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이른 봄부터 이곡리(利谷里) 일대를 온통 휘젓고 다니며 마냥 으스대는 종술(鍾述)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종술의 성깔을 익히 아는 이곡리 주민들은 그의 행패가 두려워서 감히 맞대놓고 그를 어쩌지는 못했다. 주민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그의 뒷모습을 겨냥하며 주먹으로 쑥덕감자를 먹이기도 하고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보이기도 할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구름 의자에라도 앉은 것같이 더욱 거드름을 피우고 다녔다. - P9

지칠 줄 모르는 최 사장의 끈기에 힘입어 익삼 씨도 다시 설득에나섰다.
"내가 자네라면은 나는 기왕 낚시질하는 짐에 비단잉어에다 월급 봉투를 암냥혀서 한목에 같이 낚어올리겄네. 삽자루 들고 땅띠기허는 배도 아니고 그냥 소일 삼어서 감시원 완장 차고 물 가상이로 왔다리갔다리 허면서•••"
"완장요!"
그렇다. 완장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이 순간적으로 종술의 흥분한머리를 무섭게 때려서 갑자기 멍한 상태로 만들어놓는 것이었다.
"팔에다 차는 그 완장 말입니까?"
종술의 천치스런 질문에 최 사장은 또다시 그 어울리지 않는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
"이 사람아, 팔 완장 말고 기저구맨치로 사추리에다 차는 완장이라도 봤는가?"
완장이란다! 왼쪽 팔에 끼고 다니는 그 완장 말이다!
본래 잽싼 데가 있는 최 사장이었다. 그는 우연히 튀어나온 완장이란 말에 놀랍게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종술의 헛점을 간파하고는 쥐란 놈이 곳간 벽에 구멍을 뚫듯 거기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종술이 자네가 원한다면 하얀 완장에다가 뻘긴 글씨로 감시원이라고 크막허게 써서 멋들어지게 채워줄 작정이네."
고단했던 생애를 통하여 직접으로 간접으로 인연을 맺어온 숱한완장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종술의 뇌리를 스쳤다. 완장의 나라, 완장에 얽힌 무수한 사연들로 점철된 완장의 역사가 너울거리는치맛자락의 한끝을 슬쩍 벌려 바야흐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종술의 가슴을 유혹하고 있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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