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양쪽 문으로 바람길이 통해, 난로의 바람구멍 안쪽으로 세차게 솟구쳐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검붉게 달아오른 난로 위에 인선이 주전자를 올렸다. 주전자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삽시간에증기가 되며 모래알 쏠리는 소리를 냈다. 말을 꺼내지도, 얼굴을 마주보지도 않은 채 우리는 앉아 있었다. 주전자 밑면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에야 인선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아직 주전자의 부리에서 김이 솟지 않았다. 비등점을 넘어서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흰 실타래 같은 증기가 주전자 부리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맞물렸던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반쯤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미루는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앞문 너머로 보이는 숲의 아래쪽이 거의 검어졌다. 눈에 덮여둥글고 부슬부슬한 윤곽선을 새로 얻은 나무 밑동들이 박명 속에 희미하게 빛났다. - P192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던 유골 한 구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어.
다른 유골들은 대개 두개골이 아래를 향하고 다리뼈들이 펼쳐진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유골만은 구덩이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어. 잠들기 어려울 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쓰일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구덩이들을 향해 열 명씩 세워졌을 거라는 추정 기사가 사진 아래 실려 있었어. 뒤에서 총을 쏘아 구덩이로 떨어지게 하고, 다음차례의 사람들을 다시 줄 세워 쏘기를 반복했을 거라고. 그 유골만 다른 자세를 하고 있는 이유가, 흙에 덮이는 순간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그때 들었어. 그 유골의 발뼈에만 고무신이 제대로 신겨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고무신도, 전체 골격도 크지 않은 걸 보면 여자거나 십대 중반의 남자인 것 같았어. 나도 모르게 그 신문을 접어서 배낭에 넣었어. 집에 돌아가 짐을 풀면서는 사진만 오려 책상 앞서랍에 넣었어. 밤에 꺼내 보기엔 잔인한 사진이어서, 햇빛이 밝은 오후에만 서랍을 열고 들여다보다 닫았어. 겨울이 되면서는 흉내내듯 책상 아래 모로 누워 무릎을 구부려보기도 했어. 이상한 건,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방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야. 겨울 별이 깊게 들거나 온돌 바닥이 데워져서 퍼지는 온기와는 달랐어. 따스한 기체의 덩어리 같은 게 방을채우는 게 느껴졌어. 솜이나 깃털, 아기들 살을 만지고 나면 손에 부드러움이 남잖아. 그 감각을 압착해서 증류하면 번질 것 같은•••••• - P211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다음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그렇게 해가 바뀌었을 때였어. 이름은 물론 성별도 당시 나이도 모르는 사람. 조금 가는 골격에 작은 사이즈의 고무신을 신은, 전쟁발발 직후 제주에서 예비검속돼 총살된 천여 명 중 한 사람. 그가 만약 십대였다면 출생 연도가 엄마와 얼추 비슷할 것 같았어. 두 사람의 그후에 대해 다루면 되겠다는 계획이 섰어.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육십 년에 대해서. - P212
그해에 아버지는 열아홉 살이었어. 열두 살부터 젖먹이까지 여동생 셋, 남동생 하나가 있었는데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건 그해 정초에 태어난 막내 여동생이었어. 은영이라는 이름도 아버지가 지었대. 학영, 숙영, 진영, 희영 다음으로 순영이라고 이름 붙이려는 할아버지를 만류하면서. 안 그래도 순한 아기가 이름 따라 더 무르게 자라면 어쩌려느냐고. 밑단에 시보리가 달린 점퍼를 겨울 교복 위에 입으라고 할머니가 사주었는데, 봄에 동맹휴학을 할 때 아버지는 하숙비를 아끼려고 짐을 싸서 돌아와서는 그 점퍼 속에 아기를 넣고 다녔다. 친구를 만나면 지퍼 위쪽을 열고 솜털 같은 머리카락을 보여주려고. 아기가 조그만 손을 뻗어올려 셔츠 깃을 움켜쥐는 걸 보고 여자애들이 감탄하는 걸 들으려고. 떨어뜨리면 어쩌려느냐고 할머니가 나무라면, 꼭 안고 다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넘어질 것 같으면 얼른 뒤로 자빠져버릴 테니 아기는 아무 일 없다고. - P216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이제 이영 찾아오지 말렌. 고를 말 이미 다 해신디 무사 자꾸 오멘?
그동안 얘기 안 한 거? •••••• 안 한 것이 뭐이 이시냐.
무슨 연구소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 시작이었다. 직접 본 사람이몇 명 엇다고 죽기 전에 이야기 안 하민 아무도 모르게 된다 허명 부탁하는 거라. 틀린 말 아니다 싶어그네 그때 처음 고랐져, 한번 그래놓으난 다른 데서도 오데. 이야기 시켜놓곡 가불고 나민 메칠 혼자 속 시끄러울 거 알지마는 엔간하면 다 해줘서. 우리 서방이 살아 이서시민 질색해실 일인디 일찍 죽어부러난 나를 못 말렸다. 저승에서 쫓아왕 말릴 수도 엇고 어쩔 거라. 귀신이 이시난 꿈에라도 와그네 말릴 건디 아직 그런 적도 어서. - P227
전쟁 전에 우리 서방이 군경 따라댕기멍 무신 일 해신지는 나한테 안 고랐으니 어떻 알크냐? 서방이 원해서 따라댕긴 건 아니메. 사람들하고 울력 나강 성 쌓고 이신디 경찰이 와그네 몇 명 뽑아간거라. 그때는 요즘 같은 세상이 아니메. 하라민 해야 되는 세상이라. 서청-서북청년단-사람들이 잔인해그네, 내내 같이 댕기던민보단원들도 수틀리민 죽여분다는 소문이 이시난 나는 걱정되었주게. 파출소 마당에다 산사름 각시를 총검으로 찔렁 눕혀놔그네민보단 사람들헌티도 다 한 번씩 죽창으로 찌르렌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난. 아무헌티도 원수 살 일 하민 안 된다고 내가 거념허민 우리 서방은 항상 그래서. 이녁은 통역 일만 한다곡. 서청이 제주말을 못 알아듣곡 제주 사름들은 서청 말을 못 알아들으나, 소까이-소개 -때 중산간에 불 놓으렁 댕길 때도 우리 서방은 문 두드렁 나옵서, 인제 불나난 흔저 나옵서, 고라주멍 다닌 게 다라고 그래서. 경헌디 이상해신 건 그때부텅 입대할 때까지 우리 아기를 안지 않은거라. 이헌티 닿으면 부정 탄덴, 눈도 마주치민 안된덴 하곡 정말 눈길도 안 줘서. - P228
윗옷을 벗은 이모가 양쪽 소매를 이빨로 찢어서 두 군데 상처를지혈했어. 의식 없는 동생을 두 언니가 교대로 업고 당숙네까지걸어갔어.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덩어리가 되어서 세자매가 집에 들어서니까 놀란 어른들이 입을 열지 못했다. 통금 때문에 병원에 가지도, 의원을 부르지도 못하고 캄캄한 문간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다.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다.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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