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5월의 어느 저녁,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인 에버렛 휴스EverettHughes는 어느 독일인 건축가의 집을 방문했다. 때는 1948년, 독일의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연합군이 나치에 대항해 공중전을 벌이며 집중 폭격한 대로를 따라 허물어져가는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동네 전체가 통째로 파괴되어 있었다. 폭격이 일어나기 몇 주 전 휴스는 일행과 함께 차를 몰고 분화구처럼 땅이 숭숭 팬 도심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참화를 비켜간 상점가나 주택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얼마 안 가 그들은 탐색을 포기했다. "어딜 가든 지붕이 날아가거나 아예 무너진 집이 최소 한 채는 있었고, 흔히 절반이나 그 이상이 무너진 상태였다." 휴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 P14
"그래도 부끄러움은 그대로입니다만." 건축가가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식민지를 잃고 국가적 명예를 실추한 참이었어요. 그때 나치 놈들이 나타나서 그 감정을 이용했죠. 게다가 유대인들, 그들이 문제였습니다. (...)이 최하층 인간들은 이가끓고, 더럽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카프탄(튀르키예, 아랍 등 지중해동부 지방 나라들에서 착용하던 긴 상의 옮긴이) 차림으로 게토를 뛰어다녔거든요. 첫 전쟁 후에 여기로 와서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죠. 좋은 자리란 자리는 전부 유대인들이 차지했어요. 의사, 변호사, 공무원 열 명 중 한 명이 유대인이었다니까요." 건축가는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을 놓쳤다. "제가 어디까지말했죠?" 휴스는 그에게 유대인이 "전부 차지했다"는 이야기까지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요, 그 얘기." 건축가가 말했다. "물론 유대인 문제를 그렇게 해결해선 안 되었죠. 하지만 문제는 문제였으니까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어요." - P16
그러나 휴스는 다른 요인에 주목했다. 그 일에 관련된 자들은 광신자도 아니었고 딱히 독일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히틀러 시대의 범죄자들은 그저 총통의 명령에 따라 잔악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 의 ‘대리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건축가 같은 선량한 사람들은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유대인 박해가 어떤 면에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말살Judeocide‘ 등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표현하는 용어가 여럿 나와 있었으나 휴스는 보다 평범한 표현을 선택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더티 워크dirty work‘라 표현했다. ‘불결하고 불쾌하지만 점잖은 사회 구성원들이 아주 모를 수는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독일에서 ‘열등한 족속‘을 제거하는 것은 나치에 찬동하지 않던 지식인마저 동조했다. 휴스는 ‘유대인문제‘에 관한 건축가의 생각에 대해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른 대화들을 나누며 결론을 내렸다. 휴스는 그 건축가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자신을 그들(유대인)과 명확히 분리하고 그들을 문제라고 호명했다. 그런 그가 제 손으로는 하지 않을 더러운 일을 다른사람에게 시키고는 또 그 일이 부끄럽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더티 워크의 본질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대리인에게 위임한 뒤 책임을 편리하게 회피한다. 더러운 일을 떠맡은 사람들은 무슨 불량배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무의식적 위임‘을 받은 이들이다. - P17
이 시급 노동자들은 글로벌 경제의그늘에서열심히 일하고도 그 이윤을 나눠 갖지 못한 지 오래다. 코로나 대유행 중에 이들의 노동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필수노동‘. 물론‘ 필수노동자는 그 이름으로 불리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건강보험을 보장받지 못했고, 유급병가를 쓸 수 없었으며, 치명적일 수있는 바이러스에 노출될 상황에서도 개인용 보호 장비를 지급받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필수노동이라는 새 이름은 어떤 근본적인 진실을 드러내 강조했다. 이들 없이는 사회가 돌아갈 수 없다는진실을.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수노동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 노동이 있다. 나는 이를 ‘더티 워크‘라고 부른다. 그중 하나는 구치소나 교도소 내 정신병동에서 노동이 이루어진다. 미국의 주들에는가장 큰 정신과 치료 시설이 공공 병원이 아니라 구치소와 교도소인 곳이 많다. 그 안에서는 엄청난 잔혹 행위가 자행되고, 의료진은 교도관의 수감자 학대 행위를 묵인하는 등 일상적으로 의료윤리가 위반된다. 또 하나의 더티 워크는 미국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드론(무인기)으로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일이다. 전쟁이 뉴스헤드라인에서 점점 사라지는 동안 드론을 이용한 공습 살인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반면 그에 대한 감시는 소홀하다. - P22
그저 돈을 벌겠다고 기꺼이 비윤리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망신당해도 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는 최근 몇 년간 이주민 인권운동가들이 미국 국경에서 비인도적인 이주민 정책을 집행하는 국경 순찰대를 보며 느끼는 것이다. 일부 평화운동가들은 표적살인을 수행하는 드론 조종사들이 손에 피를 묻혔다며 비난한다. 이 활동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앞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더티 워커들은 이들이 서비스하는 시스템의 1차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이들의 일은 이따금 심한 고통과 피해를 초래한다. 그러나 더티 워크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들의 행위를 지속시키는 권력의 움직임과 복잡한 공모 관계를 감추는 데 유용하다. 또한 누가 그 일을 맡을지 결정하는 구조적 차별이 은폐될 수 있다. 미국 사회에는 원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더티 워크 일자리가 많음에도 더티 워커 계층의 구성은 무작위적이지 않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더티 워크는선택지와 기회가 적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배정된다.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궁핍한 시골 지역 주민, 미등록 이주노동자, 여성, 유색인이다. 임금 수준이 낮고 물리적 위험이 많은 일자리가대개 그렇듯, 더티 워크는 기술·자격·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사람들이 지닌 사회적 유동성과 권력이 없는, 덜 특권적인 사람들에게 주로 돌아간다. - P25
일상의 대화에서 ‘더러운 일‘은 자랑스러워할 수 없는 일 또는 불쾌한 일을 뜻한다. 이 책에서 ‘더티 워크‘는 일상어보다 더 구체적인 뜻을 가진다. 첫째, 다른 인간에게 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환경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노동으로, 이따금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둘째, ‘선량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 구성원이 보기에 더럽고 비윤리적인 노동이다. 셋째, 그 일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낮게 평가되거나 낙인찍혔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스스로 위배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상처를 주는 노동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반한 노동으로, 그들은 사회질서 유지에 그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시적으로는 그 일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만약의 경우에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그 더티 워크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해야 하는데, 이는 다른 누군가가 매일같이 고역을 치르리라는 것을그들이 알고 위임한다는 뜻이다. - P30
거의 모든 형태의 더티 워크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는 그것들이 숨겨져 있어서 ‘선량한 사람들‘이 더 쉽게 눈감을 수 있고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거나 끔찍한 것을 목격하지 않으려는 욕망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 엘리아스는 썼다. "불쾌한 행위는 사회생활이라는 무대의 뒤편으로 옮겨졌다. (…) 우리가 문명화라 부르는 모든 과정의 특징이 바로 이 격리의 움직임, 혐오스러운 것을 ‘무대 뒤편‘에 숨기는 일임을 우리는 앞으로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 P31
그뿐만 아니라 더티 워크가 눈에 띄거나 눈앞에 들이밀어질 때도 쉽게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도저히 바꿀수 없는 거대한 외부의 힘을 원인으로 들먹일 수 있다. 그러나 틀렸다.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티 워크는 정해진 숙명이 아니다. 살아 있는 인간들이 내린 구체적인 결정, 원칙적으로 우리가 도로 물릴 수 있는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 정부가 채택한 정책과 우리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산물이다. 전쟁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부터 가장 취약한 시민을 어디에 감금할 것인가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가 내린 결정의 산물이다. 우리가 더티워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드러낸다.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승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 P35
신체적 증상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해리엇은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력감이었다. 이 감각은 어린 시절의 가장 암울한 순간들, 즉 아버지의 변덕스러운 행동을 보고도 힘이 없어나서지 못했던 장면들을 끄집어냈다. 해리엇의 언니는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언에 가끔 맞섰지만 해리엇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려고만 노력했다. 그게 안 되면, 당연히 안 되는 일이었지만,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다시 한번 두려움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환경에 갇혔다. 전환치료병동에서는 위법 행위를 목격하는 것부터가 위험했다. 누가 그 일을 폭로할지 모르는 탓에 교도관들이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학대가 발생하는 경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해지는 방법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라고 해리엇은 말했다. "목격자가 되지 마라. 맡은 일이나 하다 가라."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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