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누르하치의 등장
만주 땅에 중원을 노리는자가 있었다

‘두고봐라. 나 누르하치가 모든 여진 부족을 복속시키고말 것이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추장으로, 뛰어난 용사였다. 당시 명은 만주의 여진족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구분했는데, 이들 안에는 또 여러 부족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야심을 감춘 채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 P12

 허균은 포기하지 않고 1608년 누르하치의 침공을 경고하는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와 <병론>을썼다.

세상에 군대 없는 나라는 없다. 군대 없이 유지되는 나라도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런 기적적인 나라가 하나 있다.
조선이다. 변변한 군대도 없이 전쟁으로 단련된 왜군의 침략을 이겨냈다. 나도 가족을 잃었고,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기적이다. - <서변비로고>

‘기적적인 나라, 조선‘. 이 말은 반어법이다. 기적은 한 번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은 그 처절한 전쟁을 겪고도 변하지 않았다.

아,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국방을 잊었다. 장수들은 시간만 때우며, 보직 이동만 기다린다. 군인명부의 반은 비었고, 군사는 훈련하지 않는다. 성곽은 무너지고 해자는 메워졌다. 조정에서 다른 관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에겐 명이 있다."라고 하거나 "우리는 성리학의 도를 지키는 나라이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 〈서변비로고〉 - P19

조선 관료들은 학식이 낮다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이해했다. ‘탐욕스러워 힘을 얻으면 못할 짓이 없다.‘라는 의미와
‘약탈은 하지만 지배는 못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신충일은 이렇게 판단했다. ‘이들이 조선을 침공한다면 목표는약탈이다. 점령지에 눌러앉아 통치할 엄두는 내지 못할 것이고, 설령 통치한다 하더라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 P32

신충일은 안심한 채 돌아왔고, 조정도 그의 보고에 안심했다. 소문은 부풀려지고, 무지는 공포로 둔갑하는 법이다.
신충일이 묘사한 퍼알라의 모습은 무지에 기반했기에 문명권과 거리가 먼 후진국의 모습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모습이야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거칠고 투박한 것이야야만인에게는 정상적인 모습 아닌가 문제는 신충일의 보고에는 여진군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는 점이다.
"멀리서 보면 기병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가난하고 피곤한 농민 병사들이었다. 누르하치의 권력은 불안하고, 다른 여진 부락들은 여전히 충성스럽지 않다."
한마디로 조선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여진족의 모습 그대로였다. 신충일은 여기에 낙관적 평가마저 더한다.
"소수 부족이 좀 강하다 한들 글을 아는 자도 없는 저들의문명 수준을 보건대 약탈 집단에 불과하며, 공격을 한다고해도 마을을 휩쓸고 분탕질을 할 뿐이지 광범위한 영토를정복할 수는 없다. 정복한다 해도 통치하지는 못한다. 무장수준도 조선이 여진 정벌을 감행했던 15세기에서 달라지지않았다. 저들은 아직 화포도 없지 않은가? 저들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운해진 것이다." - P35

 누르하치의 칸 등극, 그리고 유일하게 누르하치와 대적할 만한 장수의 재파면, 명과 여진 간 힘의 저울이 점차 여진 쪽으로 기운다. 명에서 이성량을 재파면하기 10년 전 그해에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했다. 새 국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에 간 이덕형은 명 관리들이 누르하치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 누르하치의 1차 목표는 요동이다. 그다음은 조선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조선은 당장 요새를 손보고 군사를 배치할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의 왜적과 수준이 다르다. 임진왜란 때처럼 조선이 도망쳐서 피하고자 하면(지구전으로 버티면서 명에 원병을 청하려는 전술을 쓰다가는) 여진의 기병이 바람처럼 휩쓸어 남아나는 백성이 하나도 없을것이다. 이번에는 우리도 도울 수 없다. 귀국에서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
이덕형은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 P39

광해군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비변사의 안을결재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중국의 병력으로도 누르하치를 한 번에 섬멸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번에 요동에 회답을 보낼 때는 경솔하게 정벌하지말고 신중하게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잘 써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명은 14만 대군이 요동으로 모여들고 있으며, 더 많은 병사가 오고 있다고 허풍을 쳤지만 광해군은 믿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경험 덕분인지 명군과 누르하치의전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광해군은 말했다. "조선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은 온 천하가 다 안다."
조선군의 문제점은 야전 野戰 과 공격 능력이었다. 수비는 곧잘 하는데 공격이 안 됐고, 더 큰 문제는 원정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 이동, 보급 등 모든것에 대한 준비가 전무했다.
솔직히 형편없기는 명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은 과연 명군이 후금의 홈그라운드로 들어가 누르하치를 섬멸할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조선군의 사정을호소하기도 하고, 명군의 계획이 너무 모험적이라고 충고도했다. 명군이 정말 자신있다면 조선군이 굳이 출정할 필요없이 압록강에 진을 치고 누르하치의 퇴로를 막으면 되지않겠냐고 타협안도 보내봤다. 그러나 명군은 고집불통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출정을 결정한다. - P45

사르후에서의 패전은 광해군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파병을 주장했던 사람들을 문책하고 싶었겠지만, 그들이 먼저역공을 했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 일부러 패하게 했다는 음모론을 퍼트린 것이다. 이 밀지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가짜뉴스일 것이다.
이 음모론이 먹혀든 원인은 일단 사람들이 패전을 믿고싶지 않아 했다는 게 가장 컸다. 패전으로 인한 상심에 위안을 줄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그게 광해군이 된 것이다.  - P50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인정전에서 벌어진국문장, 관원들은 허균의 입을 막고 끌고 나가더니 바로 처형해 버린다. 죄목은 역모, ‘민중을선동했다‘는 것이다. 직전까지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서며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위해 노력하던 허균에게는 어이없는 혐의였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허균이 이런 혐의를 뒤집어쓴 데는 그가 평소에 국방 문제, 여진침공에 관한 경고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 구실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면 허균은 왜 광해군과 북인들에게 배신당했을까? 필자는 북인 측이 허균을 폐모론의 선봉장으로 이용하다가 반발이 커지자 허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본다. 그러면 허균은 왜 서인 탄압과 독재 강화에 동조했을까? 허균은 조선의 국방 상황에 위험을 느끼고 있었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광해군의 권력에 비상한 힘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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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감염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는지 알아보는 것은 간단하지만, 거기에 이른 과정은 예측을 크게 벗어난다. 자크 페팽의 조사에 의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아이티에서 바이러스가 증식하고 퍼진 과정이 새롭게 밝혀졌던 것이다. 일단 1966년경 단 한 명의 감염자로부터 에이즈 바이러스가 아이티 전역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이 사실은 1982년에야 포르토프랭스 Port-au-Prince 빈민가에 거주하면서 한 소아과 의원을 통해 홍역 임상시험에 참여한 553명의 젊은엄마들의 혈액 검체에서 밝혀졌다. 검체들을 후향적으로 검사한 결과 7. 8퍼센트의 여성이 에이즈바이러스 양성으로 판정되었다. 어떤 사회에 새롭게 도입된 바이러스치고는 놀랄 만큼 높은 수치였으므로 페팽은 틀림없이 초기에 성적접촉을 능가하는 ‘매우 효과적인 증폭 기전‘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능성있는 기전을 찾아냈다. 바로 혈장매매다.
혈장이란 혈액에서 혈구를 제거한 후 남는 액체 성분으로 항체와알부민과 응고인자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매우 유용하다. 1970년 무렵, 크게 증가한 혈장 수요에 발맞추기 위해 혈장분리교환술plasmapheresis 이라는 기법이 개발되었다. 기증자의 혈액을 여과시키거나 원심분리하여 혈장과 혈구를 분리한 후, 혈구는 다시 기증자의몸에 넣어주고 혈장만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한 명의기증자로부터 1년에 고작 몇 번밖에 채취할 수 없었던 혈장을 훨씬 자주 채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증자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돈이 필요해서 신체적 부담을 감수하는 판매자들이다.)  - P607

생태학자들은 이런 사건을 가리켜 대발생outbreak 이라고 부른다. 질병의 유행 outbreak 이라고 할 때보다 훨씬 일반적인 용법이다. 그 속에질병의 유행이 포함된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어쨌든 보다 넓은 의미에서 대발생이라는 말은 단일한 동물종의 개체수가 갑자기 엄청나게늘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대발생을 일으키는 동물종이 있는가 하면,
일으키지 않는 종도 있다. 레밍 (lemming, 나그네쥐)은 대발생을 일으키지만수달은 그렇지 않다. 메뚜기 중 일부, 생쥐 중 일부, 불가사리 중 일부종은 대발생을 일으킨다. 분류학적으로 같은 집단에 속하는 다른 동물종들은 그렇지 않다. 딱따구리가 대발생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울버린(wolverine, 북미산 족제비과에 속하는 맹수-역주)이 대발생을 일으킬 가능성도 거의 없다. 한편, 나비목(Lepidoptera, 나방과 나비)에 속하는 곤충들중에는 천막애벌레뿐만 아니라 매미나방 gypsy moth, 독나방 tussock moth, 낙옆송새싹나방 larch budmoth 등 대발생을 일으키는 몇몇 종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나비목 중에서도 일반적이라기보다 예외적 존재다. 숲속에 사는 나비와 나방 중 약 98퍼센트는 비교적 낮은 밀도로 안정적인 개체수를 유지한다. 대발생을 일으키는 좋은 기껏해야 2퍼센트에불과하다. 곤충, 또는 포유동물이나 미생물 가운데 어떤 동물종이 대발생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우 복잡한 질문이다. 전문가들조차 아직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앨런 베리먼Alan A. Berryman 이라는 곤충학자는 <대발생의 원리 및 분류The Theory and Classification of Outbreaks〉라는 논문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있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대발생이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특정한 동물종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함없이 단조로운어조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관점에서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심각한 대발생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대발생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베리먼은 특히 지난 2세기 동안 일어난 인간 집단의 성장 속도와 크기를 지적한 것이다. 이런 말이 도발적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 P618

우리는 경이롭고, 유례 없는 존재다. 우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행성 위에서 다른 어떤 영장류도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우리는 거의 모순적인 존재다. 몸집이 크고 수명이 길면서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현상, 대발생이다. - P621

"무엇보다 RNA 바이러스인 만큼 돌연변이율이 높지요. 증식은 활발한데 품질 관리가 안 된다고 할까요. 유전암호를 구성하는 각각의문자 수준에서 복제 오류가 끊임없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걸 설명하기엔 어림도 없지요. 훨씬 중요한 문제는 재배열입니다." 재배열이란 두 가지 서로 다른 바이러스 아형 사이에 게놈 분절 전체가우발적으로 교환되는 현상이다. 독감 바이러스는 게놈이 분절화되어있어 서로 다른 유전자끼리도 분절이 나뉘는 지점은 정확히 들어맞기때문에 재배열이 자주 일어난다. 적혈구응집소만 해도 16종류잖아요. 뉴라미니다아제도 9가지나 되지요. 그러면 쉽게 계산할 수 있지요?" 머릿속에서 실제로 계산해보았다. 144가지의 조합이 나왔다. 이런 변화는 무작위적이며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바이러스가죽는 것이다. 그러나 무작위적인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변이는 끝없는가능성을 탐구하는 것과 같다. 자연선택, 적응, 진화의 원재료인 것이다. 독감이 그토록 놀랍고, 그토록 새롭고, 그토록 무시무시한 이유는수많은 돌연변이와 재배열을 통한 변화무쌍함에 있다. - P632

바이러스 진화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들, 수많은 질병과학자들에게똑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1) 가까운 시일 내에 에이즈나 1918년의독감처럼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신종 질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까요? (2) 그렇다면 그 질병은 어떤 형태이며 언제 발생할까요?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럴 수도 있다‘ 또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가 가장 많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RNA 바이러스, 특히 영장류를 보유숙주로 하는 바이러스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다음번 대유행이 실제로 찾아온다면, 그 병은 인수공통감염이라는 대전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P639

과학 문헌을 찾아보면 거의 동일한 신중하지만 정보에 근거한 추측을 보게 될 것이다. 현재 피츠버그 대학 공중보건대학원 학장인 유명한 바이러스학자 도널드 버크 Donald S. Burke는 1997년 나중에 책으로출판된 강연을 통해 어떤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가능성이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첫 번째 기준이 가장 명확합니다.
인류 역사상 최근에 전 세계적인 유행을 일으킨 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르토믹소바이러스(독감)와 레트로바이러스(에이즈)가 먼저 물망에 오른다. "두 번째 기준은 인간이 아닌 동물 집단에서 큰 유행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오르토믹소바이러스와 함께 파라믹소바이러스(헨드라와 니파), 코로나바이러스SARS-CoV가 떠오른다. 버크의 세 번째 기준은 "내재적 진화가능성", 즉 돌연변이와 재조합이 쉽게 일어나 "인간 집단 내에서 신종 질병으로 나타나고, 전 세계적인 유행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바이러스"이다. 그 예로는 다시 레트로바이러스, 오르토믹소바이러스, 코로나바이러스를 들었다. 그리고 특별히 코로나바이러스를 지목하며 "이들 바이러스 중 일부는 인류 보건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진화 가능성이 높고 동물 집단에서 유행병을 일으키는 능력이입증되어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  - P640

다양한 전문가들이 이런 요인들에 대해 경고해 왔으며, 이런 요인들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열거해 보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우선 우리는 개체수가 70억을 넘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상승세를 멈추고 보합상태로 돌아서기 전에 세계인구는 90억을 가볍게 넘길 것이다. 많은도시에서 우리는 밀집된 환경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이 행성에 마지막으로 남은 거대한 숲과 야생 생태계를 침입하여 물리적 구조와 생태학적 공동체를 파괴해 왔으며, 지금도 계속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콩고 전역을 망가뜨렸다. 아마존도 망가뜨렸다. 보르네오도 망가뜨렸다. 마다가스카르도 망가뜨렸다. 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도망가뜨렸다. 이익을 노리고 나무들을 베어 넘어뜨렸으며,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른 채 돈을 챙기는데만 급급했다. 숲에서 발견한 야생동물들은 보는 족족 죽여 고기를먹어치웠다. 그 자리에 정착하여 작업장과 주거지와 마을과 채취산업과 새로운 도시들을 세웠다. 그곳에 우리가 길들인 동물들을 데리고들어가 야생동물종을 가축으로 대체해 버렸다. 우리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가축들의 숫자도 늘어야 했기에 거대한 공장식 축산업을 일으켰다. 소와 돼지와 닭과 오리와 양과 염소는 물론 수많은 대나무쥐와 딸시벳까지 집단적으로 축사와 울타리 속에 가두어 이런 가축 또는 반가축화된 동물들이 외부로부터(축사 위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병원체에 감염되고, 그런 감염이 그 속에서 널리 퍼지고, 그런 병원체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소나 오리는 물론 우리 자신까지 감염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이렇게 대량으로 사육하는 가축들에게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중을 불리고 이윤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도축할 때까지만 건강을 유지시킬 심산으로 예방 용량의 항생제를 투여함으로써 저항성 세균의 진화를 부추겼다. 우리는 아주 먼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놀라운 속도로 가축들을 수출하고 수입한다. 의학 연구를 위해 살아 있는 동물, 특히 영장류를 수출하고 수입한다. 이국적인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야생동물을 수출하고 수입한다. 무임승차한 미생물 승객이 몰래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짐승의 가죽과 사냥이 금지된 동물의 고기와 채취가 금지된 식물들을 수출하고 수입한다. 우리는 가축을 수송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시와 대륙 사이를 오간다. 우리는 낯선 사람들이 재채기를 해대는 호텔에서 묵는다. 우리가 들른 식당의 주방장은 우리가 주문한 조개 요리를 만들기전에 호저를 도살한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원숭이 사원을 방문하고, 인도에서는 살아 있는 동물을 파는 시장을 방문하고, 남미에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을 방문하고, 뉴멕시코 주에서는 먼지가 뽀얗게이는 고고학적 유적을 방문하고, 네덜란드에서는 젖소 목장을 방문하고, 아프리카 동부에서는 박쥐가 사는 동굴을 방문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경마장을 방문하여 공기를 호흡하고, 동물들에게 먹이를주고, 이곳저곳을 손으로 만지고, 친절한 현지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모기와 진드기들에게물린다. 우리가 배출한 탄소가 기후를 변화시킴에 따라 모기와 진드기가 서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나 엄청난 숫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험심이 강한 미생물에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과 기회를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이 인수공통감염병의 생태학과 진화생물학에서 중요한주제들이다. 생태학적 환경은 종간전파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진화는 종간전파가 전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번지는 과정을 촉진한다. - P643

나는 매일 그 나무를 지나친다. 거의 항상 그 자국이 거기 있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거의 항상 애벌레들이 엄청난 숫자로 몰려왔다가사라져 버린 일을 기억한다. 한때 모든 상황이 그들에게 유리했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어쩌면 행운이야말로 결정적인 요소인지모른다. 어쩌면 상황이 중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냥 운명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행동일 것이다. 유전학일 수도 있다. 요즘 나는 나무에생긴 그 자국을 보면서 종종 그렉 드와이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 P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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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 가방과 배낭을 들고 비행기에서 내리려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다른 승객들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면서 아름다움은 현실의 결을 바꾼다는호비 아저씨의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순전한 아름다움을 좇는 것은 함정이며 씁쓸함과 슬픔으로 빠지는 지름길이고, 아름다움은 더욱 의미 있는것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더욱 진부한 지혜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의미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나는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왜나는 잘못된 것에만 관심이 가고 올바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까?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나는 어째서 내가 사랑하거나 관심을 갖는 모든 것이환상이라는 사실을 빤히 보면서도 어쨌든 나만은 그 매력 속에서 거짓을위해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크나큰 슬픔, 내가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한 슬픔은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또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억지로 원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선택할수 없다. - P465

그리고 우리가 죽어갈 때, 우리가 유기체에서 생겨나 굴욕적이게도 다시유기체로 돌아갈 때,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영광이고특권이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재앙과 망각이 뒤따랐다면 -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 불멸인 한 (그것은 불멸이다) 나는 그러한 불멸성에서 밝게빛나는, 변치 않는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며, 계속 존재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불 속에서 구해내고, 사라졌을 때는 찾으려 애쓰고, 보존하고, 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아름다운 것들을 문자 그대로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고 시간의 폐허 속에서 다음 세대를 향해, 또 그다음 세대를 향해 큰 소리로 멋지게 노래를 불러온 사람들의 역사에 나 자신의 사랑을 더한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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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손을 쓰는 작업이었다. 머리를 쓰는 작업은 DRC60과ZR59의 염기 하나하나를 비교하는 것으로 주로 컴퓨터로 수행했다. 이 작업에는 두 가지 염기서열을 기존 HIV-1 M군 염기서열로 이루어진 계통수 안에 놓고 보다 넓은 범위에서 비교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비교 목적은 진화상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지 보는 것이다. 바이러스 균주는 서로 얼마나 멀어졌을까? 진화상 변화는 개개의 염기수준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에 의해 축적되는데(다른 경로도 있지만여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앞에서 설명했듯 에이즈 바이러스 같은RNA 바이러스는 돌연변이 속도가 비교적 빠르다. HIV-1의 평균적인 돌연변이 속도를 아는 것, 또는 많은 균주에서 주의 깊게 측정하는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돌연변이 속도는 바이러스의 ‘분자적 시계‘로 간주된다. 모든 바이러스는 고유한 돌연변이 속도를 갖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진행되는 변화를 측정하는 자신만의 시계를 갖고 있는 셈이다. 두가지 바이러스 균주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안다면 이들이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있다. 차이와 분자시계 사이의 함수로 경과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분자생물학자들은 TMRCA(timeto most recent common ancestor,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에 이르는 시간)라는 중요한 파라미터를 계산한다. - P523

마이클 워로비는 거의 같은 시기에 킨샤사 주민에서 얻은 DRC60과 ZR59 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가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HIV-1 M군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M군이나 군, 또는 침팬ope지 바이러스인 SIV와 혼동될 우려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M군 내에서 두 가지 서열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얼마나 멀었을까? 게놈의한 부분이 12 퍼센트 정도 달랐다. 그 차이는 얼마나 긴 시간에 해당할까? 워로비의 계산으로는 약 50년 정도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오차범위를 고려하여 DRC60과 ZR59의 가장 최근 공통 조상이 존재했던때를 1908년으로 추정했다.
1908년에 이미 종간전파가 일어났다고? 그것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만큼 이른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 발견은 유명 저널에 실릴 가치가 충분했다. 종간전파가 일어난 지 100년 후인 2008년 무옘베와장-마리 카봉고까지 공동저자로 포함시켜 《네이처>에 게재된 논문에서 워로비는 이렇게 썼다.

진화적으로 분화된 시기와 진화상 경과한 시간이 수십 년에 이른다는 우리의 추정은 DRC60과 ZR59 사이의 유전학적 거리가 멀다는사실과 함께 고려할 때 이 바이러스들이 20세기 초반 아프리카에 살던 인구집단 내에서 전파되고 있던 공통 조상으로부터 유래했음을 시사한다. - P524

여기서 우리는 HIV-1 M군의 기원이 된 SIVeepe* 균주가 오늘날까지도 카메룬 남동부에서 서식하는 중앙아프리카침팬지의 몸속에 존재하는 바이러스와 같은 계통에 속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 바이러스는국지적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곳을 시작으로 바이러스는생하강(또는 다른 지류들)을 거쳐 콩고 강 남쪽에 이른 후 거기서 다시 킨샤사로 옮겨갔을 것이다. M군의 전 세계적인 유행은 킨샤사에서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국지적으로 전파‘라는 말은 애매하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경로를 통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일까? 그 운명적인 사건들은 어떻게발생하여 진행되었을까?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2000년에 한 자신이다른 세 명의 공동저자와 함께 처음으로 에이즈가 인수공통감염병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면서 설명한 바 있다. ‘사람의 경우 사냥이나 도살, 또는 기타 활동(오염된 고기를 조리하지 않고 먹는 등) 중에 동물의 혈액과 분비물에 직접 노출된 것이 그런 전파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높다. 사냥꾼 자상 가설을 암시한 것이다. 최근 그녀는 이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침팬지-인간 전파의 가장 가능성 높은 경로는 사냥감에서 고기를 발라내는 과정에서 감염된 혈액과 체액에 노출되는 것일 것이다. ‘침팬지를 사냥한 후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는 과정에서 사람의 손에 난 작은 상처를 통해 혈액접촉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SIV는 침팬지로부터 인간으로 동물종 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전파된 후 새로운 숙주의 몸속에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된다. 이런 설명은 아직 구체적인 부분까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합리적이며, 이미 밝혀진 사실들과도 잘 들어맞는다. 1908년경 카메룬 남동부의 숲 속에서 사냥꾼자상 시나리오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가정하면 킬의 데이터는 물론, 마이클 워로비가 제시한 시간 경과도 문제없이 설명된다. 카메룬남동부에서 한 사람이 감염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
"종간전파가 거기서 일어났다면 유행이 킨샤사에서 시작된 것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한에게 물었다.
"그 지역에서 킨샤사까지는 많은 강이 흐릅니다. 우리의 추정, 즉 가설은 유인원이 아니라 사람이 바이러스를 거기까지 이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유인원이 카누를 타고 킨샤사를 방문했을 리는 없죠. 바이러스를 킨샤사까지 운반한 것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누군가 감염된 침팬지를 사로잡아 카메룬 국경 지방에서 먼 길을 거쳐 살아 있는상태로 킨샤사까지 데려갔을 희박한 가능성도 언급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합니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몸을 빌어 그곳까지 갔을 것이다. - P533

 최종 목적지는 우에소Ouesso입니다." 우에소는 강 건너 콩고 땅에 있는 인구 28,000명 정도의 항구로 생강 상류 지역의 교역 중심지다. 우리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문가 소장의 사무실을 나온 나는 잠시 복도에 서서 끔찍한 그림들위로 프랑스어로 된 경고문이 적혀 있는 벽보를 들여다보았다.
LA DIARRHEA ROUGE TUE!
피섞인 설사를 한다면 치명적입니다!
에볼라 포스터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작은 글씨로 ‘GrandsSinges et VIH/SIDA (대형 유인원과 VIH/SIDA)‘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SIDA는 프랑스어로 에이즈, VIH는 에이즈 바이러스의 머릿글자다. 만화 같지만 전혀 우습지 않은 그림은 밀렵한 원숭이 고기와 la diarrhea rouge 사이의 관계를 냉혹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보고 있노라니 그 기묘함이 새삼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계 도처의 에이즈 교육자료가 하나같이 ‘안전한 성관계! 올바른 콘돔 사용! 주사 바늘 재사용 금지!‘를 외치는데, 이곳의 메시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유인원을 먹지 마시오!" - P547

논문의 괄목할 만한 결론은 킬이 작성했던 초록과 달리 곰베에 사는 SIV 양성 침팬지가 실제로 폐사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 기간 중 사망한 18마리 중 7마리가 SIV 양성이었다. STV 양성인 개체가 전체 집단의 20퍼센트 미만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해당 연령의 정상 폐사율로 보정했을 때 이 결과는 SIV 양성 침팬지가 SIV 음성인 경우보다 폐사 위험이 10~16배 높다는 뜻이다. 무려 10~16배가 높다. 숫자 자체는 적지만 이런 비율은 엄청난 것이다. 감염된 동물은 속절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SIV 양성인 암컷은 출산율이 낮았고, 영아 페폐사율도 높았다. 부검한 세 마리는 모두(욜란다도 포함되었지만 이름이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림프구 소실과 함께 말기 에이즈와 유사한 증상을 나타냈다.
저자들은 조심스럽고도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SIV는 야생 침팬지의 건강, 생식 및 수명에 현저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바이러스는 인류와 가장 비슷한 유인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우리의 문제일 뿐 아니라 유인원들의 문제이기도 한것이다. - P596

정리해 보자. 전 세계적 유행병인 에이즈의 기원은 한 가지 우연한사건으로 추적해 갈 수 있다. 그 사건은 한 마리의 침팬지와 한 명의 인간 사이에 일어난 혈액을 통한 상호작용이었다. 그 사건은 카메룬 남동부에서 대략 1908년 경에 일어났다. 그 사건으로 인해 현재 HIV-1M군이라고 알려진 한 가지 바이러스 균주가 계속 증식했다. 이 바이러스는 종간전파를 일으키기 전 침팬지에게 치명적이었을 가능성이높고, 종간전파를 일으킨 후 인간에게는 확실히 치명적이었다. 카메룬 남동부에서 바이러스는 생강과 콩고 강을 따라 내려가 브라자빌과 레오폴드빌에 이르렀던 것이 분명하다. 이들 거점 도시에서 바이러스는 전 세계로 퍼졌다.
어떤 방식으로 퍼졌을까? 일단 레오폴드빌에 도달한 후 바이러스는 생하강 상류와 전혀 다른 복잡한 상황을 맞았던 것 같다.  - P597

자크 페펭은 논문을 썼으며, 2011년에는 에이즈의 기원The Origins of AIDs)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현장 경험과 과학적 전문성에 깊은 역사적 연구를 결합시켜 그는 사냥꾼 자상 가설과 전 세계적인 유행병 사이를 연결하는결정적인 인자가 피하주사기였다고 주장한다.
페핑은 쾌락을 목적으로 한 약물 사용과 마약 중독자들이 주사기를 돌려 쓰는 버릇을 지적한 것이 아니다. <고귀한 목표, 뜻밖의 결과Noble Goals, Unforeseen Consequitances>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책을 통해 훨씬 더 자세히 얘기한 주제는 1921~1959년 사이에 식민지 보건당국에서 몇몇 열대병을 주사약으로 치료한다는, 즉 좋은 의도로 시행했던 보건 캠페인이었다. 예를 들어 카메룬에서는 수병을 퇴치하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수면병은 체체파리가 옮기는 트리파노소마 브루세이라는 끈질긴 병원체가 일으킨다. 당시에는 트리파르사미드tryparsamide라는 비소계 약물을 주사하여치료했는데,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맞아야 했다. 가봉과 프랑스령 콩고에서 시행되었던 수면병 치료 중에는 3년간 36번 주사를 맞는 방법도 있었다. 매독과 매종(스피로헤타에 의해 생기는 열대 피부병-역주)에 대해서도 비슷한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말라리아는 주사 제형 키니네로치료했다. 나병 환자들은 경구 항생제가 나오기 전까지 1년간 매주 두세 번씩 대풍수(大風樹, 인도산 약용 식물-역주) 추출물을 주사로 투여받았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약간의 기술만 가르친 후 인젝터 injecteur라는 순회진료팀을 만들기도 했다. 이들이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수면병 환자들에게 매주 주사를 놓았다. 최신 의학의 경이로운 성과에 열광하던 시절이었다. 주사를 맞아야 병이 치료된다고 믿었다. 모든 사람이 주사를 맞았다!
물론, 일회용 주사기가 나오기 훨씬 전 얘기다.  - P598

환자는 너무 많고, 간호 인력이 쓸 수 있는 주사기는 너무 적으므로 사용한 후 매번 가압멸균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사용한 주사기는 우선 물로 씻고, 다시 한 번 알코올과 에테르로 씻은 후 새로운 환자에게 사용한다. 몇 안 되는 간호사들이 많은 환자들을 돌봐야 하고, 의료용품 공굽은 턱없이 달리는 의료기관은 어디든 마찬가지다. 한 환자에게 사용했던 주사기를 다른 환자에게 사용할 때 소량의 감염성 혈액이 남아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질병을 전염시키는 데 충분한 요건이 된다.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을까? 너무나 흔했다. 식민지 시대의 오래된 기록들을 성실하게 조사한 페팽에 따르면 그 숫자는 충격적이다. 1927~1928년 사이에 외젠 자모의 치료팀은 카메룬에서 트리파르사미드를 207,089건, 또 다른 비소계 수면병 치료제인 아톡실 atoxyl을 약1백만 건 주사했다.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에서는 1937년 한 해만도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기본 교육만 받은 인젝터들이 수면병 환자에게만 588,086번의 주사를 시행했다. 다른 질병으로 인한 주사 건수는헤아릴 수조차 없다. 페팽의 계산으로는 수면병에만 390만 건의 주사치료가 시행되었는데, 그중 74퍼센트는 정맥 내 주사였다. 정맥 내 주사는 근육이 아니라 정맥에 직접 약을 투여하므로 혈액 매개성 바이러스를 우발적으로 전파시키기에도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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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이른 봄부터 이곡리(利谷里) 일대를 온통 휘젓고 다니며 마냥 으스대는 종술(鍾述)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종술의 성깔을 익히 아는 이곡리 주민들은 그의 행패가 두려워서 감히 맞대놓고 그를 어쩌지는 못했다. 주민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그의 뒷모습을 겨냥하며 주먹으로 쑥덕감자를 먹이기도 하고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보이기도 할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구름 의자에라도 앉은 것같이 더욱 거드름을 피우고 다녔다. - P9

지칠 줄 모르는 최 사장의 끈기에 힘입어 익삼 씨도 다시 설득에나섰다.
"내가 자네라면은 나는 기왕 낚시질하는 짐에 비단잉어에다 월급 봉투를 암냥혀서 한목에 같이 낚어올리겄네. 삽자루 들고 땅띠기허는 배도 아니고 그냥 소일 삼어서 감시원 완장 차고 물 가상이로 왔다리갔다리 허면서•••"
"완장요!"
그렇다. 완장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이 순간적으로 종술의 흥분한머리를 무섭게 때려서 갑자기 멍한 상태로 만들어놓는 것이었다.
"팔에다 차는 그 완장 말입니까?"
종술의 천치스런 질문에 최 사장은 또다시 그 어울리지 않는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
"이 사람아, 팔 완장 말고 기저구맨치로 사추리에다 차는 완장이라도 봤는가?"
완장이란다! 왼쪽 팔에 끼고 다니는 그 완장 말이다!
본래 잽싼 데가 있는 최 사장이었다. 그는 우연히 튀어나온 완장이란 말에 놀랍게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종술의 헛점을 간파하고는 쥐란 놈이 곳간 벽에 구멍을 뚫듯 거기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종술이 자네가 원한다면 하얀 완장에다가 뻘긴 글씨로 감시원이라고 크막허게 써서 멋들어지게 채워줄 작정이네."
고단했던 생애를 통하여 직접으로 간접으로 인연을 맺어온 숱한완장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종술의 뇌리를 스쳤다. 완장의 나라, 완장에 얽힌 무수한 사연들로 점철된 완장의 역사가 너울거리는치맛자락의 한끝을 슬쩍 벌려 바야흐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종술의 가슴을 유혹하고 있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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