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가 아니라면 씨앗이 품고 있는 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가장 여린 마음에까지 독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독은 악이 아니다. 안간힘이고 사랑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씨앗이 품은독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리라. 무력한 인간을 번번이 일으키는 일. 주저앉아도 일으키고 주저앉아도또다시 일으키는 일.
우리는 모두 찢기기 쉬운 피막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피막에 함부로 막대기를 꽂아휘저을 수 없다. 대단한 무엇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을 둘러싼 피막이 손상될 때 인간은 죽는다. 아주 작은 찢김으로도 상한다. 그러니 겪고 뒤척이면서 두터워지는 수밖엔 없다. 이 여름, 이 겨울을지나면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겠지. 이 사랑, 이터널을 빠져나가도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 있을것이다. 그 시간을 믿으며 가야겠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 P78

썩게 하는 힘. 감정이든 사람이든 시간이든 썩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마음들은바로 그 순간에만 말이 된다. 오늘은 비가 왔어. 낮에도 어둑해서 불을 켜야 했지. 너는 대답이 없구나. 오늘은 날이 맑았어. 버지니아 울프가 연필 한 자루를 사러 런던 거리를 헤매는 이야기를 읽고 나도 용기내어 외출을 해보았어. 시장에 봄나물을 사러 다녀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제철이라 맛있을 거라며 한움큼을 더 담아주신 거 있지. 덜렁덜렁 검은 비닐봉지 흔들며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좋았어. 너는 대답이 없구나.
그런 혼잣말들로, 눈물로, 한밤의 달리기와 그네타기로, 시와 음악으로 우리는 모루에 대항한다. 연필 한 자루가 산책의 근사한 핑계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필은 이미 충분하니까. 애초에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신발 끈을 고쳐묶고 문을 열었다면 슬픔에서 위안으로 가는 협곡을뛰어넘는 중이라고 여겨주기를. 썩고 난 뒤에야 묻을 수 있다.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 것이더라도, 너는여전히 대답이 없구나. 그는 그다음 말을 향해 온 마음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 P89

나에겐 팥죽만 보면 목이 메고 울고 싶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순전히 팥죽의 색깔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못난 마음을 한 솥 가득 넣고끓이면 꼭 그런 색과 모양이 될 것 같아서다. 휘저을수록 검어지고 퍽퍽해지는 것까지 영 손쓸 도리 없는 풍경이다. - P92

이 글은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엄마를 위해 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눈물이 있을지라도 우리 삶의 구체성으로 말미암아이 페이지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될 거라고. 귀퉁이를 접어 두고두고 펼쳐보며 엄마의 아팠던 시간, 그림자의 그림자까지 끌어안겠다고.
사과의 갈변은 사과가 운 흔적일까? 유루증流淚症은 생각할수록 슬픈 병이다. 적갈색이 생각할수록 슬픈색인 것처럼.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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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그것은무슨 뜻일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생리적 욕구이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항상 무엇인가를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욕망이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라고 자크 라캉은 말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욕망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바라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을타자가 욕망하는 미끼로서 제공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타자의 성적 욕망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 P56

사실 부모와 자녀로만 이루어지는 작은 규모의 가족 형태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가족 형태다. 핵가족이 근대 이후 생긴 가족의 형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과거 농경 생활에서도 가족 단위는 핵가족을 이루면서 주변에 친척들이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에 재산이많거나 권위가 높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러 식솔들을 거느리고 확대가족을 꾸릴 수 있었던 반면 가난한 농민의 경우 대부분 핵가족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형태상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핵가족의 성격은근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부부의 성격이 낭만적 사랑을 중심으로 바뀌면서 가족 안에서 남녀의 역할이 다르게 규정되었다. 이전에는 부부 모두 생산적 활동에 종사했다면, 이제 남편은 가족을 위해 바깥에서 돈을버는 역할을 책임지고, 아내는 생산적 활동에서 분리되어가정을 돌보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역할분리가 모든 계층의 여성에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근대이후에도 노동자와 빈민 계급의 여성은 여전히 생산 활동에종사해야 했다. 그러나 그 여성들도 이상적 여성상에 따라서 남편과 자녀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역할이 요구되었다. - P84

이러한 변화는 주거공간의 구조 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는 한 방에 여러 사람이 함께 자는 것이 흔한일이었고,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묵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 부부만의 침실 공간이 중요하게 인지되고,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따로 지내는 것이 훈육을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이처럼 부부간의 관계를중시하는 방식의 가족 구성은 일터나 작업 공간의 공적 세계와 부부와 가족의 사적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을 출현시켰다. 이 변화 속에서 가족은 주변 세계, 즉 친족이나 공동체와는 점차 분리되게 되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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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 권력 체계는 근대 사회 권력의 특징으로, 현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미세한 몸짓, 특정한 말투, 신체 등 우리의 모습은 결국 스스로 규율하고 감시하는체제 속에 놓인다. 이것은 외부의 강제나 억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각 제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내면화하게 된다. 학교나 가정에서의 교육, 종교나 주변 환경에서의 교류 등을 비롯해 사람들 간의 크고 작은 만남을 통해 사회 구성원은 알게 모르게 사회화 과정을 거치고 그 속에서 규율을 학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사람들은 감시자의 시선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감시한다.
감시의 주체가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강제나 억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사회제도 속에 자연스럽게 스스로가 감시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가령 뚱뚱한 몸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사회가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시선을 느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스스로 몸이 이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위축되며 자신의 몸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떠한 비판이나지적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혐오의 태도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눈을 갖게 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미시적으로 일어나는 규율 권력이다. - P54

규율 권력 개념은 권력에 대한 통상적 관점을 무너뜨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권력을 공적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곧 청와대나 의회, 행정부, 대법원 같은 곳이야말로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고, 권력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반면 푸코는 근대 이후 권력이 작동하는 실제 영역은 감옥과 병원, 학교, 가정, 군대, 공장과 같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이 영역에서야말로 개인들이 특정한 신체로서 훈련되고 제조되기 때문이다. 규율 권력은 궁극적으로 체제에 복종하고 훈련된 신체, 즉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체는 한편으로 경제적으로 효용을 높일 수 있는 몸이 되며, 정치적으로는 체제에 반항하지 않는 순응하는 몸이 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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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촛불을 들고 다가서면

그냥, 사는 이야기를 적었어요.

이 책을 소개해달라는 청이 오면 어떻게 운을 떼야 하나 오래 고민했어요. 대단한 문학적 발견 같은건 없고요, 제가 올 일 년 동안 보고 겪고 느낀 것들에 관한 기록이에요. 너무 사사로워서 실망하실지도모르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저는 숨을 고르는 척 당신의 눈빛을 살필 거예요.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어깨는 한껏 움츠러들고 공연히 손톱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겠죠. 그런데도 당신이 아직 기대의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면 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이어갈 것입니다. - P5

자연스레 생각은 평소 내가 품어온 ‘작은‘ 소망들로 이어졌다. 2021년 1월 기준, 나의 작은 소망들은 이러하다. 산미가 강하고 꽃향기가 나는 진한 라테한 잔. 겨울에 접어들며 잎 끝이 누렇게 말라버린 반려식물의 안위. 가격 대비 품질이 좋고 포근한 겨울외투 한 벌.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지만 쉽지 않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생각해보니 나의 작은 소망들은 정말로 까다로웠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기는 소망의 크고 작음을 분별하는 것 자체가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크든 작든 하나의 소망에는 그 소망을 가로막는 심리적 물리적 장애물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길항‘은 바로 그러한 싸움을 뜻하는 단어다. 이쪽의 우리가 간절해질때 저쪽에서도 충돌할 채비를 한다. 쉽게 가질 수는없을 거야. 시간의 횡포도 견뎌야 하고 인간이라는 한계에도 맞서야 할걸. 그렇게 애석해할 거 없어. 그건 세상의 구성 원리거든. 밀물과 썰물, N극과 S극,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을 봐. 버티어 대항하는 힘은어디에나 반드시 있어.
정말 그렇다. 지금이 있기에 그때는 더욱 환하거나 어두워지고, 저곳이 있기에 이곳은 특별하거나 사소해진다. 한 방향으로만 뻗어가는 힘이나 목소리는 금세 상하거나 차게 식기 마련이다. 싸움도 둘이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혼자 하는 싸움이더라도 사실은 혼자 안의 둘이 싸우는 것처럼. - P16

 그중 봄에 꽃이 피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식물마다 꽃이 피기까지 필요한 온도가있는데 봄이 되면 식물들이 몸 안에 온도를 ‘저금‘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저금한 온도가 가득 차면 비로소 꽃이 피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그 즉시 노트를 열어 메모했다. 언젠가 내 안에서 이야기로 풀려나올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열량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생육 일수의 일평균기온을 적산한 것? 사전이 설명하는 적산온도는 실용적인 의미가 강하다. 반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적산온도는 경직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온도를 저금한다는 말. 모든 존재가 꽃이라면, 나의피어남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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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의 영성이 꽃처럼 피어나면 그 꽃들이 모여서 문명을이루고 하느님의 나라가 그 위에 세워지는 평화의 구도를 뮈텔은 아직도 이 황잡한 세상에 펼 수가 없었다. 적개심에 가득찬 자에게 평화를 말할 수는 없었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한 천주교인의 죄악에 뮈텔은 상심했다. 백 년이 넘는 박해의 세월을 견디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순교의 피 위에 세속의 거점을 겨우 확보한 조선 교회가 또다시 세속 권력과 충돌한다면 교회의 틀이 위태로워질 것을 뮈텔은 걱정했다. 뮈텔은 자신의 걱정을 신부와 신도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 해도 더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 P185

정대호는 김아려와 두 아이를 어디에 얹혀주어야 할 것인지를생각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하얼빈에 아이가 둘 딸린 젊은 여자를 의탁시킬 연고처는 없었다. 조선에 있는 안중근의 두 동생들과 편지로 의논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이 무슨 생각으로 처자식들을 하얼빈으로 불렀는지 정대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대호는 안중근의 처자식을 데리러 평양에 갔다가 며칠을 주색잡기로 소일하고 10월 23일에야 평양을 떠났는데, 안중근이 총을 쏘기 전에 처자식들을 데려와서 만나게 해주었다면 안중근이 총을 쏠 수 있었을까를 정대호는 생각했다. 안중근을 위해서나 그의 처자식을 위해서나, 총을쏜 후에 그의 처자식들이 하얼빈에 도착해서 안중근이 총을 쏘기 전에 처자식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잘된 일이지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대호는 마음이 편해졌다. - P199

김아려는 이토가 이미 죽었으므로 남편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던 이 년 전에, 남편은 돌아올수 없을 것으로 김아려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하자 결정은 사실처럼 굳어졌다. 미조부치는 첫번째 신문을 간단히 끝냈다. 미조부치는 이틀 후에 안중근의 다섯 살 난 장남 분도를총영사관으로 데려와서 진술을 청취하고 기록했다. 총영사관의여직원이 김성백의 집으로 가서 분도를 데려왔다. 김아려는 따라오지 않았다. 미조부치는 청취서에 진술인을 ‘장남 모某,  다섯살‘이라고 썼다.
미조부치는 분도에게 안중근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분도가 안중근의 사진을 보면서
-이것은 나의 아버지다.
라고 말했다고 미조부치는 청취서에 기록했다. 분도가
-어머니가 나를 아버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다.
라고 말했다고 미조부치는 기록했다. - P201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사전에 공판 방청권을 발행하고 방청권이 없는 자는 입장을 허가하지 않았다. 방청권을 얻으려면 인적사항을 모두 등록해야 했다. 입장자들은 주소, 성명을 기입한이름표를 달도록 했다. 방청인들은 품위 있는 옷을 입어야 하고, 신발은 구두와 조리草履만을 허용하고, 모자, 외투, 장갑을 착용할 수 없으며 어린이를 데리고 들어올 수 없도록 했다. 복장 불량자는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법원은 거듭 강조했다. 이번사건의 공판에서 문명한 국가의 법정 모습을 세계에 과시하라고 고등법원은 지시했다. 구내식당이 있으나 자리가 모자랄 것이므로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라고 법원은 고지했다.
방청객이 몰려서 법원은 1호 법정의 내부를 정리해서 좌석을촘촘히 들여넣었다. 방청객은 법정 복도까지 가득찼고, 방청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건물 밖에서 피의자들을 실은 마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러시아, 일본, 청, 영국의 외교관들과 정부 관리, 법률가들이법정 앞자리에 앉고, 그 뒤로 가슴에 훈장을 단 육군 해군 장교들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부인들이 앉았다. 요정 마쓰노야의여주인이 연극 구경을 취소하고 하녀들을 데리고 왔다. 여순의이름난 게이샤들이 들어올 때 방청객들의 시선이 몰렸다. 신문기자들은 맨 앞자리 기자석에 모여 있었는데, 가십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은 일반 방청객 속에 섞여 앉았다. - P225

안중근과 우덕순은 법정 안 중앙 통로를 지나갔다. 203고지의 승전 이후에 머리채를 203 고지 모양으로 틀어올려서 뒷목을 드러내는 헤어스타일이 일본 상류 여성들 사이에 유행했다. 203고지 스타일로 머리를 꾸민 남작 부인과 어깨에 숄을 걸친 장군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어서 수군거렸다. - P226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하겠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정••••••  - P238

국선변호인 미즈노는 피고인의 범행은 세계의 대세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며, 피고인이 일본 같은 문명국에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이러한 오해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토 공의 진정이 피고인에게 스며들지 않았고, 의붓어머니가 아무리 자애를 베풀어도 자식이 그 생모를 그리워하는 심정은 인지상정이라고 미즈노는 안중근을 변호했다.
넓은 도량과 깊은 동정심을 가지신 이토 공은 자신을 해친 범인에 대해 극형을 가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피고인을 극형에처한다면 이토 공은 지하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이고, 이것은 돌아가신 이토 공을 경모하는 길이 아니라고 변호인 미즈노는 말했다. 이 같은 취지는 우덕순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미즈노는 변론을 마쳤다.
논고와 변론은 이틀에 걸쳐서 길게 이어졌다. 안중근은 피고인석에 앉아서 잠자코 들었다. 검찰관은 안중근의 범죄가 무지와 오해의 소치이며 이것이 살의의 바탕이라고 말했고, 변호인은 이 무지와 오해는 동정할 만한 것이고 감형의 사유가 된다는취지로 말했다.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인의 변론이 가지런하게 잇닿아서 서로를 꾸며주고 있었다. - P239

황해도 산골 마을에서, 겨울이 오는 소리는 가랑잎이 바람에몰려가는 소리와 밤중에 어둠 속을 울리는 다듬이 소리였다. 차가운 공기가 팽팽해서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가랑잎은 메마른 소리로 버스럭거렸고, 다듬이 소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어져나갔다. 마을 끝에서 잦아들던 다듬이 소리는 어느 집에서인지 다시 살아나서 이웃집의 소리를 끌어가며 마을 안으로 들어왔고, 흘러나갔다. 개들도 소리를 이어나갔다. 덩치 큰 개들의소리가 깊게 울렸고 작은 개들은 높고 가파른 소리로 짖었다. - P242

처자식을 하얼빈으로 불러들였다면, 안중근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끝내 제 갈 길을 가겠구나, 라고 그때 빌렘은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면서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무언가 속에 있는 말을 참고 있는 듯하던 안중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안중근의 젊음은 거칠어 보였다. 안중근은 신심이 깊었으나 그의 심성과 언동은 신앙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았고 교회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서 섭리하시고, 교회의 울타리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빌렘은 안중근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말을 한다 해도 심어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빌렘도 말을 머뭇거렸다. 안중근의 신심이 더욱 무르익어서 스스로 알게 될 날이 있기를 빌렘은 그날 기도했었다.
이토가 하얼빈역에서 총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빌렘은 그 범인이 안중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안중근은 돌아올수 없고, 불러들일 수 없는 자리까지 간 것이었다.
빌렘은 마을 사람들의 침묵의 밑바닥에 깔린 두려움과 설렘을감지하고 있었다. 초겨울의 빈 들을 산책하는 저녁에 논둑길에서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은 빌렘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으나 말을 섞지 않았다. 범인이 청계동의 안중근이고, 빌렘에게 세례 받은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에 마을의 침묵은 깊어졌다. 마을 사람들의 눈과 귀는 신부의 입으로 쏠려 있었다. - P244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전보를 받고, 뮈텔은 백 년 전에 처형당한 천주교인 황사영의 죽음을 생각했다.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달아나다가 캄캄한 산골의 옹기굴 속으로 숨어들어가서 북경 주교 구베아에게 보내는 문서를 썼다. 황사영은비단 보자기 한 장에 일만 삼천여 자를 썼다. 황사영은 순교와박해의 실상을 소상히 기록하고 서양 나라의 선박 수백 척과 군사와 대포로 조선 조정을 협박해서 천주교인을 죽인 죄를 물어야 한다고 구베아 주교에게 호소했다. 훗날 이 글은 백서 帛書라고 불렸다.
황사영은 토굴에서 체포되었다. 황사영은 몸이 여섯 토막으로잘려서 거리에 버려졌고, 일족은 멸문되었다. 황사영은 스물일곱 살에 죽었다.
뮈텔은 조선 조정의 문서 창고를 뒤져서 황사영의 보자기글원문을 찾아내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본국으로 보냈다. 황사영의글을 번역하면서 뮈텔은 이 천둥벌거숭이의 몽매함에 한숨 쉬었고 순수한 신앙의 열정에 목이 메었다.
안중근은 자신에게 영세를 베푼 사제를 향해서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는 황잡한 말을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서 이토를죽였는데, 황사영은 서양 군함을 몰고 와서 국가를 징벌해달라고 북경의 주교에게 빌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양극단에서 마주서서, 각자의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되었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 황사영에서 안중근에 이르는 백 년 동안 두 젊은이의 국가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갔다. 황사영은 서양의 군함을 부르다가 몸이 토막나서죽었는데, 황사영이 죽임을 당한 후에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이 또죽임을 당했고, 천주교인을 길라잡이로 세운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서강까지 올라와서 국가를 겁박하고 강화도를 약탈했으니,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 P250

-어려운 일이지만 그 길밖에 없다. 길이 빤히 보일 때는 이생각 저 생각 하지 말아라. - P258

안중근과 빌렘의 접견을 허락함으로써 일본은 얻을 것이 크지만 안중근이 명분을 철회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부를 보낸다면 교회의 입장이 거북해진다는 것을 뮈텔은 빌렘에게 설명해줄 수없었다. 고위직에게는 아랫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는 고민이 늘있었다. 뮈텔은 빌렘에게 보내는 답장을 속달우편으로 부쳤다.

‘출장 불가‘를 알리는 뮈텔의 답장을 받은 다음날 빌렘은 여순으로 떠났다. 여순으로 가는 기선은 닷새에 한 번씩 진남포에서출항했다. 운항 날짜가 맞았다. 진남포 부두에서 빌렘은 명동대성당의 뮈텔에게 전보를 쳤다.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저는 여순으로 갑니다. 빌렘 - P264

-도마야, 네가 나를 부른 마음과 내가 너에게 온 마음이다.
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선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것을 알고있었다. 너의 마음을 말해라. 옥리들이 있으니, 작은 소리로 말해라.
안중근은 입을 열지 않았다. 빌렘이 재촉했다.
-말해라, 도마야. 내가 먼저 말하는 것보다 네가 먼저 말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느냐.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재판에서 이토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 신부님.
빌렘이 말했다.
-너의 말은 다만 말일 뿐이다. 인간의 행위는 몸과 마음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너의 말은 뉘우치는 자의 마음이 아니다. 너는 너의 마음의 진실을 말하라. 뉘우침의 힘으로 새로워져라.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지 않고 말했다.
-제가 이토를 죽인 일을 뉘우친다면, 제가 이토를 죽이는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만일 이 사업에 실패해서이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저는 이토를 죽이려는 저의 마음을 뉘우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부님.
-그것은 세속의 마음이다. 뉘우침이 아니다.
-그것이 저의 진심입니다.
-너의 마음의 깊은 곳에 또다른 마음이 있을 것이다. 말하기힘들어도 그것을 말해라.
안중근은 눈을 감고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안중근이 말했다.
-이토를 쏠 때, 이토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준했습니다. 쓰러뜨리고 나서, 신부님께 세례 받던 날의 빛과 평화가 떠올랐습니다.
-그 평화가 너에게 다가오고 있다. 계속 말해라. 도마야. 너는 1907년에 조선을 떠나서 대륙으로 갔다. 그후에 네가 한 일을 다 말해라. 옥리들이 입회해 있으니 작은 소리로 말해라. 다말해라. 모두 다 말해라.
안중근이 몸을 앞으로 굽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빌렘이몸을 앞으로 굽히고 들었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사형수의 머리와 사제의 머리가 가까워졌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숨소리처럼 들렸다. 옥리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끊기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빌렘은 침묵 속에서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전옥이 면회 시간 종료를 알렸다. 옥리가 안중근을 다시 포승으로 묶어서 감방으로 데려갔다.
- P272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해주고 나서 빌렘은 황해도 신천으로돌아와 있었다. 3월 26일 저녁에 빌렘은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7일 아침에 빌렘이 신자들을 소집했다. 안중근의 문중 사람들과 마을의 신자들이 청계동성당에 모였다.
빌렘은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를 베푼 일을마을 신자들에게 말했다. 빌렘은 ‘나의 시체를 하얼빈에 묻으라‘는 안중근의 유언을 신자들에게 전했다. 안중근의 시체는 하얼빈으로 가지 못하고 여순감옥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빌렘은전했다.
빌렘은 신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 P280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그의 몸은 대의와 가난을 합쳐서 적의 정면으로 향했던 것인데, 그의 대의는 후세의 필생筆生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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