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라졌지만 그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림위에서 빛이 줄무늬를 이루며 어른거리자 나는 이 그림에 비하면 내 삶은아무 방향도 없는 순간적인 에너지의 분출, 번쩍이며 지나가는 가로등만큼이나 무작위적으로 지직거리는 생물학적 잡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역질이 났다. - P345

따끔따끔 살갗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구역질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순도 높은 약일수록 깰 때 더욱 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뒤따랐다. 나는마틴의 이마에서 두툼한 덩어리가 뿜어져 나오던 순간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더욱 생생해서 마치 그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맥박이 뿜어져 나오는 피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더 나쁜 것은,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생각은, 그림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피묻은 외투, 달아나는 소년의발소리, 암흑, 재앙, 육체에 갇힌 인간에게 자비는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깐 살면서 약간의 소란을 피운 다음 죽어서 땅 속에서 쓰레기처럼 썩는다. 시간은 모든 인간을 아주 빠르게 파괴한다. 하지만 죽음을 모르는 물건을 망가뜨리거나 잃는 것 - 시간보다 더 강력한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은 독특한 형이상학적인 단절, 놀랄 만큼 새로운 절망이었다. - P376

하지만 그건 괜찮았다. 나는 세상에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고 마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쉽게 잊혔다. 그것이 최소한의 사회적, 도덕적 교훈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역사가 기록되는 한, 만년설이 녹고 암스테르담 거리가 물에 휩쓸릴 때까지 - 사람들은 그림을 기억하고 애도할 것이다. 파르테논의 지붕을 날린 터키인들의 이름을 누가아는가, 누가 신경 쓰는가?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의 불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한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하지만 그들이 죽었든 살았든 그들의 행위는그대로다. 그것은 최악의 불멸이었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는 나는 세상의 마음속 불을 하나 껐다. - P381

반항, 공허하고 헛되고 견딜 수 없는 삶. 내가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가뭘까? 하나도 없다. 운명을 먼저 한 방 먹이면 어떨까? 책을 불 속에 내던지고 끝장내면 어떨까? 현재의 공포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내 안에서 비롯된 공포만이 아니라 외부적이고 경험적인 공포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은 충분히 있으므로(봉투 안을 보니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약을 두껍게 늘어놓고 흡입한 다음 행복하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고결한 어둠, 별들의 폭발. - P402

 마지막이 눈앞에 왔을 때, 밤이 다 저물었을 때, 눈을 감고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할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편안한 음식? 어린 시절 일요일에 먹던 평범한 닭고기 요리? 아니면, 정반대로 마지막 사치를 누리며 꿩고기와 진들딸기, 이탈리아 알바산 흰 송로 버섯을 먹을까? 나의 경우에는 복도로 나가기 전까지는 배가 고픈 줄도 몰랐지만 속이 쓰리고 입이 씁쓸한 그 순간 내가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선택한식사가 무엇이 될까 생각하고 있으려니 복도에 맴도는 그 달콤하고 따뜻한냄새만큼 맛있는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륙식 아침 식사의커피와 시나몬과 간단한 버터 롤, 나는 방으로 돌아가서 룸서비스 메뉴를고르면서 그렇게 간단한 것이 먹고 싶다니. 식욕 자체에 대해서 식욕을 느끼다니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 P418

"미안하지만 네 말의 요점을 진짜 모르겠어."
요점은 필요 없어. 요점은 네가 말하는 그 요점이라는 건 너무 거대해서 우리가 볼 수도 파악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는 거야. 왜냐면 박쥐 날개 같은 눈썹이 위로 치솟는다. "음, 네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가지고 나오지않았다면, 또 자사가 그걸 훔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보상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이번에 발견된 그 수많은 그림들을 아직 되찾지 못했을 거 아니야? 어쩌면 영원히 되찾지 못했을지도 몰라. 갈색종이에싸인 채 처박혀 있는 거지. 아직 그 아파트에 갇혀 있는 거 아닐까? 봐주는사람도 없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외롭게 갇혀 있는 거야. 어쩌면 다른그림들을 찾기 위해서 하나가 사라져야 했던 거 아닐까?"
"그건 ‘신의 섭리‘보다 ‘무자비한 아이러니‘에 더 가까운 거 같은데?"
"그래 - 하지만 꼭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가 뭐야? 그 둘이 똑같은 것일수는 없어?"
우리는 서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보리스의 수많은 눈에 띄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보리스를 좋아하고 함께 있으면 행복했던 이유는 보리스가 절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경멸하면서도 어린 시절 보리스가 ‘지구별‘이라고 부르던 것에 그토록 별나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서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 P444

"어떤 그림이 정말로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면 ‘아, 난 이 그림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좋아‘ 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사람이 어떤 예술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아니야. 그걸 좋아하게 만드는 건 좁은 통로에서 들려오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이지. 쉿, 그래, 너 얘야. 그래, 너." 손가락 끝이 빛바랜 사진 위로 미끄러진다. 만지지 않는 듯 만지는 복원가의 손길, 표면과 검지 사이에 제병*만큼얇은 틈이 있다. "아주 사사롭게 마음을 건드리는 거야. 너의 꿈, 웰티의 꿈, 페르메이르의 꿈. 네가 보는 그림은 내가 보는 그림과 달라. 미술 책은 그걸 또 다른 위치에 놓고, 미술관 기념품 가게에서 카드를 사는 여자는 또 전혀 다른 걸 보겠지. 우리와 다른 시대의 사람들-4백 년 전에 살던 사람들, 4백 년 후에 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절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가지 않을 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심오한 느낌을 받지 않겠지, 정말로 위대한 그림은 아주 유동적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사람들의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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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은 독자라면 내가 에볼라를 박쥐가 보유숙주인 바이러스 속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분류는확정적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박쥐에서 살아 있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분리해 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바이러스를 분리해 내는 것이 보유숙주를 밝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으므로 아마 조만간 밝혀질 것이다. 그 동안에는 에볼라와 박쥐를 연결하는 증거가 추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너던 타우너의 팀이 에볼라와 매우 밀접한 마르부르크병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추정은 더욱 강해졌다.  - P458

어떤 인수공통감염 병원체는 처음부터 인간 사이에서 효율적으로전파되는 능력을 지닌 것 같다. 오랜 세월 다른 동물을 숙주로 삼았음에도 우연히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종의 집단 내에서 쉽게 전파될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2002~2003년 사이에 광둥성과 홍콩에서 발생한 SARS-CoV는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나타냈다. 유행 이후SARS-CoV가 어디에, 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헨드라 바이러스는 그런 능력이 없다. 말들 사이에서는 쉽게 전파되지만 인간에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인간의 몸속에 들어온 다음에 돌연변이나 진화에 의해 그런 능력을 획득하는 병원체도 있다. 지난 15년간 유행병 전문가들 사이에 조류독감(균주명을따서 H5N1으로 부르기도 한다)에 관한 이야기가 큰 화제가 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많은 사망자를 낸 적은 없지만 매우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돼지독감도 인간 집단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면서(가장 최근에는 2009년이었다) 때로는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유행을 일으키고, 때로는 아주 심각하지는 않지만(2009년처럼), 조류독감의 잠재적인 심각성은차원이 약간 다르다. 독감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계속 H5N1 독감을주시하는 이유는 (1) 비교적 환자수가 적은 경우에도 인간의 몸속에서매우 심한 독성을 일으켜 사망률이 높지만, (2) 아직까지 인간에서 인간으로 쉽게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걸리면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높지만, 감염된 닭을 자기 손으로 도살하거나 하지 않는 한 걸릴 가능성이 매우 낮다. 자기가 먹을 닭을 손수 잡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전세계의 보건 관계자들이 우리가 접하는 닭, 즉 죽인 뒤 분해하여 비닐에 싸거나 다른 방법으로 가공한 닭고기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나않을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한다. 그러나 H5N1이 우연히 딱 맞는 방식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거나 재구성되어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파되기 쉬운 형태로 적응한다면 우리는 1918년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유행병을 보게 될 것이다. - P463

또 한 가지 시작점은 ‘환자 제로‘로 널리 알려진 캐나다 출신 젊은비행기 승무원 게탕 두가Gaétan Dugas 였다. 에이즈의 초기 전개 과정에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두가는 흔히 ‘아프리카에서 바이러스를 들여와 서구 남성 동성애자 집단에 처음 퍼뜨린‘ 사람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걸쳐 매우 왕성하고, 비난 받아 마땅할 정도로 부주의한 ‘전파자‘ 역할을 수행한 것 같다. 항공기 승무원으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사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었던 그는 북미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상대를 바꿔 쾌락에 탐닉했다.  - P477

당시 바이러스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몽타니에가 바이러스Virus)라는 제목의 회고록에 적었듯이 그럴 가능성을 시사하는 세 가지 증거가 있었다. 첫째, 성적으로접촉한 동성애자들 사이의 발생률은 에이즈가 감염병임을 시사했다.
둘째, 정맥주사용 마약 사용자들의 발생률은 혈액 매개성 감염을 시사했다. 셋째, 혈우병 환자에서 발생한 증례들은 이 혈액 매개성 병원체가 응고인자 등 혈액제제 제조과정에서 검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했다. 따라서 에이즈의 원인은 극히 미세하고, 혈액을 통해 전염되는 병원체일 것이었다. 몽타니에는 이렇게 썼다. ‘기존에 알려진 세균이나 곰팡이, 또는 원충이 에이즈를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 이런 병원체들은 혈우병 환자에게 필요한 혈액제제 제조과정에서 필터에 의해모두 걸러지기 때문이다. 이는 에이즈의 병원체가 아주 작다는 뜻이며, 결국 바이러스일 수밖에 없었다.‘ - P483

HIV-2는 HIV-1보다 전파력이나 독성이 약하다. 이렇게 결정적인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아직 분자 수준에서 밝혀지지 않은 채 게놈 속에 숨어 있지만 생태학적, 의학적 결과는 분명하고 엄혹하다. HIV-2는 주로 세네갈과 기니비사우 (식민시대에는 포르투갈 기니라고 불렸다) 등 서아프리카 국가들과 포르투갈 본토 및 인도 서남부 등 예전 포르투갈 제국 내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연결된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HIV-2 에 감염된 사람은 혈액 내 바이러스 수치가 낮으며, 성적 접촉시에도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는 일이 적고, 면역결핍 또한 오래 시간이 지난 후 나타나는 데다 덜 심한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이 아예 에이즈로 진행하지 않는 것 같다. 산모가 감염되더라도 아기에게 수직감염될 가능성이 더 낮다. 물론 고약하지만 에이즈 바이러스라는 이름만큼 고약하지는 않은 것이다. HIV-1은 전혀 다르다.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이 감염되어 있다고 할 때는 HIV-1을 가리킨다. HIV-1은 세계적인 재앙이다.  - P499

M군 GroupM은 가장 흔하고 독성이 강하다. 영문자 M은 ‘주요 main‘에서 따온 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 대부분의 에이즈바이러스 감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HIV-1 M군이 없다면 전 세계적인 유행과 수백만에이르는 사망자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O군GroupO)이다. 여기서는 ‘역외자outler‘에서 따왔다. 여기 속하는 바이러스들은 종류가 몇 되지 않고, 기원을 추적해보면 하나같이 유행이 집중된 지역을벗어난 곳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기원은 가봉, 적도 기니, 카메룬 등모두 중앙아프리카 서쪽 지역이다. 1998년 세 번째 바이러스 군이 발견되었을 때는 N으로 표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었다. ‘M군도 아니고 0군도 아니다 non-Minon-o‘라는 뜻이면서 알파벳 순서도 대충맞기 때문이다. (몇년뒤 발견된 네 번째 바이러스 군은 군으로 명명되었다.) N군은 극히 드물어 명명 당시까지 단 두 명의 카메룬인에서만 발견되었다. N군과 O군이 드물기 때문에 M군이 엄청나게 두드러지기도 한다. M군은 어디에나 있다. 왜 이 계통은 널리 분포하고 치명적인데 반해 나머지 두 가지(또는 세 가지) 계통은 그렇지 않은가? - P503

과학자들은 이들 12개 바이러스 군이 각자 따로따로 동물종 간의경계를 뛰어넘어 인간에게 전파되었다고 생각한다. 종간전파가 12번 일어났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인류를 감염시킨 것은 한 번이 아니다. 그런 일은 최소한 12번 일어났다. 우리가 아는 것만 12 번이고 어쩌면 아주 먼 과거에 훨씬 자주 일어났을 것이다. 이들의 종간전파는 매우 드문 사건이 결코 아니다. 어느날 무한공간을 날아온 혜성이 지구를 강타하여 공룡들을 멸종시켰듯, 호모 사피엔스란 종이 극히 가능성이 희박한 불운에 맞닥뜨려 참담한 결과가 생긴 것이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인간의 혈액 속에 침투한 것은 작지만, 어떤 경향의 일부다. 우리와 아프리카 영장류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특성상 그런 일은 상당히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 P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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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를 확인하니 새벽 네시였다. 나는 30분 동안 괴로워하다가 맨몸으로 어둠 속에서 일어나 앉아서 - 프랑스 영화 속의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 담배에 불을 붙이고 새벽이라서 말 그대로 텅 빈 렉싱턴가를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택시들은 이제 영업을 시작하거나 끝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꿈은 흩어지기를 거부하고 유독한 수증기처럼 공기 중을 떠돌았고, 꿈속의 비현실적인 위험에 그 무방비하고 위험한 느낌에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렸다. - P247

적어도 거기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야 할까, 오른쪽으로 꺾어야 할까? 나의 모든 운명은 전철 F선을 탈지 6호선을 탈지에달려 있는 거야. 끔찍한 예감이지. 모든 게 겁나 여기 돌아오면 난 열세 살로 돌아가버려 그러니까,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모든 게 그날에 멈춰버려, 난 심지어 성장도 멈췄어. 왜냐면 그거 알아? 난 그 사건 이후로 1센티미터도 안 자랐으니까 단 1센티미터도."
"딱 좋은 키야."
"음, 흔한 일이야." 피파가 나의 서툰 칭찬을 무시하며 말했다. "다쳐서 트라우마를 갖게 된 아이들 그런 애들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피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따금 그녀의 담당 의사 카멘친트의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그가 장악하는 순간, 피파가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원이 분산되는 거야 성장 체계는 멈추는 거지. 우리 학교에 어떤 여자애가 있었어. 사우디 공주인데 열두 살 때가 납치됐었다. 납치범은 처형됐지. 하지만-난 개가 열아홉 살 때 만났는데, 좋은 애었지만 키가 작았어. 150센티미터정도였을 거야.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납치당한 그날 이후로 1센티미터도 안자란거야."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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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고단한 가게. 나는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앉았다가, 창가로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모든 것이 공포로 흠뻑 젖었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자기 어릿광대가 앙심을 품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가구들조차 구역질나고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업타운의 창고 회사에 숨겨둔 비밀 때문에 내가 더 나은 사람, 더 현명한 사람, 더 고귀하고 소중하고 살가치가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림으로 인해 덜 유한하고 덜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그 증거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수단이자 전부였다. 그것은 대성당을 지탱하는 쐐기돌이었다. 나를 받쳐주던 그림이 내 인생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 항상 그거대하고 야만적이고 숨겨져 있는 기쁨에 의지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끔찍했다. 그것은 내 인생 전체가 언제라도 자신을 산산조각 낼 수있는 비밀 위에 균형을 잡으며 서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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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추아의 연구 덕분에 타당성 있는종간전파 시나리오가 마련된 것이다. 바이러스는 어떻게 박쥐에서 돼지로 전파되었을까? 필요한 조건은 양돈장 근처에 잘 익은 과일을 잔뜩 매단 망고나무나 물사과나무가 있는 것뿐이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박쥐가 물사과를 먹다가 씹다 만 조각을 땅에 뱉는다(박쥐들은 곧잘 이런 행동을 한다), 바이러스가 우글우글한 과일 조각이 돼지들 사이에 떨어진다. 한 마리가 다가와 이 맛난 과일을 게걸스럽게 먹을 때 상당한 양의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간다. 바이러스는 돼지의 몸속에서복제를 일으키고 다른 돼지에게 전파된다. 머지않아 돼지떼 전체가 감염되고, 돌보던 인간이 쓰러진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나리오가 아니다. 현재 말레이시아의 농업은 매우 다변화되어 있다. 축산과 함께 과일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기 때문에 양돈장 주변에 망고나 물사과는 물론 다른 과일나무가 늘어서 있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수 있다. 니파 바이러스는 달콤한 과일 조각의 형태로 하늘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어떤 돼지가 마다하겠는가? - P406

 루비의 연구팀은 연구를 통해 인도날여우박쥐 중 일부가 니파 항체 양성이라는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돼지를 통하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박쥐에서 사람으로 종간전파를 일으켰을까? 여기서 대추야자수액이 등장한다. 인도날여우박쥐도 이 수액을 무척 좋아한다. 나무 주인들은 밤에 대추야자 나무에서 박쥐 소리가 들린다고 불평을 해댔다. 탕가일에서 연구를 마친 후 루비의 팀은 이렇게 보고했다.

나무 주인들은 과일박쥐가 나무에 상처를 낸 자리, 또는 그 밑에 받쳐놓은 항아리에서 직접 야자나무 수액을 먹는 일이 잦다고 매우 성가시게 생각했다. 박쥐의 배설물이 항아리 주변에 떨어져 있거나 수액 위에 떠 있는 일도 흔히 있었다. 항아리 속에 아예 죽은 박쥐가 떠 있는경우도 가끔 있었다. - P414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유행이 발생한 방글라데시 서부는 니파 토착지역으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이 대추야자나무의 토착 서식지이기때문이다. 박쥐는 그보다 훨씬 폭넓게 분포하지만 서부는 특히 사탕대추야자가 잘 자라고 사람들이 그 수액을 즐기는 지역이다. 수액 채취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겨울의 시작으로 여기는 첫 번째 추운 밤,
즉 12월 중순에 시작된다. 수액을 채취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는 가치라gachis 라고 부른다. 방글라데시 말로 가츠gach는 나무라는 뜻이므로 결국 ‘나무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추야자나무의 소유주는 다른 사람들이다. 보통 채취한 수액의 절반이 소유주의 몫이다. 가치라는 빈곤충 농업 노동자들로 보통 한철 부업 삼아 이 일을 한다. 수액을 채취하려면 먼저 나무에 올라간 후 꼭대기 근처에서 나무 껍질을 V자 모양으로 크게 벗겨낸다. V자의 맨 아래에 대나무로 만든 대롱을 꽂고, 대롱 끝에 작은 옹기 항아리를 매달아 둔다. 밤새 대롱을 통해 흘러내린 수액이 항아리 속에 고이는 것이다. 가치라는 해뜨기 직전에 다시 나무로 올라가 신선한 수액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갖고 내려온다. 나무한 그루에서 얻는 수액을 10시 전에 판다면 보통 10타카(taka, 방글라데시의 화폐단위, 1타카는 약 30원-역주)를 번다. 그는 많은 나무에서 채취한 수액들을 커다란 알루미늄 용기에 붓는다. 이때 수액과 박쥐똥, 박쥐 오줌, 그리고 바이러스가 한데 섞인다. 이제 그는 신이 나서 수액을 팔러 나간다. 불순물이 섞인다고 해도 눈하나 꿈쩍 않는 가치라들이 많다. 누군가는 루비의 팀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들이 나무에서 수액을 먹는다고요? 아무 문제없어요. 새들이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요. 박쥐나 다른 동물이 수액을 먹어도 쫓아내지 않으면 신이 은총을 베풀어 주신답니다." 그는 신의 은총을 얻고 고객들은 니파를 들이마신다. 물론 신경을 쓰는 가치라들도 있다. 죽은 벌이나 새털, 박쥐 똥이 섞여 거품이 일고 찐득거리는 수액보다 붉고 투명한 수액이 더 좋은 값을 받기 때문이다. - P415

RNA바이러스는 돌연변이율이 높고 복제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어디든 잘 적응하며, 모든 종간전파는 어디엔가 적응하여 한몫 잡을 새로운 기회라는 점을 그는 상기시켰다. 우리는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동물바이러스가 종간전파를 일으켜인간의 몸속에 뛰어드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들 바이러스 중많은 수가 아예 질병을 일으키지 않거나, 새로운 질병을 일으키더라도보건의료가 거의 보급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미 알려진 질병으로 오인된다. "요점은 바이러스에게 종간전파를 일으킬 기회가 많이 주어질수록, 새로운 면역계에 대항하여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일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돌연변이는 마구잡이로 일어나지만 놀랄 만큼 빈도가높고, 엄청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뉴클레오티드를 새롭게 조합시킨다.
"그러다 보면 조만간 새로운 숙주에게 적응하는 데 딱 맞는 조합을 발견하는 바이러스가 나오게 됩니다."
‘기회‘에 관한 이런 지적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라기보다 훨씬 미묘한 구석이 있다. 전에도 나는 몇몇 질병과학자들에게서 같은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전체적인 상황이무작위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정확히 지적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신종 질병이라는 현상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호모 사피엔스를 공격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열대우림의 복수‘라는 식으로 별 생각없이 수다를 떠는 것은 그런 낭만화의 예라고 할 수 있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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