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상하다. 나는 불행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혼자였고,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유럽북쪽의 숲들을 갈아엎고, 그곳에 금속이 박힌 살덩어리들과몇 년 뒤에 무고한 산책객들 코앞에서 폭발하게 될 포탄들을살포했고, 자신이 만들어 낸 그 볼품없는 지진계에 고작 12등급만을 주었던 메르칼리조차 창백하게 질릴 만한 황폐함을만들어 냈다하지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살아오는 내내 바뀌었으며나중에는 오페라 가수들과 축구 선수들까지도 포함하게 될나만의 우상들을 모신 만신전에 기도를 올리면서 저녁마다그 사실을 확인했다. 어쩌면 내가 젊었고, 나의 하루하루가아름다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낮의 아름다움이 밤의 예지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헤아린다. - P42
그러니까 이게 그거였다. 바로 귀족이라는 것. 그저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주고받기 위해서 펜을 잉크에 적셔 기울인 글씨체로 카드를 작성해 서로에게 보내는 사람들. 나는 카드를 내 가슴에 꼭 댄 채 길게 누워 몽상에 잠겼다.사람들이 바로 내게 이런 카드를 보내온 거다. 사랑하는 미모야, 우리는 새 옷이 네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원하던 뿔 손잡이 칼도, 오늘 저녁 구름처럼 푹신한 깃털과 양털과 말총 침구에서 자는 사람도 나다. 비록 시늉에 그칠지라도, 잠깐이나마 이 세계에 속해 보기. 그저 1분만 제발, 자비를.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1분.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로부터 정말로 너무나 짧은 1분을 훔쳐 낼 수 있기를. - P86
비올라, 비올라, 비올라, 깊이 자고 있다가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저 조금 더 강렬해진, 바로 그 오렌지꽃 향기. 내가 투덜거리는데도 그 존재는 끈질기게 그 자리에 머물렀고 나는 한쪽팔꿈치로 몸을 괴었다. 자다가 놓친 생일 축하 카드가 바닥에나뒹굴었다. 나는 내가 방금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퍼뜩 깨달았다. 침대에서 잠을 자고 말았다. 오르시니 가문의 침대에서.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에 비하면 가벼운 죄랄까. 바로 그 여자였다. 전날 만났던 죽은 젊은 여자가 초록색 비단 드레스를 입고 침대 옆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귀신이 내게들러붙었고 앞으로도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 나는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죽은 여자가 옷을 갈아입고 오렌지꽃 향기를 풍기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어제 묘지에서 봤던 게 바로 너로구너.‘ 그녀가 두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 P91
하지만 내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 버렸고 그 애의 이름이머릿속에서 노랫가락처럼 계속 맴돌았으니, 어른들이 술을진탕 마시면 불러 대는 그런 가락, 그들에게 20대의 눈동자를돌려주는 그런 노래와 같았다. 비올라, 비올라, 비올라. - P97
「11월 22일.」비올라는 기뻐 날뛰며 나를 끌어안고는 잠깐 춤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우주적 쌍둥이야!」「어쨌든 믿기지 않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이라니!」「난 그럴 줄 알았어! 곧 보자, 미모.」「또 두 달을 기다리게 하는 건 아니지?」「우주적 쌍둥이를 기다리게 하는 법은 없지.」 비올라가 심각하게 말했다. 그 애는 오른쪽으로, 나는 왼쪽으로 출발했다. 그 아이의행복이 내 발걸음을 가볍게 했고 어둠을 밝혔다. 나는 그 애에게 거짓말한 것을 심하게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11월7일에 태어났다. 하지만 내가 그 애의 침실에서 잠이 들기 전에 읽고 또 읽었던 생일 축하 카드에서 본 날짜가 갑자기 생각났다. 기쁨을 안겨 주는 작은 거짓말은, 내 생각엔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 안셀모에게 고해를 할 수도 있으리라. 고해성사를 볼 훌륭한 기회. 멀어져 가면서, 나는 아주 신경 써서 세 번 뒤돌아봤다. 한번은 저번에 못 한 것, 또 한 번은 이번 것, 그리고 마지막은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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