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짐작하겠지만, 이런 얼굴 형상 목격담에 대해 이제는 세속적인 설명을 해보기로 하자. 우리의 시각체계가 얼굴, 사물, 단어를 인식할 때 해결하기 어려운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조명 상태, 거리, 각도, 부분 노출, 색상 등 인식 대상이 다양한 조건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신호가 약할 때 증폭기를 켜듯 시각체계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패턴을 접할 때 극도로 민감해진다. 우리 뇌의 시각 영역은 기대하는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활성화된다. 뇌는 단 0.2초 안에 의자나 자동차 같은 사물들과 사람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다. 의자 같은 사물에서 주차요금 징수기나 3극 접지 콘센트처럼 사람의 얼굴 모양을 닮은 사물을 구별하는 데에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얼굴과 비슷한 사물을 보면 실제 얼굴에 매우 민감한 방추이랑 fusiform gyrus(좌측 측두엽에 위치)이라는 뇌 영역이 활동을 시작한다. 즉 무엇이건 얼굴처럼 생긴 물건을보게 되면 뇌는 즉시 그 물건을 얼굴로 취급하고 주변 사물과 다르게처리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얼굴 모양의 패턴을 매우 쉽게 실제 얼굴로 인식한다.  - P227

<그레이 아나토미>와 <하우스> 같은 텔레비전 의학드라마나 키팅 박사가 운영하는 세인트루이스 진단 클리닉에서 만날 수 있는 특이 환자들과는 달리, 의사들이 매일 만나는 환자들 대부분은 지극히 평범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종플루보다는 흔한 감기, 임상적 우울증보다는 일상적 슬픔을 접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예상해 가장 개연성있는 진단을 내리도록 배웠기 때문에 일반 증상을 재빨리 알아낸다.
일반인들은 전문가일수록 더 다양한 종류의 질병과 대안을 고려해 진단을 내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전문성은 다양한 것들을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관련 없는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이다.  - P229

수많은 심리학 입문서에는 아이스크림 소비와 익사율의 상관관계 고찰이 등장한다. 아이스크림 소비가 많은 날에 사람들이 더 많이 익사하고, 아이스크림 소비가 거의 없는 날에는 익사율이 낮다. 아이스크림섭취가 익사 원인은 아닐 테고, 익사 소식 때문에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기피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제3의 요인인 ‘더위‘가 이 둘의 주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겨울에는 아이스크림 소비도 줄어들고 수영하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익사율도 낮다이 사례를 통해 원인 착각에 숨겨진 두 번째 중요한 편견(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때 한 사건을 다른 사건의 원인으로 추론)을 살펴볼 수 있다. 심리학 교재가 아이스크림-익사 상관관계를 이용하는 이유는 한쪽이 다른쪽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반면, 언급되지 않은 제3의 요인이 두 사건 다 일으켰을 가능성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처럼 간단하게 원인 착각을 간파하기 어렵다. - P232

음모론은 대부분 음모가 있었다는 관점에서 사건 원인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패턴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음모론은 우연의일치로부터 인과관계를 추론한다. 음모론을 믿으면 믿을수록 원인 착각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음모론은 예측을 벗어난 패턴 인식 방법에서 비롯된 결과이며 ‘성모마리아 샌드위치‘ 의 인식적 변형이다. 부시가 사전에 계획한 이라크침공을 정당화하려 9.11 테러를 조작했다고 믿는 음모론자들은 부시가그 공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첫번째 비행기가 타워에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는 부시의 잘못된 기억을 재빨리 떠올렸다. 힐러리 클린턴을 ‘당선되려고 별별 수를 다 쓰는 인간‘ 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보스니아 저격수에 대한 힐러리의 잘못된 기억을 ‘거짓말하고 있는 증거라고 재빨리 결론지었다. 둘 다 자신의 편견대로 그 사람의 모습을이용해 사건을 패턴에 끼워 맞춘 케이스다.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한 원인을 찾았다고 강하게 확신한 나머지 더 이치에 맞는 다른 설명이 있을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 P233

상관관계의 원인에 대한 인지 오류는 이야기의 힘과 밀접한 관련이있다. 십대가 성적인 음악을 듣거나 폭력적인 게임을 한다고 들으면 사람들은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같은 십대가 그 뒤에성관계를 갖거나 폭력적이 되기 쉽다고 하면 인과관계로 인지한다. 이런 행동들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해석은 논리적 오류에 기초한다. 원인착각을 일으키는 세 번째 주요 메커니즘은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발생한다. 사건이 순차적으로 일어나거나 연결되기만 해도 우리는먼저 일어난 사건이 나중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라고 추정한다. - P239

아들 질병의 진짜 원인을 안다고 확신하는 엄마의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그 원인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수백 수천 명의 아동을 대상으로한 실제 연구자료 수십 개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 또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소재로도 훨씬 매력적이다. 강간당했다는 제니퍼 톰슨의강력한 증언이 로널드 코튼을 범죄자로 만들었듯, 한 엄마의 경험담은우리가 그 증거를 적절히 저울질할 수 있는 능력을 압도한다. 그 이야기는 감정, 즉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일화에 지나치게 영향력을 부여하려는 우리의 본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공감할수록 그 경험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덜 비판하고 더 잘 기억하게된다. 수많은 광고 캠페인은 바로 이 약점을 파고든다. 광고 모델에게공감하는 시청자는 비판의 말을 아낀다. 자폐증의 경우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 P259

감지한 원인을 착각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과학과 통계자료로 개인적 일화를 극복하는 것은 더 어렵다. 이런 개인적 일화에 바탕을 둔 가설의 강력한 영향력은 그 가설이 불어넣은 감정의 결과일 것이다. 자폐증과 백신접종이 과학적으로 연관 없다고 밝힌 오피트의 권위있는 저서는 아마존닷컴의 5점 만점의 독자평점에서 3.9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에 달린 평점은 보통 다른 책에 매겨진 일반적인 평균과는다르다. 이 책을 집필 중인 현재를 기준으로 102명의 독자 중 70명은 최고점, 25명은 최저점을 준 반면 중간점(3점)을 준 사람은 단 한 명도없었다.  오늘날 백신접종이 자폐증과 전혀 관련 없다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설문조사에 따르면 29퍼센트의 사람들이 "자녀에게 접종시키는 백신에는 자폐증을 일으키는 책임이 일부 있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대중매체들이 착각에 불과한 원인에 그토록 관심을 보인 걸 감안하면, 영향을 받은 사람이 그 정도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긴 하지만 과학은 기껏해야 불완전한 승리만을 얻었을 뿐이다. 만약 29퍼센트에 해당하는 부모가 그러한 믿음을 실천에 옮겨서 자녀에게 백신접종을 시키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의 면역력은 대규모 홍역 발생을 일으킬 만큼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또한 철저한 실험보다 개인적 일화를 바탕으로한 증거에 의존하는 새로운 자폐증 치료법이 계속 나타나 부모들을 위험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이 장을 읽음으로써 원인착각을 이용한 이러한 시도들에 면역력을 갖길 바란다. - P264

잠재력 착각潛在力錯覺 (illusion of potential)은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아직 활용하지 못하는 지적 능력이 우리 뇌에 엄청나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이 착각은 다음의 두 가지 믿음의 결합이다. 첫째, 인간의 정신과 뇌는 여러 다양한 상황이나 환경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고 있다. 둘째, 이 잠재력은 매우 쉽고 간단한 기술로도 발휘할 수 있다. ‘모차르트 효과‘는 이런 착각이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주장을 어떻게 수백만 달러짜리 사업이 될 수 있는 인기 있는 전설로 탈바꿈시키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 P269

스토와 스틸 그리고 그 외 연구자들의 연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최초 발견자들의 출판물은 대중의 인식뿐 아니라 국가 정책에도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심지어 로셔는 미 의회에서 자신의 발견을 발표하기도 했다). 언론은 연구 주제가 발표된 첫 번째 연구에 무게를 실어 집중적으로 보도했으며 이후에 발표된 연구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편향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명성은 몇 달 후에 도달한 사람이나 최초의 업적을 이어나가는 사람이 아닌, 최초 발견자에게만 수여된다. 하지만 과학 분야에서 위대함의 여부는 역사만이 판단할 수 있는 회고적인 - P274

면이 있으며, 언론은 역사의 초안이 된다. 새로운 발견이 발표되면 언론인들과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두 곳 이상의 연구실에서 결과를 재현하기 전까지 이 결과를 보도할 생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기 어렵다. 더욱이 10분 만에 IQ 점수가 9점이 오르는 놀라운 방법이 있다면더욱 그럴 것이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처음 보도되는 방식은 모든사람이 주시하는 희대의 범죄 사건이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는 것과비슷하다. 나중에 용의자가 무혐의로 풀려난다 해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도되는 것처럼, 눈길을 끌지 못하는 후속 실험 결과는 아예 소개되지도 않거나 어느 구석에 작게 실리는 것으로 그친다.
모차르트 효과 이야기는 전개될수록 점점 더 부풀려졌다. 관련 연구들이 모두 대학생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수행됐는데도 모차르트가 아이, 유아, 심지어 태아에게까지 유익하다는 전설이 퍼져나갔다. 중국의 한 신문 칼럼니스트는 "서양에서 수행된 연구에 따르면 임신 기간에 모차르트의 오페라나 음악을 들은 아이가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더욱총명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썼다. 사회심리학자 에이드리언 뱅거터 Adrian Bangerter 와 칩 히스가 로셔와 쇼의 첫 번째 연구를 보도한 뉴스들을 조사해 본 결과, 연구 발표 해인1993년에는 언론의 큰 관심을 받긴 했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잡지에 발표된 다른 연구들이 받은 관심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언론은 정신분열증, 명왕성 궤도, 피부암, 심지어 남성과 여성의 섹스 파트너 수와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다뤘다. 하지만 그 뒤 8년여에걸쳐 모차르트 효과에 관한 논문은 다른 연구들보다 10배 이상 언론에 보도되었다. 다른 연구들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첫 번째 보도 이후 급격히 사라졌지만, 모차르트 효과는 그렇지 않았다. - P273

다수의 사람들이 미지의 수량에 대한 총 개수를 예측하려 할 경우에 정확하게 예측하는 방법은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의 예상 수치를 제안한 다음, 모든 예상 수치의 평균을 계산하는 것이다. 각 개인의 예상은 정확하지않을 수 있으나 똑같이 높거나 낮을 순 있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예상수치의 평균을 계산하면 너무 높은 예상 수치들과 너무 낮은 예상 수치들은 서로 상쇄되기 때문에 실제 총 개수에 가까운 예상 수치를 얻을수 있다. 21과학 분야의 연구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각각의 연구는 실제의 효과를 부정확하게 예측하도록 함으로써 결과를 왜곡시키는 무의식적인 편견이나 오류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모차르트의 음악을들은 후에 IQ가 얼마나 높아지는지에 관한 연구가 바로 그렇다). 다수의 연구로부터 평균치를 구하면 효과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게 하는 임의의 오류들은 평균으로 수렴하여 진실에 가장 가까운 예상 수치만 남게된다. 관련 연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메타분석의 결과는 하나의 뚜렷한 연구 결과나 로셔와 쇼의 첫 번째 논문과 같이 잘 알려진 연구 결과에 크게 영향 받지 않는다. - P277

나는 ‘모차르트 효과‘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음악을 들었을 때 생기는 긍정적인 효과 이외에 어떤 이득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모차르트 음악이 당신을 더 총명하게 해주기보다는 아무 소리도 듣지 않거나 긴장을 푸는 일이 당신을 조금 더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본다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일반적인 수준의 정신 자극과 비슷한 대조 조건이며 무음조건과 이완조건은 인지능력을 축소시키는 ‘처치‘ 이다. 어느 쪽이건 모차르트 효과를 거의 또는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일부 추가 연구는 이완조건이나 무음조건과 같은 대조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메타분석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그 연구들은모차르트 음악의 뚜렷한 효과에 대해 또 다른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한 예로, 연구자 수잔 할람Susan Hallan BBC 방송과 함께 영국 전역의 200개 학교, 8천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실험을 진행했다. 어린이들은 모차르트의 현악 5중주, 과학 실험에 관한 토론, 또는 3곡의 팝송을 들은 다음, 로셔가 최초 실험에서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인지능력 검사를 받았다. 인기곡을 들은 어린이들의 인지능력이 가장 높았고 모차르트 음악과 과학 토론을 들은 어린이들은 차이가 없었다. 논문에서는 이러한 결과를 모차르트 효과에 빗대어 ‘블러 효과‘라 불렀다.  - P278

여러 면에서 이 믿음은 아주 순수한형태의 잠재력 착각이다. 우리가 뇌의 10퍼센트만 사용하고 있다면 방법을 찾을 경우 사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90퍼센트의 뇌를 틀림없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이 믿음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일부 법령들이 부정확하게 쓰여있어서 집행이 어렵듯, 이 설명도 "불분명해서 무효하다"고 선언되어야 한다. 첫째, 사람의 뇌 용량을 측정하거나 어느 정도의 용량을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둘째, 어떤 경우에서든 뇌 조직이 장시간 어떤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조직이 죽은 거란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뇌가 10퍼센트만 사용되고 있다면 기적적인 부활이 일어나거나 뇌 이식을 수행하지 않고선 사용 비율을 끌어올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진화가 (또는 아주 총명한 창조주가) 우리에게 90퍼센트가쓸모없는 기관을 주었으리라 의심할 이유가 없다. 큰 뇌를 갖게 되면 인간은 생존하기 매우 어려운 종이다. 큰 뇌를 덮고 있는 머리도 커져서 힘들게 산도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으므로 분만 중에 죽음에 이를 수있는 위험이 커진다. 우리가 뇌의 일부만 사용하고 있었다면 자연 선택은 오래 전에 인간을 줄어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 P286

그렇다면 팝콘과 콜라 연구는 뭐였을까? 바로 이 실험이 대중에게 잠재의식 설득 기술이 효과 있다고 믿게 만든 원인이다. 연구 발표 후고작 일 년 만에, 미국 성인 41퍼센트가 잠재의식 광고를 들어봤다고응답했다. 이 수치는 1983년에는 81 퍼센트까지 치솟았고 우리 조사결과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잠재의식 광고가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윌슨은 저서에서 팝콘 콜라 실험 배후에 있던 제임스 비커리James Vicary라는 광고 전문가를 상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로부터 10년도 전에비커리가 그 연구는 사기였다고 공공연히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고시대Advertising Age〉와 가진 인터뷰에서 비커리는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고객을 끌어들이려고 ‘연구‘를 꾸며냈다고 고백했다. 다른 연구자들이 비커리가 거짓으로 주장한 실험결과를 재현해보려 했지만 성공사례는 없다. 한 캐나다 방송국은 자사 프로그램에서 "지금 전화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순간적으로 짧게 반복해서 내보냈지만 전화량은 늘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시청자들에게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정답을 말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배고프거나 목말랐다고만 응답했다. - P291

이 놀라운 발견은 <네이처>에도 실렸다. 우리의 정신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도쿠를 잘하기 위해 여가시간의 대부분을스도쿠 게임으로 보낸다고 가정하자. 물론 그럴 경우 스도쿠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풀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비록 해본 적은 없더라도 캔캔 퍼즐(스도쿠의 최신변형)을 풀 수 있는 능력 역시 향상될 것이다. 캔캔퍼즐의 수행능력 향상은 어느 정신적 기술이 이와 매우 유사한 다른 기술도향상시키는 ‘제한적인 이전‘의 사례다. 스도쿠 연습이 암산능력을 향상시켜 머릿속으로 소득세를 산출하거나 전화번호 숫자를 기억하는 능력을 향상시켰다면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기술의 향상은 ‘폭넓은 이전‘을 의미한다. 메달오브아너 게임을 훈련한 결과, 상대보다 빨리 총을 쏴야하는 비슷한 비디오게임에서 타깃을 발견하는 능력이 향상된다면 제한적인 이전이다. 운전 중에 주변상황에 대한 주의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메달오브아너 게임을 하는 것은 전화번호를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스도쿠를 하는 것과 같다. 이는 폭넓은 이전의 예이며, 특별히 훈련되지 않은 인지능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유용하다. 게다가 이경우에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뭔가를 하면서 다른 기술을 향상시켰다. "연습하면 완벽해진다"는 격언이 있는데, 만약 그 ‘연습‘ 이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것뿐이라면 누가 연습을 마다하겠는가. - P307

또한 게임에 숙달된 전문가들이 실험실에서는 인지 테스트 성과가좋더라도 실생활에서 인지과제를 수행할 때는 나아진 게 없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인지능력과 관계없는 뭔가 다른 요인이 테스트 성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월터 부트는 댄과의 인터뷰에서 과학 문헌에서는 좀처럼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을언급했다.

"비디오게임에 숙달된 사람은 자신의 전문기술에 근거한 연구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과제를 더 잘 수행했을 것이다. 광고를 통해 모집된 참가자들이나 선발된 게이머들은 자신들이 전문가라서 선택되었다는 걸 알고,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동기부여가 잘되어 있고, 더 주의를 집중하며, 더 잘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대중매체에서 다루고, 특히 게이머들이 자주 가는 블로그에서 그들은 남들보다 잘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반면 비전문가들은 자기가 참여한 실험이 비디오게임 연구라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

달리 말하자면, 전문가들이 초심자들을 능가했던 것은 원래 그런 과제를 더 잘해서라거나 수천시간 동안 비디오게임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연구가 비디오게임 기술에 관한 것이고 그들이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효과‘는 이런 부류의 실험에서는 잘 알려진 주제다.  - P315

이런 종류의 상식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직관直觀intuition이다.
우리가 직관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믿는가는 주로 과거에추측하고 이해하며 축적해온 경험들에 기인한다. 직관은 아무런 생각없이 자동적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또한 직관으로 인해 우리는, 실제 능력 이상으로 주의를 집중할 수 있고, 기억은 실제보다 세세하고 확실하며,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은 유능하기 때문이고, 자신은 실제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우연히 시간상 같이 일어나고 관련 있으면인과관계라 여기고, 사람의 뇌는 방대한 능력을 발휘할 잠재력이 충분하고 언제든지 활용가능하다고 섣불리 판단하고 착각한다.  - P329

분석이 언제나 직관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직관은 분명 유용하지만, 실제로 직관에 의한 판단이 더 옳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는한 직관이 분석보다 훌륭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성공적인 의사 결정을 위한 열쇠는 직관을 신뢰해야 할 때와 직관을 경계하면서 고되지만 모든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때를 아는 데 있다. - P336

일상의 착각들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예전처럼 자기 자신을 확고히 믿진 못하겠지만, 자신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고 사람들이 때로 어이없이 행동하는 이유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멍청해서, 오만해서, 무지해서, 부주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상의 착각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결론으로 성급하게 뛰어들기 전에 항상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하기를 바란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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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몇 년 전 바버라 콜스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순전히 누군가가 "저 여자가 존슨의 새 여자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밀하고 야한 의미로 쓰는
"아, 그거"라는 말을 그녀에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존슨이 그 여자에게서 과연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때 존슨을 지켜보면서 ‘저 여자는 오래가지 못하겠군‘이라고 생각한 기억이 났다. 존슨은 미남이었지만, 술기운에 조금 붉어진 얼굴로 어떤 여자에게 수작을 걸고 있었다. 바버라는 벽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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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부터 2008년까지 도리스 레싱은 50편이 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거의 매해 책을 출간했다. 그는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미래가 달라질 리 없다고 단정 짓는 "도덕적 피로"를 항상 경계했다.  - P31

안타깝게도 프리다의 건강은 빠른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오른발은 염증 재발로 썩어들어가고, 요추 통증도 나날이 심해졌다. 1950년 프리다는 오른발 절단 수술을 받았고,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수술을 받은 후 또다시 9개월을 병상에서 머물러야 했다. "한 세기분의 고통이 지속되었다.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그렇다고 마냥 운명 앞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프리다는 반전 평화 운동 서명에 참여했고, 개인전을 준비했으며,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의 삶을 통틀어 22번의 외과 수술을 받았다." 고통도 프리다를 이기지는 못했다.
1953년 4월, 멕시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리다의 작품전이 열렸다. "내 의지는 강하다. 내 의지는 변함이 없다." 개막식 날 프리다는 구급차를 타고 전시장에 도착해 침대에 누워 친구들과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1년 3개월 후인 1954년 7월 13일, 프리다는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프리다는 자기 작품에 짧은 인사를 남긴다.
"인생 만세!" 스스로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었다.
쓰라렸던 자신의 삶에 보내는 찬사도 잊지 않았다. "나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프리다 칼로의 성취 앞에 서면 언제나 겸손해진다.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 매번 큰 용기를 얻는다.
글쓰는 여자는 사랑을 증명한다. - P68

제이디 스미스가 지향하는 문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할 것인가? 작가는 오직 그 질문만을 던진다. "구원은 현재하고 있는 일에, 지금 쓰고 읽는 것에 존재한다." 글 쓰는 여자는 오늘에 집중한다. - P94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지면을 얻지 못하고 독자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타협할 수는 없었다. 좀 더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아무래도 당대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들 때마다 후대의 독자들을 상상하며 글을 썼고 책을 만들었다. 막연한 희망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큰 용기가필요했다. "소리 내 싸우는 건 / 아주 용감하다// 하지만 더용감한 건/ 내면에서 싸우는 슬픔의 기병대/ 이겨도 나라가 알아주지 않고/쓰러져도 누가 봐 주지 않으며," 결과도장담할 수 없었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기다림과 희망은 같은 말이었다. "나는 가능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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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이 예측을 잘못한 전문가의 사례만 선별했다고 생각하는가? 분명 이 내용들은 이례적인 사례에 속한다. 전문가들이 아무것도모른다거나 항상 틀린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과학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많이 알고, 그들의 지식은 일반인이 아는 내용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앞의 사례들은 과학적 사고를 하는 전문가들조차 자신의 지식을 지나치게 믿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전학자들은 인간 유전자 수를 실제보다 높게 측정했고, 어떤 학자의 측정치는 다섯 배나 차이 났다. 컴퓨터 과학자들이 예상했던 시기는 네배나 차이가 났고, 재앙을 예측했던 경제학자들은 직접 선택한 광물자원의 예상가격도 알아맞히지 못했다. 전문가들조차 이러니, 우리도 자신의 지식을 지나치게 신뢰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실제로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할 때마다, 또하나의 일상적인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제부터 다룰 주제인 지식 착각知識錯覺 illusion of knowledge이 바로 그것이다. - P178

 우리가 세운 계획이 빗나갔다는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니다. "예측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미래에 대해서는 "이라는 요기 베라 Yogi Berra 의 말처럼 결국 세상은 인간이 머릿속으로 설계한 단순한 모형보다 훨씬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관리전문가조차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할 때가 많다. 물론 아마추어들보다는 정확하지만 여전히 소요시간에 대해서는 3분의 1정도 잘못 예측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지식의 착각을 경험하며, 단순한 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간단하고 쉬워 보였던 일이 현실과 맞닥뜨려야 비로소 복잡한 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예측할 때는 시간이나 비용을 너무 과소평가하기 쉽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한계를 고려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거듭 말하지만 익숙함에서 비롯된 단순하고 낙관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는데도, 우리는 지식 착각에 의해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 P187

지식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낯선 프로젝트에 대해 당신이 추정한 소요 기간과 비용 예상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자기프로젝트를 본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긴 어려울 수 있다. 이미 프로젝트 내용에 익숙해졌기에 자신만이 정확하게 설계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기 쉽다.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서 이미 완료한 프로젝트를 찾아본다면(당신이 맡은 프로젝트 내용과 비슷할수록 당연히 더 좋다), 기존 프로젝트에서 실제 사용된 비용과사업기간을 비교 자료로 활용해 더 나은 예상을 할 수 있다. 자기 생각만 고수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바깥에서 살펴보기 outside view‘ 를 선택하면 계획을 바라보는 방식이 극적으로 달라진다. - P489

이처럼 현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전문가를 사람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지식 착각은 계속된다. 자기 지식의 한계를 아는 사람들은 "비올 확률은 75퍼센트입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확신하고 단언한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최고라는 사람들조차 지식 착각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유전자 개수와 천연 자원의 한계를 잘못 예측하고, 체스 컴퓨터의 가능성을 단언했던 과학자들을 다시 떠올려보라. 그들은 실패자도 아니고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인간 유전자 수를 잘못예견한 에릭 랜더와 원자재 가격이 끊임없이 상승한다고 잘못 예견한 존 홀드렌은 오바마 행정부의 과학 고문이 되었다. 반면 폴 에를리히는 1990년에 345,000달러의 상금이 걸린 맥아더 재단의 ‘특별한 재능‘ 상을 받았으나 같은 해에 있었던 원자재 가격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허버트 사이먼은 ‘경제 조직 내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선도적인 연구로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지만 인간과 컴퓨터의 체스 경기 결과는 틀리게 예측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례에서 지식 착각 때문에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은 없었지만, 때로는 그렇게 되는 사람도 존재한다. 흔히 성공한 투자자로 언급되는 사람의 전형은 리스크를 조심스레 헤지하고, 미래의 불확실성 수준을 판단해 그에 맞게 자산을 배분하고 레버리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돈을 걸고 과감하게 게임에 배팅하는 사람이다. 지식 착각은 너무도 강력해서 많은 사람들이 잠시 승리를 맛본 뒤 과도한 욕심을 부려 모든 것을 잃고 망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만든다.
2007년 브라이언 헌터는 아마란스와 도이체방크에 처참한 손해를 끼치고 미국 정부로부터 주식 시장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아 공식 기소를 당한 와중에도 새로운 헤지펀드를 만들기 위해 자금을 모았다. 이는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나 그 밖에 파산한 예전의 펀드 설립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던 일들이다. - P217

 안전하고 효과적인 백신이 나온 지 40년이 넘었는데도 어째서 부모들은 홍역처럼 치명적일 수 있는 질병에 자녀들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걸까?
이런 행동은 앞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또다른 일상의 착각, 즉 원인착각 原因錯覺 illusion of cause의 결과다. 사람들이 자식에게 예방 접종을 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서로 별개이면서도 밀접히 연관되어있는 세 가지 편견, 즉 원인 착각을 일으키는 편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 편견들은 우리의 머리 구조가 패턴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우연의 일치에서 인과관계를 추론하며, 앞서 일어난 사건이 뒤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라고 믿도록 되어 있기에 발생한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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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 P143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쌓인 눈이 낮에는 빛을 튕겨냈고, 밤에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동장대 위로 해가 오르면 빛들은 눈 덮인 야산에 부딪쳤다. 빛이 고루 퍼져서 아침의 성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고였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면 어둠은 먼 골짜기에서 퍼졌다.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먼 산들이 먼저 어두워졌고 가까운 들과 민촌과 행궁 앞마당이 차례로 어두워졌다. 가까운 어둠은 기름과서 번들거렸고, 먼 어둠은 헐거워서 산 그림자를 품었다.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팽팽해서 별들이 뚜렷했다.
행궁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치솟은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이 밤하늘에 닿아 있었고, 모든 별들이 성벽 안으로 모여서 오목한 성은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였다. 별들은 영롱했으나 땅위에 아무런 빛도 보태지 않아서, 별이 뚜렷한 날 성은 모든 별들을 모아 담고 캄캄했다. 어둠 저편 가장자리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자욱했다. 이십만이라고도 했고, 삼십만이라고도했는데, 자욱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적병은 눈보라나 안개와같았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새벽과 저녁나절에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면서 갈라섰고, 모두들 그푸르고 차가운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 P179

서날쇠가 바랑에서 호미를 꺼내 배수구 앞에 쌓인 얼음과 잡석을 걷어 냈다. 배수구 구멍 밖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대감, 제가 없는 동안 나루 혼자 있으니……
- 알았다. 내 거두마- 그럼 대감… 서날쇠가 눈 위에 꿇어앉아 김상헌에게 큰절을 올렸다.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로 받았다. 예조판서의 머리와 대장장이의 머리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 새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엎드린 김상헌의 등에 눈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김상헌이 일어섰다. 서날쇠가 일어섰다. 서날쇠는 바랑을 벗어서 앞으로 밀면서 기어서 배수구를 빠져나갔다. - P232

••• 온조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
최명길의 이마가 차가운 돗자리에 닿았다. 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것이라고, 최명길은 차가운 땅에 이마를 대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치욕이 기다리는 넓은 세상을 향해 성문을 열고 나가야할 것이었다. 최명길은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김상헌이 종헌을 올렸다. 잔을 올리고 물러나 절할 때, 비틀거리는 김상헌을 최명길이 부축했다.
향 연기 속에 떠오른 온조의 혼령이 일천육백 년의 시간을건너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환영을 김상헌은 느꼈다. 침탈과 살육과 기근과 유랑의 들판을 가벼운 옷자락으로 스치며 혼령은 한 줄기 피리소리처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던 새벽에, 새로 내린 눈 위에 빛나던 새로운 햇빛과 새로운 시간들, 서날쇠가 떠나던 새벽에 서날쇠가 나아가는 쪽에서 아침의 빛으로 깨어나던 봉우리들을 김상헌은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환란의시간은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맑게 피어나고 있으므로,
끝없이 새로워지는 시간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었다. 모든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 새벽의 시간은 더럽혀질수 없고, 다가오는 그것들 앞에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이마를 땅에 대고 김상헌은 그 새로움을 경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P236

정명수가 대답했다.
- 조선 국왕이 누리를 거느리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행하는 것이옵니다.
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 무어라 명에게… 북경 쪽으로... 대청 황제 칸이 이역만리 조선 땅에 와 일월성신의 신년영접하는 봉우리 아래에서, 갇힌 성 안의 조선 국왕이 명에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용골대는 무참했다. 칸의 진노가 떨어질듯 등줄기가 시켰다. 용골대가 단 앞에 엎드렸다.
-폐하, 소장의 무능이옵니다.
- 뭐, 그렇기야 하겠느냐. 저들이 제 짓을 하는 것이겠지.
- 지금 포를 쏴서 헤쳐버릴까 하옵니다.
- 사정거리가 닿겠느냐?
- 홍이포紅夷砲는 닿고도 남습니다.
사냥개 한 마리가 칸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개가 칸의 신발을 핥았다. 칸이 개의 대가리를 쓰다듬었다. 개가 벌건 아가리를 벌려서 하품했다. 칸이 빙그레 웃었다.
- 쏘지 마라. 저들이 예법을 행하고 있지 않느냐.
- 폐하께서도 신들의 예를 받고 계시옵니다.
-쏘지 마라. 정초에 화약 냄새는 상서롭지 못하다.
- 신은 차마 볼 수가 없나이다.
- 냅둬라. 저들을 살려서 대면하려 한다. 발포를 금한다.
행궁 마당이 조용해질 때까지 칸은 성 안을 내려다보았다. - P263

김상현이 말했다.
- 군왕끼리의 예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마주보는것입니다. 이 일은 용골대에게 세찬을 보낸 것과는 다른 일이옵니다. 사전에 문서도 사신도 없이 군사를 몰아서 불쑥 왔다면 이미 예를 논할 수 없사옵니다.
최명길이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 칸은 비록 황제라 하나 몸을 가벼이 움직이는 자이옵니다. 배후에 명이 있으니, 칸은 삼전도에 오래 머물지는 못할것이옵니다. 칸이 머무는 동안 성을 나가는 길을 여소서. 칸이 돌아가면 그 다음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옵니다.
김상헌이 말했다.
- 칸이 왔다면 빈손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오. 그가 취하려는 바가 뭐라고 이판은 생각하시오?
최명길이 말했다.
- 그게 무엇인지를 예판은 모르시오? 아마 전하께서는 아실 것이오.
김상헌이 말했다.
-  전하,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
최명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 전하,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적이 성을 깨뜨리기 전에 성단을 내려주소서. - P270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었다. 송파강은 날마다 부풀었다.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않을 터인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이해할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송파강에 당도하기까지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대처를 지날 때에도 관아와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조선의 누런 개들이 낯선 행군대열을 향해 짖어 댈 뿐이었다. 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 놓고 군신이 언 강 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키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 P280

임금이 승지를 바라보았다. 임금의 눈동자에서 촛불 불빛이 타올랐다. 임금이 말했다.
- 사흘 뒤에 성을 나가겠다. 승지는 오늘 밤 안에 내 뜻을 삼사에 알리고 세자에게도 그리 전하라. 야심하다. 서둘러라.
마루에서 사관이 장지문 안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임금의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승지가 밤새도록 성 안을 돌면서 당상들의 처소를 찾아다녔다.
이른 아침부터 묘당은 내행전으로 몰려들었다.
성을 나가기 전에, 화친을 배척했던 사대부들 중에서 묶어서 적 앞으로 보낼 신하를 골라내라고 임금은 김류에게 명했다. 칸이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말끝을 흐렸다.
- 세자는 나와 함께 갈 채비를 갖추라.
최명길이 말했다.
-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최명길이 울었다. 울음을 멈추고 최명길이 또 말했다.
- 전하, 뒷날에 신들을 다 죽이시더라도 오늘의 일을 감당하여주소서. 전하의 크나큰 치욕으로 만백성을 품어주소서 감당하시어 새날을 여소서.
아하••••••. 김상현이 낮게 신음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행궁 밖으로 나갔다. 임금이 말했다.
-출성의 일은 재론하지 말라.
삼사의 당하들이 내행전 마당으로 몰려왔다. 당하들은 청대를 요구했다. 임금은 응하지 않았다. 임금은 침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승지가 장지문 앞을 서성거렸다. 마루 왼쪽 구석에서 사관은 조용히 먹을 갈았다. 사관의 귀는 임금의 침소쪽을 향해 있었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녁을 준비하는 나인들이 수라간에서 달그락거렸다. 날이저물어 새들이 행궁 뒤 숲으로 날아들었다. 내행전 마당에서 당하들이 울부짖었다. 당하들은 밤새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 P339

자결에 실패한 뒤 상헌은 곡기를 끊고 누워 있었다. 조카들이 곁을 지켰다. 큰조카가 김류의 감시 명령을 김상헌에게 전했다.
- 조정이 척화신을 찾고 있다 하옵니다.
아직 죽을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김상헌은 알았다. 김상현의 몸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죽기 전에 감당해야 할 일이 남한산성에는 남아 있었다. 묶어서 삼전도로 끌려가서 거기서 적의 칼에 죽는다면, 아마도 사공이 죽은 자리에서 가까울 것이었다.
김상헌이 윗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 알았다. 당분간 살아 있으마 마음을 가져와라.
김상헌은 요 위에 앉아서 미음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 P344

- 일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세자가 왕을 따랐다.
조선 기녀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추었다. 기녀들의 소맷자락과 치마폭이 바람에 나부꼈다. 풍악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다. 홍이포가 터지고, 청의 군장들이 여진말로 함성을질렀다.
조선 왕은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다. 조선 왕은 먼 지심 속 흙냄새를 빨아들였다. 볕에 익은 흙은 향기로웠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조선 왕은 이마로 땅을 찧었다.
청의 사령이 다시 소리쳤다.
-이배요!
조선 왕이 다시 절을 올렸다. 기녀들이 손을 잡고 펼치고 좁히며 원무를 추었다. 풍악이 자진모리로 바뀌었다. 춤추는기녀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속곳이 펄럭이고 머리채가 흔들렸다. 다시 홍이포가 터지고 함성이 일었다. 조선 왕이 삼배를 마쳤다.
칸이 조선 왕을 가까이 불렀다. 조선 왕은 양쪽으로 청의 군장들이 도열한 계단을 따라 구층단으로 올라갔다. 세자가따랐다. 조선왕이 칠층을 지날 때, 강화에서 끌려온 사녀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았다. - P355

서날쇠는 서문으로 들어와 행궁 뒷담길을 따라서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불길이 끊긴 화덕이 썰렁했고, 오소리가 굴을 뚫었다. 서날쇠는 진흙을 이겨서 화덕 안쪽의 구멍을 막았다.
백성들이 날마다 몇명씩 성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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