 있다. 결합의 ‘녹는점‘을 재면 된다.
이중 나선 DNA의 녹는점이 약 85 도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리라. 정상적으로 적절하게 짝지은 이중 나선 DNA 라면, 가령 사람의DNA 한 가닥이 ‘녹아서‘ 상보적인 두 가닥으로 풀릴 때는 85도가맞다. 하지만 결합이 더 약하면 (사람의 가닥과 침팬지의 가닥이 결합한 경우라면) 더 낮은 온도에서도 결합이 깨진다. 사람의 DNA가 그보다 더먼 친척인 물고기나 두꺼비의 DNA와 결합한 경우라면, 그보다 더 낮은 온도로도 풀릴 것이다. DNA 가닥이 같은 종의 가닥과 결합했을 때와 다른 종의 가닥과 결합했을 때의 녹는점 차이가 바로 두 종의 유전적 거리를 말해주는 잣대다. 대강의 경험적 규칙으로, 녹는점이 1도 낮아지면 서로 맞는 DNA 문자 수가 1퍼센트 줄어든다고본다(혹은 지퍼에서 빠진 이빨 수가 1퍼센트 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 P425

동물이 화가 나면 목덜미 털이 곤두선다. 동물이 공포를 느낄 때도그렇다. 털을 쭈뼛 세워서 몸을 더 커 보이게 만듦으로써 위험한 경쟁자나 포식자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우리 털 없는 원숭이들 역시,
있지도 않은 (혹은 겨우 조금 남은 털을 세우는 메커니즘을 이식 갖고있다. 그것이 소름이다. 우리의 털 세우기 메커니즘은 흔적이다. 오래전의 선조들에게는 유용하게 쓰였겠지만 지금은 기능을 잃고 유물로만 남았다. 흔적이 된 털은 우리 몸 구석구석에 우리 역사가 쓰여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진화가 실제로 발생했음을 말해주는 설득력 있는 증거다. 이것 역시 화석에서 나온 증거가 아니라 현생 동물에게서 나온 증거다.
- P452

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설계상의 굵직한 실수라도(심지어 파국적인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실수라도) 후속 땜질 조치로 얼마든지 수정할 수있다는 것이다. 적당한 환경에서라면 독창적이고 정교한 땜질을 통해서 처음의 실수를 완벽하게 보완할 수 있다. 일반적인 진화 과정에서는 굵직한 돌연변이가 등장한 뒤에 거의 언제나 수많은 땜질 작업을 거쳐야 한다. 대체로 옳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돌연변이라고해도 마찬가지다. 그 후에도 자연선택은 수많은 작은 돌연변이를선호함으로써 뒤청소를 한다. 최초의 대규모 돌연변이가 남긴 울퉁불퉁한 모서리들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매의 눈이 최초 설계에 심각한 실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 보는 것이다. 다시 헬름홀츠를 인용해보자.

눈은 다른 광학 도구들이 가질 수 있는 결점을 모조리 갖고 있다. 더구나 눈에만 고유한 결점도 있다. 그렇지만 그 결점들은 너무나 훌륭하게 상쇄되어 있다. 그래서 정상적인 조명 환경에서라면, 결점들로인한 영상의 부정확성이 망막 원뿔 세포들에 의해 규정된 민감성 한계를 넘어설 만큼 뚜렷하게 인식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다소 변화된 조건에서 관찰을 하려는 순간, 색수차, 비점수차, 맹점, 정맥 그림자, 매질의 불완전한 투명성, 기타 내가 지적했던 모든결점이 인식되기 시작한다.

-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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