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동안 나를 표현하는 수식어에 대해 고민해왔다. 학생, 인턴, 직장인처럼 누구에게나 때가 되면 따라붙게 마련인 명칭 말고 지금의 나를 가감 없이 담아내는 표현을 찾고 싶었다. 그나마 지난해 고민 끝에 찾은 건 ‘만드는 사람(maker)‘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영 아쉬웠다. 세상에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데다가 표현 자체가 너무두루뭉술하고 보편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까지의 내 삶을 관통하는 단어가 오직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러던 중 모 문구회사 홈페이지의 대표 인사말을 읽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00사를 아끼는 소비자와 문구인 여러분!

문구인(文具人),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암실에 빛한 줄기가 찡 하고 들어와 온 방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핑생을 찾아 헤맨 단 하나의 단어를 먼 길을돌고 돌아 이제야 조우한 느낌! 아아, 정말이지 나는 이 단어와 단숨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 P7

 가만 보면 내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이사는 것 같다. 클래식하고 심플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아기자기한 총천연색의 귀여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책상 위에도 묵직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오브제들과 함께 오색찬란 화려한 색상의 팬시문구들이 늘 함께 어울려 있다. 본능적으로 끌리기도하겠지만 그런 언밸런스를 은근히 즐기는 것 같기도하다. 귀엽고 가벼운 것들이 즉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명랑한 친구들이라면, 클래식한 오브제들은 말수는 별로 없지만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속 깊은친구 같다. 이 친구들을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일에나는 시간을 과감하게 쓰고 있다. 집에서 대체 뭘 그렇게 하느냐는 말에 나는 퍽 억울하다. 책상 위에도나름대로의 분주한 시간들이 있단 말이다.
- P42

그래, 취향이라고 해서 꼭 멋들어질 필요가 있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로 행복과 만족을 찾아나가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일 수 있다.
오늘도 나의 작은 우주, 책상 위 아끼는 수많은 문구들 틈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며 생각한다. 문구도 꽤좋은 취향이지.‘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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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유년 시절이 퍽 멀게느껴지시나요? 선생님이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었던 때가 아득한 옛날처럼 여겨지세요?"
로리 씨는 뜻밖에도 유순한 카턴의 태도에 놀라며 대답했다.
"이십 년 전쯤만 해도 그랬다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마치 원을 그리듯 점차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소. 원만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할까.
요즘은 오래전에 돌아가신 젊고 예뻤던 어머니(나는 이렇게 늙었는데 말이야!)에 대한 추억이 자주 떠오른다오. 세상이라는 것이 그리 실감 나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던 시절의 기억도."
"그 느낌 알 것 같습니다!" 카턴이 밝게 홍조를 띤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서 지금 더 나아졌다고 느끼시는 거죠?"
- P445

"아아, 카턴 아저씨다, 카턴 아저씨!" 어린 루시가 달려와 그의 팔에 열렬히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저씨가 오셨으니, 이제 우리 엄마 도와주실 거지요? 우리 아빠 구해 주실 거지요! 엄마를 보세요, 아저씨!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아저씨잖아요. 우리 엄마를 좀 보세요. 네?"
그는 허리를 굽혀 아이의 활짝 핀 꽃 같은 뺨에 자신의 뺨을 지그시 댔다. 이윽고 어린 루시를 살짝 떼어놓고 의식 없는 아이의 어머니를 들여다보았다.
"가기 전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아저씨가 엄마한테 키스해도 되지?"
사람들은 나중에 이 장면을 회상했는데, 카턴이 허리를 굽혀 루시의 얼굴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대면서 몇 마디 중얼거렸다고 했다. 그때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어린 루시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훗날 그녀가 고운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손자들을 앉혀 놓고 카턴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 P479

"나는 알고 있다. 바사드와 클라이, 드파르주, 방장스, 배심원, 판사 같은 옛 체제가 붕괴된 후 생겨난 기나긴 대열의 새 압제자들이 더는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아도 결국 이 보복적인 도구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 P538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행위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곳보다 더없이 편안한 곳이리라."
- 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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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사가 다네이를 석방시키려고, 아니, 최소한 재판은 받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게 당시 여론은 너무 강경했고, 급격하게 변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국왕은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는 공화국은 세상을 상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전쟁을 선포했다. 노트르담의 높은탑에는 밤낮으로 검은 깃발이 나부꼈고 삼십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프랑스 곳곳에서 지상의 압제자에 대항해 총궐기를 했다.
마치 용의 이빨을 널리 뿌려놓은 듯 언덕과 평원, 바위와 자갈,
충적토에서, 남쪽의 환한 하늘 아래, 북부의 구름 아래, 가을과겨울 할 것 없이,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에서, 짧게 깎은 풀과 옥수수 그루터기에서, 넓은 강의 비옥한 강둑, 해안의 모래밭에서도 똑같이 열매를 맺은 듯했다. 그런데 어찌 사사로운 근심으로 인민 공화국 원년의 범람하는 물결을 거스르려 하겠는가. 그것도 하늘의 창문도 닫힌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홍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대홍수를 말이다.
- P390

그들은 갑자기 다시 멈추더니 잠시 후 이번에는 새로운 춤을 추었다. 먼저 도로 너비만큼 줄지어 선 다음 고개를 숙이고 두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비명을 지르며 덮칠 듯 달렸다. 어떤 싸움도 이 춤의 절반만큼도 오싹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단연코 한때는 순진무구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악마적으로 되어버린, 타락한 놀이였다. 원래 건전한 오락거리였지만 피를 끓게 하고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며 강심장을 만들어주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원래 선했던 것이 어떻게 뒤틀리고 추해졌는지 보여 주었을뿐 아니라 고상해 보였던 것일수록 더욱 추해 보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젊은 하녀는 가슴을 풀어 헤쳤고, 예쁜 처녀의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피와 진흙탕 속에서 움직이는 섬세한 발동작은 박자가 맞지 않았다.
카르마놀이라는 춤이었다.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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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육 과학자 R. A. 로리(R. A. Lawrie)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소비자들이 고기의 질을 판정할때 으뜸으로 꼽는 기준은 질감과 연한 정도이다. 사람들은 빛깔과 향을 포기하고서라도 연한 고기를 선택하는 것 같다. 식육 과학의 핵심 목표는 연한 고기를 생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인데, 사육 방법, 도살방법, 저장 방법, 조리 방법 모두가 고기를 연하게 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한다. 불에 익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리 역사가 마이클 시먼스에따르면, 역사상 요리사의 주된 목표는 한결같이 음식을 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핵심은 요리사가 인간이라는 기계의 작용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 P99

 이처럼 음식 조리법이 향상된 것은 200만년에 걸친 진화 기간 동안 인류의 뇌 크기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는지 모른다. 다른 어느 종도 뇌의 크기가 이처럼 급속하게,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증가한 경우는 없다. 찰스 다원은 불로 하는 요리를 "언어를 제외하면 아마도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이때 그가 생각한 것은 단지 우리가 먹는 음식의 질이 개선됐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음식의 질이 개선됨으로써 뇌 용량의 증가가 가능했다는 사실은 더욱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불로 요리하기‘의 발견이 위대한 것은 단지 우리가 더 나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거나 그 덕분에 우리가 육체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인류가 될 수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불로 요리하기‘는 그보다 훨씬 더 중대한 일을 했다. 우리가 독보적으로 큰 뇌를 가질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부실한 육체에 빛나는 정신력을 부여해 준 것이다.

이 같은 사회 구조에 대한 형질 인류학의 전통적인 설명은 본질적으로 장 앙텔므 브리야사바랭이 제안한 것과 동일하다. 즉 고기가 인류의 식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을 때, 여성은 남성보다 이를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잉여분이 있는 남성이 여성에게 조금나눠 주고, 여성은 선물을 고맙게 여겨 식물성 식량을 채집해 나눠 줌으로써 보답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초기 가구의 출현이었다. 이에 대해 형질 인류학자 셔우드 워시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자들은 사냥하고 여자들은 채집하여 그 결과물을 서로 공유하고아이들에게도 주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 자녀들 사이에나누고 공유하는 것이 습관처럼 반복되면서 인류의 가정의 기초가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가정은 사냥의 혜택을 주고받은 결과로 생겨났다. 어머니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원숭이나 유인원의 사회 집단에 남성이 추가된 것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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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돌은 손잡이가 두 개인데, 남자 두 명이 각각 나눠 잡고 미친 듯이 돌렸다. 그럴 때면 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머리칼이 뒤로넘어가 세상에서 가장 사납게 변장한 최악의 야만스러운 얼굴보다도 더 섬뜩하고 잔인해 보였다. 거짓 눈썹과 거짓 수염이 연신휘날렸고 오싹한 얼굴은 온통 피와 땀투성이였으며 소리를 지를때면 흉측하게 뒤틀렸고, 짐승 같은 광기와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눈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았다. 이 악한들이 빙글 빙글 돌면 젖어서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다가 목 뒤로 넘어가곤 했다. 여자들은 그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포도주를 들고있었고, 그들은 칼을 가는 동안 술을 마셨다. 피가 뚝뚝, 포도주가 뚝뚝 떨어지고, 숫돌에서 불똥이 튀어 주변 대기는 온통 핏방울과 불빛으로 가득 찼다. 그 무리 중에서 피로 얼룩지지 않은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앞 사람이 일을 끝내면 자신의 칼을 갈기위해 숫돌을 향해 서로 어깨를 밀치는 남자들도 허리까지 옷을벗어젖힌 몸뚱이와 사지에 피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남자들은 은갖 종류의 마를 걸쳤는데, 그 넝마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사악하게도 여자들에게서 훔친 레이스와 실크, 장식 띠 따위도 걸쳤는데, 속속들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날을 세우려고 가져온 손도끼와 칼, 총검, 겸 따위도 모두 피로 붉게 물이 들었다. 난도질을 했던 검을 리넨으로 만든 끈이나 찢어발긴 옷자락으로 손목에 묶어 차고 다니기도 했다. 끈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지만 모두한 가지 색으로 짙게 물이 들어 있었다. 무기의 주인이 쏟아져내리는 불똥 사이로 미친 듯이 무기를 잡아채어 거리로 뛰쳐나갈 때, 그 광포한 눈동자도-문명화된 구경꾼이 아무리 조준이 정확한 총으로 겁을 주려고 해도 조준하는 데만 이십 년쯤 걸릴 그런 눈이었다-똑같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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