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신의 위엄을 풍기며 얼마나 뻣뻣하게 굴었던가. 하지만 그는 나보다 더 뻣뻣했다. 내 옷소매가 그의 옷소매를 스치고 지나가자 벌벌 떨었다. 내가 말을 걸 때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내가 아는 몸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앞에서, 그때까지 만난 그 모든 위대한 신들 앞에서 내가 수천 번 반복해온 몸짓이었다. 공포의 연쇄 관계. - P51
"일어나거라." 내가 말했다. "얼른 나는 너의 그물을 축복한 적 없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다. 나는 민물만을 관장하는 나이아스에게서태어났고 얼마 안 되는 그들의 재능마저 내게는 없다." "그래도, 제가 또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다시 여기서 뵐 수 있을까요? 제 평생 이렇게 놀라운 일은 처음입니다." 나는 그때까지 줄곧 아버지의 광휘 옆에 서 있었다. 예전에 아이에테스를 품에 안은 적도 있었고 내 침대에는 불사의 손들이 엮은 두툼한 모직 담요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순간까지 온기를 느낀 적이라고는 없었다. "그래."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의 이름은 글라우코스였고 날마다 찾아왔다. - P52
다시 한 움큼을 준비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래야 한다면 꽃밭 전체를 짜서 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살갖 위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갗이 점점 까매졌다. 갈색을 지나고 자주색을 지나 그의 온몸이 가장 짙은 바다색이될 때까지 멍처럼 번졌다. 그의 손과 다리와 어깨가 부풀었다. 동록색의 긴 수염이 턱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튜닉이 벌어진 틈새로 그의 가슴에서 돋아나는 수포가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따개비였다. 다글라우코스, 나는 속삭였다. 내 손가락에 닿은 그의 팔의 느낌이이상했다. 단단하고 두툼하고 살짝 서늘했다. 나는 그 팔을 흔들었다. 일어나. 그가 눈을 떴다. 숨을 한 번 쉬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폭풍 해일처럼, 본연의 바다의 신답게 우뚝 섰다. 키르케, 그가 외쳤다. 내가 달라졌어요! - P66
물속에 그의 신전을 건설할 수 있게 거들었다. 나는 그곳을 매일 찾아갔다. 소금물 때문에 살갗이 따끔거렸고, 그는 손님들을 보며 감탄하느라 바빠서 나에게는 아주 잠깐 미소를지어 보이는 게 고작일 때가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우리에게는시간이 많았다. 시간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은 식탁에 앉아서 그의관심을 끌려고 난리법석을 떠는 님프와 신들을 구경하면 재미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생선장수라고 비웃었을 그들이 이제는 인간이었던 시절의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야기는 할 때마다 점점부풀려졌다. 그의 어머니는 꼬부랑할망구처럼 허리가 굽었고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손찌검을 했다. 그들은 헉 소리를 내며 가슴에손을 얹었다. "이제는 괜찮다." 그가 말했다. "파도를 보내서 배를 박살냈더니아버지가 충격으로 죽었거든. 어머니에게는 내가 축복을 내렸지. 덕분에 새 남편과 설거지를 돕는 노예가 생겼다. 어머니가 나를 모시는제단을 만들었고 거기서 이미 연기가 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내가좋은 물때를 선물해주길 바라지." "선물해줄 거예요?"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님프가 물었다. 내 여동생과 페르세스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하나로 원래는 동그란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는데, 이제는 잘 익은배처럼 변하여 글라우코스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다." 그가 말했다. "그들이 뭘 바치는지 보고." 기분이 아주좋으면 발이 팔딱이는 꼬리로 변했는데 지금이 그랬다. 나는 첩첩이겹쳐진 비늘이 무지갯빛으로 어렴풋하게 일렁이는 그 꼬리가 아주연한 회색으로 반짝이며 대리석 바닥을 쓰는 것을 지켜보았다. - P69
"싫어!" 그는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 시절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매시간 새로 멍이 생기고 새로 아픈 데가 생기고, 항상 피곤하고, 항상 어깨가 무겁고 기운이 없었어. 나는 이제 너의 아버지와 회의에참석하는 사이야. 뭐든 일일이 구걸할 필요가 없어. 님프들이 아우성을 쳐대니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님프를 고를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스킬라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돌덩이처럼 나를 때렸지만 그렇게 쉽게 그를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수 있어." 내가 말했다. "나는 네 기분을 맞춰줄 수 있어, 진짜야. 나보다 더 충성스러운 배필은 없을 거야. 내가 뭐든 할게.‘ 그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내 가슴속에담긴 천 가지의 굴욕적인 발언과, 지금까지 비축한 열정의 모든 증거와, 앞으로의 비굴한 다짐을 쏟아내기 전에 그의 능력이 나를 감싸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쿠션을 정리했을 때처럼 손을 퉁겨 나를 내방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흐느꼈다. 그 꽃의 즙을 먹고 드러난 그의진면모는 파랗고 지느러미가 달렸고, 내 것이 아니었다. 너무 아파서죽을 것만 같았다. 아이에테스가 떠났을 때처럼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느낌이 아니라 칼날이 내 가슴을 관통하는 듯 날카롭고 격렬했다. 하지만 나는 죽을 수 없는 몸이었다. 데일 듯한 순간을 견뎌가며 계속 살아가야 했다. 우리 신족이 육신을 버리고 돌이나 나무로 지내는쪽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상심이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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