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설명들 곁에 실려 있던 눈 결정들의 사진을 기억한다. 컬러도판을 보호하기 위해 얇은 기름종이가 함께 제본된 책이었는데, 그 반투명한 종이를 넘기자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한 결정들이 한면 가득 펼쳐졌다. 그 정교함에 나는 압도되었다. 몇몇 결정들은정육각형이 아니라 매끈한 직육각기둥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눈과 비의 경계에서 그런 형태를 지닌다는 설명이 작은 글씨로 하단에 적혀 있었다. 그후 한동안 진눈깨비가 내릴 때면 그 은빛의섬세한 육각기둥이 생각났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엔 짙은 색 코트소매를 허공에 내밀고서 보풀에 맺힌 눈송이가 물방울이 될 때까지 들여다봤다. 도판에서 본 것 같은 정육각형의 화려한 결정들이그 안에서 수없이 결속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어지러웠다. 눈이지나간 뒤 한동안은 잠에서 깨며 감은 눈으로 생각했다. 밖에 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루한 방학숙제를 하다 말고 방안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거스러미를 뜯어낸 손 위로. 머리카락과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는 장판 바닥 위로. - P94

이 할머니와 비슷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방언 대신 또렷한 서울말로 인선의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 P99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오른쪽 어깨 위, 스웨터 올 사이로 가칠가칠했던 아마의 두 발이 떠오른다. 내 왼손 집게손가락을 횃대 삼아 앉아 있던 아미의 가슴털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전까지 내가 닿아보았던 어떤 생명체도 그들만큼 가볍지 않았다. - P109

파문처럼 환하게 몸 전체로 번지는 온기 속에서 꿈꾸듯 다시 생각한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법이 없다. - P135

숲 사이로 거대한 흰 뱀처럼 뻗어올라간 건천에서 파르스름한빛이 배어나오고 있다.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깊게 허리를 구부린채 나는 한 걸음씩 디뎌간다. 맹렬히 전진하는 먹구름 사이로 달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 해쓱한 빛을 받은 모든 나무의 우듬지들이, 마치 다시는 어두워지지 않을 듯 암청색의 빛을 발하며 일렁이고 있다. 그러나 우듬지 아래 숲속은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어둠이다. 아득한 동굴처럼 입을 벌린 그 암흑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수천 그루 나무들의 어두운 밑동뿐일까. 소리 내지 않는 새들과 노루떼뿐일까.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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