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신의 위엄을 풍기며 얼마나 뻣뻣하게 굴었던가. 하지만 그는 나보다 더 뻣뻣했다. 내 옷소매가 그의 옷소매를 스치고 지나가자 벌벌 떨었다. 내가 말을 걸 때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내가 아는 몸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앞에서, 그때까지 만난 그 모든 위대한 신들 앞에서 내가 수천 번 반복해온 몸짓이었다. 공포의 연쇄 관계. - P51

"일어나거라." 내가 말했다. "얼른 나는 너의 그물을 축복한 적 없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다. 나는 민물만을 관장하는 나이아스에게서태어났고 얼마 안 되는 그들의 재능마저 내게는 없다."
"그래도, 제가 또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다시 여기서 뵐 수 있을까요? 제 평생 이렇게 놀라운 일은 처음입니다."
나는 그때까지 줄곧 아버지의 광휘 옆에 서 있었다. 예전에 아이에테스를 품에 안은 적도 있었고 내 침대에는 불사의 손들이 엮은 두툼한 모직 담요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순간까지 온기를 느낀 적이라고는 없었다.
"그래."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의 이름은 글라우코스였고 날마다 찾아왔다.  - P52

다시 한 움큼을 준비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래야 한다면 꽃밭 전체를 짜서 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살갖 위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갗이 점점 까매졌다. 갈색을 지나고 자주색을 지나 그의 온몸이 가장 짙은 바다색이될 때까지 멍처럼 번졌다. 그의 손과 다리와 어깨가 부풀었다. 동록색의 긴 수염이 턱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튜닉이 벌어진 틈새로 그의 가슴에서 돋아나는 수포가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따개비였다.
다글라우코스, 나는 속삭였다. 내 손가락에 닿은 그의 팔의 느낌이이상했다. 단단하고 두툼하고 살짝 서늘했다. 나는 그 팔을 흔들었다.
일어나.
그가 눈을 떴다. 숨을 한 번 쉬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폭풍 해일처럼, 본연의 바다의 신답게 우뚝 섰다. 키르케, 그가 외쳤다. 내가 달라졌어요! - P66

물속에 그의 신전을 건설할 수 있게 거들었다.
나는 그곳을 매일 찾아갔다. 소금물 때문에 살갗이 따끔거렸고,
그는 손님들을 보며 감탄하느라 바빠서 나에게는 아주 잠깐 미소를지어 보이는 게 고작일 때가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우리에게는시간이 많았다. 시간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은 식탁에 앉아서 그의관심을 끌려고 난리법석을 떠는 님프와 신들을 구경하면 재미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생선장수라고 비웃었을 그들이 이제는 인간이었던 시절의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야기는 할 때마다 점점부풀려졌다. 그의 어머니는 꼬부랑할망구처럼 허리가 굽었고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손찌검을 했다. 그들은 헉 소리를 내며 가슴에손을 얹었다.
"이제는 괜찮다." 그가 말했다. "파도를 보내서 배를 박살냈더니아버지가 충격으로 죽었거든. 어머니에게는 내가 축복을 내렸지. 덕분에 새 남편과 설거지를 돕는 노예가 생겼다. 어머니가 나를 모시는제단을 만들었고 거기서 이미 연기가 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내가좋은 물때를 선물해주길 바라지."
"선물해줄 거예요?"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님프가 물었다. 내 여동생과 페르세스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하나로 원래는 동그란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는데, 이제는 잘 익은배처럼 변하여 글라우코스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다." 그가 말했다. "그들이 뭘 바치는지 보고." 기분이 아주좋으면 발이 팔딱이는 꼬리로 변했는데 지금이 그랬다. 나는 첩첩이겹쳐진 비늘이 무지갯빛으로 어렴풋하게 일렁이는 그 꼬리가 아주연한 회색으로 반짝이며 대리석 바닥을 쓰는 것을 지켜보았다. - P69

"싫어!" 그는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 시절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매시간 새로 멍이 생기고 새로 아픈 데가 생기고, 항상 피곤하고,
항상 어깨가 무겁고 기운이 없었어. 나는 이제 너의 아버지와 회의에참석하는 사이야. 뭐든 일일이 구걸할 필요가 없어. 님프들이 아우성을 쳐대니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님프를 고를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스킬라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돌덩이처럼 나를 때렸지만 그렇게 쉽게 그를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수 있어." 내가 말했다. "나는 네 기분을 맞춰줄 수 있어, 진짜야. 나보다 더 충성스러운 배필은 없을 거야.
내가 뭐든 할게.‘
그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내 가슴속에담긴 천 가지의 굴욕적인 발언과, 지금까지 비축한 열정의 모든 증거와, 앞으로의 비굴한 다짐을 쏟아내기 전에 그의 능력이 나를 감싸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쿠션을 정리했을 때처럼 손을 퉁겨 나를 내방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흐느꼈다. 그 꽃의 즙을 먹고 드러난 그의진면모는 파랗고 지느러미가 달렸고, 내 것이 아니었다. 너무 아파서죽을 것만 같았다. 아이에테스가 떠났을 때처럼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느낌이 아니라 칼날이 내 가슴을 관통하는 듯 날카롭고 격렬했다.
하지만 나는 죽을 수 없는 몸이었다. 데일 듯한 순간을 견뎌가며 계속 살아가야 했다. 우리 신족이 육신을 버리고 돌이나 나무로 지내는쪽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상심이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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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점 항만 및 산업 클러스터와 관련해서도 주목해 볼 만하다. 부산항은 이미 환적 화물 처리 세계 2위, 컨테이너 처리 세계 7위이다. 세계 280개항만과 연결되어 국내 컨테이너 물량 70% 이상을 처리하는 아시아 물류 허브다. 북극항로가 개통되면 부산항은 자연스레 동쪽 관문이 될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이에 더해 해수부는 2만 4,000TEU(Twenty-foot Equivalent Unit,
20피트(약 6.1m) 길이 컨테이너 1개 크기 단위)를 넘어 3만 TEU 컨테이너선까지 접안할 수 있는 부산항 진해신항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2026년 예산에4,622억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또한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은 조선, 철강, 기계, 자동차, 석유 화학 등 주요 제조업이 집적된 해양산업 벨트를 형성하고있어, 국내 산업 연관성과 기여도가 매우 높다는 것은 자명하다. - P117

기후변화는 항로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낳고 있다. <서울신문>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온난화가 북극항로의 안정성을 해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북극 중앙부에 갇혀 있던, 수십 년된 두껍고 단단한 다년생 얼음(multi-year ice)이 녹으면서 거대한 빙산처럼 남하해 오히려 캐나다 북서항로(NWP)의 일부 주요 해협을 막아 버리는 일이발생하고 있다. 1년생 얼음과 달리 선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다년생 얼음 때문에 특정 구간의 운항 가능 기간이 오히려 단축된다는 뜻이다.
또한 《네이처》의 자매 저널인 <npj 오션 서스테이너빌리티(OceanSustainability)》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극지 코드가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또다른 위험을 지적한다. 바로 ‘해수 비말 결빙 (sea-spray icing)‘ 현상이다. 차가운바닷물이 강풍에 의해 배 위로 튀어 오르면서 순식간에 얼어붙어 선박의 무게중심을 높이고 전복 위험을 키우는 현상이다. 북극해의 혹독한 자연환경이 제기하는 또 다른 심각한 위협이 될 만하다.
지정학적 위험도 쉽게 넘길 수 없는 과제다. 북극항로의 안정성은 국제 정세에 크게 좌우한다. KIMS의 분석에 따르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발발 이후 서방 세계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러시아가 통제하는 북동항로 국제 통항량은 급감했다. 이는 북극항로가 언제든 지정학적 갈등의 지뢰를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명백한 사례다. 북극과맞닿아 있지 않은 한국, 중국, 일본 등도 북극항로에 관심을 가지면서 향후북극해를 둘러싼 시장 경쟁이 심화될 전망이고, 이 과정에서 이미 선점한 국가들이 다양한 장벽을 쳐 시장 진입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더해서 강화하는 환경 규제 역시 운항의 복잡성과 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이다. 해양과학 분야의 국제 저널 <프론티어 인 마린 사이언스(Frontiers in Marine Science)》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IMO는 극지 코드 외에도 선박 연료로 중유(HFO) 사용을 금지하고 블랙카본(black carbon) 배출을 규제하는 등 환경 보호 기준을 계속 높여 가고 있다. 이러한 규제들은 북극의민감한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더 비싼 연료를 사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야 하는 것은 선박 회사로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 P121

컴퓨터의 눈으로 본 대기는 가상공간 안에 흩어져 있는 계산점의 값,
즉 수치의 집합이다. 기상 커뮤니티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해 가상공간에서대기의 모습을 재현하거나 예측하는 방법을 ‘수치예보‘라고 하고, 이 과정에 쓰이는 계산 소프트웨어를 ‘수치예보모델‘이라고 부른다.
대기라는 유체가 흐르고 변해 가는 원리는 미분방정식으로 쓰여 있다.
방정식이 복잡해서 이상적인 조건에서만 해를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컴퓨터를 쓰면 어떤 조건에서도 정답에 근접한 해를 구할 수 있다. 대신 비용을 치러야 한다. 정확한 해를 구하려면 3차원 대기 공간 안에 계산점을 촘촘하게배치해야 하는데, 계산량이 많아지는 만큼 문제 푸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부담이다. 정확성과 시의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게 수치예보의 딜레마다. 그래서 나라마다 계산점을 늘리면서 동시에 계산 속도가빠른 슈퍼컴퓨터를 증설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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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내가 어머니와 이모들과 수많은 사촌들과 비슷할 줄 알고 나를 님프라고 불렀다. 하급 여신 중에서도 가장 말단인 우리는 능력이 워낙 미미해서 영생이나마 가까스로 보장할 정도였다.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고 꽃을 가꾸며, 구름에서 물방울을 파도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었다. 님프라는 단어에서 우리 미래의 모든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언어로 님프라는 말에는 그냥 여신만이아니라 신부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 P9

삼촌들 중에는 앉아 있는 의자보다 체취가 약한 이들도 있었지만 나의 외할아버지 오케아노스는 강바닥의 진흙처럼 진한 체취를 풍겼고, 아버지는 방금 전에 불을 지핀 이글거리는 화염과도 같았다.프로메테우스에게서 풍기는 푸른 이끼 냄새로 사방이 진동했다.
나는 빈 잔을 내려다보며 용기를 냈다.
"인간들을 도우셨죠." 내가 말했다. "그래서 벌을 받으시는 거죠."
"그렇다."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어린아이의 질문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대답할 순 없어. 저마다 다르게 생겼거든.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뿐.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알아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죽는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해요."
"신이라면 누구든 그렇지. 그들은 몸이 바스러져서 땅속으로 흡수된단다. 영혼은 차가운 연기로 바뀌어 저승으로 날아가고.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없지. 뭐든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고."
한기가 내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그걸 무슨 수로 견뎌요?"
"최대한 잘."
횃불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시커먼 물처럼 우리를 향해 찰랑찰랑 다가왔다. "용서해달라고 빌라는 걸 거부하셨다던데 진짜예요? 붙잡힌 게 아니라 제우스한테 가서 솔직하게 얘기하셨다는 것도요?"
"그렇다."
"왜요?"
그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얘길 한번 들어보자. 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 P33

단검을 꺼냈다. 방으로 들고 가자 청동 칼날이 양초 불빛을 받고반짝였고 사자가 이빨을 드러냈다. 그 아래에 부드럽고 주름 하나 없는 내 손바닥을 놓았다. 흉터도 생기지 않고 곪지도 않을 것이다. 아주희미한 세월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동반될 고통은 두렵지않았다. 나를 엄습한 것은 다른 공포였다. 칼날에 베이지 않으면 어쩌나 연기를 가르듯 칼날이 나를 그대로 관통하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칼날이 닿자 살갗이 찢어졌고 번개처럼 뜨거운 은백색의 고통이 쏜살처럼 나를 갈랐다. 나에게는 삼촌의 능력이 없으니 빨간 피가 흘렀다. 상처는 한참 동안 피를 흘린 다음에야저절로 아물어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걸 지켜보았고 그러는 동안 새로운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기 손이 자기 거라는사실을 깨달은 갓난아이처럼 너무 미숙한 발상이라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내가 그랬다. 나는 갓난아이나 다름없었다.
그 생각이란, 내 인생 자체가 뿌연 심연이었지만 내가 그 어두컴컴한 바다의 일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안에 사는 생명체였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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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주니어 선수들가운데 햇병아리 페더러와 같은 재목이 있는지 없는지는 물론 알수 없다. 천재성은 복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고, 그것도 여러 형태로 전염된다. 그리고 힘과 공격성이 아름다움 앞에서취약해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감을 느끼고 (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 P407

이 문제가 그저 취향이나 개인적 특징의 문제만은 아니다. 좋•은 소설가는 대부분 지식인이다. 젊은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평론가와 교사도 그렇다(놀랄 만큼 많은 편집자도 그렇다). 그리고 텔레비전, 광고, 그것들이 반영하고 정의하는 대중문화는 지식인이 무엇을 자신이 관심을 쏟아도 좋은 대상으로 간주하는가 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TV와 광고가 심리적 범유행병이 되기 전에 정신적 가치를 형성했던 선배들은 요즘도 바버라 터크먼 식으로 뚜렷하게 구분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그들이 볼 때 한쪽에는 진정한 ‘품질‘을 갖춘 것, 세련된 사람들이 생산하고 요구하는 것이 있다. 반대쪽에는 그저 ‘인기‘와 ‘대중적 매력‘만 있는 것,대중이 요구하는 것, 평등주의적 자본주의 탓에 이른바 민주적 시장에 현혹된 사람들이 기꺼이 제공하는 것이 있다. 이전 세대의 계몽된 심미주의자들, 박식하고 진보적인 사람들, 대충 1940년에서1960년 사이에 젖을 뗀 사람들은 이처럼 진정한 고상함과 진정한 진보주의가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아무렇지도않게 잘 활동한다. - P420

모든 사람은 여러 사건과 변화로 구성되고 최소한 시작과 중간이 있어서 남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자기 인생을 이해한다. 우리는 시공간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인간에게 내재된 속성이다. 그런데 오늘날 C.Y. 작가들의 입장에서, 미국 독자들이 가장 많이 노출되는 이야기 패턴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아무리 너그러운 기준으로 봐줘도 이야기 예술로서 텔레비전은 몹시 저급한 형태다. 텔레비전은 변화시키거나, 계몽시키거나, 확장시키거나,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려고 애쓰는 이야기 예술이 아니라 심지어 꼭 ‘즐겁게해주려고‘ 애쓴다고도 할 수 없다-그저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이야기 예술이다. 텔레비전의 유일한 목적은-공공연히 인정되는 목적은-지속적 시청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전이암처럼 효율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현실은 이야기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에 반드시 심각한 영향을, 대가와 함께, 미친다. 어떤이야기 예술이 진정한 예술인가 하는 독자들의 기대 자체에 영향을미친다. - P429

여러분이 1987년 현재 젊은 작가들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기꺼이 인생을 바칠 경우, 여러분은 우리가 그 무언가를 미치도록 좋아한다고 믿어도 된다는 것. 그리고 돈 때문에 글을 쓰는것이 아닌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 이유란 글쓰기가 예술이고, 예술은 의미이고, 의미는 힘이라는 것이다. 고양이를 색칠하는 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 텅 빈 공허를 발 디딜 바닥으로 바꾸는 힘, 빚을 보물로 바꾸는 힘.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들‘ 중 가장 뛰어난 이들은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이 사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고 있다. 어쩌면 가장 뛰어난 이들은 아직 한 명도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중 두엇은 심지어 ••• 독학자일 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말로 유행과 흐름과 학계가 우유를 묽게 만들고 있다면, 적어도 그 덕분에 크림이 떠오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나는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겠다.
(1988년) - P449

내가 아는 한, 픽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비유는 돈 드릴로의 《마오 II》에 나온다. 그 책에서 드릴로는 한창 집필 중인 책을 가리켜 작가를 쫓아다니는 추악한 기형의 아기로 묘사했다. 아기는 늘 작가를 따라 기어 다니는데(이를테면 작가가 식사를 하려고 찾은 식당에서 문득 바닥을 질질 기며 나타나거나, 아침에 침대 발치에서 그날 맨 먼저 보이는 얼굴이라거나), 추악한 기형이고, 뇌수종이 있고, 코가 없고, 팔이 뭉툭하고, 대소변을 못 가리고,지능이 떨어지고, 입에서는 뇌척수액이 질질 흐르고, 작가를 향해늘 앵앵거리고 우물거리고 울어대면서 사랑을 갈구한다. 그 추악함때문에 틀림없이 얻어낼 것이 분명한 무언가를 원한다. 바로 작가의 온전한 관심을. - P453

이 재미는 말하자면 놀이로서의 일이다. 혹은 규율 잡힌 재미가 충동적이거나 방종한 재미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혹은 모든 역설이 우리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것이다. 재미를 새롭게 다스리게 되었을 때, 픽션 쓰기는 이제 당신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당신이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혹은남들 어느 누구도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조명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주제야말로 알고 보면 모든 작가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반응하는 것, 느끼는 것이다. 픽션은 이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아니고, 남들이 가장 좋아해줄 것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보이는 수단도 아니며, 그보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 된다.
이 과정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무섭다. 또한 고되다. 그러나 알고보면 최고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처음에 글쓰기를 통해서 벗어나고 싶었거나 가장하고싶었던 당신의 부분, 바로 그 재미없는 부분을 직면함으로써 이제글쓰기의 재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어떤 종류의 구속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선물이고, 일종의 기적이다. 그리고 이것에 비한다면, 낯선 사람들의 애정이라는 보상은 한낱 먼지에, 보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1998년) -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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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교수의 공적을 수백만 쪽에 달할 도스토옙스키의 초고와 메모와 편지와 일기와 동시대인들의 인물평과 다양한 언어로 쓰인 비평을 소화하여 달여낸 공적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제대로 알려면, 우리는 우선 전기와 비평에 대한 접근법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을 결합하려고애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통의 문학가 전기는 작가의 개인적 삶에 (특히 이면이나 신경증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작가가 몸담았던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은 거의 무시한다. 한편 다른 연구들은-특히 이론적 의제를 품은 연구들은 작가와 작품을 작가가몸담았던 시대의 편견, 힘의 역학, 형이상학적 망상이 빚어낸 단순함수로만 취급한다. 어떤 전기 작가는 대상의 작품을 이해하는 작업은 이미 다 완료되었다고 가정한 뒤, 자신이 생각할 때 논쟁의 여지없이 벌써 다 정해졌다고 보는 그 의미에 맞추어 작가의 개인사를 추적하는 데만 시간을 쏟는다. 반면 우리 시대의 ‘비평 연구‘들은 거꾸로 작품을 밀봉된 상태로 취급할 때가 많다. 비단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유용할 뿐 아니라 어떻게 그 작품에 특정 작가의인간성, 스타일, 목소리, 시각, 기타 등등에서 나오는 독특한 개인적마법이 깃들어 있는지 설명하는 데도 유용한 작가 개인의 환경과믿음에 관한 사실들은 무시하는 것이다. - P347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결정적이고 큰 변화의 계기였던 사건은 1849년 12월 22일의 가짜 처형이었다는-이 쇠약하고신경증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젊은 작가가 자신이 딱 죽을 거라고 믿었던 그 짧은 오분 내지 십 분의 시간이었다는것이다. 그때 도스토옙스키 내부에서 벌어졌던 일은 일종의 개종 체험이었으나, 구체적으로는 이야기가 좀더 복잡하다. 왜냐하면 이후 그의 글에 영향을 미친 기독교적 신념은 특정 종파나 전통의 신념은 아니었으며거기에 러시아의 신비주의적 민족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가 결합된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요소는 다음 세기에 소련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적잖이 억압하거나 왜곡한 요인이었다. - P362

 하지만 프랭크의 도스토옙스키는 우리에게 이렇게 지적할 것이다(혹은 펄쩍펄쩍 뛰고 주먹을 흔들며 우리에게 날아들어 외칠 것이다). 상황이 정말 그렇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그 영역을 포기한 탓도 있다고. 무자비한 엄격함과 남을 심판하려는 열성으로 보아 자신이 남들에게 적용한다는 이른바 ‘기독교적 가치‘를 사실은 잘 모르는 게 분명한 근본주의자들에게, 우리가 내주었다고. 정부에 대한 편집증이 지나친 나머지 정부를 실제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존재로 가정하는 우파민병대들과 음모론자들에게, 우리가 내주었다고. 그리고 학계와 예술계에서는 그 부조리함과 독선이 갈수록 심해지는 정치적 올바름운동에게, 우리가 내주었다고. 발화와 담론의 형식에만 집착하는그들의 태도는 우리가 지닌 최선의 진보적 직관이 이토록 무기력해지고 미학화했다는 사실을, 진정 중요한 것들로부터 이를테면-동기, 감정, 믿음으로부터-이토록 멀어졌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주는데 말이다. - P367

<백치>에서 이폴리트가 읊는 유명한 "필수 설명"중 한 토막을 보자.

"개인의 자선을 비난하는 사람은," 나는 말을 시작했다. "인간본성을 비난하고 개인의 존엄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공적 자선 단체와 개인적 자유는 서로 다른 문제이고, 상호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개인의 친절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입니다. 남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충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생한 충동이기 때문입니다∙∙∙. 말해보십시오, 바무토프,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그렇게 관계 맺는것이 연관된 사람들의 운명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주요한 소설가가 인물에게 이런 말을 시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다른 냉소적인 주인공이 비판할 수 있도록 제시된 위선적인 장광설이 아니라, 인물이 자살할지 말지 고민하면서 늘어놓는 열 쪽짜리 진지한 독백의 일부로)? 우리가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없는이유가 바로 요즘 소설가들이 그런 것을 상상하지 않는 이유다. 우리 시대의 기준에서 그런 소설가는 가식적이고 장식적이고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오늘날 진지한 소설에 이런 연설이 직설적으로 나온다면, 그에 대한 반응은 분개나 비난이 아니라 그보다 더나쁜 것, 즉 치켜올린 눈썹과 아주 쿨한 미소일 것이다. 그 소설가가 거물이라면, <뉴요커>에 정색한 비아냥이 실릴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 소설가를 웃음거리로 치부할 것이다(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생각하는 진정한 지옥이다).
그러니 그는 우리는, 우리의 소설가는 진지한 예술을 통해서 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일은 감히 시도하지 않을 못할)것이다." 그런 작업은 메나르의 《돈키호테> 같아 보일 것이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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