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정치 사상가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 Leviathan] 에서 국가나 정치가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부르면서,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의 만인에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이고, 약탈과 다툼이 벌어지는 무질서의 상태인 것이다. 홉스는 국가란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권리 중 일부를 포기한 결과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시민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의 일부를 주권자에게 위임하고, 그 주권자는 정치적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도록 하는사회계약을 맺는다는 것이다. 홉스는 이를 국가의 탄생이라고 했다. 이처럼 정치가 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우리의 삶이 법과 질서에 의해 평화롭게 영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러한 권력을 담당할 것인가? 이것 역시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대립, 분열을 이끌어낼 수 있다. - P110
이 때문에 폭력과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권력을 위임할 것인가에 대한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우디 아라비아나 브루나이와 같은 왕국에서는 특정 가문에 의해 권력이 세습된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권력 위임은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뤄진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뜻을 반영하면서도 폭력적인 형태를 수반하지 않고 권력을 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선거다. 이는 민주주의가 낳은 매우 훌륭한 정치제도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은 다수의 뜻에 의해 권력을 담당할 사람을 결정한다. 국민 다수의 동의에 기반한 권력, 주기적으로 국정 운영에 대한 정치적 책임성을 평가받아야 하는 권력. 이처럼 선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권위의 정당성 legitimacy의 원천이 되며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적 기제가 된다. - P112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남한만의 선거를 대비하여 선거법을 제정한다. 당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선의원은 한민당 계열이 주축이었으며 관선의원은 김규식이 주도하는 중도파가 다수였다. 두 집단 간 서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에 선거법 제정 과정에서 상당한 격론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만들어진 선거법은 보수 세력에게 보다 유리한 방식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 정치 세력은 변화와 개혁을 선호하는 젊은 층을 배제하고자 선거권 연령을 높여 선거권은 23세부터, 피선거권은 25세부터 부여한다. 또한 투표 방식을 기표가 아닌 지지하는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쓰도록하는 자서 방식으로 정했는데, 1945년 당시를 기준으로할 때 문맹률이 거의 80퍼센트에 달했던 것으로 보면 사실상 대부분의 유권자들을 선거로부터 배제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논란거리는 38선 이북에 본적을 둔 남한 거주자들의 투표를 따로 집계해 266석의 의석 중 36석을 할당한것이다. 이북에 대한 대표성을 인정하기 위해 월남인들을위한 특별 선거구를 만들자는 것인데, 대표성도 불분명하고 남한 본적자에 비해 대표성이 과도 대표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점은 월남한 이들이 매우 강한 반공주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시 정국에서 한민당 등 강한 우파 정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 P117
광복 후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 여운형은 일본 총독부 아베 정무총감과의 회담 이후 해방 직후의 전환기를 관리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만들었지만,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건준 대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다. 미군정이 들어오기전에 국가 형태를 수립해 대등한 자격으로 논의하기 위해나라를 하나 만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때 인공의 주석으로 이들이 추대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당시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의 인기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P123
사실 김구가 제헌국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만약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참여했다면 제헌국회 내에서의 헌법 제정이나 반민족특별위원회 등 제헌국회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크게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치인은 최선이 어렵다면 차선이라도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김구 선생이 제헌국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 P124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높이고 이를 통해 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압박하기 위해 지방선거 실시를 결정한다. 또 한편으로는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는 경우 대통령 선거에서 지지표를 얻기 위한 선거운동 조직으로서의 정당에 대한 필요성도 고려했을 것이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를 국부國父로 간주하면서 정당의 필요성을 부정했지만, 직선제를 위해서는 자신을 지지해주고 운동을 이끌어갈 지원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광복절 축사에서 일민주의 一民主義에 기초한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때 창당한 것이 바로 자유당으로,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 청년단인 족청을 기반으로 삼은 것이었다. - P126
함께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함태영이 41.5퍼센트의 지지율로 당선된다. 당시 자유당 조직의 기반이 되는 족청의 지도자 이범석은 자유당 부통령 후보로 나오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비롯한 족청 세력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견제해 무소속 함태영을 지지한다는 뜻을 은밀하게 장택상 국무총리, 김태선 내무부장관에게 밝힌다. 이러한 대통령의 뜻에 따라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경찰과 공무원들에 힘입어 함태영은 이범석을 밀어내고 부통령으로 당선된다. - P128
진보당의 해산, 보수 양당 체제의 확립 1958년 5월 2일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인상적인 득표를 한 조봉암의 진보당이 자유당, 민주당과 함께 삼파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작으로 국면은 달라진다. 자유당으로서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 경쟁자로 부상한 조봉암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가 불편했고 민주당은 야당에 대한 지지세를 나눠야 할 진보당의 부상이 싫었던 것이다. - P132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1958년 2월 25일에는 진보당에 대한 해산 결정을 내렸다. 해산 명령의 근거는 미군정이 포고했던 군정법령 제55호에 있었는데, 이 행정법령에 의거해 진보당의 등록을 아예 취소해버린다. 한편 1958년 1월 검찰은 진보당의 지도자 조봉암과 당 주요 간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조봉암은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고 지령에 따라 간첩 행위를했다는 혐의로 결국 1959년 7월 사형에 처해졌다. 1956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이승만의 가장 큰 정적으로 부상했던 조봉암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조봉암 재판은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 왔는데 2011년 1월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조봉암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당과 조봉암이 사라지고 난 이후 실시된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42.1퍼센트로 126석을, 민주당은 34.2 퍼센트로 80석을 얻었다. 이 두 정당이 얻은 의석이외에는 통일당이 1석, 무소속이 26석이었다. 자유당과민주당의 보수 양당 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는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등장할 때까지 우리 정치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서의 좌파 혹은 노동자 정당, 계급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 없지만 만약 진보당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4.19 혁명 이후 선거에서 민주당에 맞서는 주요한 경쟁 정당이 되었을 것이다. 1960년 총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몰락했고 다른 혁신계정당은 대안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 전체 의석의 75퍼센트를 차지하면서 사실상 1당 지배 체제가 되었다. 이처럼 견제 세력 없는 1당 체제로 당내에서 극심한 신파와 구파 간 갈등이 빚어졌고 이는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면서 결국 5·16 군사 쿠데타로까지 이어진다. - P133
그러나 제2공화국의 불행은 집권당이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어 총리와 내각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데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윤보선 대통령은 이한림 장군이 지휘하던 제1군을 동원하여 쿠데타 군을 진압하자는 미 대리대사나 미 7군 사령관의 제안을 거부했다. 우리 군끼리 피흘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는데, 그결과 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에 대한 미국 국무성 자료에서도 윤보선 대통령이 군인들의 힘을 통해 장면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2공화국은 이렇게 해서 허무하게 9개월 만에 무너졌다. 무엇보다 집권당의 분열, 특히 총리와 대통령 간의 갈등과 반목이 결정적 순간에 그체제를 지켜내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 P142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선거 이슈는 사상 논쟁이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 이후인 1948년11월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선거 유세 막판에 폭로한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악랄한 매카시즘의 수법"이며, 집권 후에는 공직 채용에서 연좌제를 폐지하고 혁신계 인사를 석방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결과적으로 사상 논쟁은 박정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거 결과 겨우 15만 6026표의 근소한 차이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득표율로 보면 박정희 42.6퍼센트, 윤보선 41.2퍼센트로 두 후보 간 득표율의 차이는 겨우1.4퍼센트였을 만큼, 초접전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5명 후보의 표를 모두 합치면 83만여 표나 되었다. 야당 후보가윤보선으로 단일화되었다면 승패가 뒤바뀔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 P146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재임에 도전했고 야당 경쟁자는 이번에도 윤보선이었다. 4년 전과 달리 야당은 신민당으로 사실상 통합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568만여 표를 얻어 452만여 표를 얻은 윤보선을 이전 선거에서와 달리 116만 표라는 매우 큰 차이로 따돌리고 재집권에성공했다. 이전 투표에서와 달리 여촌야도 현상도 사라져, 서울에서의 지지율이 30.2퍼센트였던 것이 45.2퍼센트로, 부산에서의 지지율도 48.2 퍼센트에서 64.2 퍼센트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광주, 전주, 수원을 제외한 전 도청 소재지에서 박정희는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된 데는 경제개발 계획에 따른 효과가 나타나면서 경제 상황이 좋아진 것이 그 이유였다. 1962~1966년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간 동안 실질 경제 성장률은 8.3퍼센트 상승했으며, 국민소득은 1962년 83.6달러였던 것이 1967년 123.5달러로 늘어났다. 이렇게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이었다.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무상 혹은 차관 형태로 많은 돈이 들어왔고,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 군과 기업, 노동자들이 국내로 송금하는돈도 적지 않았다. 경제 성장의 효과는 우선적으로 도시 지역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나지 않게 한 요인이었다. - P148
신민당이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얻은 의석수는 개헌을 막을 수 있는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훌쩍 넘는 것이어서 1967년과 같은 날치기에 의한 정권 연장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무렵은 전태일 분신, 실미도사건, 광주대단지 폭동, 한진 노동자 KAL 빌딩 방화 사건, 사법파동 등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박정희 체제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72년 10월 17일 계엄과 국회 해산 및 헌법 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 선언으로 시작된 유신 체제의 바탕이 된다. 유신 체제의 등장과 함께 한국의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지되었다. 유신 체제하에서는 복수의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경쟁 선거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체육관선거‘가 들어선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사실상 거수기 역할을 하는 대의원들이 박정희 1인 후보에대한 찬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이다. 대통령, 국회의원의 임기도 6년으로 늘렸다. 선거는 자주 치러지지않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역시 변경되었는데 우선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했다. - P155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중요한 점은 유신 체제 종말의 시그널도 결국 선거를 통해서 왔다는 것이다. 제1공화국의몰락이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예견되었던 것처럼. 유신 체제 몰락도 1978년 총선거에서 공화당의 패배를 통해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선거가 결코 공정하고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민심은 정치적 격변을 선거를 통해 예고했다. 이러한 시그널은 전두환 정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유신체제 몰락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전두환은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듬해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가 ‘박정희 없는 유신 체제‘를 이어갔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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