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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내가 어머니와 이모들과 수많은 사촌들과 비슷할 줄 알고 나를 님프라고 불렀다. 하급 여신 중에서도 가장 말단인 우리는 능력이 워낙 미미해서 영생이나마 가까스로 보장할 정도였다.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고 꽃을 가꾸며, 구름에서 물방울을 파도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었다. 님프라는 단어에서 우리 미래의 모든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언어로 님프라는 말에는 그냥 여신만이아니라 신부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 P9

삼촌들 중에는 앉아 있는 의자보다 체취가 약한 이들도 있었지만 나의 외할아버지 오케아노스는 강바닥의 진흙처럼 진한 체취를 풍겼고, 아버지는 방금 전에 불을 지핀 이글거리는 화염과도 같았다.프로메테우스에게서 풍기는 푸른 이끼 냄새로 사방이 진동했다.
나는 빈 잔을 내려다보며 용기를 냈다.
"인간들을 도우셨죠." 내가 말했다. "그래서 벌을 받으시는 거죠."
"그렇다."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어린아이의 질문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대답할 순 없어. 저마다 다르게 생겼거든.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뿐.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알아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죽는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해요."
"신이라면 누구든 그렇지. 그들은 몸이 바스러져서 땅속으로 흡수된단다. 영혼은 차가운 연기로 바뀌어 저승으로 날아가고.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없지. 뭐든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고."
한기가 내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그걸 무슨 수로 견뎌요?"
"최대한 잘."
횃불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시커먼 물처럼 우리를 향해 찰랑찰랑 다가왔다. "용서해달라고 빌라는 걸 거부하셨다던데 진짜예요? 붙잡힌 게 아니라 제우스한테 가서 솔직하게 얘기하셨다는 것도요?"
"그렇다."
"왜요?"
그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얘길 한번 들어보자. 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 P33

단검을 꺼냈다. 방으로 들고 가자 청동 칼날이 양초 불빛을 받고반짝였고 사자가 이빨을 드러냈다. 그 아래에 부드럽고 주름 하나 없는 내 손바닥을 놓았다. 흉터도 생기지 않고 곪지도 않을 것이다. 아주희미한 세월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동반될 고통은 두렵지않았다. 나를 엄습한 것은 다른 공포였다. 칼날에 베이지 않으면 어쩌나 연기를 가르듯 칼날이 나를 그대로 관통하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칼날이 닿자 살갗이 찢어졌고 번개처럼 뜨거운 은백색의 고통이 쏜살처럼 나를 갈랐다. 나에게는 삼촌의 능력이 없으니 빨간 피가 흘렀다. 상처는 한참 동안 피를 흘린 다음에야저절로 아물어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걸 지켜보았고 그러는 동안 새로운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기 손이 자기 거라는사실을 깨달은 갓난아이처럼 너무 미숙한 발상이라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내가 그랬다. 나는 갓난아이나 다름없었다.
그 생각이란, 내 인생 자체가 뿌연 심연이었지만 내가 그 어두컴컴한 바다의 일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안에 사는 생명체였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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