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선에는 위선적인 자비와 얼음장 같은 냉소와 냉혹한 독기가고루 무르녹아 있었다. 그의 위선적인 자비는 피의자에게<두려워 말아라, 너는 지금 네 선을 드러내어 악을 가리려는형제들 앞에 있음이다>, 얼음장 같은 냉소는, <네가 네 선을모르니 내가 일러 주리라>, 냉혹한 독기는, <심문하고 있는한 너는 내 수중에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미지오는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를 어렴풋이 헤아리고 있을 테지만, 베르나르 기의 침묵과 의도적인 지연 작전은 레미지오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같았다. 심문관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의자는 그만큼 기가 꺾이면서 사람값이 깎이다가 결국은 체념하고, 손에다 잔뜩 침을 칠하고기다리는 심문관의 먹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 P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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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진화의 첫 3억 년간 이어진 오랜 침묵을 깨뜨린 첫 바다 동물은 닭새우였을 것이다. 바닷가재의 먼 친척뻘인 현생 닭새우는 더듬이가 길고 표면이 까끌까끌하며 커다란 앞발이 없는 것으로 알아볼 수있는데, 전 세계 따뜻한 바다에서 서식한다. 닭새우는 길이가 1미터넘게 자랄 수 있으며, 해마다 8만 미터톤 넘게 잡히는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다.
이다음에 슈퍼마켓 갔을 때 얼음 조각들 사이에서 닭새우가 보이거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바닷속에서 처음으로 소통을 위한소리를 낸 얼굴이니까. 닭새우는 더듬이 밑동의 혹을 눈 아래로 지나가는 매끄러운 이랑에 문지른다. 이 꽉꽉 소리는 실제로 들으면 무척요란해서 포식성 어류나 갑각류를 올러 쫓아내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일본이나 서유럽의 연안 같은 황금 어장에 수중청음기를 내리면 시간당 수십마리의 닭새우를 탐지할 수 있다. 가장 큰 개체의 소리는 3킬로미터까지 퍼지기도 한다. - P102

장기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지금의 인간 목소리를 가지게 된 것은 젖 덕분이다. 구체적로 말하자면 고대 원포유류(原哺乳類)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던 젖 말이다. 젖먹이기가 진화하기 전 원포유류 새끼들은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양분으로 삼았다. 부모가 가져다줄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스스로 찾아야 했다. 씨앗, 식물성 먹이 소형 먹잇감 동물을 먹으려면 복합적이고 때로는 단단한 먹이를 장에서 소화할 수 있어야 했다. 에너지와 양분은 종종 공급이 부족하여 새끼의 성장 속도를 제약했다. 그러다 영양피부분비물(nutritive skinsecretion)이 발명되면서 이 제약이 깨져 새끼는 족쇄에서 풀려났다.
어미는 먹잇감을 잡아 소화하는 고된 일을 도맡은 채 영양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되는 먹이를 새끼에게 공급했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려면 어미에게는 힘과 너그러움이 둘 다 필요했다. 젖먹이기 진화의 최초 단계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현생 동물의 DNA를 연구했더니 2억년 전 즈음 암컷 포유류에게 젖샘(유선)과 특수 유단백질이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새로운 새끼 먹이기 방법이 진화하려면 어미의 생리와 행동이 달라지는 것과 더불어 새끼의 목도 재설계되어야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 혁신들 덕에 인간은 언어 능력을 얻게 된다. 우리의 언어는 이 고대의 어미들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다.
파충류는 빨지 못한다. 파충류의 주둥이, 혀, 목은 구조가 약하며복잡한 근육을 지탱할 뼈대가 없다. 변화는 포유류의 진화 초기에 일어났다. 포유류의 목에 있던 가느다란 V꼴 목뿔뼈(설골)가 네 개의 가지가 돋은 튼튼한 안장으로 바뀐 것이다. 근육들은 이 가지에 붙은채혀, 입, 후두, 식도를 강화하고 안정시켰다. 화석 증거로 판단컨대 1억 6500만년 전 포유류의 목뿔뼈와 근육은 파충류의 헐겁고 개방된구멍을 힘세고 일사불란한 빨기 수단으로 탈바꿈시켰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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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도원 수도사의 안내를 받아 이자와 마녀를 독방에다분리 감금하라. 수도사는 벽의 고리에다 단단히 묶어 두되심문이 시작되면 언제든 끌어 내어 올 수 있도록 하라. 여자는 정체가 분명해진 이상 화형대로 보내는 마녀 재판이 따로 열릴 터이다. 따라서 밤중에 끌어 내어 심문할 일은 없을것이다.」베르나르 기는 끌려가는 살바토레에게 진실을 말하고 공범을 대면 죽음을 면하는 길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않았다.
두 사람은 대장간 지하로 끌려갔다. 살바토레는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사람처럼 조용히 끌려 나갔고, 여자는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발버둥치며 끌려 나갔다. 그러나 여자가 외마디 소리로 뱉어 내는 사투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베르나르 기나 경호병들도 알아듣지못하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에는 권능을베푸는 말이 있고, 무리를 비속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말이있다. 평범한 대중의 속된 언어가 바로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데,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이들에게 지혜의 세계와 권능의 세계에서 두루 통용될 자기 표현의 능력을 선물로 주셔야 했을터인데 어째서 그 반대로 하셨는지 나는 모르겠다. -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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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경관(soundscape)은 산간 도로의 어수선한 소림과 길가로부터멀리 떨어진 저지대 개발지와 대조적이다. 산업적 영농이 실시되고 있는 밭과 시골길에서는 곤충의 노랫소리가 잠잠하다. 제초제와 밭갈이로 단정하게 만든 밭에는 자연 식생이 별로 남지 않았다. 다채롭던 토종 풀밭과 숲은 한해살이 작물의 단작 경작지로 바뀌었다. 살충제는농약 분무기 노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바람과 비가 수증기와먼지를 들쑤시면 수십 년 전 금지된 화학 물질이 배어 나온다.
곤충생물학 전문가 60명의 연구 성과를 종합한 2016년 보고서에따르면 유럽의 메뚜기, 귀뚜라미, 그들의 친척이 위기를 맞았다. 약 30퍼센트의 종이 멸종 위험에 처했으며 개체군 데이터가 탄탄하게 확보된 종의 대부분에서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밭갈이와 살충제 연무로부터 떨어진 지역에서도 메뚜기 개체수가 줄고 있다. 캔자스주 콘자프레리 평원에서는 20년 만에 메뚜기가 30퍼센트 - P80

감소했다. 이것은 프레리 식물의 질소 및 무기질 양분 함량이 훌쩍 낮아진 것과 관계가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서 프레리 식물의 생장이 20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지만 이 무성한 식생의 영양소는 오히려 희박해졌다. 이제 메뚜기는 영양 만점 샐러드보다는 양 많고 맛없는 지푸라기를 먹을 수밖에 없다.
곤경에 처한 곤충은 귀뚜라미와 메뚜기만이 아니다. 벌, 개미, 딱정벌레, 메뚜기, 파리, 귀뚜라미, 나비, 날도래, 잠자리 등 온갖 종류의곤충에 대한 장기적 연구 160건을 취합한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육상곤충이 10년마다 감소하는 평균 비율은 10퍼센트를 초과한다(다만민물에 서식하는 일부 곤충에서는 정반대 추세가 나타난다). 이 곤충들은 대다수물 생태계의 토대다. 생물량으로 따지면 곤충의 무게는 포유류와 조류를 전부 합친 것보다 스무 배 넘게 나간다. 종수로는 최소 400배 이상이다. 뭍에서 수억 년의 진화가 빚어낸 소리 다양성이 급감하고 있다. 숲과 풀밭에서 커져만 가는 곤충의 침묵은 모든 육상 생태계의 생명력을 떠받치는 동물들이 감소하는 소리인 셈이다.
이렇듯 감각 다양성이 사멸하고 있는 데는 독을 퍼뜨리는 기술,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 생산 비용을 다른 사람과 다른 종에 떠넘기는 산업의 ‘외부 효과‘, 나날이 팽창하면서 다른 종을 밀어내는 인류의 입맛 변화와 인구 증가 등 여러 원인이 있다. 이 모든 사회·경제적 요인의 배경은 둔감함과 무관심의 문화다. - P81

1억 4500만 년에서 6600만 년 전 백악기에 뭍의 생명들은 생태계가 재구성되는 광경을 보았다. 구과식물, 양치식물, 그 친척만 자라던서식처에 꽃식물이 자리 잡아 금세 우점종이 되었다. 대형 양치식물이 여전히 무성한 상층 식생을 이루는 숲에서도 꽃식물의 약진은 두드러졌다. 또한 지구의 생명 시간표를 통틀어 고작 3퍼센트에 불과한이 기간에 현생 생태계에서 노래하는 대부분의 동물을 비롯한 많은동물군이 탄생하거나 분화했다. 생물학자들은 이 기간을 ‘육지 혁명(terrestrial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에디아카라기와 캄브리아기초기 바다에서 일어난 진화적 대폭발 이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창조성의 분출이었다. 이때는 발성이 혁명적으로 팽창한 시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꽃식물의 번성에 발맞춰 곤충의 다양성이 급속히 증가했다. 여치, 메뚜기, 나방, 파리, 딱정벌레, 개미, 벌, 말벌의 계통수를 화석과 DNA로 재구성했더니 곤충이 풍성해진 시기는 꽃식물이 등장하여 승승장구한 시기와 일치했다. 이 번성은 지구의 소리를 바꿨다.
옛 음성을 더 잘 들리도록 부각했으며 노래하는 곤충의 새로운 집단이 탄생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이 소리꾼 중 상당수에게 진화의역사는 강물이 삼각주를 이루는 것과 비슷하다. 기다란 한 가닥 물길이 난데없이 무성한 개울로 갈라지고 거기서 또 갈라진다. 물길이 동물 조상들의 계통이라면 개울은 꽃식물이 지구를 정복한 뒤 동물 다양성이 폭발한 사건이다. - P87

많은 서식처에서 인간의 가청 범위를 지배하는 곤충 종인 귀뚜라미, 여치, 메뚜기, 매미의 소리를 듣는 것은 곤충에 의해 소리로 전환된 식물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관계는 식물의 당과 아미노산을 연료로 쓰는 찰나적 관계이기도 하고, 꽃식물의 자극에 의해이 곤충 집단이 진화적으로 분화한 역사적 관계이기도 하다.
다른 주요 곤충 집단의 다양성도 꽃식물의 번성에 의해 꽃을 피웠다. 나방과 나비의 조상은 3억 년 전 민꽃식물을 먹으며 살았다. 꽃꿀을 홀짝거리기 위한 빨대주둥이(proboscis)는 트라이아스기에 등장했는데, 꽃이 흔해지면서 다양성이 급증했다. 이때는 애벌레에게 영양 많은 잎을 공급하고 성체에게 꽃꿀이 풍부한 꽃을 공급하는 먹이 식물이 번성한 것과 대체로 비슷한 시기였다. - P90

백악기에 소리 표현이 대폭발을 일으킨 근원은 꽃식물로 인한 생태·진화 혁명이다. 많은 동물은 꽃식물의 촉매 효과를 직접 겪었다. 꽃식물은 동물에게 영양을 공급했으며, 동물은 꽃가루받이로서, 초식동물로서, 열매 배달부로서 꽃식물과 공진화했다. 꽃식물 덕에 먹잇감 곤충이 다양하고 풍부해진 간접적 효과를 누린 동물도 있었다.
꽃식물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뭍의 먹이그물을 떠받치는 것이 여전히 양치식물과 구과식물뿐이었다면 세상의 소리는 훨씬 획일적이고 앙상했을 것이다. 여치, 매미, 새를 비롯하여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소리꾼들은 노래하지 않거나 침묵하거나 단조로운 소리만 냈을 것이다.
지금의 생물 다양성 위기에서 이 역사는 우리에게 경고를 발한다.
식물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은 살아 있는 지구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동물들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지구에 서식하는 50만 종의 식물 중에서 90퍼센트가 꽃식물이다. 개체수 데이터가 확보된 종이 별로 없긴하지만, 현재 가장 믿을 만한 추정치에 따르면 전 세계 식물 종의 최소20퍼센트가 멸종 위협을 받고 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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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섭리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뜻이라면 일각수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심려 말아라. 일각수는 이 서책에 존재하고 있지 않으냐?
참 실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능한 실재로 존재하니 그것으로 만족하려무나.」「그렇다면 서책을 읽을 때도 우리는 신학적인 미덕인 믿음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요?
「신학적 미덕에는 믿음 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고 또 하나는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에 대한 자비이다.」「사부님의 지성은 일각수의 존재를 믿지 않으시는데, 도대체 일각수라는 존재가 사부님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베난티오의 시신은 돼지 피 항아리로 끌려 들어갔다. 그때 눈 위에 남았던, 베난티오가 끌려간 흔적이 그러하듯이,비록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일각수는 나에게 여전히 유용하다. 서책 속의 일각수는 그 흔적과 같다. 흔적이 있으면 흔적을 남긴 존재도 분명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일각수와 그 흔적은 다른 것일 것 같습니다만.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남기는 것에 따라 흔적의모양은 늘 같지 않고, 또 흔적이라는 것이 꼭 찍혀야 생기는것도 아니다. 때로 인간의 육체가 인간의 마음에다 흔적을남기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관념은 만물의 기호요, 형상은 기호의 기호, 관념의 기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육체나 관념이 없어도 이미지로써 이를 재구성한다. - P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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