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가 아니라면 씨앗이 품고 있는 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가장 여린 마음에까지 독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독은 악이 아니다. 안간힘이고 사랑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씨앗이 품은독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리라. 무력한 인간을 번번이 일으키는 일. 주저앉아도 일으키고 주저앉아도또다시 일으키는 일.
우리는 모두 찢기기 쉬운 피막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피막에 함부로 막대기를 꽂아휘저을 수 없다. 대단한 무엇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을 둘러싼 피막이 손상될 때 인간은 죽는다. 아주 작은 찢김으로도 상한다. 그러니 겪고 뒤척이면서 두터워지는 수밖엔 없다. 이 여름, 이 겨울을지나면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겠지. 이 사랑, 이터널을 빠져나가도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 있을것이다. 그 시간을 믿으며 가야겠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 P78

썩게 하는 힘. 감정이든 사람이든 시간이든 썩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마음들은바로 그 순간에만 말이 된다. 오늘은 비가 왔어. 낮에도 어둑해서 불을 켜야 했지. 너는 대답이 없구나. 오늘은 날이 맑았어. 버지니아 울프가 연필 한 자루를 사러 런던 거리를 헤매는 이야기를 읽고 나도 용기내어 외출을 해보았어. 시장에 봄나물을 사러 다녀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제철이라 맛있을 거라며 한움큼을 더 담아주신 거 있지. 덜렁덜렁 검은 비닐봉지 흔들며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좋았어. 너는 대답이 없구나.
그런 혼잣말들로, 눈물로, 한밤의 달리기와 그네타기로, 시와 음악으로 우리는 모루에 대항한다. 연필 한 자루가 산책의 근사한 핑계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필은 이미 충분하니까. 애초에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신발 끈을 고쳐묶고 문을 열었다면 슬픔에서 위안으로 가는 협곡을뛰어넘는 중이라고 여겨주기를. 썩고 난 뒤에야 묻을 수 있다.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 것이더라도, 너는여전히 대답이 없구나. 그는 그다음 말을 향해 온 마음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 P89

나에겐 팥죽만 보면 목이 메고 울고 싶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순전히 팥죽의 색깔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못난 마음을 한 솥 가득 넣고끓이면 꼭 그런 색과 모양이 될 것 같아서다. 휘저을수록 검어지고 퍽퍽해지는 것까지 영 손쓸 도리 없는 풍경이다. - P92

이 글은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엄마를 위해 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눈물이 있을지라도 우리 삶의 구체성으로 말미암아이 페이지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될 거라고. 귀퉁이를 접어 두고두고 펼쳐보며 엄마의 아팠던 시간, 그림자의 그림자까지 끌어안겠다고.
사과의 갈변은 사과가 운 흔적일까? 유루증流淚症은 생각할수록 슬픈 병이다. 적갈색이 생각할수록 슬픈색인 것처럼.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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