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설

가지마다 눈이 걸려 있었다. 기관총 사수는 노래를 불렀다. 그는 러시아의 숲속 저멀리 돌출한 초소에 있었다. 그는성탄절 노래를 불렀는데, 때는 이미 2월초였다. 그러나 눈이 1미터도 넘게 쌓여 있었다. 검은 나무둥치들 사이에 눈이있었다. 검푸른 가지 위에 눈이 있었다. 잔가지에 걸려 있고,
덤불에는 바람에 불려 솜처럼, 검은 나무둥치에는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많고 많은 눈이. 그리고 기관총 사수는 이미 2월인데도 성탄절 노래를 불렀다. - P11

기관총 사수는 러시아의 숲속에 서있었다. 가지마다 흰눈이 매달리고 귓전에서 피 도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리고 땀이 이마에서 얼어붙었다. 땀이 철모 밑으로 흘러내렸다. 한숨 소리 때문이었다, 무엇인가의 혹은 누군가의, 눈은그 소리를 가만히 숨겨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땀이 이마에서 얼어붙었다. 귀에 들리는 공포가 너무 커서. 한숨 소리 때문에. - P13

그의 뒤에서 딜빛 우울한 거리가 다시 돌 같은 고독 속으로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창문들은 희뿌연 우윳빛 입김을 불어넣은 유리를 끼운 듯 파충류의 눈처럼 죽어 보였다. 커튼이, 잠에 겨워 몰래 숨 쉬는 눈꺼풀같이 바람에 가만히 흔들렸다.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하얗고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그의 뒤에서 애처롭게 손을 혼들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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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라-코트디부아르(또는 다른 어떤 바이러스)가 인간에서 낮은 독성을 나타내는 데 진화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복잡한 문제다. 단순히 치사율만 비교해서는 결론 내릴 수 없다. 치사율 자체는 진화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인 바이러스의 증식력이나 장기 생존력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 인체는 에볼라의 주 서식지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에볼라의 주 서식지는 보유숙주다.
다른 인수공통감염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에볼라도 보유숙주 내에서 평화롭게 살면서 꾸준히 증식하지만, 지나치게 숫자를 불려 숙주에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 방향으로 적응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종간장벽을 넘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환경과 조건들을 맞아 치명적인 결과를 빚는 것이다. 어떤 전문가들은 에볼라 바이러스의 삶과 모험에서 인간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보유숙주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종말숙주dead-end host 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 의미는 이렇다. 유행이 통제되어 막바지에 이르면 바이러스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 물론 그 바이러스가 모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종간전파라는 도박에 모든 것을 걸고 인간의 몸속으로 뛰어든 바이러스의 혈통이 그렇다는 것이다. 게임은 끝났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이들의 혈통은 진화적 패배자다. 인간 집단에서 토착병이 되어 계속 살아갈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거대한 유행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에볼라가 딱이런 경우다. - P103

2007년 우간다에서 발견된 에볼라-분디부교를 끝으로 현재 알려진 에볼라의 분류체계와 분포지역이 대략 정해졌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네 종류가 있는데 중앙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다양하게 분포한다. 현재까지 수단, 가봉, 우간다, 코트디부아르, 콩고 콩고민주공화국등 6개국에서 보유숙주로부터 인간에게 전염되어 질병을 일으켰다(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릴라와 침팬지의 죽음과 함께). 다섯 번째 바이러스는 필리핀 토착종으로 생각되는데 감염된 마카크원숭이를 통해수차례 미국에 유입되었다. 하지만 에볼라가 아프리카 적도지방에서기원했다면 어떻게 필리핀까지 건너갔을까?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 사이를 건너뛰었을까? 수단 서남부에서 마닐라까지는 직선 거리로 1만 킬로미터가 넘는다. 철새도 이 정도 거리를 쉬지 않고 날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에볼라 바이러스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분포하는 것일까? 인도나 태국, 베트남 등지를 뒤져봐야 할까? 아니면 스위스나 요하네스버그에 간 것과 마찬가지로 비행기에 실려 필리핀까지 갔을까?
이런 모든 의문을 생물지리학(생물종이 어디 사는지 연구하는 학문)과 계통발생학(각 계통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의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현재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해 과학이 이해하는 바는 온통 깜깜한 밤에 아주 작은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P108

입자학파는 에볼라 자이르가 중앙아프리카의 숲 속에서 비교적 오래 전부터 아주 흔히 볼 수 있었던 바이러스이며, 각각의 유행은 직접적인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예를든다면  이렇다. 누군가 감염된 침팬지의 사체를 먹는다. 그 침팬지가 감염된 이유는 그 전에 보유숙주가 입을 댔던 과일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인간 유행은 결국 국지적이고 우연한 사건에의해 생긴 것이므로 다른 사건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일종의 ‘입자‘라고본다. 에릭 르로이는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저는 이 바이러스가 보유숙주의 몸속에서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때때로 보유숙주에서 다른 동물로 전파되는 거죠."
파동가설은 에볼라-자이르가 중앙아프리카에 퍼진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상격인 어떤 바이러스로부터 비교적 최근에 갈라져 나온 새로운 바이러스로, 어쩌면 얌부쿠 지역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 최근에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 유행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국지적인 유행은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파동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는 최근 몇십 년 사이에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보유숙주들을 감염시키면서 서식 범위를 넓히고있다. 이런 관점에서 각각의 유행은 훨씬 큰 차원에서 벌어지은 일의 일부로 생각할 수 있다. 즉, 거대한 파동이 어떤 지역에 도달했을 때 국지적으로 일어나은 사건에 불과하다. 파동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로는 미국의 생태학자인 피터 월쉬Peter Walsh가 있다. - P148

"한 마리도 남김없이 2003년 유행 때 죽었지요. "사실 죽었다기보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와 다른 추적자들은 고릴라 무리의 마지막 흔적을 따라가다 여섯 마리의 사체를 발견했다.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파리떼가 새카맣게 내려앉은 사체 중에 카산드라도 있었을까?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그의‘ 고릴라 가족들을 모두 잃었고, 몇 명의 인간 가족도 떠나보내야 했다.
프로스퍼는 오래도록 그 책을 들고 서서 이름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인수공통감염병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주의 깊은 관찰과 모델 연구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아는 것을 정서적으로 이해했다. 인간과 고릴라, 말과 다이커 영양과 돼지, 원숭이와 침팬지와 박쥐와 바이러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 P156

역학자들은 홍역은 물론 다른 병원체로 인한 감염병에도 숙주 개체수의 최소 임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개체수가 그 임계점 아래로 떨어지면 그 지역에서 계속 감염을 이어가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임계집단크기 critical community size, CCS는 질병동력학에서 중요한 파라미터다. 홍역의 임계집단크기는 25~4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런 범위는 바이러스의 전파 효율, 바이러스의 독성(치사율로 측정), 노출된 후 면역이 평생 유지되는지 등 질병의 고유한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25만 명 미만의 고립된 집단에서는 때때로 홍역 유행이 발생하더라도 비교적 단기간 내에 바이러스가 저절로 없어져 버린다. 왜 그럴까? 취약한 숙주들을 감염시킬 기회가 금방 소진되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에서는 성인은 물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어린이도거의 모두 이전에 홍역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면역을 가지고 있다. 매년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만으로는 바이러스가 계속 전파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인구수가 40만을 넘으면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만으로 취약한 숙주가 계속 공급되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이어나갈 수 있다.
홍역에 관해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인수공통감염 바이러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 집단 내 또는 근처에 사는 동물들을 감염시킬 수 있다면 임계집단크기라는 개념은 중요성을 잃고 만다. 인간 집단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바이러스는 항상 다른 서식처를 찾아 집단 내, 또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홍역 바이러스는 인간만 감염시키지만 매우 유사한 다른 바이러스들이 동물을 감염시키기 때문이다. 홍역 바이러스가 속한 모빌리바이러스 속에는 개홍역과 역 바이러스가 들어간다.  - P162

말라리아는 매개체 감염병이다. 곤충에 의해 한 가지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전염되는 병이라는 뜻이다. 매개체는 숙주가 아니다.  - P169

 모기가 사람을 물었을 때 피부를 뚫고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종충種蟲, sporozoite 이라는 형태로 암수 구별이 없는 무성세대에 속한다. 종충은 인간의 간으로 가서 역시암수 구별이 없는 낭충娘蟲merozoite 으로 변한다. 간을 빠져나온 후에는 적혈구를 침투한 후 그 속에서 분열하여 영양체營養體, trophozoite 가된다. 영양체는 적혈구 내부를 갉아먹으며 점점 성장하여 분열체分裂體) schizont로 변한다. 분열체는 적혈구를 찢고 쏟아져나와 다시 낭충이되어 혈액 속에서 증식하는 데 이때 특징적인 발열이 일어난다. 이렇게 적혈구를 감염시킨 후 혈액 속으로 쏟아져 나오는 일이 반복되다 나중에는 암수로 분화하여 유성세대가 시작되는데, 이때의 원충을 생식모세포生殖母細胞, gametocyte 라고 한다. 이 상태에서 모기가 다시 피를빨면 원충은 모기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생식세포는 모기의 장 속에서 유성생식을 거쳐 운동접합체 運動接合體cokinete가 되며 이들은 장벽에 달라붙어 종충으로 가득 찬 일종의 알주머니로 변한다. 종층들은 때가 되면 알주머니를 찢고 나와 모기의 침샘으로 가서 모기가 다른 숙주의 피를 빨 때까지 기다린다. 지금까지 요약한 말라리아 원충의 생활사를 한 번 읽고 이해했다면 생물학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연속적으로 정교하게 형태를 바꿔가며 순차적인 감염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오랜 적응의 결과로 적어도 모기와 숙주 입장에서는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사실 이렇게 정교하게 구조와 전략과 변형이 일어나는 모습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진화의 강력한 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 P170

물론 모든 것은 그 기원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 자체가 비교적 새로 출현한 동물종이므로 우리가 앓는 가장 오래된 감염병이라도 다른 동물, 즉 훨씬 오래된 숙주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진화에 의해 약간 변형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인수공통감염병과 여기 속하지 않는 질병을 구분하는 일 또한 다분히 작위적이다. 그 구분에는 시간적 요소가 중요하다.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인수공통감염 병원체(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겪는 감염병의 약 60퍼센드)란 현재 반복적으로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서 종간전파를 일으키는 병원체이며, 여기 속하지 않는 감염(천연두, 콜레라, 홍역, 소아마비 등 나머지 40퍼센트)은 과거 언젠가 우리 조상들에게 완전히 넘어온 병원체에 의해 발생한다. 우리가 앓는 모든 병이 궁극적으로 인수공통감염병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되겠지만, 인수공통감염병은 우리와 다른 동물숙주들 사이에 장구한 세월에 걸쳐 끈질기게 이어지는 연관관계를 나타내는 엄연한 증거다. - P172

열대열원충이발견된 보노보들은 뚜렷한 증상이 없었으며 혈액 중 원충 숫자도 낮은 편으로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기생숙주 관계였다는 설명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데이터를 근거로 한 이런 기술적 결과에 대해 크리예프 연구팀은 한 가지 가설과 한 가지 경고를 덧붙였다.
가설 - 보노보의 열대열원충이 인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면 이원충들은 보노보와 인간 사이를 오갈 수 있을 것이다. 즉, 열대형 말라리아는 넓은 의미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더라도 인수공통감염병일 가능성이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숲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보노보의 혈액에서 유래한 열대열원충에 일상적으로 감염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보노보 또한 인간으로부터 감염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경고 - 이것이 사실이라면 말라리아를 근절시킨다는 거대한 꿈은훨씬 더 달성하기 힘들 것이다. 크리예프 연구팀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결국 보노보를 최후의 한 마리까지 죽이거나 완치시키지 않는 한 절대로 말라리아를 근절시킬 수 없다는 뜻이 된다. - P186

웨스턴 고릴라는 말라리아 원충 감염률이 매우 높으며(약 37퍼센트가 감염되어 있다), 고릴라에서 분리된 원충의 일부는 열대열원충과 거의 동일했다. 그들은 확신에 차 이렇게 썼다. ‘이런 소견은 인간의 열대열원충이 침팬지나 보노보나 인류의 원시적 기원이었던 존재가 아니라 고릴라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인간의 열대열원충에서 나타나는 유전학적 범위 전체가 ‘고릴라 열대열원충 계통에 속하는 단일 계통monophyletic lineage을 구성한다‘고 덧붙였다. 쉬운 말로 하면 인간의 원충은 고릴라의 원충이라는 큰 가지에 속한 잔가지이며, 이 사실은 인간의 원충이 딱 한 번의 종간전파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뜻이다. 즉, 한 마리의모기가 한 마리의 감염된 고릴라의 피를 빤 후, 매개체가 되어 한 사람의 인간을 물어 감염시켰다는 말이다. 먼 옛날 한 마리의 모기가 한명의 사람을 물었던 사소한 사건에 의해 새로운 종의 몸속으로 들어간 원충이 현재 연간 100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인수공통감염병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 P177

전염병은 언젠가는 수그러든다. 그런데 왜 수그러드는 것일까? 커맥과 맥켄드릭의 말을 들어보자.

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전염병의 유행이 끝나는 것이더 이상 취약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질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 중에 취약한 사람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염력, 회복및 사망률 등 다양한 요인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두 번째 가능성을 지지했다. 즉, 질병의 유행은 감염력, 사망률, 회복(면역 획득)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에 의해 수그러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들의 또 다른 업적으로 네 번째 요인, 즉 취약한 사람의 숫자에어떤 ‘문턱값 밀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문턱값 밀도란 특정 감염률, 회복률 및 사망률이라는 조건하에서 유행병의 발생이 가능해지는 취약한 사람들의 밀집된 정도를 뜻한다. 결국 인구밀도, 감염률, 사망률, 회복률 등 네 가지 요인이 열과 불쏘시개와 불꽃과 연료처럼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것이다. 어떤 결정적인 조화가 이루어질 때, 즉 요소들이 가장 알맞은정도로 만나면 불이 붙는다. 유행병이 시작되는 것이다. 커맥과 맥켄드릭의 공식은 불이 점화되고, 계속 타오르다가, 마침내 꺼지는 조건들을 설명한 것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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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방울새가 한결같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무판은 무척 작아서 내가 빌린 미술 책에 적힌 것처럼 ‘A4 용지보다 아주 조금클 뿐‘이었다. 하지만 제작 연도와 실제 치수 같은 교과서적인 죽은 정보는전혀 상관없었다. 패커스 팀이 4쿼터에서 2점 앞서고 있는데 얼음 같은 싸눈이 경기장에 쌓이기 시작하면 신문 스포츠란의 통계가 상관없어지듯이 말이다. 그림은 그림의 마법과 생생함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카메과에 눈송이와 푸르스름한 빛이 소용돌이치는 그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순간과 같았다. 그렇게 말없이 바람이 휘몰아치는 순간이면 경기는,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는 더 이상 아무 상관없고 그저 술만 마시고 싶어진다. 나는 그림을 보면 항상 똑같은 한 지점에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고 언제까지나 존재할 쏟아지는 찰나의 햇빛이었다. 방울새의 발목에 달린 사슬이 눈에 띄는 것은, 혹은 잠깐 파닥이다가 항상 늘 같은 절망의 자리에 내려앉아야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작은 생물에게 얼마나 잔인한 삶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주 가끔뿐이었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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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그러나 이제 자연 생태계가 너무나 많이 파괴되어 이런 미생물이 점점 많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다. 나무들이 벌목되고 토종 동물들이 도살될 때마다, 마치 건물을 철거할 때 먼지가 날리는 것처럼, 그들의 몸에 깃들어 살던 미생물들이 주변으로 확산된다. 밀려나고 쫓겨나 서식지를 빼앗긴 기생적 미생물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새로운 숙주(또는 새로운 종류의 숙주를 찾든지, 멸종하는 것이다. 이들이 특별히 우리를 표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존재하고, 너무 주제넘게 침범하는 것이다. 질병의 역사를 연구하는 윌리엄 맥닐 William H. McNeill은 이렇게 말한다. "굶주린 바이러스, 또는 심지어 세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더라도 수십억 인체는 기가 막힌 서식지입니다. 인구는 최근까지도 지금의 절반에 불과했지요. 약 25~27년 사이에 인류는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니 인체에 침입하여 적응할 수만 있다면 기가 막힌 표적이죠." 바이러스, 특히 게놈이 DNA가 아니라 RNA로 되어 있는 바이러스는 돌연변이가 쉽게 일어나 매우 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 - P53

나는 단순한 정의가 좋다. 즉, 신종 전염병이란 ‘새로운 숙주 집단이 처음 노출된 후 발생률이 계속 증가하는 감염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물론 ‘감염‘, ‘증가‘, 그리고 ‘새로운 숙주‘다. 그렇다면 재유행 질병이란 ‘장기간에 걸친 역학적 변화에 따라 기존 숙주 집단에서 발생률이 증가하는 질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핵은 재유행 질병으로 특히 아프리카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결핵균이 새로운 기회를 맞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회란 에이즈에 감염되어 면역기능이 완전히 없어진 환자들이다. 황열 역시 감염된 원숭이와 감염되지 않은 사람사이에 이집트숲모기가 바이러스를 옮기는 환경이 다시 조성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재유행한다. 야생 원숭이를 보유숙주로 모기가 옮기는 또 다른 질병인 뎅기열은 2차대전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재유행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도시화의 진행, 여행객의 증가, 부적절한 하수 관리, 비효율적인 모기 방제, 기타 다른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다. - P55

 더욱이 ‘신종 인수공통감염병의 71.8퍼센트는 야생동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가축은 중요한 역할을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레이시아의 니파와 중국 남부에서 발생한 사스를 예로 들었다. 더욱 주목할 것은 가축에 의한 질병과 달리 야생동물과 관련된 발병 건수의 증가 속도가 갈수록 빨라진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야생동물에 의한 인수공통감염병은 모든 신종 전염병 중 전 세계인들의 보건에 가장 중요하고 점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로 볼 때, 신종 전염병의 예측 수단으로 야생동물 집단의 건강을 모니터링하고 인수공통감염을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병원체를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합리적인 결론이다. 야생동물들을 눈여겨보자. 이들을 포위하고, 구석으로 몰고, 몰살시키고, 잡아먹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질병에 걸리는 것이다. - P57

 최종보고서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은 기나긴 동물종의 목록 외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앞으로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세 가지 중요한 가정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첫째, 그들은 초기 연구를 근거로 보유숙주가 포유동물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아프리카에서 에볼라 유행은 항상 울창한 숲과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키크위트처럼 도시 지역의 유행도 숲 속에서 살았던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보유숙주는 숲 속에 사는 동물이라고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셋째, 에볼라 유행은 시간적으로 분산되어 나타났다. 한 번 유행하면 몇 년씩 잠잠하기도 했다. 이런 시간적 패턴은 보유숙주로부터 인간이 감염되는 일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렇게 종간전파가 드물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보유숙주 자체가 드문 동물종이거나, 사람과의 접촉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키크위트 팀이 아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권위있게 서술한 그들의 논문은 1999년 《감염병 저널> 특집 증보판에 여러 편의 에볼라 관련 논문들과 함께 발표되었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보유숙주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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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넌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착한 사람들 같더라, 아는 것도아주 많고, 아일랜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이런 사건을 많이 봤다. 영국과 파리 공항의 여행 가방 폭탄 사건이랑 탕헤르 노천카페 사건에 대해서 얘기해주더라. 너도 알지, 수십 명이 죽었는데 폭탄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은 하나도 안 다쳤던 거. 그 사람 말로는 꽤 이상한 현상들이 있었다나 봐. 특히 낡은 건물에서는 폐쇄된 공간, 울퉁불퉁한 표면, 반사물질 - 예측하기가 정말 힘들지. 음향학이랑 똑같대. 폭발파는 음파와 같아서 튀고 굴절한다더군. 때로는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가게 창문이 깨지기도 하고. 아니면-" 호비가 손목으로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넘겼다. "때로는 가까운 곳에, 그 사람 말로는 방패 효과라는 게 생긴대. 폭발 지점과 아주 가까운 것들은 무사한 거지. IRA가 숨어 있는 시골집이 폭발로 날아가도 찻잔은 깨지지 않는다거나, 너 같은 상황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날아온 유리 조각이나 잔해에 맞아서 죽지. 아주 멀리까지 날아갈 때도 있다더구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유리 조각이나 돌멩이는 총알만큼이나 강력하지." - P178

"기분이 왜 나아졌는지 알겠니?"
"아뇨, 별로요"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아졌다‘는 말이 적당한 표현도 아니었다. 내 기분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말할 거리도안 되는 사소한 일들-학교 복도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 과학 실험 시간에 수조 안을 재빨리 기어가는 도마뱀붙이- 때문에 순간적으로 즐거워졌다가 금방 울고 싶어진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러시아워의 차들이 줄어들면서 밤이 다가오고 도시는 점차 한석해지면 가끔 모래를 실은 축축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 파크가에서 불어 들어왔다. 비가 오고 나무에는 잎이 났고 봄이 깊어져 여름이 되어갔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경적의 쓸쓸한 울음소리와 젖은 보도의 축축한 냄새에는 강렬한 느낌이 있었다. 인파 속 포장음식을 든 뚱뚱한 남자들과 조용하고 외로운 비서들이 지나가고 있을 것같았다. 살아가기 위해서 억지로 고군분투하는 존재의 초라한 슬픔이 사방에 있었다. 몇 주 동안 나는 얼어붙은 채 봉인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샤워를하면서 물을 최대한 세게 틀고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모든 것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고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속에서 얼음이 깨진 틈으로 끌려나와 햇볕과 불타는 추위를 마주한 것 같았다. - P198

피파가 고개를 돌려 이어폰 한쪽을 빼서 나에게 주었다. "너도 같이 듣자고"
나는 침대 위 피파 옆에 앉아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천상의 화음, 천국에서 보내온 라디오 신호인 것처럼 인간의 것 같지 않고 가슴을 꿰뚫는 소리였다.
우리는 마주 보았다. "이게 뭐야?" 내가 말했다.
"으음-"피파가 아이팟을 보았다. "팔레스트리나."
"아."하지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은 순전히 비 오는 날의 어둑한 빛, 창가의 하얀 나무, 천둥, 피파 때문이었다. - P208

 그리고 피파의 입맞춤의 맛ㅡ달곰씁쓸하고 낯선맛은 흔들흔들 버스를 타고 졸면서 돌아오는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고, 슬픔과 사랑스러움과 함께 녹아들어서 반짝이는 아픔이 되어 바람이 휩쓰는 도시 높이, 나를 연처럼 날렸다. 내 머리는 비구름 속에, 내 마음은 하늘에 있었다. - P213

스완슨 선생님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숄이 걸쳐진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시오, 작고 일상적인 일들이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낼 수 있다는 걸 알면 넌 아마 놀랄 거야. 하지만 누구도 대신 해줄수는 없어 열린 문을 찾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선생님이 좋은 의도였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사무실에서 나왔고 분노의 눈물 때문에 눈이 따끔거렸다. 저 늙다리가 뭘 안다는 거야? 스완슨 선생님에게는 가족이 정말 많았다.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면 자식이 열 명에 손자가 서른 명이었다. 스완슨 선생님은 센트럴파크웨스트에 커다란 아파트가 있고 코네티컷에 집이 한 채 있었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지대가 부러져서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어떤느낌인지 전혀 몰랐다. 스완슨 선생님이 히피 느낌이 나는 팔걸이의자에기대어 앉아서 과외활동과 열린 문에 대해서 중얼거리기란 정말 쉬웠다.
하지만 뜻밖에도 문이 정말로 열렸다. 그것도 정말 생각지 못했던 호비아저씨의 작업장에서 의자 수리를 돕는 것(기본적으로 아저씨가 좌석을 뜯어서 벌레가 갉아 먹은 부분, 성급하게 수리한 부분, 덮개 아래 숨겨진 그밖의 여러 끔찍함을 보여주는 동안 옆에 서 있는 것이었다)‘은 곧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학교가 끝난 오후에 내가 이상할 만큼 몰입하는 두세 시간이되었다. 나는 병에 라벨을 붙이고, 토끼 가죽 아교를 혼합하고, 서랍 부품들(성가신 조각들을 정리하고, 때로는 호비 아저씨가 선반기로 의자 다리 다듬는 모습을 구경만 했다. 철문을 닫아두어서 가게는 늘 어두웠지만 가게 뒤의 가게에서는 괘종시계가 똑딱거리고 마호가니가 빛나고 식탁 위로빛이 들어와 금빛 연못을 만들었고, 진귀한 동물원 같은 아래층의 삶은 계속되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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