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화실과 기도 모임의 담장 너머에서는 ‘백색 테러‘가 타이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장제스와 그 휘하의 패잔병들, 중화민국 행정부, 이들의 가솔까지 도합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착한 종착지 타이완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일본이 떠난 자리를 국민당이 접수했던 2년 전, 타이완에서는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처음에 타이완의 인구 대부분은 다시 중국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환호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중국 본토의 사람들이 장제스 정권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승리의재난"이 타이완에서도 재연되었던 것이다. 만연한 부패, 무능한 통치(고도로 효율적이었던 일본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타이완에 거주해온 본성인(本省人)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외성인(外省人)들, 그리고 그밖에 국민당이 타이완을 접수하면서 발생한 무수히 많은 폐해들이 1947년 2월 28일 봉기를 야기했다. 그리고 잔혹한 무력 진압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P382

장제스가 여든넷, 메이링이 일흔셋이던 1971년, 부부의 유유자적한 삶은산산조각났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의관계 회복을 꾀하면서 이듬해 초에 베이징을 방문하겠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그가 파견한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에서 대통령의 방중을 대비하던 10월, 유엔은 ‘중국‘ 의석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배정하고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퇴출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서구 정치인들이 부지런히 마오쩌둥의 방 문을 두드리는 동안, 비탄에 빠진 메이링은 신앙에서 안식을 찾으며 「성서」의 구절을 연거푸 암송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괴로움을 당해도 꺾이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않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을 당하지 않으며 맞아서 쓰러져도 죽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제4장 8-9절/옮긴이)에마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분별과 정직의 시계추가 조만간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중요한 건 어떤 일이 벌어지느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야." - P394

장징궈는 1950년대 초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새 근거지 타이완을 사수하기 위한 ‘백색 테러‘를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승계 후에는 ‘민중친화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주민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던아버지와 달리 그는 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끊임없이 각지를 시찰하면서 도로변의 조그만 가판대에서 밥을 먹고, 주변 사람들과한담을 나누었다. 겉모습에서도 그는 위풍당당하고 강인한 아버지의 외양을 따르는 대신 소탈한 모습을 선택했다. 정치적으로는 장제스가 죽자마자 그의 정책 대부분을 사실상 완전히 개정했다. 장제스는 타이완의 경제발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장징궈는 그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의 통치 아래 타이완은 ‘타이완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장징궈의 재임 기간 동안 타이완의 경제 성장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고, 1977년부터 6년 안에 국민소득은 세 배가 되었다. 상당한수준의 자유화도 뒤따랐다. 사상 처음으로 타이완 국민들에게 여행을 목적으로 한 자유로운 출국이 허가되었다. 본토 출신의 국민당 노병들은 고향에 가서 가족과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봉쇄되었던 해안가와 산지 역시대중에게 개방되었다.
장징궈 정부는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징궈와 그의 가족은 그 어떤 재산도 축적하지 않았다. 또한 장징궈는 공공심이 투철한 다수의 인재들을 곁에 두었다. 공직을 맡아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었다. 부패의 부재, 근면성실하게 나라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는 정신은 타이완의 성공을 견인했다. 일당 독재 체제 아래 공산당 및 중화민국으로부터의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의 활동은 여전히 금지되었지만, 제재는 지나치지 않았고 장징궈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타이완을 민주화의 길로 이끌었다.
1985년, 장징궈는 세 아들 중 누구도 총통직을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선언함으로써 그의 가족에게 정권이 이양되리라는 항간의 예측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 P426

장징궈의 통치 아래 타이완은 이전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경제적 번영이 타이완 사회에 새로운 차원의 열망을 불어넣었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매년 30만 명에 달하는, 여행또는 유학을 가서 세계 다른 나라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의 공식 입장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출판물이 우후죽순처럼 간행되었다.
민주화를 향한 거스를 수 없는 시류 속에서, 1987년 장징궈는 계엄령을 해제했고, 새로운 정당의 설립과 언론의 자유를 허가했다. - P428

장례식 이튿날, 당시 타이완의 총통 천수이볜이 메이링의 맨해튼 저택을 방문해서 애도를 표하고 경의의 뜻을 담아서 그녀의 친척들에게 타이완국기를 수여했다. 2000년에 선출된 천수이볜은 타이완 역사상 첫 반국민당 계열 총통이었다. 메이링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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