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스웨터와 두 개의 코트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가 느껴진다. 바깥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시작된 것 같은 한기다. 몸이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 P287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머릿속 수천 개 퓨즈들에 일제히 불꽃 튀는 전류가 흘렀다가 하나씩 끊기는 것 같은 과정을 나는 지켜봤어.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나를 동생이나 언니로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을 구하러 온 어른이라고도 믿지 않았고, 더이상 도와달라고도 하지 않았어. 점점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가끔 말한다 해도 단어들이 섬처럼 흩어졌어. 응, 아니, 라는 대답까지 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는 원하고청하는 것도 없어졌어. 하지만 내가 까서 준 귤을 받아들면, 평생새겨진 습관대로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나에게 건네며 가만히 웃었어. 그럴 때면 심장이 벌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나. 아이를 낳아기르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생각했던 것도. 그즈음부터 엄마는 잠을 잤어. 언제 그렇게 나에게 잠재우지 않는 고통을 주었느냐는 듯 하루의 삼분의 이, 나중엔 사분의 삼이상을 잤어.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낸 마지막 한 달은 거의 종일 잠들어 있었어.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모래펄이완전히 잠긴 뒤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거라고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 P314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 P317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 P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