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 문화는 가족 내 역할을 분명히 정해주고 구성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똘똘 뭉치게 만듦으로써 가족이 곧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을 강화한다. 반면 가족의 집단이익이 강조되다 보니 개인의 희생과 노력이 가려지기 쉽다.
이는 국민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단기간 빠른 성장을 이룬 한국 사회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IMF 시기의 금 모으기 운동이다. 국민모두가 집에 있던 금을 내놓아 국가를 살리고자 한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 전무후무하다. 이를 긍정적 측면에서 볼수도 있겠지만, 국가가 어떤 문제나 위기에 봉착했을 때 개인들이 국가의 책임을 묻기보다는 개인의 희생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식은 가족주의가 확대된 것으로 하나의 국가관이라고 할 수 있다. - P90

따라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가장급성장하는 시기에 국민을 돌보는 문제는 모두 국가가 아닌 개별 가족이 떠맡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도시로이주하도록 독려했는데, 이주한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안전이나 기본적 복지를 보장받을 수가 없었다. 이촌향도로 도시에 온 사람들은 같은 지역 출신의 친척을 통해서나, 줄줄이 잇따라 올라온 형제자매들과 서로 돕고 돌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한국에 개신교가 급성장한 것도 당시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했던 것과 연결된다. 외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가족에게조차 의존하지 못할 때,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은 종교 공동체밖에 없었던것이다. - P93

한국의 가족주의는 국가가 제공하지 못하는 안전망을개인에게 주었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생성해왔다. 한국 사회에서 권력 다툼, 즉 먹거리를 놓고 누가 가져갈 것인지 다투는 양상은 가족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현대 한국 사회를 들여다 보면, ‘밥그릇 싸움‘에서 혈연, 학벌, 동향 등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왔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속해있는지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어디 성 씨라든지, 어느 동향이라든지, 조상 중에 어떤 직위를 누리신 어르신이 있다든지, 어느 학교 출신이라든지 하는 점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곤 한다. 이것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지위와 가치를 높임으로써 권력 다툼에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즉, 혈연, 학벌, 동향 등 확대된 가족주의는 패거리주의를만들어왔다.
이 같은 패거리주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노동, 정치권, 시민운동계는 연고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패거리를 만든다. 교회와 재벌가에서는 가족을 중심으로 세습이 이루어진다. 같은 패거리끼리 중요 사항을논의하고 결정하며, 패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그 문제에 참여하고자 하면 철저하게 배척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내부 집단 간의 결속을 강화하고, 외부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것이다. 주요 결정들이 가족이나 연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은 전쟁직후의 불확실한 현실과 급성장 시기에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편일지언정 오늘날 한국이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 P94

소가족이 가족의 표준적 모델로 승인되고 제도화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라고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족이 오늘날과 같이 성과 사랑이 중심이 되는 친밀한 사적 영역으로 개념화된 것은 근대 산업사회에 이르러서이다. 경제, 규범, 교육 등의 기능이 이제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적 차원의 법이라든지 학교라든지 자본주의 체제로 분화되어버린 산업사회에서 가족은 애정이나 친밀함과 같은 정서적 기능을 핵심 기능으로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공적 영역인 가정 밖에서의 역할과 사적영역인 가정에서의 역할이 분리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남성은 바깥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은 집 안에서 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며 가족의 정서를 다루는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 변화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근대 핵가족의 이념과 남녀 성 역할의 분화가 발생했다고할 수 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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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가 아니라면 씨앗이 품고 있는 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가장 여린 마음에까지 독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독은 악이 아니다. 안간힘이고 사랑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씨앗이 품은독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리라. 무력한 인간을 번번이 일으키는 일. 주저앉아도 일으키고 주저앉아도또다시 일으키는 일.
우리는 모두 찢기기 쉬운 피막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피막에 함부로 막대기를 꽂아휘저을 수 없다. 대단한 무엇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을 둘러싼 피막이 손상될 때 인간은 죽는다. 아주 작은 찢김으로도 상한다. 그러니 겪고 뒤척이면서 두터워지는 수밖엔 없다. 이 여름, 이 겨울을지나면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겠지. 이 사랑, 이터널을 빠져나가도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 있을것이다. 그 시간을 믿으며 가야겠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 P78

썩게 하는 힘. 감정이든 사람이든 시간이든 썩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마음들은바로 그 순간에만 말이 된다. 오늘은 비가 왔어. 낮에도 어둑해서 불을 켜야 했지. 너는 대답이 없구나. 오늘은 날이 맑았어. 버지니아 울프가 연필 한 자루를 사러 런던 거리를 헤매는 이야기를 읽고 나도 용기내어 외출을 해보았어. 시장에 봄나물을 사러 다녀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제철이라 맛있을 거라며 한움큼을 더 담아주신 거 있지. 덜렁덜렁 검은 비닐봉지 흔들며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좋았어. 너는 대답이 없구나.
그런 혼잣말들로, 눈물로, 한밤의 달리기와 그네타기로, 시와 음악으로 우리는 모루에 대항한다. 연필 한 자루가 산책의 근사한 핑계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필은 이미 충분하니까. 애초에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신발 끈을 고쳐묶고 문을 열었다면 슬픔에서 위안으로 가는 협곡을뛰어넘는 중이라고 여겨주기를. 썩고 난 뒤에야 묻을 수 있다.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 것이더라도, 너는여전히 대답이 없구나. 그는 그다음 말을 향해 온 마음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 P89

나에겐 팥죽만 보면 목이 메고 울고 싶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순전히 팥죽의 색깔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못난 마음을 한 솥 가득 넣고끓이면 꼭 그런 색과 모양이 될 것 같아서다. 휘저을수록 검어지고 퍽퍽해지는 것까지 영 손쓸 도리 없는 풍경이다. - P92

이 글은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엄마를 위해 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눈물이 있을지라도 우리 삶의 구체성으로 말미암아이 페이지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될 거라고. 귀퉁이를 접어 두고두고 펼쳐보며 엄마의 아팠던 시간, 그림자의 그림자까지 끌어안겠다고.
사과의 갈변은 사과가 운 흔적일까? 유루증流淚症은 생각할수록 슬픈 병이다. 적갈색이 생각할수록 슬픈색인 것처럼.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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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그것은무슨 뜻일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생리적 욕구이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항상 무엇인가를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욕망이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라고 자크 라캉은 말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욕망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바라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을타자가 욕망하는 미끼로서 제공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타자의 성적 욕망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 P56

사실 부모와 자녀로만 이루어지는 작은 규모의 가족 형태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가족 형태다. 핵가족이 근대 이후 생긴 가족의 형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과거 농경 생활에서도 가족 단위는 핵가족을 이루면서 주변에 친척들이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에 재산이많거나 권위가 높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러 식솔들을 거느리고 확대가족을 꾸릴 수 있었던 반면 가난한 농민의 경우 대부분 핵가족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형태상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핵가족의 성격은근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부부의 성격이 낭만적 사랑을 중심으로 바뀌면서 가족 안에서 남녀의 역할이 다르게 규정되었다. 이전에는 부부 모두 생산적 활동에 종사했다면, 이제 남편은 가족을 위해 바깥에서 돈을버는 역할을 책임지고, 아내는 생산적 활동에서 분리되어가정을 돌보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역할분리가 모든 계층의 여성에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근대이후에도 노동자와 빈민 계급의 여성은 여전히 생산 활동에종사해야 했다. 그러나 그 여성들도 이상적 여성상에 따라서 남편과 자녀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역할이 요구되었다. - P84

이러한 변화는 주거공간의 구조 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는 한 방에 여러 사람이 함께 자는 것이 흔한일이었고,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묵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 부부만의 침실 공간이 중요하게 인지되고,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따로 지내는 것이 훈육을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이처럼 부부간의 관계를중시하는 방식의 가족 구성은 일터나 작업 공간의 공적 세계와 부부와 가족의 사적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을 출현시켰다. 이 변화 속에서 가족은 주변 세계, 즉 친족이나 공동체와는 점차 분리되게 되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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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 권력 체계는 근대 사회 권력의 특징으로, 현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미세한 몸짓, 특정한 말투, 신체 등 우리의 모습은 결국 스스로 규율하고 감시하는체제 속에 놓인다. 이것은 외부의 강제나 억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각 제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내면화하게 된다. 학교나 가정에서의 교육, 종교나 주변 환경에서의 교류 등을 비롯해 사람들 간의 크고 작은 만남을 통해 사회 구성원은 알게 모르게 사회화 과정을 거치고 그 속에서 규율을 학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사람들은 감시자의 시선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감시한다.
감시의 주체가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강제나 억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사회제도 속에 자연스럽게 스스로가 감시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가령 뚱뚱한 몸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사회가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시선을 느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스스로 몸이 이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위축되며 자신의 몸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떠한 비판이나지적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혐오의 태도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눈을 갖게 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미시적으로 일어나는 규율 권력이다. - P54

규율 권력 개념은 권력에 대한 통상적 관점을 무너뜨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권력을 공적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곧 청와대나 의회, 행정부, 대법원 같은 곳이야말로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고, 권력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반면 푸코는 근대 이후 권력이 작동하는 실제 영역은 감옥과 병원, 학교, 가정, 군대, 공장과 같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이 영역에서야말로 개인들이 특정한 신체로서 훈련되고 제조되기 때문이다. 규율 권력은 궁극적으로 체제에 복종하고 훈련된 신체, 즉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체는 한편으로 경제적으로 효용을 높일 수 있는 몸이 되며, 정치적으로는 체제에 반항하지 않는 순응하는 몸이 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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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촛불을 들고 다가서면

그냥, 사는 이야기를 적었어요.

이 책을 소개해달라는 청이 오면 어떻게 운을 떼야 하나 오래 고민했어요. 대단한 문학적 발견 같은건 없고요, 제가 올 일 년 동안 보고 겪고 느낀 것들에 관한 기록이에요. 너무 사사로워서 실망하실지도모르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저는 숨을 고르는 척 당신의 눈빛을 살필 거예요.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어깨는 한껏 움츠러들고 공연히 손톱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겠죠. 그런데도 당신이 아직 기대의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면 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이어갈 것입니다. - P5

자연스레 생각은 평소 내가 품어온 ‘작은‘ 소망들로 이어졌다. 2021년 1월 기준, 나의 작은 소망들은 이러하다. 산미가 강하고 꽃향기가 나는 진한 라테한 잔. 겨울에 접어들며 잎 끝이 누렇게 말라버린 반려식물의 안위. 가격 대비 품질이 좋고 포근한 겨울외투 한 벌.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지만 쉽지 않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생각해보니 나의 작은 소망들은 정말로 까다로웠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기는 소망의 크고 작음을 분별하는 것 자체가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크든 작든 하나의 소망에는 그 소망을 가로막는 심리적 물리적 장애물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길항‘은 바로 그러한 싸움을 뜻하는 단어다. 이쪽의 우리가 간절해질때 저쪽에서도 충돌할 채비를 한다. 쉽게 가질 수는없을 거야. 시간의 횡포도 견뎌야 하고 인간이라는 한계에도 맞서야 할걸. 그렇게 애석해할 거 없어. 그건 세상의 구성 원리거든. 밀물과 썰물, N극과 S극,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을 봐. 버티어 대항하는 힘은어디에나 반드시 있어.
정말 그렇다. 지금이 있기에 그때는 더욱 환하거나 어두워지고, 저곳이 있기에 이곳은 특별하거나 사소해진다. 한 방향으로만 뻗어가는 힘이나 목소리는 금세 상하거나 차게 식기 마련이다. 싸움도 둘이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혼자 하는 싸움이더라도 사실은 혼자 안의 둘이 싸우는 것처럼. - P16

 그중 봄에 꽃이 피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식물마다 꽃이 피기까지 필요한 온도가있는데 봄이 되면 식물들이 몸 안에 온도를 ‘저금‘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저금한 온도가 가득 차면 비로소 꽃이 피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그 즉시 노트를 열어 메모했다. 언젠가 내 안에서 이야기로 풀려나올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열량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생육 일수의 일평균기온을 적산한 것? 사전이 설명하는 적산온도는 실용적인 의미가 강하다. 반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적산온도는 경직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온도를 저금한다는 말. 모든 존재가 꽃이라면, 나의피어남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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