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대한 붉은 여왕식 설명의 역사는 한 문제에 대해 다양한 접근 방식을 종합하는 과학의 방법에 관한 아주 좋은 예이다. 해밀턴과 다른 사람들의 기생생물과 성에 대한 생각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독립된 세 연구의 수혜자들이다. 첫째는 기생생물들이 개체군을 조절하고 개체군의 주기를 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알프레드 로트Alfred Lotka 와 비토 볼테라 Vito Volterra가 제시하였고, 1970년대에 런던에서 로버트 메이 Robert May와 로이 앤더슨 RoyAnderson이 다시 언급하였다. 둘째는 1940년대에 홀데인 등에 의한 풍부한 다형 현상의 발견이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유전자는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한 형태가 다른 형태를 제거하지 못하게 작용한다는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셋째는 월터 보드머 Walter Bodmer와 다른 의학자들이 발견한 기생생물에 대한 방어 방식이었다. 그것은 방어 유전자가 자물쇠 열쇠 체계 같은 것을 제공해준다는 생각이었다. 해밀턴은 이 세 가지 물음을 합쳐, 기생생물은 저항 유전자를 계속 바꿔나가는 숙주와 꾸준히 싸우는데, 이때 유전자의 형태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은 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 P139

성과 질병은 깊은 연관이 있다. 기생생물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성이 필요하다. 기생생물보다 자신들의 유전자가 한 걸음 앞서가게 하기 위해 생명체에게는 성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수컷은 쓸모없는 잉여가 아니다. 그들은 독감이나 홍역 등으로 자손이 몰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암컷의 보험 증서이다(이것으로 위안이 된다면), 암컷은 자신의 난자에 정자를 추가시키는데, 만약 이런 행위를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로 생기는 자손들은 그들의 유전적 자물쇠를열려고 오는 첫 기생생물의 공격에 모두 똑같이 취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성들이 자신들의 새 역할을 축복하기 전에,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북을 치며 병원체에 대한 노래를 부르기 전에, 그들 존재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겠다. 곰팡이를 고려해보도록 하자. 많은 곰팡이들이 유성이지만 웅성을 띠고있지는 않다. 곰팡이들은 수만 개의 다른 성을 지니고 있으며, 구조적으로 동일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번식할 수는 있지만 자가교배는못한다. 심지어는 동물 가운데에도 지렁이같이 자웅동체인 동물들이 많다. 유성이 다양한 성별의 필요성, 단 두 성별의 필요성 또는그 두 성별이 암수처럼 동떨어져 있을 필요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로 처음 본 순간에 가장 멍청하게 보이는 것이 양성 체계이다. 만나는 사람 중 족히 50퍼센트는 배우자로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웅동체라면 모든 사람이 배우자의 가능성을 지닐 것이다. 우리가 수천 종류의 성별을 갖는다면, 보통 독버섯처럼 만나는 사람의 99퍼센트가 배우자의 가능성을 지닌다. 만약 세 종류의 성별을 갖는다면 3분의 2가 가능성을 가진 배우자가 된다. 왜 사람들이 성을갖는가에 대한 붉은 여왕의 풀이는 단지 길고 긴 이야기의 시작임이 밝혀지고 있다. - P143

 유전자는 의식이 없고, 서로 협동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화학적 신호에 의해 켜지거나 꺼지는 생명력이없는 분자이다. 그들을 올바른 순서로 작동하게 해서 인간의 육체를만들도록 하는 것은 신비스러운 생화학적 계획이지 민주주의적인 결정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수년간 윌리엄스, 해밀턴 등에 의해 시작된 혁명으로 점점 더 많은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활발하고 약삭빠른 개체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유전자가 의식이 있거나어떤 목적을 향해 작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진지한 생물학자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뚜렷한 목적론적인 사실은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자연선택은 자신의 생존 능력을 높여주는 유전자의 강화된 생존이라는 것이다. 즉,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잘 전달되는 유전자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적론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생존을 향상시키는 작용을 수행하는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협동하여 촌락을 형성하는 것이 효과적인 사회 전략이듯이, 유전자에게는 협동하여 신체를 만드는 것이 효과적인 생존 전략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모두 협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쟁적인 자유기업도 반드시 필요하다.  - P148

수십억 년 전에 생명체가 원시 대양에서 나온 이후 다른 분자를 사용하여 자신을 복제하는 분자의 수는 증가했다. 그러다 그 몇몇분자들은 협동과 분화의 이점을 알게 되었고, 염색체라는 그룹을 만들었으며 세포라는 기계를 작동하여 효과적으로 염색체를 복제할수 있었다. 마치 작은 농부 집단이 목수와 대장장이를 만나 촌락이라는 작은 협동 조직을 형성하듯이. 그리고 촌락 부족을 이룬 것처럼, 염색체는 몇몇 세포를 합쳐서 초세포Super cell를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세포는 이렇게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가 모여서 형성되었다. 부족에서 국가로, 그리고 제국이 되어가듯이, 세포들은 뭉쳐서 유전자 집합체의 거대한 집합체인 동식물과 균류를 만들었다.
인간 사회에서 이러한 과정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 앞서 사회적 이익을 강요하는 법이 시행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전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후세들이 유전자를 평가하는데는 한 가지 기준만이 있다. 바로 다른 유전자들의 조상이 되는가이다. 대체로 다른 유전자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것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부를 축적할 때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타인을 설득해 그의 부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전자가 독립하면 그때는 다른 모든 유전자는 적이 되어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게 된다.
만약 유전자가 연합체의 일부라면 경쟁 연합을 패배시키는 데 똑같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마치 보잉사의 직원들이 에어버스사의 희생속에서 성공하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 P150

개개의 유전자 차원에서 보면, 유전자는 성을 통해 수직적으로뿐아니라 수평적으로도 퍼져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유전자가 자신이 거주하는 전달체에 성을 갖도록 했다면, 설령 개체에게 불이익이 가더라도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가능하다면 후손을 남길 수 있는 쪽으로). 광견병 바이러스가 다른 개로 퍼지기 위해 개를 조종하여 무엇이든 물게 하듯이, 유전자는 다른 가계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의 숙주가 성교하도록 만든다. - P152

히키와 로즈는 특히 한 염색체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다른 염색체로 옮겨가는 전이인자 transposon 혹은 도약 유전자라는 유전자에 홍미를 느꼈다. 1980년 같은 시기에 두 그룹의 과학자들은 전이인자가 다른 유전자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복제만을 퍼뜨리는 ‘이기적인‘ 기생 DNA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과거의 과학자들처럼 전이인자가 개체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전이인자가 개체에게는 나쁘지만 전이인자 자신에게는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강도와 무법자는 사회에 이익을 주기보다는 손해를 끼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아마도 전이인자는 ‘무법자 유전자‘ 이리라. 또한 히키는 전이인자가 근친교배나 무성교배하는 생물보다는 이계교배하는 유성생식 생물에서 더 흔하게 발견되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는수학적 모델을 이용하여 기생적인 유전자가 숙주에 악영향을 주더라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였다. 그리고 히키는 유성생식 중에서는 빠르게 퍼지지만 무성생식 종에서는 느리게 퍼지는 효모의 기생성 유전자를 찾았다. 그러한 유전자는 ‘플라스미드plasmid‘ 혹은독립된 작은 DNA 고리에 위치하며, 박테리아에서는 이런 플라스미드가 유전자들이 퍼지는 수단인 접합을 유도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개들이 서로를 물어뜯게 하는 광견병 바이러스와 같다. 나쁜유전자와 전염성 바이러스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 P153

 여성이 임신하면 배아는 어머니가 지닌 유전자의 반만을 받는다. 이 유전자들은 운이 좋은 것이다. 운이 없는 다른 반쪽은 다음기회를 기다린다. 요점을 말하자면 사람은 23쌍의 유전자를 지니는데, 23개는 어머니의 것이고 23개는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난자나 정자를 만들 때 각 쌍으로부터 하나씩 채택해서 최종적으로 23개의 염색체를 갖게 된다. 어머니에게 받은 것만을 그대로주거나 아버지의 것만을 주거나, 아니면 두 가지가 혼합된 상태로줄 수 있다. 이때 확률을 조작해서 배아에 들어갈 확률을 50퍼센트이상으로 증가시킨 이기적인 유전자는 훨씬 유리해질 것이다. 이 유전자가 단순히 배아의 다른 쪽 조부모에서 온 유전자를 제거한다고가정해보자.
실제로 그런 유전자가 있다. 어떤 초파리의 2번 염색체에는 ‘분리교란자 segregation distorter‘ 라는 유전자가 존재한다. 이 유전자는 단순히 다른 2번 염색체를 지닌 모든 정자만을 제거한다. 그래서 이 초파리는 정상 개체의 절반 분량의 정자만을 생산한다. 그렇지만 모든 정자는 분리 교란자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초파리의후손에 대해 독점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유전자를 카인이라고 하자. 그런데 카인은 아벨의 일란성쌍둥이이므로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그의 형제를 죽일 수 없다. 아벨에게 사용할 무기가 세포 내로 방출되는 파괴 효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학 무기와 같다. 이때 카인의 방어책은 자신을 보호해주는방독면 같은 기구에 의존하는 것뿐이다(이것은 파괴 효소를 물리치는유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카인의 방독면‘은 카인이 아벨에게 사용하는 가스로부터 카인 자신을 보호해준다. 카인은 인류의 조상이 되고아벨은 죽는다. 이렇게 해서 형제 살인을 행하는 유전자는 살인자가 대지를 상속하듯 자손을 퍼뜨릴 것이다. 분리 교란자와 형제를 죽이는 유전자들을 속칭해서 ‘감수분열 추진자meiotic drive‘ 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들이 동반관계가 깨지는 감수분열 과정에서 편협한 결과가 나오도록 추진하기 때문이다. - P155

생쥐와 초파리의 경우, 카인 유전자는 자신의 방독면을 꼭 껴안음로써 교차가 일어날 때 떨어지지 않아 살아남는다. 그렇지만 특별히 카인 유전자의 침입을 많이 받는 염색체 한 쌍이 있는데, 이는 교차가 일어나지 않는 ‘성염색체‘ 이다. 사람을 비롯해 다른 많은 동물에서 성별은 유전자 추첨으로 결정된다. 부모로부터 한 쌍의 X염색체를 물려받으면 여성이 되고, 하나의 X와 하나의 Y를 받으면 남성이 된다(새, 나비, 또는 거미의 경우에는 반대이다), Y염색체에는남성의 특성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있으므로, Y는 X와 양립하지 않고 서로 교차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X염색체의 카인 유전자는 자살의 위험 부담 없이 Y염색체를 소멸시킬 수 있다. 이 유전자는다음 세대에서 성비性比를 여성 쪽으로 기울게 하여 전체 인구가 대가를 치르도록 유도하지만, 후손을 독점하는 이익은 자신이 얻는다. 마치 불로소득자가 공유지의 비극을 유발하는 경우와 같다. - P157

옥스퍼드대학의 로렌스 허스트는 이 논점을 이용하여 성별은 융합성교fusion sex의 결과라고 예측했다. 즉, 클라미도모나스와 대부분의 동식물에서처럼 성교가 두 세포의 융합 형태로 일어나는 경우에 두 종류의 성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세포 사이에 관이 형성되어 핵 유전자가 이것을 통해 전달되는 접합의 형태에서는 세포의 융합이 없고 그래서 분쟁이 없으므로 살인자와 피해자의 성별은 필요 없다. 섬모성 원생동물과 버섯같이 접합성교 conjugation sex를 하는 종들에게는 수십 종류의 성별이 있다. 융합성교를 하는 종들에게는 대체로 두 종류의 성별이 나타난다. 특히 두 방식 모두로 성교를 하는 ‘하모‘섬모충은 좋은 예이다. 하모류가 융합성교를 할 때에는 두 종류의 성별이 보이고, 접합성교를 할 때에는 많은 성별이 나타난다. - P161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끝장을 보는 것이 기생생물에게 이롭다면, 숙주로서는 두 형질의 기생생물들에 의한 교차감염을 방지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그리고 성교보다 교차 감염의 위험률이 높은 것은 없다. 난자와 융합하는 정자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안고 들어올 위험이 있다. 이것들이 침입하게 되면 난자 내의 기생생물들을깨워 난자를 병들게 하거나 죽일 수 있는 쟁취의 전쟁을 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정자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묻혀올 수 있는 물질을 난자 안으로 가져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 그래서 오로지 핵만을 난자에게 전달한다. 이것이 바로 안전한 성교가 아닌가?
이 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얻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느다란 관으로 여분의 핵을 전달하는 접합생식을 하는 짚신벌레는 이 이론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이 과정은 관을 통해 핵만 이동한다는점에서 위생적이다. 두 마리의 짚신벌레는 이렇게 2분 정도만 붙어있는데, 이 시간이 넘으면 관을 통해 세포질이 이동한다. 이 관은 너무 좁아서 핵도 간신히 비집고 통과한다. 따라서 짚신벌레와 유사종들만이 그렇게 작은 핵을 갖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작은핵은 유전자를 저장하고 있어서 ‘암호 저장고‘ 라고 불리며 작은 핵에서 일상생활에 쓰이는 큰 핵이 만들어진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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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은 분명 험난하고 지독한 곳을 건너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거기에는 새하얀 목련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료안에게 외쳤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 또한 료안이라고 말했는데, 료안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자신들이 서 있는 고원의 평평함에 대해 얘기했다.
"이곳은 정말로 평평하군요."
"네, 평평합니다. 하지만 이 평평함은 험준함에 대한 평평함입니다. 진정한 평평함은 아닙니다." - P50

"얻어맞아 팅팅 부은 얼굴이 미워서 내가 ‘이딴 짓 하지 말고,
하던 대로 글이나 열심히 써‘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글쓴다고인생이 가만히 놔둘 것 같니?‘라면서 흘겨보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그래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잖아. 해도 안 되는일, 질 게 뻔한 일을 왜 하고 있어?‘라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윈드‘라고 하더라구요. 동양 챔피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흉내내서 젠체하는 거였는데, 나중에 그 ‘두번째 바람‘이라는 말이 두고두고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지요."
맞다. 그랬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 P60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있어. 지금은 공책에 써서 지우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서부터 지울 수 있어.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을 남길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마음껏 생각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 그 소설가가 "모든 글‘쓰기‘는 글‘짓기‘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아빠의 그 말을 떠올렸어요. 그렇게 수많은 생각들을 받아 적고 또 지워가면서 십대를 보냈습니다. 차츰 저는 제 머리를 라디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끌 수 없는 라디오 같은 것 말이에요. 거기에서는 온갖 방송들이 흘러나오니까 마음에 드는 방송을 찾아 들으면 되는 것이죠. 어쩌면 이건 선생님의 달 이야기와 같은 얘기일 수도있어요. - P86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 P97

아내의 옛 책을 찾은 건 한 달 뒤, 제작팀과 함께 몽골로 떠날무렵이었다. 책이 두툼하게 부풀어올랐고 페이지가 바랬지만, 새책보다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 꾸린 여행 가방에 그 책을 밀어넣었다. 정미가 죽은 뒤로 마음의 가장자리는 매 순간 조금씩 시간에 쏠려 과거로 떨어지고 있었다. - P103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 P120

 의사가 시키는 대로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간호사가 그의 왼팔에 수액 바늘을 꽂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미는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정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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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가 설명하는 방식은 복권추첨과 비슷하다. 무성생식을하는 것은 번호가 같은 복권을 많이 갖고 있는 것과 같다. 당첨 확률을 높이려면 번호가 다른 복권을 여러 장 갖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후손이 변형되거나 색다른 환경에 처하기 쉬울 때, 성은 종뿐 아니라 개체에게도 유리하다.
윌리엄스는 특히 진디나 단성생식을 하는 윤충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수세대에 걸쳐 단 한 번 성을 가진다. 진디는 여름에 장미 덤불 속에서 번식하고, 단성생식을 하는 윤충은 거리의 웅덩이에서 번식한다. 그러나 여름이 가면 진디나 단성생식을 하는 윤충의 마지막세대는 완전히 유성생식을 하게 된다. 그들은 암컷과 수컷을 낳고 새끼들은 서로의 짝을 찾아 교미하여 튼튼한 자손이 더 좋은 조건이 돌아올 때까지 딱딱한 포낭에 싸여 겨울이나 가뭄을 이겨내도록한다. 윌리엄스가 볼 때 이것은 복권추첨 이론Lottery theory과 맞아떨어졌다. 주변 조건이 우호적이고 예측 가능할 때는 되도록 빨리 생식하는 것이 좋다. 무성생식의 방법으로 그러나 이런 아늑한 세계가 파괴되어, 다음 세대의 진디나 윤충들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거나 예전의 거주지가 원상태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할 때에는, 서로다른 다양한 자손들을 낳고 그중 하나가 적자로 살아남기를 바라는것이 유리했다. - P101

진보의 사다리라는 낡은 개념이 아직도 목적론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진화는 종들에게 이롭기 때문에 종들은 진화가 더 빨리 진행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화의 특징은 변화가 아닌 안정이다. 성, 유전자 수리, 후세에게 결점 없는 정자와 난자를 남겨주기 위해 고등동물들이 지닌 선별 메커니즘과 같은 이 모든 것들이 변화를 막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이 아니라 실러캔스가 유전자체계의 승리자이다. 실러캔스는 유전형질을 이루는 화학물질에 가해지는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세대 동안 원래 형태를계속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성에 대해 낡은 변절자 가설은 성이 진화를 가속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이 모델은 돌연변이가 다양성의 근원이기 때문에 생명체들이 돌연변이 발생률을 꽤 높게 유지하려 할 것이고, 나쁜 돌연변이를 아주 잘 골라낸다고 했다. 그렇지만 윌리엄스는 어떤 생물이라도 돌연변이 발생률을 되도록 최소화하려는 행동 이외의 짓을 한다는 증거는 발견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든 생물은 돌연변이 발생률을 0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진화는 돌연변이 방지의 실패에 달려 있다. - P109

붉은 여왕 이론은 세상이 필사적인 경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정말로 계속 변화한다. 그렇지만 방금 전에는 종들이 몇 세대 동안 안정적이며 좀처럼 변화를 겪지 않는다고 하지 않있는가? 그렇다. 붉은 여왕 이론의 핵심은 그녀가 계속 달리고 있지만 항상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결국 시작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변화는 있지만 발전은 없다.
붉은 여왕 이론에 따르면 성은 더 커지거나, 더 잘 위장하거나, 더 추위를 잘 견디거나, 더 잘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생물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성의 존재 이유는 반격하는 적과 싸우는 것이 전부이다.
생물학자들은 너무 이른 죽음에 대한 물리적 원인만을 과대평가했지, 생물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화를 설명하는대부분의 글에서 가뭄, 서리, 바람, 기근은 생존의 거대한 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낙타의혹, 북극곰의 털, 술통 같은 윤형동물의 고온저항성 몸 등과 같은 물리적인 적응의 신비는 진화의 위대한 성과 중 하나로 여겨진다. 성에 대한 최초의 생태학 이론들은 모두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이러한 적응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뒤엉킨 강둑 이론과 함께 다른 주제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붉은 여왕의 행군에서 이는 압도적인 음색을 갖는다. 사실 동물을 죽이거나 생식을 억제하는 요소가 물리적 요인일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기생동물, 경쟁자, 그리고 육식동물 같은 다른 동물이 다. 포화된 연못에서 굶고 있는 물벼룩은 경쟁의 희생양이지 식량 부족의 희생양은 아니다. 대체로 육식동물과 기생동물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세상 대부분의 죽음을 일으킨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은 보통 곰팡이로 인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청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보통 더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히거나 그물에 걸려서이다. 무엇이 몇 세기 전에 당신 조상들을 죽였는가? 천연두, 결핵, 폐렴, 전염병, 성홍열, 설사 등이었다. 사고나 기근이 사람들을 약화시켰지만, 감염은 그들을 죽인다. 부유층의 사람들 중 노령이나, 암, 심장마비 등으로 죽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적었다. - P112

기생생물은 육식동물보다 두 가지 이유에서 더 파괴적인 효과를나타낸다. 하나는 그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들과 거대한 백상어 외에는 포식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아주 많은 기생생물을 가지고 있다. 토끼가 담비, 족제비, 여우, 매, 개와 사람 등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많은 토끼가 이, 벼룩, 모기, 촌충, 점액종 바이러스에게 죽는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의 원인이다. 바로 포식자는 먹이보다 덩치가 크지만, 기생생물은대체로 숙주보다 작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생생물의 생존기간이 짧아서 주어진 시간 동안 숙주보다 더 많은 세대를 거친다는 의미이다. 내장 속의 박테리아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인류가 유인원에서부터 진화해온 전체 세대의 6배를 거친다. 그 결과 숙주보다 더빨리 번식하여 숙주의 개체수를 감소시키거나 조절할 수 있다. 포식자는 단지 먹이가 풍부한가에 따라 많아졌다 적어졌다 할 뿐이다.
기생생물과 숙주는 아주 친밀한 진화관계를 맺고 있다. 기생생물의 공격이 더 효과적일수록(더 많은 숙주를 침범하거나 하나의 숙주로부터 더 많은 자원을 얻을수록), 숙주의 생존 기회는 방어책을 구축할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숙주가 잘 방어할수록 이 방어책을 이겨낼 수 있는 기생생물이 자연선택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익은 항상 한쪽에서 다른 쪽 사이를 오간다. 위기가 닥치면 닥칠수록 숙주와 기생생물 둘 다 힘을 다해서 싸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결코 승리 없이 일시적인 휴식만을 얻는 진정한 붉은 여왕의 세계이다. - P114

또한 변화가 가득한 게 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성은 매 세대 유전자를 바꿔야 할 훌륭한 동기로 작용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성의 역할이다. 이전 세대에서 특정 유전자들이 기생생물의 공격을 잘 방어해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음 세대에서 동일한 유전자 조합을 피해야하는 가장 좋은 이유이다. 다음 세대가 돌아올 때쯤이면, 기생생물들은 전 세대에서 가장 우수했던 방어에 대한 해답을 알아낼 것이기때문이다. 마치 운동과 같다. 체스나 축구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라도 상대방이 그 해법을 터득하면 더 이상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공격의 모든 혁신은 곧 방어의 혁신에 의해 무마된다. - P115

그렇지만 진화에서는 진화 속도가 느린것들이 빠른 것들보다 유전자를 더 많이 섞는다. 세대의 길이와 재조합 정도의 연관성에 대한 오스틴 버트의 발견은 붉은 여왕이 작용한다는 증거이다. 기생생물이 대항할 것을 염두에 두면 세대가 길수록 유전자의 재조합이 많이 일어나는 편이 좋다.  - P121

그렇지만 붉은 여왕의 경우는 이보다 더 신비스럽고 강력하다. 성교를 거쳐 태어난 자손이 자신의 클론보다 더 생존할 가능성이 크다. 성의 이점은 단일세대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는 한 세대에공통적인 어떠한 자물쇠라도 이에 맞는 열쇠가 기생생물 사이에서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몇 세대 후에는 반드시 피해야 할자물쇠가 되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에 맞는 열쇠가 흔할 테니 말이다. 독특한 모양의 자물쇠가 매우 유리하게 된다.
유성생식을 하는 좋은 무성생식 종에게는 불가능한 자물쇠의 도서관에 의존할 수 있다. 이 도서관을 다른 말로 하면 이형접합체로異型接合體, 혹은 다형多型 현상인데, 거의 비슷한 뜻이다. 이것은 근친교배를 거듭하면 잃게 되는 자원이다. 즉 대부분의 개체군(다형현상)과 모든 개체(이형접합체)에게서 한순간에 동일 유전자의 다양한 형태가 발견된다는 의미이다. 서양인의 ‘다형화‘된 푸른색과 갈색 눈동자는 좋은 예이다. 갈색 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푸른 눈동자의 열성 유전자도 지니므로, 이들은 이형접합체이다. 이런 다형현상은 순수 다윈론자들에게는 성만큼이나 의문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는 한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색 눈이 푸른 눈보다 조금이라도 우성이면(더 정확히 말해서 정상 유전자가 겸상적혈구빈혈증 유전자보다 우성이라면), 갈색 눈은 푸른 눈을 멸종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런 다양한 형태의 유전자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이형접합체가 다양한 것일까? 겸상적혈구빈혈증의 경우에는 이 유전자가 말라리아를 퇴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형접합체(정상 유전자 하나와 겸상적혈구 유전자 하나를 지닌 개체들은 말라리아가 만한 곳에서 정상 유전자를 지닌 개체들보다 더 유리하다. 하지만 동형접합체들(두 개의 정상 유전자나 겸상적혈구 유전자를 지닌 개체들)은각각 말라리아나 겸상적혈구빈혈증에 시달린다. - P122

 해밀턴이 말한 대로 반反기생성 적응은 끊임없는 퇴화이다."
무성생식 종에서는 불리한 유전자가 멸종해버리지만, 유성생식 종에서는 그저 희귀해질 뿐이고, 그랬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해밀턴은 "우리 이론에서 성의 핵심은 지금은 쓸모없지만 나중에는 유하리라 예상되는 유전자를 저장한다는 데 있다. 성은 끊임없이 유전자를 조합하려 하고, 불필요한 것이 필요하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적었다. 질병 저항성에는 영구적인 이상 상황이 존재할 수 없다. 비영구적인 퇴화 현상이 돌고 돌 뿐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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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때마다 나는 1999년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유체 이탈, 도플갱어, 예지몽, 인체자연발화, 공중부양 등등 불가사의한 능력이나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정기 구독하던 어린이 잡지에 매달 그런 기사가 한 꼭지는 실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도 역술이나 점, 단학 따위가 판을 치고 있었다. 한강 다리가 무너지거나 IMF 사태로 대량 실직이 일어나는 등예측 불허의 현실 속에서 다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 때라 그런 비과학적인 말들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 P9

그러다가 2012년 ‘춤추는 말의 숫자에 달린 원이 아홉개가 되는 때, 고요한 아침으로부터 종말이 올 것‘이라는 그의 예언시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 예언을 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회수가 십억 회가 넘어가면 지구 종말이 온다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는데, 예언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이현령비현령의 사후 추정이라는 걸 이보다 잘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말춤이라서 말세인가? 말장난을 하려는 게 아니다. 소설가로서 나는 예언의 내용보다는 그 형식이 언어여야만 한다는 게 더 흥미롭다. 어떤 예언가가 환상 속에서 미래의 뭔가를 봤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지식 수준에 맞춰 언어로 표현해야만 한다. 실제로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모를까, 그걸 언어로 변환한 이상 그 진의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게다가 번역까지된다면 왜곡은 피할 길이 없다. 결국 예언은 그 형식 때문에 빗나갈 가능성이 많은 셈이다.  - P10

"그 한 문장으로 판매금지가 결정될 수 있단 말인가요?"
"군부가 판매금지를 시킬 때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요. 그게 독재정권이 하는 일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해요. 정권이 싫어하는 게 뭔지를 그렇게 독재정권하의 사람들은 스스로 내적 검열관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탓에 판매금지된 책을 구해 읽어보면 가끔 어리둥절할 때가 있어요.  - P16

"과거는 제가 분명히 겪은 일이지만, 앞으로 이 친구와 결혼한다는 건 가능성일 뿐이잖아요."
나는 그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민은 그렇게 말했다고한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건 지민씨의 엄마가 소설에 쓴 말이에요. 소설 속 연인은 두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시간이 없으니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요. 오직 이 순간의 현재만 존재하죠. 그럼에도 인간은 지나온 시간에만 의미를 두고 과거에서 현재의 원인을 찾습니다. 시간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 흐르든, 19세기로 흐르든 마찬가지예요. 안타까운 건 이런 멋진 소설을 쓰고서도 지민씨의 엄마가 이십 년 뒤의 지민씨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가장 괴로운 순간에 대학생이 된 딸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선택은 달라졌을 겁니다.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미래를 기억해, 엄마를 불행에 빠뜨린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 P29

1999년 여름, 1학기 종강파티가 끝나고 지민이 내게 자신은곧 죽을 사람이라고 말할 때만 해도 나 역시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어릴 때 내가 상상한 미래는 지구 멸망이나 대지진, 변이 바이러스의 유행이나 제3차세계대전 같은 끔찍한 것 아니면 우주여행과 자기부상열차, 인공지능 등의 낙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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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그녀를 잠식했다. (수전은 이런 감정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포로였다. (수전은 이 생각도 살펴보았다. 이것이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라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매슈에게 반드시 말해야 했다. 하지만 뭘? 수전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감정, 그녀 스스로 경멸하는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감정들이 너무나 강렬해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방학이 또 다가왔다. 이번에는 거의 두 달이나 되는 방학이었다. 수전은 의식적으로 차분하고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느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아서,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아니면 평소에 비어 있는 여분의 방으로 올라갈 때도 있었다. 그녀가 거기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엄마, 엄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도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며 침묵을 지켰다. 혼자서 정원 끝까지 갈때도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천천히 흘러가는 갈색 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존재 속으로, 혈관 속으로 강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서 수전은 다시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 식구들에게돌아왔다. 미소를 잃지 않고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 P296

호텔 방은 평범한 익명의 장소였다. 수전이 원하는 바로 그런곳. 수전은 가스히터에 1실링을 넣어 작동시킨 뒤, 더러운 창문을 등진 더러운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더니 곧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살짝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배인인 미스 타운센트가 직접 찻잔을 들고 와 있었다. 수전이 너무 오랫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서 혹시 어디가 아픈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미스 타운센드는 쉰 살의 고독한 여성이었다. 최대한 정직하게이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수전에게서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방에 남아 수전과 이야기를 나눴다. 수전은 몸이 아프다는 거짓말을 자신이 더욱더 환상적으로 꾸며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리치먼드의 큰 집, 부자 남편, 네 아이라는 조건에 맞는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하다 보니 이야기가 점점 황당해졌다. 그 대신 수전이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
‘미스 타운센드, 저는 몇 시간 동안 혼자 있고 싶어서 이 호텔을 찾아왔어요. 내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있고 싶어서요."수전은 머릿속으로만 이 말을 하면서, 노처녀인 미스 타운센드의 얼굴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표정을 역시 머릿속으로만 그려보았다. "미스 타운센드, 우리 네 아이와 남편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요. 이해하시겠어요? 그런데 당신 눈에서 히스테리의 기운이 번들거리고 있네요. 오로지 외로움을 간신히 참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눈빛이죠. 그걸 보니, 제 삶이 곧 당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 그대로라는 걸 알겠어요. 하지만요 미스 타운센드, 저는 그런 삶을 전혀 원하지 않아요. 원하신다면 제 삶을 가져가세요, 미스 타운센드, 저는 당신처럼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미스 타운센드, 일곱 악마가 저를 포위하고 있어요, 미스 타운센드, 그 악마가 쫓아올 수 없는 이 호텔에 머무르게 해주세요 •••••." 수전은 이런 말 대신 단순히 빈혈이 있다고만 말했다. - P304

낮 12시였다. 수전은 자유였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냥 앉았다. 눈을 감고 앉아서 혼자가 되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나자 그녀는 짜증이 났다. 짜증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프레드였다. 그녀의 지시대로 5시가 되었다고 알리러 온 것이다. 프레드는 날카롭고 작은 눈으로 방을 한번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침대, 흐트러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이 방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수전은 프레드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모레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과 자신이 먹을 저녁식사를 다시 요리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온 소피를 반갑게 맞았다. 이 모든 일을 수전은 유쾌하게, 기꺼이 했다. 하지만 그동안 내내 그 호텔 방을 생각하며, 온 마음으로 그곳을 갈망하고 있었다. - P317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여기서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 매슈의 아내, 파크스 부인과 소피트라우브의 고용주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친구, 교사, 상인 등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정원이 딸린 크고 하얀 집의 안주인도 아니고, 이런저런 행사에딱 맞게 차려입을 수 있는 다양한 옷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존스 부인이고 혼자였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없었다.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여러 책임들을 수행한 내가 지금은 여기에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언제나 똑같아. 하지만 가끔은 매슈 롤링스의 아내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들 외에는 내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정말 이상하지!
그녀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녀는 거리 저편의 쓰러져가는 건물들, 축축하고 우중충하지만 가끔 파랗게개기도 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건물이나 하늘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텅 빈 상태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이 하얀 백지 같았다. 가끔은 아무 말이나 소리 내어 말하기도 했다. 아무 의미 없는 감탄사 같은 것. 그다음에는 얄팍한 카펫의 꽃무늬나 초록색 새틴 이불의 얼룩에 대해 한마디논평을 덧붙였다. 하지만 한없이 공상에 잠기며, 아니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기고, 방황하고, 깜깜하게 어두워져서 공허함이 피처럼 혈관을 따라 즐겁게 도는 것을 느끼며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 P318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약 네 시간이었다. 그녀는 즐겁게, 어둡게 달콤하게 그 시간을 보내며 아주아주 부드럽게 강변을 향해 미끄러졌다. 그러다 딱히 의식을 차리지 않은 상태로 의자에서일어나 얄팍한 카펫을 문으로 밀고, 창문이 단단히 닫혔는지 확인하고, 벽난로 미터기에 2실링을 넣은 뒤 가스 밸브를 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 방의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서는 퀴퀴한 냄새, 땀과 섹스의 냄새가 났다.
초록색 새틴 이불 위에 똑바로 누워 있다 보니 다리가 싸늘해졌다. 그녀는 일어나서 서랍장 맨 아래 칸에서 개켜져 있는 담요를 찾아내 꼼꼼히 다리를 덮었다. 그렇게 누워서 가스가 작게 쉭쉭거리며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어두운 강물로 떠갔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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