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이를 예상한 사람은 마르크 에이브럼슨Mare Abramson이다. 그는 탈시설화 운동이 가속화되던 1970년대 초반에 캘리포니아주 샌마테오의 구치소를 방문했다가 그곳에 수많은 정신질환자가 감금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한 사회가 정신장애 행동을 인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1972년의 논문에 이렇게 썼다. "만약 정신장애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정신보건 체제라는 사회통제 안으로 진입하는 속도가 지체된다면, 지역사회의 압력은 그들을 형사처벌 체제라는 사회통제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이 논문이 발표되고 1년 후 캘리포니아주의회는 에이브럼슨이 제기한 우려를 논의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교도소에 수감된 정신질환자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대중의 관심은 사그라들었고, 많은 지역사회가 자체적으로 떠안을 뻔했던 문제를 구치소와 교도소를 통해 해결한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에이브럼슨의 우려가 현실이 된것이다. 치료권리옹호센터는 이렇게 주장한다. "현 상황에서 가장우려되는 측면은 이러한 수치가 더 이상 전문가나 대중의 반응을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세기 전이었다면 이러한 보고가 열띤 공적 논의와 개혁안을 끌어냈을 것이지만, 이제는 대중에게 하품만 나오게 할 뿐이다." - P65

해리엇은 총체적 기관이 학대자가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도록 조장한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경험을통해 같은 기관에서 또 다른 역학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사실, 즉 재소자와 동정적인 직원 간에 때때로 유대관계가 형성된다는 사실도 분명히 깨달았다. 어빙 고프먼도 《수용소》에서 이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총체적 기관에서 하는 일은 ‘인간 재료 human material‘와 매일같이 상호작용해야 하는 노동, 그의 용어로는 ‘사람노동people work‘에 속한다. 심지어 환자와 직원 간의 사회적 거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고안된 시설에서도 사람 노동은 도덕적·정서적으로 그 틀을 무색하게 할 수 있다. 고프먼은 말한다. "직원들이 인간 재료로부터 아무리 먼 거리를 유지하려고 해도 인간 재료는 동료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나아가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재소자가 사람으로 보일 위험은 늘 존재한다. 그래서 재소자에게 고통이라 느껴질 만한 것이 가해지는 경우, 그에게 공감하는 직원은 고통을 느낀다. " - P73

 한편 이 시기에 양형 기준이 강화되면서 플로리다주 교정시설의 수감자 수가 수용 가능 인원을 초과하는 와중에 교도소 인력은 예산 부족으로 감축되었다. 그 결과 여러 교도소에서 교도관의 근무시간이 길어졌으며, 이로 인해 스트레스 수치와 함께 학대 가능성도 높아졌다. - P83

 많은 재소자가 어릴 때부터 폭력에 시달렸다. 해리엇은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즉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의 가해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실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해리엇만이 아니었다. 2012년 사회학자 브루스 웨스턴 Heaterm의 연구팀은 매사추세츠주 교정시설 수감자 122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중 절반이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구타당했다고 답변했다. 성폭행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 또한 무질서하고 위험한 동네에 살면서 총기 사고를 목격한 사람도 많았다. "대다수의 폭력범은 처음 범죄를 저지르기 한참 전부터 피해자다." 웨스턴은 이렇게 요약한다. 과거에 피해자였던 수감자가 많다는 것은 그들이 그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의 대상임을 뜻하지만, 교도소에는 그런 정서가 거의 없다"고 웨스턴은 말한다. 인터뷰에 참가한 수감자의 4분의 3이 교도관이나 다른 재소자의 폭력을 목격했다고 답변했던 것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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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5월의 어느 저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인 에버렛 휴스EverettHughes는 어느 독일인 건축가의 집을 방문했다. 때는 1948년, 독일의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연합군이 나치에 대항해 공중전을 벌이며 집중 폭격한 대로를 따라 허물어져가는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동네 전체가 통째로 파괴되어 있었다. 폭격이 일어나기 몇 주 전 휴스는 일행과 함께 차를 몰고 분화구처럼 땅이 숭숭 팬 도심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참화를 비켜간 상점가나 주택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얼마 안 가 그들은 탐색을 포기했다. "어딜 가든 지붕이 날아가거나 아예 무너진 집이 최소 한 채는 있었고, 흔히 절반이나 그 이상이 무너진 상태였다." 휴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 P14

"그래도 부끄러움은 그대로입니다만." 건축가가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식민지를 잃고 국가적 명예를 실추한 참이었어요. 그때 나치 놈들이 나타나서 그 감정을 이용했죠. 게다가 유대인들, 그들이 문제였습니다. (...)이 최하층 인간들은 이가끓고, 더럽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카프탄(튀르키예, 아랍 등 지중해동부 지방 나라들에서 착용하던 긴 상의 옮긴이) 차림으로 게토를 뛰어다녔거든요. 첫 전쟁 후에 여기로 와서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죠. 좋은 자리란 자리는 전부 유대인들이 차지했어요. 의사, 변호사, 공무원 열 명 중 한 명이 유대인이었다니까요."
건축가는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을 놓쳤다. "제가 어디까지말했죠?" 휴스는 그에게 유대인이 "전부 차지했다"는 이야기까지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요, 그 얘기." 건축가가 말했다. "물론 유대인 문제를 그렇게 해결해선 안 되었죠. 하지만 문제는 문제였으니까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어요." - P16

그러나 휴스는 다른 요인에 주목했다. 그 일에 관련된 자들은 광신자도 아니었고 딱히 독일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히틀러 시대의 범죄자들은 그저 총통의 명령에 따라 잔악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
의 ‘대리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건축가 같은 선량한 사람들은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유대인 박해가 어떤 면에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말살Judeocide‘ 등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표현하는 용어가 여럿 나와 있었으나 휴스는 보다 평범한 표현을 선택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더티 워크dirty work‘라 표현했다. ‘불결하고 불쾌하지만 점잖은 사회 구성원들이 아주 모를 수는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독일에서 ‘열등한 족속‘을 제거하는 것은 나치에 찬동하지 않던 지식인마저 동조했다. 휴스는 ‘유대인문제‘에 관한 건축가의 생각에 대해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른 대화들을 나누며 결론을 내렸다. 휴스는 그 건축가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자신을 그들(유대인)과 명확히 분리하고 그들을 문제라고 호명했다. 그런 그가 제 손으로는 하지 않을 더러운 일을 다른사람에게 시키고는 또 그 일이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더티 워크의 본질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대리인에게 위임한 뒤 책임을 편리하게 회피한다. 더러운 일을 떠맡은 사람들은 무슨 불량배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무의식적 위임‘을 받은 이들이다. - P17

이 시급 노동자들은 글로벌 경제의그늘에서열심히 일하고도 그 이윤을 나눠 갖지 못한 지 오래다. 코로나 대유행 중에 이들의 노동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필수노동‘. 물론‘
필수노동자는 그 이름으로 불리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건강보험을 보장받지 못했고, 유급병가를 쓸 수 없었으며, 치명적일 수있는 바이러스에 노출될 상황에서도 개인용 보호 장비를 지급받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필수노동이라는 새 이름은 어떤 근본적인 진실을 드러내 강조했다. 이들 없이는 사회가 돌아갈 수 없다는진실을.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수노동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 노동이 있다. 나는 이를 ‘더티 워크‘라고 부른다. 그중 하나는 구치소나 교도소 내 정신병동에서 노동이 이루어진다. 미국의 주들에는가장 큰 정신과 치료 시설이 공공 병원이 아니라 구치소와 교도소인 곳이 많다. 그 안에서는 엄청난 잔혹 행위가 자행되고, 의료진은 교도관의 수감자 학대 행위를 묵인하는 등 일상적으로 의료윤리가 위반된다. 또 하나의 더티 워크는 미국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드론(무인기)으로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일이다. 전쟁이 뉴스헤드라인에서 점점 사라지는 동안 드론을 이용한 공습 살인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반면 그에 대한 감시는 소홀하다. - P22

그저 돈을 벌겠다고 기꺼이 비윤리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망신당해도 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는 최근 몇 년간 이주민 인권운동가들이 미국 국경에서 비인도적인 이주민 정책을 집행하는 국경 순찰대를 보며 느끼는 것이다. 일부 평화운동가들은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드론 조종사들이 손에 피를 묻혔다며 비난한다. 이 활동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앞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더티 워커들은 이들이 서비스하는 시스템의 1차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이들의 일은 이따금 심한 고통과 피해를 초래한다.
그러나 더티 워크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들의 행위를 지속시키는 권력의 움직임과 복잡한 공모 관계를 감추는 데 유용하다. 또한 누가 그 일을 맡을지 결정하는 구조적 차별이 은폐될 수 있다. 미국 사회에는 원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더티 워크 일자리가 많음에도 더티 워커 계층의 구성은 무작위적이지 않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더티 워크는선택지와 기회가 적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배정된다.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궁핍한 시골 지역 주민, 미등록 이주노동자, 여성, 유색인이다. 임금 수준이 낮고 물리적 위험이 많은 일자리가대개 그렇듯, 더티 워크는 기술·자격·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사람들이 지닌 사회적 유동성과 권력이 없는, 덜 특권적인 사람들에게 주로 돌아간다. - P25

일상의 대화에서 ‘더러운 일‘은 자랑스러워할 수 없는 일 또는 불쾌한 일을 뜻한다. 이 책에서 ‘더티 워크‘는 일상어보다 더 구체적인 뜻을 가진다. 첫째, 다른 인간에게 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환경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노동으로, 이따금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둘째, ‘선량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 구성원이 보기에 더럽고 비윤리적인 노동이다. 셋째, 그 일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낮게 평가되거나 낙인찍혔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스스로 위배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상처를 주는 노동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반한 노동으로, 그들은 사회질서 유지에 그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시적으로는 그 일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만약의 경우에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그 더티 워크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해야 하는데, 이는 다른 누군가가 매일같이 고역을 치르리라는 것을그들이 알고 위임한다는 뜻이다. - P30

거의 모든 형태의 더티 워크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는 그것들이 숨겨져 있어서 ‘선량한 사람들‘이 더 쉽게 눈감을 수 있고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거나 끔찍한 것을 목격하지 않으려는 욕망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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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는 썼다. "불쾌한 행위는 사회생활이라는 무대의 뒤편으로 옮겨졌다. (…) 우리가 문명화라 부르는 모든 과정의 특징이 바로 이 격리의 움직임, 혐오스러운 것을 ‘무대 뒤편‘에 숨기는 일임을 우리는 앞으로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 P31

그뿐만 아니라 더티 워크가 눈에 띄거나 눈앞에 들이밀어질 때도 쉽게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도저히 바꿀수 없는 거대한 외부의 힘을 원인으로 들먹일 수 있다. 그러나 틀렸다.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티 워크는 정해진 숙명이 아니다. 살아 있는 인간들이 내린 구체적인 결정, 원칙적으로 우리가 도로 물릴 수 있는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 정부가 채택한 정책과 우리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산물이다. 전쟁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부터 가장 취약한 시민을 어디에 감금할 것인가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가 내린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가 더티워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드러낸다.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승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 P35

신체적 증상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해리엇은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력감이었다. 이 감각은 어린 시절의 가장 암울한 순간들, 즉 아버지의 변덕스러운 행동을 보고도 힘이 없어나서지 못했던 장면들을 끄집어냈다. 해리엇의 언니는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언에 가끔 맞섰지만 해리엇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려고만 노력했다. 그게 안 되면, 당연히 안 되는 일이었지만,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다시 한번 두려움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환경에 갇혔다. 전환치료병동에서는 위법 행위를 목격하는 것부터가 위험했다. 누가 그 일을 폭로할지 모르는 탓에 교도관들이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학대가 발생하는 경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해지는 방법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라고 해리엇은 말했다. "목격자가 되지 마라. 맡은 일이나 하다 가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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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에게 라파스란 대부분 빛과 냄새로 남아 있다.
햇빛은 바다와 고래 등에서 튕겨 나와, 청새치와 파도와 모래위에서 반짝였다. 헐벗은 뾰족한 바위와 은은한 사막을 스치고지난 그 햇빛은 홍수처럼 이 땅을 가득 채웠다. 노랗고, 파랗고, 투명하고, 하얗고, 사방이 진동하고, 솔직하고도 무뚝뚝하게,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들이 꼭 플라스틱같았다. 빛, 억수처럼 내리쬐었지.
엔젤은 비 오는 날도 무척 좋아했다. 비가 오면 그림자가 모퉁이와 골목길을 따라 신비한 길을 내었다. 그리고 모두는 황혼을 사랑했다. 빛이 정신을 잃고 언덕을 지나 태평양으로 떨어지는 모습. 붉은 태양은 점점 더 빨개지고 주홍빛으로 변하다 마침내는 초록빛이 되어갔다. 하늘은 용암이 검은 바위를 먹어치워 불타오르는 거대한 잇자국을 내듯 녹아내렸다. 때로는 온 도시가 멈추어 서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가게 주인들은 안에서 나와거리에 섰다. 가족들은 집에 누워 있던 병자들을 침상이나 휠체어에 태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면 그들은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는 그 광기에 굽은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다. 갈매기떼와 펠리컨의 소용돌이가 하늘에 폭동을 일으키며 떠다니는 모습은 마치 하느님이 손수 뿌리는 꽃가루 눈송이 같았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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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한 시대를 끝내고 백 년의 삶을묻은 다음 저녁 전에 집에 올 수 있단 말인가? 빅 엔젤은 모두가 몸을 담은 이 더러운 거래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죽음이라. 참으로 우습고도 현실적인 농담이지, 노인들이라면 어린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하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수고와 욕망과 꿈과 고통과 일과 바람과 기다림과 슬픔이 순식간에 드러낸 실체란 바로 해 질 녘을 향해점점 빨라지는 카운트다운이었다.
일흔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본인이야 모든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상 아무것도 중요하지가 않다. 그걸 어떻게 해야겠다는 필요성도 간절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생일날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기껏해야 20년 정도 더살겠군.‘ 그리고 한 해 한 해가 점점 어둡게 저물기 시작하면서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15년 남았군‘ ‘10년 남았나‘ ‘이제 5년정도겠군. 그러다가 아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사는 게 뭐 대수라고. 내일이라도 버스에 치여 죽을 수 있어! 언제 골로 갈지는 아무도 몰라." - P151

 그는 동네의 백인 지구에서 자랐다. 학교애들은 리틀 엔젤의 가족이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집은 여기가 됐을 수도 있다. 110제곱미터의 네모난 상자 같은 집. 부겐빌레아가 피어 있고, 어린이용 세발자전거와 스쿠터들이 진입로에 버려져 있는 집. 농구 골대가 차고 문에 달려 있는 집. 유사 계급 계층이군, 하고 그의 머릿속 교수가강의를 했다. 하지만 음악은 달랐다.
그는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감시 카메라가 그를 비추는 느낌이 들었다. 창문마다 눈이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크라운 빅토리아 차를 엿보며 ‘돼지 새끼!‘라고 생각하겠지. 그는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그러면 좀 작아 보이거나안 보일 수도 있다는 듯 말이다.
‘저 백인은 누구야?‘
‘아, 저 사람 미국이랑 멕시코 혼혈이다.‘
‘마약 단속 경찰처럼 생긴 놈이군.‘
빅 엔젤과 페를라의 집 현관으로 들어설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아직도 클럽의 회원권을 얻지 못한 멤버 같았으니까. 하지만 노크를 하거나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그들은 모두 리틀 엔젤을 타박했다. 동생이 집에 들어오는 건데 뭐 하러 노크를 해? 그냥 들어오면 되지. 그래서 그는 남자답게 마음을 먹고 무거운 철망 안전 격자를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거실에 펴놓은 커다란 탁자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야구 모자 안에는 물건 인수증이 들어 있고, 담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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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화실과 기도 모임의 담장 너머에서는 ‘백색 테러‘가 타이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장제스와 그 휘하의 패잔병들, 중화민국 행정부, 이들의 가솔까지 도합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착한 종착지 타이완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일본이 떠난 자리를 국민당이 접수했던 2년 전, 타이완에서는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처음에 타이완의 인구 대부분은 다시 중국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환호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중국 본토의 사람들이 장제스 정권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승리의재난"이 타이완에서도 재연되었던 것이다. 만연한 부패, 무능한 통치(고도로 효율적이었던 일본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타이완에 거주해온 본성인(本省人)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외성인(外省人)들, 그리고 그밖에 국민당이 타이완을 접수하면서 발생한 무수히 많은 폐해들이 1947년 2월 28일 봉기를 야기했다. 그리고 잔혹한 무력 진압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P382

장제스가 여든넷, 메이링이 일흔셋이던 1971년, 부부의 유유자적한 삶은산산조각났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의관계 회복을 꾀하면서 이듬해 초에 베이징을 방문하겠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그가 파견한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에서 대통령의 방중을 대비하던 10월, 유엔은 ‘중국‘ 의석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배정하고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퇴출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서구 정치인들이 부지런히 마오쩌둥의 방 문을 두드리는 동안, 비탄에 빠진 메이링은 신앙에서 안식을 찾으며 「성서」의 구절을 연거푸 암송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괴로움을 당해도 꺾이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않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을 당하지 않으며 맞아서 쓰러져도 죽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제4장 8-9절/옮긴이)에마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분별과 정직의 시계추가 조만간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중요한 건 어떤 일이 벌어지느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야." - P394

장징궈는 1950년대 초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새 근거지 타이완을 사수하기 위한 ‘백색 테러‘를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승계 후에는 ‘민중친화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주민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던아버지와 달리 그는 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끊임없이 각지를 시찰하면서 도로변의 조그만 가판대에서 밥을 먹고, 주변 사람들과한담을 나누었다. 겉모습에서도 그는 위풍당당하고 강인한 아버지의 외양을 따르는 대신 소탈한 모습을 선택했다. 정치적으로는 장제스가 죽자마자 그의 정책 대부분을 사실상 완전히 개정했다. 장제스는 타이완의 경제발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장징궈는 그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의 통치 아래 타이완은 ‘타이완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장징궈의 재임 기간 동안 타이완의 경제 성장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고, 1977년부터 6년 안에 국민소득은 세 배가 되었다. 상당한수준의 자유화도 뒤따랐다. 사상 처음으로 타이완 국민들에게 여행을 목적으로 한 자유로운 출국이 허가되었다. 본토 출신의 국민당 노병들은 고향에 가서 가족과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봉쇄되었던 해안가와 산지 역시대중에게 개방되었다.
장징궈 정부는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징궈와 그의 가족은 그 어떤 재산도 축적하지 않았다. 또한 장징궈는 공공심이 투철한 다수의 인재들을 곁에 두었다. 공직을 맡아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었다. 부패의 부재, 근면성실하게 나라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는 정신은 타이완의 성공을 견인했다. 일당 독재 체제 아래 공산당 및 중화민국으로부터의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의 활동은 여전히 금지되었지만, 제재는 지나치지 않았고 장징궈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타이완을 민주화의 길로 이끌었다.
1985년, 장징궈는 세 아들 중 누구도 총통직을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선언함으로써 그의 가족에게 정권이 이양되리라는 항간의 예측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 P426

장징궈의 통치 아래 타이완은 이전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경제적 번영이 타이완 사회에 새로운 차원의 열망을 불어넣었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매년 30만 명에 달하는, 여행또는 유학을 가서 세계 다른 나라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의 공식 입장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출판물이 우후죽순처럼 간행되었다.
민주화를 향한 거스를 수 없는 시류 속에서, 1987년 장징궈는 계엄령을 해제했고, 새로운 정당의 설립과 언론의 자유를 허가했다. - P428

장례식 이튿날, 당시 타이완의 총통 천수이볜이 메이링의 맨해튼 저택을 방문해서 애도를 표하고 경의의 뜻을 담아서 그녀의 친척들에게 타이완국기를 수여했다. 2000년에 선출된 천수이볜은 타이완 역사상 첫 반국민당 계열 총통이었다. 메이링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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