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라졌지만 그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림위에서 빛이 줄무늬를 이루며 어른거리자 나는 이 그림에 비하면 내 삶은아무 방향도 없는 순간적인 에너지의 분출, 번쩍이며 지나가는 가로등만큼이나 무작위적으로 지직거리는 생물학적 잡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역질이 났다. - P345
따끔따끔 살갗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구역질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순도 높은 약일수록 깰 때 더욱 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뒤따랐다. 나는마틴의 이마에서 두툼한 덩어리가 뿜어져 나오던 순간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더욱 생생해서 마치 그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맥박이 뿜어져 나오는 피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더 나쁜 것은,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생각은, 그림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피묻은 외투, 달아나는 소년의발소리, 암흑, 재앙, 육체에 갇힌 인간에게 자비는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깐 살면서 약간의 소란을 피운 다음 죽어서 땅 속에서 쓰레기처럼 썩는다. 시간은 모든 인간을 아주 빠르게 파괴한다. 하지만 죽음을 모르는 물건을 망가뜨리거나 잃는 것 - 시간보다 더 강력한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은 독특한 형이상학적인 단절, 놀랄 만큼 새로운 절망이었다. - P376
하지만 그건 괜찮았다. 나는 세상에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고 마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쉽게 잊혔다. 그것이 최소한의 사회적, 도덕적 교훈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역사가 기록되는 한, 만년설이 녹고 암스테르담 거리가 물에 휩쓸릴 때까지 - 사람들은 그림을 기억하고 애도할 것이다. 파르테논의 지붕을 날린 터키인들의 이름을 누가아는가, 누가 신경 쓰는가?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의 불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한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하지만 그들이 죽었든 살았든 그들의 행위는그대로다. 그것은 최악의 불멸이었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는 나는 세상의 마음속 불을 하나 껐다. - P381
반항, 공허하고 헛되고 견딜 수 없는 삶. 내가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가뭘까? 하나도 없다. 운명을 먼저 한 방 먹이면 어떨까? 책을 불 속에 내던지고 끝장내면 어떨까? 현재의 공포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내 안에서 비롯된 공포만이 아니라 외부적이고 경험적인 공포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은 충분히 있으므로(봉투 안을 보니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약을 두껍게 늘어놓고 흡입한 다음 행복하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고결한 어둠, 별들의 폭발. - P402
마지막이 눈앞에 왔을 때, 밤이 다 저물었을 때, 눈을 감고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할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편안한 음식? 어린 시절 일요일에 먹던 평범한 닭고기 요리? 아니면, 정반대로 마지막 사치를 누리며 꿩고기와 진들딸기, 이탈리아 알바산 흰 송로 버섯을 먹을까? 나의 경우에는 복도로 나가기 전까지는 배가 고픈 줄도 몰랐지만 속이 쓰리고 입이 씁쓸한 그 순간 내가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선택한식사가 무엇이 될까 생각하고 있으려니 복도에 맴도는 그 달콤하고 따뜻한냄새만큼 맛있는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륙식 아침 식사의커피와 시나몬과 간단한 버터 롤, 나는 방으로 돌아가서 룸서비스 메뉴를고르면서 그렇게 간단한 것이 먹고 싶다니. 식욕 자체에 대해서 식욕을 느끼다니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 P418
"미안하지만 네 말의 요점을 진짜 모르겠어." 요점은 필요 없어. 요점은 네가 말하는 그 요점이라는 건 너무 거대해서 우리가 볼 수도 파악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는 거야. 왜냐면 박쥐 날개 같은 눈썹이 위로 치솟는다. "음, 네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가지고 나오지않았다면, 또 자사가 그걸 훔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보상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이번에 발견된 그 수많은 그림들을 아직 되찾지 못했을 거 아니야? 어쩌면 영원히 되찾지 못했을지도 몰라. 갈색종이에싸인 채 처박혀 있는 거지. 아직 그 아파트에 갇혀 있는 거 아닐까? 봐주는사람도 없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외롭게 갇혀 있는 거야. 어쩌면 다른그림들을 찾기 위해서 하나가 사라져야 했던 거 아닐까?" "그건 ‘신의 섭리‘보다 ‘무자비한 아이러니‘에 더 가까운 거 같은데?" "그래 - 하지만 꼭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가 뭐야? 그 둘이 똑같은 것일수는 없어?" 우리는 서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보리스의 수많은 눈에 띄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보리스를 좋아하고 함께 있으면 행복했던 이유는 보리스가 절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경멸하면서도 어린 시절 보리스가 ‘지구별‘이라고 부르던 것에 그토록 별나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서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 P444
"어떤 그림이 정말로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면 ‘아, 난 이 그림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좋아‘ 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사람이 어떤 예술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아니야. 그걸 좋아하게 만드는 건 좁은 통로에서 들려오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이지. 쉿, 그래, 너 얘야. 그래, 너." 손가락 끝이 빛바랜 사진 위로 미끄러진다. 만지지 않는 듯 만지는 복원가의 손길, 표면과 검지 사이에 제병*만큼얇은 틈이 있다. "아주 사사롭게 마음을 건드리는 거야. 너의 꿈, 웰티의 꿈, 페르메이르의 꿈. 네가 보는 그림은 내가 보는 그림과 달라. 미술 책은 그걸 또 다른 위치에 놓고, 미술관 기념품 가게에서 카드를 사는 여자는 또 전혀 다른 걸 보겠지. 우리와 다른 시대의 사람들-4백 년 전에 살던 사람들, 4백 년 후에 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절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가지 않을 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심오한 느낌을 받지 않겠지, 정말로 위대한 그림은 아주 유동적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사람들의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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