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시에서는 사람들과 창문의 관계도 변했다. 창문은 가장 죽음이 찾아오기 쉬운 공간과의 경계였다. 창문은 가장 약한 총탄 세례도 막을 수 없었고, 바깥이 보이는 실내의어떤 지점이라도 총탄이 오가는 잠재적 교전 지점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리창은 인근의 포화로 인해 너무도 쉽게 파편이 되어서, 모두가 한 번쯤은 날아오는 유리 조각에 베어 피를 흘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많은 창문이 이미 부서졌고 남은 창문도 없애는 편이 신중한 처사였지만, 겨울이라 밤은 추웠고 가스와 전기 공급이 점점 줄어들어서 사람들은 냉기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하는 창문을 그대로 두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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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취재한 기자 중 한 명은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두고 "거대하고 신나는 모험"이라고 했다. 그 일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일 수 있다. 그 뒤로 유력 대선 후보가 그렇게 열정적이거나 무모하게 출마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늘어나고미국 정치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정치컨설턴트 · 여론조사원 · 해설가 · 질문검열원이라는 보호막을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에서는 사용하지않았다. 존 에드워즈(2004년과 2008년 대선에 출마한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옮긴이)를 제외하면 어떤 후보도 그만큼 빈곤 문제를 대선 쟁점으로 삼지도, 소수인종과 가난한 유권자를 들뜨게 하지도, 백인 노동자와 흑인 모두에게 신뢰를 받지도, 노골적으로 유권자를 비판하지도 않았다. 로버트케네디 같은 주류 정치인이 <뉴욕타임스> 칼럼에 "한때 미국인은 제퍼슨과 함께 우리가 전 인류의 ‘가장 위대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와 권력에만 기대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글을 썼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미트더프레스 Meet the Press> 같은 인기 방송프로그램에나와 "우리 사회가 불만스럽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불만이 있습니다"
라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해 보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민감한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그런 비판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되돌아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일 수있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마치 서서히 진행되는 자살 같았기때문이고,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 암살은 단순히 또 한 명의 케네디가 죽은 것이아니라, 항상 준비된 발언을 하는 정치인의 등장을 의미했고, 파란색주와 빨간색 주로 나뉘는 정치판을 의미했으며, (르윈스키 성 추문 때 빌 클린턴의) 말돌리기나,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무력을 자랑하며 했던 것처럼) 대통령의입에서 "다 덤비라고 해!" 같은 발언이 나오는 정치판을 의미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되돌아보는 것은 신중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82일은 로버트 케네디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경선에서 케네디의 라이벌인 미네소타주 출신 유진 매카시의원의 선거 캠프에서 일한 작가 윌프리드 쉬드는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그의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는지 보여줬고, 뒤이은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선거운동 기간에 집중하게 된다"고 인정하면서 "적어도 선거운동 기간 중 케네디는 자신의 본성과 그런 본성에 대한 주위 사람의 불만을 뛰어넘어 정말 위대한인물로 거듭났다"고 덧붙였다. - P34

바비 케네디는 1950년대에 몇몇 상원위원회에서 일하고 1960년대에는 케네디 정부의 법무부 장관 겸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정부의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불륜과, 미국이 응오딘지엠 남베트남 대통령의 암살로 이어진 쿠데타에 관여한 사실에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마피아와 결탁한 부패한 노조 지도자들을 조사하고 심문했으며, CIA의 피델 카스트로 암살 시도를 승인하고 부추겼을 뿐 아니라, 마틴 루서 킹의 밑에서 일하는 두 사람을 공산주의자라고 오해해 전화 도청을 승인했으며, 킹 목사를 위협하고 킹 목사의뢰를 떨어뜨리려는 J.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활동에 눈감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런 모든 일을 알았기 때문에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 후보보다 정부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고, 형 케네디에 이어 또 한 명의 케네디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촉발될 증오와 감당해야 할 위험을 분명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출마했다.
출마 당시 로버트 케네디는 상원의원으로 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1960년 대통령에 오른 존 F. 케네디보다 더 준비된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다. 법무부 장관직을 일부에서 역사상 최고였다고 평가할정도로 훌륭하게 수행했고, 일종의 대통령 보좌관 역할을 하면서 쿠바침공의 실패를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CIA를 감독하고 소련 외교관과의 비밀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다. 댈러스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뒤에는 더 신중하고 세심해졌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과정에서 했던 역할과 케네디 대통령이 린든 존슨을 부통령으로 지명한 데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로버트 케네디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한 행동, 예컨대 피델 카스트로 제거에 대한 집착이나 조직 폭력배와 부패한 노조 지도자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만든 일이 자기 형의 암살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 P36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바비 케네디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라크 전쟁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을 이미 오래전에 해야 했습니다. 물론 전쟁 수행에 돈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돈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용 중 가장 적은 겁니다. 우리가 잃는것은 미국의 젊은이입니다. 수만 명의 인생이 영원히 끝나버립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세계 속에서의 지위입니다. 중립국이나 동맹국 할 것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정책으로 다른 나라를 당황하게 하고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관용과 연민이 없습니다. 희생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십억 달러를 쓰면서 우리 국민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고 미룰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동맹이라는 것은 이름뿐입니다. 미국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정부입니다."
"신문 1면에 미군이 포로를 고문하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 P38

1장
불가피한 선택
1968년 3월 16~17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두 달 뒤 로버트 케네디는 아시아를방문했다. 애초에 케네디 대통령을 위해 계획된 일정에 대신 참석한 것이다. 순방 중 케네디는 필리핀에 있는 학교를 방문했는데, 여학생들이케네디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CBS 방송 카메라맨 월터 돔브로우와 함께 차를 타고 학교에서 나오는 동안, 케네디는 주먹이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쥐고 두 뺨에 눈물을 흘렸다. 고개도 저었는데 돔브로우에게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마침내 케네디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형이 왔더라면 아이들이 더 좋아했을 텐데요."
톰브로우는 케네디를 껴안으며 말했다.
"밥, 케네디 대통령이 남긴 일을 이어가야죠."
그 말을 듣고 30초간 정면을 응시하던 케네디는 돔브로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돔브로우는 바로 그 순간 바비가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란 사실과, 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깨달았다. - P44

다음 날 아침 <미트더프레스>에 출연한 바비는 존슨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면 지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케네디는 질문을회피하거나 당연히 자신이 경선에서 이길 생각이라고 말하며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경선 과정을 좌지우지하고 당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민주당의 지도부를 화나게 할 것이 분명한 답을 내놓았다. 존슨이 지금 같은 정책을 계속한다면, 지지를 "심각하게 망설일 것이라면서 자신은 "당에 충실하겠지만 당보다 미국과 인류전체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출마 선언을 한 주말 내내 케네디와 보좌관들은 민주당 소속 의원과 주지사, 당 지도부에 전화를 걸었다. 지지의사를 밝히거나 당장 못하겠다면 적어도 케네디가 예비선거 몇 곳에서 이길 때까지는 다른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도 보류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케네디의 후보 사퇴를 촉구했다.
민주당 내 진보진영은 로버트 케네디와 유진 매카시가 반전 운동세력을 분열시킬 것을 우려했고, 보수파와 중도파는 케네디가 당을 분열시켜 닉슨에게 백악관을 내어줄 것을 우려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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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정치 사상가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 Leviathan] 에서 국가나 정치가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부르면서,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의 만인에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이고, 약탈과 다툼이 벌어지는 무질서의 상태인 것이다. 홉스는 국가란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권리 중 일부를 포기한 결과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시민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의 일부를 주권자에게 위임하고, 그 주권자는 정치적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도록 하는사회계약을 맺는다는 것이다. 홉스는 이를 국가의 탄생이라고 했다. 이처럼 정치가 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우리의 삶이 법과 질서에 의해 평화롭게 영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러한 권력을 담당할 것인가? 이것 역시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대립, 분열을 이끌어낼 수 있다.  - P110

이 때문에 폭력과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권력을 위임할 것인가에 대한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우디 아라비아나 브루나이와 같은 왕국에서는 특정 가문에 의해 권력이 세습된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권력 위임은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뤄진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뜻을 반영하면서도 폭력적인 형태를 수반하지 않고 권력을 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선거다. 이는 민주주의가 낳은 매우 훌륭한 정치제도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은 다수의 뜻에 의해 권력을 담당할 사람을 결정한다. 국민 다수의 동의에 기반한 권력, 주기적으로 국정 운영에 대한 정치적 책임성을 평가받아야 하는 권력. 이처럼 선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권위의 정당성 legitimacy의 원천이 되며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적 기제가 된다. - P112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남한만의 선거를 대비하여 선거법을 제정한다. 당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선의원은 한민당 계열이 주축이었으며 관선의원은 김규식이 주도하는 중도파가 다수였다. 두 집단 간 서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에 선거법 제정 과정에서 상당한 격론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선거법은 보수 세력에게 보다 유리한 방식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 정치 세력은 변화와 개혁을 선호하는 젊은 층을 배제하고자 선거권 연령을 높여 선거권은 23세부터, 피선거권은 25세부터 부여한다. 또한 투표 방식을 기표가 아닌 지지하는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쓰도록하는 자서 방식으로 정했는데, 1945년 당시를 기준으로할 때 문맹률이 거의 80퍼센트에 달했던 것으로 보면 사실상 대부분의 유권자들을 선거로부터 배제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논란거리는 38선 이북에 본적을 둔 남한 거주자들의 투표를 따로 집계해 266석의 의석 중 36석을 할당한것이다. 이북에 대한 대표성을 인정하기 위해 월남인들을위한 특별 선거구를 만들자는 것인데, 대표성도 불분명하고 남한 본적자에 비해 대표성이 과도 대표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점은 월남한 이들이 매우 강한 반공주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시 정국에서 한민당 등 강한 우파 정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 P117

광복 후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 여운형은 일본 총독부 아베 정무총감과의 회담 이후 해방 직후의 전환기를 관리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만들었지만,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건준 대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다. 미군정이 들어오기전에 국가 형태를 수립해 대등한 자격으로 논의하기 위해나라를 하나 만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때 인공의 주석으로 이들이 추대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당시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의 인기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P123

사실 김구가 제헌국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만약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참여했다면 제헌국회 내에서의 헌법 제정이나 반민족특별위원회 등 제헌국회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크게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치인은 최선이 어렵다면 차선이라도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김구 선생이 제헌국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 P124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높이고 이를 통해 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압박하기 위해 지방선거 실시를 결정한다.
또 한편으로는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는 경우 대통령 선거에서 지지표를 얻기 위한 선거운동 조직으로서의 정당에 대한 필요성도 고려했을 것이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를 국부國父로 간주하면서 정당의 필요성을 부정했지만, 직선제를 위해서는 자신을 지지해주고 운동을 이끌어갈 지원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광복절 축사에서 일민주의 一民主義에 기초한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때 창당한 것이 바로 자유당으로,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 청년단인 족청을 기반으로 삼은 것이었다.  - P126

함께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함태영이 41.5퍼센트의 지지율로 당선된다. 당시 자유당 조직의 기반이 되는 족청의 지도자 이범석은 자유당 부통령 후보로 나오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비롯한 족청 세력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견제해 무소속 함태영을 지지한다는 뜻을 은밀하게 장택상 국무총리, 김태선 내무부장관에게 밝힌다. 이러한 대통령의 뜻에 따라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경찰과 공무원들에 힘입어 함태영은 이범석을 밀어내고 부통령으로 당선된다. - P128

진보당의 해산, 보수 양당 체제의 확립
1958년 5월 2일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인상적인 득표를 한 조봉암의 진보당이 자유당, 민주당과 함께 삼파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작으로 국면은 달라진다. 자유당으로서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 경쟁자로 부상한 조봉암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가 불편했고 민주당은 야당에 대한 지지세를 나눠야 할 진보당의 부상이 싫었던 것이다.  - P132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1958년 2월 25일에는 진보당에 대한 해산 결정을 내렸다. 해산 명령의 근거는 미군정이 포고했던 군정법령 제55호에 있었는데, 이 행정법령에 의거해 진보당의 등록을 아예 취소해버린다.
한편 1958년 1월 검찰은 진보당의 지도자 조봉암과 당 주요 간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조봉암은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고 지령에 따라 간첩 행위를했다는 혐의로 결국 1959년 7월 사형에 처해졌다. 1956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이승만의 가장 큰 정적으로 부상했던 조봉암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조봉암 재판은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 왔는데 2011년 1월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조봉암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당과 조봉암이 사라지고 난 이후 실시된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42.1퍼센트로 126석을, 민주당은 34.2 퍼센트로 80석을 얻었다. 이 두 정당이 얻은 의석이외에는 통일당이 1석, 무소속이 26석이었다. 자유당과민주당의 보수 양당 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는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등장할 때까지 우리 정치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서의 좌파 혹은 노동자 정당, 계급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 없지만 만약 진보당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4.19 혁명 이후 선거에서 민주당에 맞서는 주요한 경쟁 정당이 되었을 것이다. 1960년 총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몰락했고 다른 혁신계정당은 대안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 전체 의석의 75퍼센트를 차지하면서 사실상 1당 지배 체제가 되었다.
이처럼 견제 세력 없는 1당 체제로 당내에서 극심한 신파와 구파 간 갈등이 빚어졌고 이는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면서 결국 5·16 군사 쿠데타로까지 이어진다.  - P133

그러나 제2공화국의 불행은 집권당이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어 총리와 내각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데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윤보선 대통령은 이한림 장군이 지휘하던 제1군을 동원하여 쿠데타 군을 진압하자는 미 대리대사나 미 7군 사령관의 제안을 거부했다. 우리 군끼리 피흘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는데, 그결과 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에 대한 미국 국무성 자료에서도 윤보선 대통령이 군인들의 힘을 통해 장면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2공화국은 이렇게 해서 허무하게 9개월 만에 무너졌다. 무엇보다 집권당의 분열,
특히 총리와 대통령 간의 갈등과 반목이 결정적 순간에 그체제를 지켜내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 P142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선거 이슈는 사상 논쟁이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 이후인 1948년11월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선거 유세 막판에 폭로한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악랄한 매카시즘의 수법"이며, 집권 후에는 공직 채용에서 연좌제를 폐지하고 혁신계 인사를 석방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결과적으로 사상 논쟁은 박정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거 결과 겨우 15만 6026표의 근소한 차이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득표율로 보면 박정희 42.6퍼센트, 윤보선 41.2퍼센트로 두 후보 간 득표율의 차이는 겨우1.4퍼센트였을 만큼, 초접전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5명 후보의 표를 모두 합치면 83만여 표나 되었다. 야당 후보가윤보선으로 단일화되었다면 승패가 뒤바뀔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 P146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재임에 도전했고 야당 경쟁자는 이번에도 윤보선이었다. 4년 전과 달리 야당은 신민당으로 사실상 통합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568만여 표를 얻어 452만여 표를 얻은 윤보선을 이전 선거에서와 달리 116만 표라는 매우 큰 차이로 따돌리고 재집권에성공했다. 이전 투표에서와 달리 여촌야도 현상도 사라져, 서울에서의 지지율이 30.2퍼센트였던 것이 45.2퍼센트로,
부산에서의 지지율도 48.2 퍼센트에서 64.2 퍼센트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광주, 전주, 수원을 제외한 전 도청 소재지에서 박정희는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된 데는 경제개발 계획에 따른 효과가 나타나면서 경제 상황이 좋아진 것이 그 이유였다. 1962~1966년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간 동안 실질 경제 성장률은 8.3퍼센트 상승했으며, 국민소득은 1962년 83.6달러였던 것이 1967년 123.5달러로 늘어났다. 이렇게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이었다.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무상 혹은 차관 형태로 많은 돈이 들어왔고,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 군과 기업, 노동자들이 국내로 송금하는돈도 적지 않았다. 경제 성장의 효과는 우선적으로 도시 지역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나지 않게 한 요인이었다. - P148

신민당이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얻은 의석수는 개헌을 막을 수 있는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훌쩍 넘는 것이어서 1967년과 같은 날치기에 의한 정권 연장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무렵은 전태일 분신, 실미도사건, 광주대단지 폭동, 한진 노동자 KAL 빌딩 방화 사건, 사법파동 등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박정희 체제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72년 10월 17일 계엄과 국회 해산 및 헌법 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 선언으로 시작된 유신 체제의 바탕이 된다. 유신 체제의 등장과 함께 한국의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지되었다. 유신 체제하에서는 복수의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경쟁 선거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체육관선거‘가 들어선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사실상 거수기 역할을 하는 대의원들이 박정희 1인 후보에대한 찬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이다. 대통령, 국회의원의 임기도 6년으로 늘렸다. 선거는 자주 치러지지않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역시 변경되었는데 우선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했다.  - P155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중요한 점은 유신 체제 종말의 시그널도 결국 선거를 통해서 왔다는 것이다. 제1공화국의몰락이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예견되었던 것처럼.
유신 체제 몰락도 1978년 총선거에서 공화당의 패배를 통해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선거가 결코 공정하고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민심은 정치적 격변을 선거를 통해 예고했다.
이러한 시그널은 전두환 정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유신체제 몰락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전두환은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듬해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가 ‘박정희 없는 유신 체제‘를 이어갔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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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저녁 헬리콥터들이 총성에 놀란, 또는 앉아 있던 나무 밑동이 도끼에 찍히기라도 한 새들처럼 하늘을 가득 메웠다. 불그스름한 어스름 속에 태양이 지평선 밑으로 꺼져 갈 때 헬리콥터들은 단독으로, 또는 쌍을 이루어 솟아오르며 도시의 하늘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창 안으로, 골목 깊숙한 곳으로 메아리치는 회전 날개 소음은 그 아래 공기를압축하는 듯했다. 마치 투명한 기둥, 숨 쉬는 투명 원기둥 위에 세워진 것처럼 이중 날개로 되어 조종사와 포병이 다른높이에 탑승한 가냘픈 동체의 헬리콥터도 인력을 잔뜩 실은 커다란 헬리콥터도 있는 이 괴상한, 매처럼 생긴 움직이는조각상들은 천상을 가르며 두두두두 날았다. - P42

사이드와는 달리 나디아는 휴대전화를 제한할 필요를느끼지 않았다. 그녀처럼 제 집에 묶인 숱한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휴대전화는 기나긴 저녁의 벗이 되어 주었고, 이를 통해 나디아는 밤마다 쓸쓸하고 고요한 세상으로 깊숙이 나아갔다. 폭탄이 떨어지는 모습, 운동하는 여자들, 구애하는 남자들, 구름이 모여들고 파도가 유한하고 한시적이며 사라지는,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행성의 수많은 혀처럼 모래를 핥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디아는 종종 소셜 미디어 영역을 탐색했지만 흔적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스스로 글을 써서 올리는 일도 없었고,
온라인의 검은 옷이라 할 불분명한 아이디와 아바타를 썼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친밀해진 첫날 밤 먹은 슈룸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구매한 것이었다. 당시 그 도시에서는 직접 배달해 주는 현금 주문 슈룸을 아직 구할 수 있었다. 경찰과 마약 퇴치 당국은 시장을 주도하는 다른 물질에 집중했고,
무해해 보이는 버섯류는 환각성이 있든 포토벨로 버섯이든 모두 비슷하게 보여서 요리사와 미식가들에게 희귀 재료를 공급하는 그 지역의 한 꽁지머리 중년 남자가 이 점을 이용해 작은 부업을 했으며, 사이버공간에서는 대체로 젊은이들이 팔로우를 하고 ‘좋아요‘를 눌렀다.
이 꽁지머리 남자는 몇 달 뒤 참수되었다. 고통을 가중시키려고 톱날 칼로 뒷목부터 잘린 그의 머리 없는 몸뚱이는한쪽 발목이 전신주에 묶여 매달렸고, 그를 처형한 자가 밧줄 대신 사용한 그의 신발 끈이 썩어서 툭 끊어질 때까지 다리를 벌린 채 덜렁거렸다. 누구도 줄을 끊어 시신을 내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도시의 자유분방한 가상 세계는 대부분의 일상생활과 큰 대조를 이루고 젊은 남자들, 특히 젊은 여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삶과 크게 달랐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드는 아이들은 조그만 화면을 통해 외국의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먹고, 심지어 존재에 회의가 느껴질 만큼 너무도 풍족하게 차려 놓고 먹을 것을 던지며 싸우고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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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968년 미국은 상처 입은 나라였다. 그것은 도덕적인 상처였다. 베트남 전쟁과 3년간 여름 도심에서 벌어진 일련의 폭동은 미국인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혔고, 스스로를 어느 나라 국민보다 훌륭하고 명예롭다고 생각해온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인들은 1965년 베트남 ‘캄네‘라는 마을에서 부녀자와 아이들이 살아남으려고 도망치는 동안 미국 해병대원이 담배 라이터와 화염방사기로 초가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TV 뉴스로 보면서, 한때 적국이나 저지를 법한 만행을 미국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틴 루서 킹 암살 뒤에 일어난 폭동중에는 워싱턴 D.C. 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지키고,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연방군이 미국의 각 도시에서 거리를 순찰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언덕 위의도시(성서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세계의 모범이 되는 나라라는 뜻옮긴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자문했다. - P19

민주당 대선 경선을 위한 선거운동 중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행위와 국내에서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배려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 국민 개개인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미국인은 새 대통령과 새로운 정책에 표를 주는 것만으로는 이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1960년 대선 당시 형 존 F.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이끌었고, 케네디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일했다. 이 때문에 거칠고 분열적인 선거운동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숭고한 이상을 내세우기 어렵고, 비도덕적인 선거운동을 한 후에 도덕적으로 상처 입은 나라를 치유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국가가 도덕적 위기에 처했을 때 대통령 후보가 어떤 방식으로 선거에 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 같은 사례였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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