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56년 7월

달링턴 홀

요 며칠 사이에 나의 상상을 붙들어 온 그 여행을 정말 감행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패러데이 어르신의 안락한 포드를 타고 나 홀로 즐기게 될 여행,
잉글랜드의 수려한 산하를 거쳐 서부 지방으로 나를 데려다줄 여행, 그리고 예상컨대 무려 닷새나 엿새 동안 나를 달링턴 홀에서 떼어 놓을 여행이다. 이 여행의 발상 자체가 패러데이 어르신의 지극히 고마운 권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 P9

그러나 잠시 후 주위 풍경이 점점 낯설어지면서 내가 기존에 알았던 모든 경계들을 넘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흔히들 쓰는 말을 빌리자면 배에 돛이 오르는 순간 마침내 육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러한 순간을 두고 들뜬 기분과 불편함이 뒤섞인 느낌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되는데, 내가 주변 경관이 점점 낯설어지는 가운데 포드에 앉아서 받았던 느낌과 매우 흡사한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든 것은 내가 차의 방향을 틀어 산자락을 끼고 도는 도로에 들어선 직후였다. 도로변에 늘어선 수목들과 두껍게 덮인 나뭇잎들 때문에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왼편이 가파른 절벽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정말 달링턴 홀을 남겨 두고 떠나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고백하건대 약간 불안감도 들었다. 지금 혹시 길을 잘못 들어 황야로 이어지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쌩쌩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짙어지는 불안감 말이다. 그 느낌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결국 속도를 늦추게 만들었다. 심지어 길을 제대로 가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도 왠지 차를 멈추고 잠시 중간 평가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P39

우리가 이 땅을 ‘그레이트(위대한)‘ 브리튼이라 부르는 것을 두고 좀 건방진 관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우리 나라의 풍경 하나만으로도 그 숭고한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위대함‘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은 대체 어디에, 혹은 무엇에 존재하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에 답하자면 내 머리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머리가 필요하다는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게 위험을 무릅쓰고 추측해 보라고 한다면 명백한 극적 효과나 화려함의 ‘결핍‘, 바로 그점이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차분한 아름다움, 절제의 미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마치 땅 자체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 비해 아프리카나 미국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전율에 가까운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꼴사나운 과시욕으로 인해 객관적인 관찰자에게는 저급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P47

모두 내가 확인해 보았으므로 아마도 정확한 이야기들일것인 이 두 사례에서 내 부친은 ‘헤이스 소사이어티‘가 지칭한 ‘자신의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증명해 보일 뿐 아니라 당신이 이미 그 화신의 경지에 근접해 있었다는 점에 여러분도 동의해 주면 좋겠다. 그러한 때의 내 부친과 잭 네이버스 씨(기술적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던 때의 그 사람이라고해도 상관없다.) 같은 인물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면 ‘위대한‘ 집사와 단순히 유능한 집사를 나누는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식별이 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만찬 식탁 밑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도 태연할 수 있었던 집사의 이야기를 내 부친이 그렇게나 좋아하셨던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 일화의 어딘가에 진정한 ‘품위‘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 내 부친은 본능적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싶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사로산다는 것은 무슨 팬터마임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슬쩍 밀거나 약간만 비틀거리게 만들어도 가면이 떨어져 내려가면 뒤의 배우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에서 말이다. - P70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 P71

반쯤 빛을 받고 있던 부친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내가 계속 말했다.
"외부 손님들이 계시든 안 계시든 더 이상 아버님께 식탁시중을 맡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지난 오십사 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식탁 시중을들어왔다."
부친은 서두르는 느낌이 전혀 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또 있습니다. 아무리 짧은 거리더라도 아버님께 물건이얹힌 쟁반을 나르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제한들을 고려해, 또 아버님께서 간명한 것을 워낙 중시하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수정한 업무 목록을 만들어 왔습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는 이 내용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그분께 직접 건네기가 싫어 침대가장자리에 얹어 놓았다. 부친은 그것을 힐끔 보시고는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셨다. 여전히 뚜렷한 감정의 흔적이 없는 표정이었고 의자 등받이에 얹힌 두 손도 긴장 상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비록 등은 굽었지만 그분의 풍채에담긴 충격적인 효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옛날 차뒷좌석에 앉은 술 취한 두 신사를 정신 번쩍 들게 만들었던 바로 그 느낌 말이다. 이윽고 부친께서 말씀하셨다.
"그때는 계단 때문에 넘어졌을 뿐이다. 계단이 한쪽으로 기울었어. 다른 사람이 또 그 꼴을 당하기 전에 거기를 바로잡으라고 시머스한테 일러 주어라."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저 종이를 꼼꼼하게 읽어 보기는하실 거죠?"
"시머스한테 계단을 고치라고 꼭 지시해. 유럽에서 신사분들이 도착하시기 전에 확실하게 해야 해."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좋은 아침 되십시오." - P104

포플러나무의 그림자들이 잔디밭 대부분을 덮고 있었지만 모퉁이, 정자로 올라가는 언덕배기 쪽에는 아직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부친은 네 개의 석판으로 된 그 계단 옆에 깊은 생각에잠겨서 계셨다. 미풍이 그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어 놓고 있었다. 잠시 후 내가 지켜보는 사이 부친께서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셨다. 맨 위 칸에 이르러 돌아서시더니 약간 더 빠른 걸음으로 다시 내려오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시더니 앞에 놓인 계단을 응시하며 몇 초가량 다시 조용히 서계셨다. 이윽고 부친께서 두 번째로 아주 조심조심 계단을 오르셨다. 이번에는 계단 위 잔디밭으로 계속 걸어가 정자 가까이 가서야 돌아서셨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땅에서눈을 떼지 않은 채 되돌아오셨다. 그때 그분의 행동은 사실내가 설명하더라도 켄턴 양이 편지에서 묘사한 것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마치 떨어뜨린 귀한 보석이라도 찾고 있는 사람처럼.‘ - P106

"그는 나의 적이었소."
나리께서 말씀하고 계셨다.
"그러나 항상 신사답게 행동했어요. 우리는 육 개월 동안서로 포탄을 퍼부어 대면서도 서로를 점잖게 대했소. 그는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신사였고 나는 그에게 아무런 적의도 품지 않았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소. ‘이봐요, 지금은 우리가 적이니 나는 전력을 다해 당신과 싸우겠소. 하지만 이 몹쓸 짓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적이 될 필요가 없으니 함께 어울려 술이나 한잔합시다.‘ 그러나 더 몹쓸것은 이 조약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다는 거요. 나는 분명 그에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적이 아니라고말했소. 하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그를 마주 바라보면서 내말이 결국 진실로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겠소?"
그리고 잠시 후 나리께서 고개를 가로저으시며 다소 무겁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번 전쟁에서 싸운 것은 이 세계의 정의를 지키기위함이었소. 게르만족을 상대로 하는 복수전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었소." - P116

어쨌거나 브레만 씨의 사망 후 이 년여에 걸쳐 나리와 당시 그분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데이비드 카디널 경이 힘을 합쳐 꾸준히 노력한 결과, 독일의 상황을 계속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인사들을 광범위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영국인과 독일인은 물론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외교관이거나 고위 정치인, 저명한 성직자, 퇴역 장성, 작가, 사상가들이었다. 이 신사들 중 일부는 나리와 생각이같아서 당시 베르사유 조약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미 끝난 전쟁을 두고 한 나라를 계속 단죄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독일이나 독일 사람들을 크게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다만 독일의 경제 혼란을 막지 못하면 전 세계로 급속히 파급될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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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스웨터와 두 개의 코트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가 느껴진다. 바깥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시작된 것 같은 한기다. 몸이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 P287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머릿속 수천 개 퓨즈들에 일제히 불꽃 튀는 전류가 흘렀다가 하나씩 끊기는 것 같은 과정을 나는 지켜봤어.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나를 동생이나 언니로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을 구하러 온 어른이라고도 믿지 않았고, 더이상 도와달라고도 하지 않았어. 점점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가끔 말한다 해도 단어들이 섬처럼 흩어졌어. 응, 아니, 라는 대답까지 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는 원하고청하는 것도 없어졌어. 하지만 내가 까서 준 귤을 받아들면, 평생새겨진 습관대로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나에게 건네며 가만히 웃었어. 그럴 때면 심장이 벌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나. 아이를 낳아기르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생각했던 것도.
그즈음부터 엄마는 잠을 잤어. 언제 그렇게 나에게 잠재우지 않는 고통을 주었느냐는 듯 하루의 삼분의 이, 나중엔 사분의 삼이상을 잤어.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낸 마지막 한 달은 거의 종일 잠들어 있었어.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모래펄이완전히 잠긴 뒤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거라고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 P314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 P317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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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양쪽 문으로 바람길이 통해, 난로의 바람구멍 안쪽으로 세차게 솟구쳐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검붉게 달아오른 난로 위에 인선이 주전자를 올렸다. 주전자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삽시간에증기가 되며 모래알 쏠리는 소리를 냈다.
말을 꺼내지도, 얼굴을 마주보지도 않은 채 우리는 앉아 있었다. 주전자 밑면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에야 인선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아직 주전자의 부리에서 김이 솟지 않았다. 비등점을 넘어서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흰 실타래 같은 증기가 주전자 부리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맞물렸던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반쯤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미루는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앞문 너머로 보이는 숲의 아래쪽이 거의 검어졌다. 눈에 덮여둥글고 부슬부슬한 윤곽선을 새로 얻은 나무 밑동들이 박명 속에 희미하게 빛났다. - P192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던 유골 한 구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어.

다른 유골들은 대개 두개골이 아래를 향하고 다리뼈들이 펼쳐진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유골만은 구덩이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어. 잠들기 어려울 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쓰일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구덩이들을 향해 열 명씩 세워졌을 거라는 추정 기사가 사진 아래 실려 있었어. 뒤에서 총을 쏘아 구덩이로 떨어지게 하고, 다음차례의 사람들을 다시 줄 세워 쏘기를 반복했을 거라고.
그 유골만 다른 자세를 하고 있는 이유가, 흙에 덮이는 순간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그때 들었어. 그 유골의 발뼈에만 고무신이 제대로 신겨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고무신도, 전체 골격도 크지 않은 걸 보면 여자거나 십대 중반의 남자인 것 같았어.
나도 모르게 그 신문을 접어서 배낭에 넣었어. 집에 돌아가 짐을 풀면서는 사진만 오려 책상 앞서랍에 넣었어. 밤에 꺼내 보기엔 잔인한 사진이어서, 햇빛이 밝은 오후에만 서랍을 열고 들여다보다 닫았어. 겨울이 되면서는 흉내내듯 책상 아래 모로 누워 무릎을 구부려보기도 했어.
이상한 건,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방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야. 겨울 별이 깊게 들거나 온돌 바닥이 데워져서 퍼지는 온기와는 달랐어. 따스한 기체의 덩어리 같은 게 방을채우는 게 느껴졌어. 솜이나 깃털, 아기들 살을 만지고 나면 손에 부드러움이 남잖아. 그 감각을 압착해서 증류하면 번질 것 같은••••••
- P211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다음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그렇게 해가 바뀌었을 때였어. 이름은 물론 성별도 당시 나이도 모르는 사람. 조금 가는 골격에 작은 사이즈의 고무신을 신은, 전쟁발발 직후 제주에서 예비검속돼 총살된 천여 명 중 한 사람.
그가 만약 십대였다면 출생 연도가 엄마와 얼추 비슷할 것 같았어. 두 사람의 그후에 대해 다루면 되겠다는 계획이 섰어.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육십 년에 대해서. - P212

그해에 아버지는 열아홉 살이었어.
열두 살부터 젖먹이까지 여동생 셋, 남동생 하나가 있었는데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건 그해 정초에 태어난 막내 여동생이었어. 은영이라는 이름도 아버지가 지었대. 학영, 숙영, 진영, 희영 다음으로 순영이라고 이름 붙이려는 할아버지를 만류하면서. 안 그래도 순한 아기가 이름 따라 더 무르게 자라면 어쩌려느냐고.
밑단에 시보리가 달린 점퍼를 겨울 교복 위에 입으라고 할머니가 사주었는데, 봄에 동맹휴학을 할 때 아버지는 하숙비를 아끼려고 짐을 싸서 돌아와서는 그 점퍼 속에 아기를 넣고 다녔다. 친구를 만나면 지퍼 위쪽을 열고 솜털 같은 머리카락을 보여주려고. 아기가 조그만 손을 뻗어올려 셔츠 깃을 움켜쥐는 걸 보고 여자애들이 감탄하는 걸 들으려고. 떨어뜨리면 어쩌려느냐고 할머니가 나무라면, 꼭 안고 다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넘어질 것 같으면 얼른 뒤로 자빠져버릴 테니 아기는 아무 일 없다고. - P216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이제 이영 찾아오지 말렌. 고를 말 이미 다 해신디 무사 자꾸 오멘?

그동안 얘기 안 한 거?
•••••• 안 한 것이 뭐이 이시냐.

무슨 연구소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 시작이었다. 직접 본 사람이몇 명 엇다고 죽기 전에 이야기 안 하민 아무도 모르게 된다 허명 부탁하는 거라. 틀린 말 아니다 싶어그네 그때 처음 고랐져, 한번 그래놓으난 다른 데서도 오데. 이야기 시켜놓곡 가불고 나민 메칠 혼자 속 시끄러울 거 알지마는 엔간하면 다 해줘서.
우리 서방이 살아 이서시민 질색해실 일인디 일찍 죽어부러난 나를 못 말렸다. 저승에서 쫓아왕 말릴 수도 엇고 어쩔 거라. 귀신이 이시난 꿈에라도 와그네 말릴 건디 아직 그런 적도 어서. - P227

전쟁 전에 우리 서방이 군경 따라댕기멍 무신 일 해신지는 나한테 안 고랐으니 어떻 알크냐? 서방이 원해서 따라댕긴 건 아니메. 사람들하고 울력 나강 성 쌓고 이신디 경찰이 와그네 몇 명 뽑아간거라. 그때는 요즘 같은 세상이 아니메. 하라민 해야 되는 세상이라.
서청-서북청년단-사람들이 잔인해그네, 내내 같이 댕기던민보단원들도 수틀리민 죽여분다는 소문이 이시난 나는 걱정되었주게. 파출소 마당에다 산사름 각시를 총검으로 찔렁 눕혀놔그네민보단 사람들헌티도 다 한 번씩 죽창으로 찌르렌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난. 아무헌티도 원수 살 일 하민 안 된다고 내가 거념허민 우리 서방은 항상 그래서. 이녁은 통역 일만 한다곡. 서청이 제주말을 못 알아듣곡 제주 사름들은 서청 말을 못 알아들으나, 소까이-소개 -때 중산간에 불 놓으렁 댕길 때도 우리 서방은 문 두드렁 나옵서, 인제 불나난 흔저 나옵서, 고라주멍 다닌 게 다라고 그래서. 경헌디 이상해신 건 그때부텅 입대할 때까지 우리 아기를 안지 않은거라. 이헌티 닿으면 부정 탄덴, 눈도 마주치민 안된덴 하곡 정말 눈길도 안 줘서. - P228

윗옷을 벗은 이모가 양쪽 소매를 이빨로 찢어서 두 군데 상처를지혈했어. 의식 없는 동생을 두 언니가 교대로 업고 당숙네까지걸어갔어.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덩어리가 되어서 세자매가 집에 들어서니까 놀란 어른들이 입을 열지 못했다.
통금 때문에 병원에 가지도, 의원을 부르지도 못하고 캄캄한 문간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다.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다.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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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제발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우린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잖아요?"
로드니 킹 (Rodney King)의 이 간곡한 호소가 유명해진 것은 1992년5월 1일, 흑인인 그가 로스앤젤레스의 경관 네 명에게서 거의 죽을지경으로 구타를 당하고 약 1년 뒤의 일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그의 구타 영상이 전 국민적 화제였기에, 배심원들이 경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미국 전역에서 분노가 끓어올랐고 로스앤젤레스에서는엿새 동안이나 폭동이 그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발생한 사망자만 53명, 불에 탄 건물은 7000채에 이르렀다. 이 걷잡을 수 없는 폭력사태는 이후에도 도통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현장에 접근하지 못한 방송국에서는 헬리콥터로 주변을 돌며 하늘에서 찍은 영상을 뉴스로 내보내야 했다. 그러다 급기야 백인 트럭 운전사가 폭도에게 잔학무도하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터졌고, 결국 보다 못한 킹이 평화를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 P15

그래서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여러분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새로운 생각의 틀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두 가지 주제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골치 아프며 가장 편이 갈리는 문제인 정치와 종교를 말한다. 사회생활 에티켓 책에서는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할 때는 정치와 종교에 관한 화제는 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 둘을 가지고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누라는 입장이다.
정치와 종교는 둘 다 우리 기저에 자리 잡은 도덕적 심리의 표현인바. 그러한 심리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로 인해 일어나는 그 모든 과열 • 분노 • 편 가르기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그 자리를 경외심 • 놀라움 • 호기심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이렇게 복잡한 도덕적 심리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인류라는 종족이 숲 속과 초원을 박차고 나와 불과 수천 년 만에 오늘날의 현대사회를 이룬 것은, 그리하여 그속에서 수많은 즐거움과 편안함, 그리고 유례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은 다 이 능력 덕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옴으로 해서 앞으로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섞인 가운데서도 도덕, 정치, 종교에 대한 논의가 좀 더 일상적이고, 예의 있고, 재미있게 오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데에 이책이 힘을 보태기를 바란다. - P17

어 있는 셈이었다.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는가? 즉, 도덕성이 처음 형성되는 곳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는 으레 두 가지 대답이 나오곤 한다. 천성 아니면 양육,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천성 쪽에 손을 들었다면, 당신은 선천론자인 셈이다. 선천론자는 도덕적 앎이 우리 마음에 원래부터 들어 있었다고 믿는다. 그것이 미리 자리 잡은 까닭은, 《성경》에서 말하듯 하느님이 우리 가슴에 그 내용을 새겨놓았거나 다윈의 주장처럼 우리의 진화한 도덕적 감정 속에 그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양육을 통해 도덕적 앎이 생겨난다고 믿는 쪽이라면, 당신은 후천론자(empiricist)인 셈이다.‘ 이런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이들이 거의 텅빈서판(존 로크의 표현을 빌리자면)에 가까운 상태라고 믿는다. 더구나 도덕성이란 나라나 시대마다 다 다른 법인데, 그것이 어떻게 선천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우리는 어린 시절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과 옳고 그름에 대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인으로서의 윤리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후천론자들은 생각한다("empirical‘이라는 말 자체가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 얻은"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후천론도 결국은 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1987년도에 도덕심리학은 도덕성의 기원에 대해 제3의 대답을 내놓기에 주력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답이 합리주의로, 여기서는 도덕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낸다고 주장했다. - P33

 아이들은 스스로 그 이치를 깨치는데, 다만 그러려면 반드시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하고, 더불어 거기에 맞는 적절한 경험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인지능력 발달 접근법은 피아제가 아동의 도덕적 사고를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는 아이들 틈에 쪼그려 앉아 구슬치기 놀이를 하면서 때로는 일부러 규칙을 어겨보기도 하고 때로는 바보같이 구슬을 치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의 실수에 반응을보였는데, 그 과정에서 규칙을 지키고, 규칙을 바꾸고, 차례를 지키고, 싸움을 가라앉히는 아이들의 능력이 점점 발달해가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 성장은 아이들의 인지능력이 성숙할 때와 마찬가지로 체계적인 단계에 따라 이루어졌다.
피아제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들이 도덕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이 유리컵에 담긴 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비슷했다. 즉, 도덕성에 대한 이해는 선천적이라고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것을 어른에게서 직접 배운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놀며 도덕성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세워나간다고 보는 것이맞았다. 아이들이 놀 때 서로 차례를 바꾸는 것은 물을 이컵 저컵에 옮겨 담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 셈이다. 또 세 살짜리 아이들에게는 물의 총량이 보존되는 원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것처럼, 아직 준비가 덜 된 아이들에게는 공평성 개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 이제 대여섯 살이 되어친구들과 함께 놀이도 해보고, 말다툼도 벌여보고, 함께 힘도 합쳐본 후에는 차차 공평성이 무언지 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어른들에게서 듣는 그 어떤 설교보다도 훨씬 더 효과가 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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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명들 곁에 실려 있던 눈 결정들의 사진을 기억한다. 컬러도판을 보호하기 위해 얇은 기름종이가 함께 제본된 책이었는데, 그 반투명한 종이를 넘기자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한 결정들이 한면 가득 펼쳐졌다. 그 정교함에 나는 압도되었다. 몇몇 결정들은정육각형이 아니라 매끈한 직육각기둥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눈과 비의 경계에서 그런 형태를 지닌다는 설명이 작은 글씨로 하단에 적혀 있었다. 그후 한동안 진눈깨비가 내릴 때면 그 은빛의섬세한 육각기둥이 생각났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엔 짙은 색 코트소매를 허공에 내밀고서 보풀에 맺힌 눈송이가 물방울이 될 때까지 들여다봤다. 도판에서 본 것 같은 정육각형의 화려한 결정들이그 안에서 수없이 결속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어지러웠다. 눈이지나간 뒤 한동안은 잠에서 깨며 감은 눈으로 생각했다. 밖에 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루한 방학숙제를 하다 말고 방안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거스러미를 뜯어낸 손 위로. 머리카락과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는 장판 바닥 위로. - P94

이 할머니와 비슷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방언 대신 또렷한 서울말로 인선의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 P99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오른쪽 어깨 위, 스웨터 올 사이로 가칠가칠했던 아마의 두 발이 떠오른다. 내 왼손 집게손가락을 횃대 삼아 앉아 있던 아미의 가슴털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전까지 내가 닿아보았던 어떤 생명체도 그들만큼 가볍지 않았다. - P109

파문처럼 환하게 몸 전체로 번지는 온기 속에서 꿈꾸듯 다시 생각한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법이 없다. - P135

숲 사이로 거대한 흰 뱀처럼 뻗어올라간 건천에서 파르스름한빛이 배어나오고 있다.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깊게 허리를 구부린채 나는 한 걸음씩 디뎌간다. 맹렬히 전진하는 먹구름 사이로 달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 해쓱한 빛을 받은 모든 나무의 우듬지들이, 마치 다시는 어두워지지 않을 듯 암청색의 빛을 발하며 일렁이고 있다. 그러나 우듬지 아래 숲속은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어둠이다. 아득한 동굴처럼 입을 벌린 그 암흑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수천 그루 나무들의 어두운 밑동뿐일까. 소리 내지 않는 새들과 노루떼뿐일까.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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