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거대한 그림이고 조화옹(造化翁)은 위대한 화가다. 주황색으로 요염하게 붉게 물든 오구나무의 꽃은 누가 붉은 물감을 칠하고 붉은 빛깔의 돌과 산호가루를 뿌려 그려 놓았는가? 복숭아 꽃잎에는 연지처럼 붉은 즙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같다. 가을 국화꽃의 빛깔은 등황색을 곱게 바른 것만 같다. 눈이 개고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기운에는 푸른 빛깔이 두 겹세 겹 엇갈려 먼 곳과 가까운 곳에 골고루 나뉘었다. 세찬 소낙비가 강 위를 내달려서 수묵(水墨)을 한가득 뿌려 놓으면 더 채색할 틈도 없게 된다. 잠자리의 눈동자는 초록빛이 은은하고,
나비의 날개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천상에채색을 담당한 성관(星官)이 있어서 풀과 꽃과 돌과 금의 정수(精髓)를 모았다가 조화옹에게 제공해 온갖 사물에 빛깔을 입히게 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가을 강 석양의 거대한 그림이 가장 좋다. 이것이야말로 조화옹이 뜻을 얻은 그림이라고 할만하다.

- 여기 세계를 화판 삼아 그림을 그리는 조물주 역시 무슨 위대한 작업과 거룩한 행위를 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아니다. 그냥 놀이삼아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일 뿐이다. 전지전능한 자의 거룩한 역사(役事)로 창조된 세계보다는 차라리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듯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듯 창조된 세계가 훨씬 더낫지 않을까? 최소한 그런 세계에서는 ‘해야만 한다‘는 식의 획일화되고 규범적인 윤리나 명령의 강제보다는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하고싶다‘는 마음처럼 상대적이고 개성적인 욕망이 자유롭게 존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 P27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 말똥구리에게 여의주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용 역시 자신의 여의주가 귀한 만큼 말똥구리에게는 말똥이 귀하다는 것을안다. 비록 상상의 존재지만 우주 만물 중 가장 귀한 동물로 여겨지는 용의 여의주와 가장 미천한 동물로 여겨지는 말똥구리의 말똥의 가치는 동등하다. 이제 우열(愚劣)과 존귀(尊貴)와 시비(是非)의 이분법은 전복되고 해체된다.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이덕무를 비롯한 북학파(北學派) 지식인들은 인성(人性)과물성(物性)이 균등할 뿐만 아니라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표현한 이 구절을 무척 좋아하고 아꼈다. 연암 박지원(燕巖朴趾源)은 <낭환집서문(낭丸集序)에 이 구절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여기에는 영재 유득공(柳得恭)의 숙부였던 기하 유금(幾何柳琴)이 이 말을 듣고 문집의 이름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는기록이 등장한다. 실제로 유금은 자신의 문집을 ‘말똥구리의 말똥구슬‘이라는 뜻에서 낭환집(낭丸集』이라고 이름 붙였다. <낭환집 서문>은 바로 박지원이 이 문집에 써준 글이다. - P35

무더운 여름날 저녁 콩꽃핀 울타리가를 걷다가 기와빛을 띤 거미가 실을 뽑아 거미줄을 엮는 모습을 보았다. 그 신묘한 모습이 부처와 서로 통함을 깨달았다. 실을 뽑고 실을 당기며 다리를 움직이는 방법이 너무나 기막혔다. 때로는 멈춘 듯하다가 때로는 순식간에 거미줄을 엮기도 했다. 마치 사람들이 보리를 심을 때의 발놀림이나 거문고를 퉁길 때의 손놀림과 같았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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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 붉은 물결

삼월 푸른 계곡에 비가 개고 햇빛은 따사롭게 비춰 복숭아꽃 붉은 물결이 언덕에 넘쳐 출렁인다. 오색빛 작은 붕어가 지느러미를 재빨리 놀리지 못한 채 마름 사이를 헤엄치다가 더러 거꾸로 섰다가 더러 옆으로 눕기도 한다. 물 밖으로 주둥아리를 내밀며 아가미를 벌름벌름하니 참으로 진기한 풍경이다. 따사로운 모래는 맑고 깨끗해 온갖 물새 떼가 서로서로 짝을 지어서 금석에 앉고, 꽃나무에서 지저귀고, 날개를 문지르고, 모래를 끼얹고, 자신의 그림자를 물에 비추어 본다. 스스로자연의 모습으로 온화함을 즐기니 태평세월이 따로 없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웃음 속에 감춘 칼과 마음속에 품은 화살과 가슴속에 가득 찬 가시가 한순간에 사라짐을 느낀다. 항상 나의 뜻을 삼월의 복숭아꽃 물결처럼 하면 물고기의 활력과 새들의 자연스러움이 모나지 않은 온화한 마음을 갖도록 도와줄 것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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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넬의 눈에, 그 포즈는 이상하게도 친숙해 보였다. 석사 과정 학생인 그녀는 뿔매미의 친척뻘인 멸구류의 ‘진동을 통한 의사소통‘을 연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의 신호를 탐지하려고 할 때 몸을 앞으로 숙인채 발로 땅바닥을 내리누르곤 했다. 코끼리도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들 중 하나가 이런 자세를 취할 때마다 다른 코끼리들이 멀리서곧 나타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었다. 코끼리들은 발로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2002년 오코넬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기 위해 물웅덩이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전에 사자들의 위협을 받는 지역에서 코끼리들의 경고음을 녹음한 적이 있었다. 원래 녹음한 소리는 가청음이었지만, 오코넬은 고주파 부분을 제거하고 땅에 묻힌 교반기를 통해 재생함으로써 지반진동 신호로 변환했다. 그러자 코끼리 떼 전체가 얼어붙는 게 아닌가! 그들은 침묵하고 경계하며 한데 뭉쳐 방어 대형을 갖추었다. 야간투시경을 통해 그들을 지켜본 오코넬은 흥분했다. "이 순간을 계획하고, 희망하고, 꿈꿔왔던 지난 세월들! 우리는 마침내 보여주고 있었다. 아주 ㅠ오래 전 나의 원래 예감이 사실이었음을. 그녀는 자신의 책 《코끼리의 은밀한 감각 The Elephants Secret Sense》에 이렇게 썼다. "코끼리들은 지반진동신호를 탐지해 응답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녀는 실험을 반복했지만 이번에는 케냐에서 녹음된 케냐 코끼리들의 경고음을 추가했다. 그랬더니 에토샤코끼리들은 낯익은 경고음(에토샤 코끼리의 경고음)의 진동에 반응했지만, 낯선 경고음(케냐 코끼리의 경고음)의 진동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동에만신경 쓰는 게 아니라, 진동의 원천(아는 코끼리 모르는 코끼리)까지도 구별하는 것으로 보인다.  - P309

지구를 배회했던 코끼리의 친척뻘 되는 동물들(예: 매머드, 마스토돈)은 어땠을까? 오늘날의 회색곰보다 훨씬 컸던 짧은얼굴곰short faced bear(땅나무늘보 giant ground sloth), 자동차만 한 크기의 아르마딜로, 오늘날의 코뿔소보다 열 배나 무거웠던 뿔없는코뿔소hornless thinos는 어땠을까? 이러한 거대동물들은 모두 멸종했는데, 그 책임은 인간과 우리의 선사시대 친척들에게 있다. 우리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동안 가장 큰 동물들은 눈만 껌벅였고, 이런 상황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남아 있는 코끼리 종-아프리카 두 종, 아시아 한 종-은 모두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코끼리 다음으로 큰 육상동물들-흰코뿔소와 검은코뿔소, 기린, 하마-도 곤경에 처해 있다. 거대한 무리도 줄어들었다. 한때 3000만에서6000만 마리에 이르렀던 들소들이 수천 마리씩 무리 지어 북아메리카를 배회했지만, 유럽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원주민들을 몰살하기 위해 그들을 학살했다. 이제 들소는 50만 마리만 남았고, 대부분 사유지에 국한되어 있다. 그 모든 발굽과 발이 사라진 지금, 땅이 얼마나 조용해졌는지 상상해보라. 한때 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했던 여섯 개 대륙에는 이제 드문드문 웅웅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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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진동 세계와의 직접적인 연결이 감소하는 동안 다른 진동풍경이 생겨났다. 현대의 휴대폰은 우리의 피부와 손끝에 대고 윙윙거리며 속보, 다가오는 사건, 사회적 관심사를 알려준다. 우리의 전자장비는 진동을 이용해 우리를 몸 너머의 세계와 연결하고, 우리의 환경세계를 해부학적 범위 너머로 확장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원조는 다른 동물 그룹이었다. - P310

거미는 거의 4억 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해왔고, 그동안 줄곧 거미줄을 생산해왔을 것이다. 거미줄은 공학의 경이로움으로, 가볍고 탄력성이 있지만 강철보다 강하고 케블라보다 질길 수 있다." 거미는 그것을이용해 알을 포장하고, 피난처를 만들고, 공중에 매달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한다). 거미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많은 종들이 만드는 동글납작한 형태의 거미줄 원형 거미줄이다.
원형 거미줄은 날아다니는 곤충을 낚아챈 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함정이다." 그것은 또한 감시 시스템으로, 거미의 감각 범위를 ‘몸이 닿을 수 있는 범위‘ 너머로 크게 확장시킨다. 게다가 거미의 몸은 수천 개의 틈새 감각기-모래전갈이 먹잇감의 진동 활동을 탐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진동 감지 균열로 뒤덮여 있다. 거미의 틈새 감각기는 관절 주위에도 집중되어 있으며, 그곳에서 무리를 지어 수금형 기관lyrifomorgan 을 형성한다. 이 절묘하게 민감한 기관을 사용해 모든 거미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표면-장소는 다양하다-을 통과하는 진동을 감지할 수 있다. 앞 장에서 소개한 떠돌이호랑거미에게 그 표면은 땅이고, 무당거미와 같은 거미줄 거미orb-weaver에게 그것은 거미줄이다. 무당거미는 진동을 감지하는 표면을 스스로 구성한다. 따라서 원형거미줄의 재료는 다른 기질이를테면 토양, 모래, 식물의 줄기-이 아니라 거미의 일부다. 그리고 거미줄은 거미의 감각계의 일부이며, 기능과 역할 면에서 그들의 몸에 있는 틈새 감각기에 비해 전혀 손색이없다. - P313

거미줄 거미는 자신만의 진동풍경을 구축할 뿐만 아니라, 마치 악기를 튜닝하는 것처럼 조정할 수도 있다. 조정의 범위는 엄청나다. 개별섬유에 가스총을 이용해 발사체를 발사한 후 고속 카메라와 레이저로 거미줄 가닥을 분석함으로써, 모티머는 "일부 거미줄이 알려진 어떤 물질보다도 넓은 범위의 속도로 진동을 전달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론적으로 거미는 섬유의 경직도, 가닥의 장력, 거미줄 전체의 모양을 바꿈으로써 진동의 속도와 강도를 변경할 수 있다. 새로운 거미줄을 만들 때, 거미는 그때그때 다른 속도로 원사原絲를 뽑아내거나 다른 굵기의 섬유를 만들거나 새로운 가닥에 장력을 더함으로써 이 과제를 수행한다. 특정한 가닥을 추가, 제거 또는 견인함으로써 이미 완성된 거미줄을 조정할 수 있다. 습기 속에서 수축하는 원사의 자연적인 경향에 의존한 다음, 이렇게 조여진 가닥을 적당히 늘일 수도 있다. 거미줄거미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시점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감각을 조정하고 필요에 따라 자신만의 환경세계를 정의할 수 있는옵션을 보유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 P316

인간은 수평 방향에서 올빼미와 거의 비슷하지만, 수직 방향에서는 정확도가 상당히 떨어져 3~6도에 머문다. 그것은 우리의 양쪽 귀가 수평을 이루고 있어서, 소리가 위에서 나든 아래에서 나든 거의 동시에 두귀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빼미의 귀는 독특하게 비대칭적이어서, 왼쪽이 오른쪽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올빼미의 얼굴을 시계로생각하면, 왼쪽 귀는 2시에 열리고 오른쪽 귀는 8시에 열린다. 그러므로 소리가 위나 왼쪽에서 나면 ‘오른쪽 아래‘ 귀보다 ‘왼쪽 위 귀에 조금 더 빠르고 크게 들린다. 소리가 아래나 오른쪽에서 나면 그 반대다. 이러한 타이밍과 크기의 차이를 이용해, 올빼미의 뇌는 음원의 위치를 수직 방향과 수평 방향에서 모두 파악한다. 하이킹을 하다가 근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소리의 방향을 대충 짐작한 후 고개를 돌려 그 원천을 정확히 확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 위 나무에 앉아 있는 올빼미는 귀만으로도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 P324

전통적인 오감 중에서, 청각은 촉각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직관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후자는 (단단하고 만질 수 있는) 표면과 관련 있는 데 반해, 전자는 (공기 중에 떠다니고 천상의 것처럼 보이는) 소리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각과 촉각은 모두 기계적 감각으로, 동일한 수용체(구부러지거나 눌리거나 비틀릴 때 전기 신호를 보내는 수용체)를 이용해 외부 세계의 움직임을 탐지한다. 촉각의 경우, 이러한 움직임은 손가락 끝(또는 수염, 부리 끝, 아이머 기관)으로 표면을 누르거나 쓰다듬을 때 발생한다. 청각의 경우, 그런 움직임은 음파가 귀에 도달해 그 안의 작은 유모세포를 구부러뜨릴 때 발생한다.
그러나 촉각과 달리 청각은 장거리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 시각과 달리 청각은 어둠 속에서, 그리고 단단하고 불투명한 장벽 앞에서도 기능을 발휘한다. 앞 장에서 살펴본 진동 감각과 달리 청각은 표면이 필요하지 않으며, 공기나 물처럼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매체를 경유해 작동할 수있다. 그리고 분자의 느린 확산에 의해 제한되는 후각과 달리 청각은 상당히 빨리 음속으로-작동한다. 어떤 감각들은 이러한 특징 중 몇 가지를 가지고 있지만, 청각은 그것들을 모두 겸비하기 때문에 일부 동물들은 청각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도 한다. 윌리엄 스테빈스William Stebbins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요약했다. "소리가 다른 형태의 자극과 크게 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현재 진행되는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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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죽인 사람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요? 당신은 그 말을 하려는 거죠? 당신은 그들 사이엔 미워할 까닭도 없었고 전쟁도 없었다고 말하려는 거죠?"
나는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맞지만 그의 표현 방식은 옳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들 사이엔 전쟁도 없었고 서로 미워할까닭도 없었어요. 하지만 사형집행인 역시 그가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죽이는 겁니다. 명령을 받았기때문인가요? 그가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내가 지금 명령과 복종에 대해서 그리고 수용소의 요원들은 명령을 하달받았고 또 그들은 그 명령에 따를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는 경멸하는 투로 웃었다. "아니요. 난 지금 명령과 복종에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형집행인은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는거요. 그는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신한테방해가 되거나 그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공격하려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것도 아니지요. 그에게는 그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에겐 그들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 P163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법률적으로 타당성을 인정받든 인정받지 못하든 간에, 나의 학생세대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경험적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책임은 제3제국 당시에 일어났던 일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묘석에 철십자 훈장을 그려 넣은 사실, 그토록 많은 수의 옛 나치주의자들이 법원과 행정부 그리고 대학에서 출세를 한 사실, 독일연방공화국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사실, 전통적으로 망명과 저항이 순응하는 삶보다 덜 전승되었다는 사실이 모든 사실은 비록 우리가 손가락으로 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해도 우리 가슴속을 수치심으로 가득 채웠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해서 우리가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손가락질을 함으로써 적어도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 손가락질은 수치심의 수동적인 고통을 에너지와 행동과 공격심리로 전환시켜주었다. 그리고 죄를 저지른 우리 부모들과의 대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 P181

나는 그녀에게 한나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상황에서 상대방의 옛사랑 이야기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느냐고 생각했다. 게르트루트는 영리하고 유능하고 충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 두 사람의 삶이 많은 하인들과 하녀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서로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하면서 꾸려나가야 하는 농가에서의 삶이었다면, 우리의 삶은 성취와 성공을 일구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시외의 한 신축 건물의 방 세개짜리 아파트와 우리의 딸 율리아와 사법관 시보인 게르트루트와 나의 일이 전부였다. 나는 게르트루트와 함께 지내는 것과 예전에 한나와 함께 지내던 것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게르트루트와 포옹할 때마다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손길이나 감촉. 그녀의 냄새와 맛, 그것은 내가 찾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것도 시간이 지나면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러한 것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나는 한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아닌데하는 느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 P184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말이 많으면서도 말이 없는 접촉이 시작된 지 4년째 되던 해에 한나에게서 한마디 인사가 날아왔다.
"꼬마야 지난번 이야기는 정말 멋졌어. 고마워. 한나가."
줄이 쳐진 편지지는 노트에서 찢어내 가장자리를 반듯하게자른 것이었다. 인사말은 그 종이의 맨 위쪽에 세 줄을 채우면서 쓰여 있었다. 인사말은 오래 써서 글씨가 번지는 파란색 볼펜으로 적혀 있었다. 한나는 펜에 힘을 잔뜩 주어 쓴 것 같았다. 종이 뒷면에까지 글씨 자국이 났기 때문이다. 내 주소 역시힘을 잔뜩 주어 썼다. 한가운데를 접은 편지지의 아래쪽 면과 위쪽 면에 박힌 글씨 자국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얼핏 보면 그것은 어린아이가 쓴 글씨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글씨체에서 서툴고 어색하게 보이는 부분이 여기서는 듬뿍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선들을 모아 글자를만들고, 글자들을 모아 낱말을 만들기 위해 한나가 극복해야했을 어려움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손은 이리저리 마구 헤매기 때문에 글씨가 나아가는 길의 안쪽에다 손을 붙잡아두어야 한다. 반면 한나의 손은 그 어디로도 가려고 하지 않기때문에 앞으로 가도록 몰아대야 했다. 글자들을 형성하고 있는선들은 획을 올려 그을 때나 내려 그을 때나, 곡선을 그리거나 고리 모양을 그리기 전에나 모두 그때마다 늘 새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각각의 글자는 새로이 창출해냈다고 할 정도로 그 기울기나 경사의 방향이 새로웠으며 높이와 너비가 잘못된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녀의 인사말을 읽고서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다.
"그녀가 글씨를 쓸 줄 안다. 그녀가 글씨를 쓸 줄 안다고!"
나는 그동안 문맹자와 관련된 글들을 구할 수 있는 한 다 구해서 읽었다. 나는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겪는, 즉 길이나 주소를 찾을 때 또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고를 때 겪는 당혹스러움에 대해서, 미리 주어진 생활의 틀과 낯익은 행로를 더듬더듬 따라가면서 여기서 벗어나면 어쩌나 하며 느끼는 불안감에 대해서, 글씨를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소모하는 정력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실제 삶에 있어서의 에너지 상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는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걸음을 깨우침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 P198

나는 단 한 번도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일은 계속했다. 일 년 동안 미국에 가있을 때에도 그곳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보냈다. 휴가 여행을 떠나거나 할 일이 특별히 많을 때에는 다음에 보낼 카세트테이프를 완성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나는 특별히 기간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어떤 때에는 카세트테이프를 일주일이나 보름마다 부쳤으며, 어떤 때에는 3주나 4주 만에 부치는 경우도 있었다. 한나가 이제 혼자서 글을 읽는 법을 익혔으므로 내가 보내는 카세트테이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거라는 우려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것 외의 책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 P201

"슈미츠 부인은 자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슨 일로 인해 슈미츠 부인이 당신이 데리러 오기로 한날 새벽에 자살을 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고 있어요." 그녀는 종이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스커트를 손으로 문질러 폈다. "그녀의 죽음은 저한테는 충격이었어요. 아시겠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어요. 슈미츠 부인과 당신한테 말이에요. 어쨌든 갑시다."
그녀는 다시 앞장섰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나는 한 병동의 조그만 방에 누워 있었다. 우리는 벽과 들것 사이로 간신히 들어설 수 있었다. 교도소장은 천을 뒤로젖혔다.
한나의 머리에는 시신이 완전히 굳을 때까지 턱을 들어 올려놓기 위해서 천이 동여매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특별히 평화스럽지도 특별히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굳어 있었으며 죽은 듯이 보였다.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자니 죽은 얼굴에서살아 있는 얼굴이 떠올랐다. 늙은 얼굴에서 젊은 얼굴이 말이다. 늙은 부부들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에게는 늙은 남자의 모습 속에 젊은 남자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을 것이고, 남자에게는 늙은 여자의 모습 속에 젊은 여자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신선하게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왜 나는 일주일 전에 이러한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인가?
나는 울어서는 안 되었다. 교도소장이 묻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쳐다보았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 한나의 얼굴 위로 다시 천을 덮었다. - P222

어쨌든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이 사실만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것이 정말로 참기 어렵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썼는지도 모른다.
나는 뉴욕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한나의 돈을 그녀의 이름으로 ‘문맹퇴치를 위한 유대인 연맹 앞으로 송금했다. 나는 얼마 뒤 한나 슈미츠 여사 앞으로 유대인 연맹이 보낸 기부에 감사하는 내용을 담은 컴퓨터로 쓴 짤막한 서한을 받았다. 나는그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서 한나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내가 그녀의 무덤 앞에 선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P232

그것들은 한나가 직접 손으로 적거나 아니면 작은 사진들과 마찬가지로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낸 것들이었다. "봄은 제 푸른 리본을 대기 중에 다시 휘날린다", "구름의 그림자가 들판 위로 도망친다"시들은 모두 자연의 기쁨과 자연에의 동경으로 가득 차 있는 것들이었으며, 작은 사진들은 봄빛이 환한 숲과 꽃들이 다채롭게 흐드러진 초원, 가을의 나뭇잎들과 몇 그루의 나무들, 시냇가의 버드나무, 빨간 버찌가 무르익은 벚나무 한 그루, 가을빛으로 노랗게 그리고 오렌지 색깔로 타오르는 밤나무 한 그루 등을 보여주었다. 신문에서 오려낸 사진에는 검은 양복 차림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한 중년신사와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중년 신사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소년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학교장에게 상장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한나가 그 도시를 떠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당시 글을 읽을줄 모르던 그녀가 그 사진이 실린 지역 신문을 정기구독하고있었던 것인가? 어쨌든 그녀는 사진 내용에 대해서 알아내고 또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재판이 열리던 중에도 그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었을까? 나는 다시 가슴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여오는것을 느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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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고인 몇 명과 그들의 변호사들은 우리 쪽으로 등을 향하고 앉아있었다. 한나 역시 우리 쪽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그녀가 호명되어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갈 때에야 비로소 그녀를 알아보았다. 물론 그녀의 이름은 금방 알아들었다. 한나 슈미츠. 이어서 그녀의 자태를, 즉 독특하게 틀어 올린 머리 모양과 목덜미, 넓은 등과 튼튼한 두 팔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아주꼿꼿한 자세였다. 두 다리로 탄탄하게 서 있었으며 양팔은 양쪽에 자연스레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소매가 짧은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알아보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아무 느낌이 없었다. - P102

그렇게 나는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와 목덜미와 어깨를 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와 목덜미와 어깨를 읽었다. 재판에서 자신에 대해 언급될 때면, 그녀는 특히 머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중상모략을 받고 있다고, 그리고 공격을 받고 있다고 느껴져 이에대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면,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마다 목덜미가 부풀어 올랐고 근육의 가닥들은 더욱 불거져 보였다. 나름대로 답변을 하려는 시도는 매번 실패했고, 그때마다 그녀의 어깨는 아래로 처졌다. 그녀는 결코 어깨를 으쓱해보이거나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어깨를 으쓱하거나 고개를 가로젓는 가벼운 몸짓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들거나 아래로 숙이거나, 머리를 팔로 받칠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려면 틀림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가끔 단단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서 머리카락 몇 올이 빠져나와 잔물결을 일으키며 목덜미 위로 늘어졌다가는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날리면서 목덜미를 쓸었다. 한나는 가끔 왼쪽 어깨 윗부분의 배냇점이 드러날 정도로 앞가슴이 많이 파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윽고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입으로 훅 불던 것, 그리고 그녀의 배냇점과 목덜미에 입 맞추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기억은 저장된 파일을다시 불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 P107

검사들은 나름대로의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매일매일 똑같은 공격력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못했다. 처음에는 재판의 대상과 결과들이 너무나 경악스러웠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그들에게도 마비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비 증세는 판사와 참심원들에게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재판이 시작된 처음 몇 주 동안에는 때로는 눈물과 함께. 때로는 힘겨운 목소리로, 때로는 흥분과 당혹함이 밴 말투로 소상히 밝혀지는 끔찍한 사실들을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는 놀라움이나 힘겹게 평정을 유지하려는 표정으로 경청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정상적인 얼굴빛을 되찾았고,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서로 무슨 말을 속삭이기도 했으며, 증인이 증언을 하다가 이야기의 맥락을 놓치면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재판 중에 이스라엘로 가서 한 여자 중인의 말을 들어보자는 의견이 나오자, 그들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은 늘 새삼스럽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재판을 보러 왔는데, 그때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그 경악스러움이 그들의 일상 속으로 침입하는 일이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재판에 참석한 나는 거리를 두고 그들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었다. - P110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고 이미 당시부터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질문이 있다. 우리 제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해서는 안 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그 끔찍한 사건들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해도, 그 앞에서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면서 침묵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렇다고 내가 세미나에서 보였던 탐사와 진상 규명의 열성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쉽게 식어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판결을 받고 형을 살고, 제2세대인 우리는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가? - P112

"당신들 중 누구도 뒤로 빼는 사람 없이, 모두들 함께 행동했습니까?"
"네."
"당신은 당신이 수감자들을 죽음 속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아뇨,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왔고, 이전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당신 그리고 당신 그리고 당신은 후송돼서 죽어야 해‘라고 말했나요?"
한나는 재판장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재판장에게 그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듣고 싶었던 것이다. - P119

"그래요. 그녀는 애인들을 두고 있었어요. 언제나 젊고 연약하고 섬세하게 생긴 여자들이었어요. 그녀는 그들을 보호해주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고, 잠자리도 좋은 곳을 내주었어요. 또 필요한 것을 갖다 주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음식을 주었고, 밤이 되면 그들을 자기 방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소녀들은 밤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서는 안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그 짓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마치 재미를 보다가 싫증을 느끼면 그러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아우슈비츠로 후송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어느 날 한 소녀가 말을 해서 알게 되었어요. 소녀들은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거예요. 매일 밤마다 매일 밤마다 말이에요. 그 짓을 하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지요. 또 집 짓는 공사장에 나가서 죽도록 일하는 것보다는 편한 일이었지요. 나는 그게 훨씬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틀림없어요. 안 그랬다면, 내가 어떻게 잊지 않고 있었겠어요? 하지만 그게 더 나은 일이었을까요?"
••••••
재판장은 한나에게 신문을 한 변호사에게 질문이 아직 더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한나의 변호사에게 묻겠다고 말했다. ‘그녀한테 물으시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가그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것이 그들이 어차피 집 짓는 일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인지, 그들이 어차피 다음번 수송 때 아우슈비츠로 후송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참을 만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는지 그녀에게 직접 물으시오. 한나, 어서 그렇게 말해. 당신이 그 여자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참을 수 있게 해주려고 그런 것이라고 말해. 그것이 당신이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바로 그 이유라고.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그리고 있을 수도 없다고.
그러나 그 변호사는 한나에게 묻지 않았고, 한나 역시 먼저 말하려 하지 않았다. - P125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한테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우리의 자전거 여행에서 쓰는 일과 읽는 일을 모두 나에게 맡겨두었고, 호텔에서 맞이한 아침에 내가 남겨놓은 쪽지를 발견하고는, 그 내용을 그녀가 파악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를 짐작하고는 자신의 치부가 노출될 것이 두려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전차 회사에서 도망을 쳤던 것이다. 차장으로 일할 땐 감출 수 있었던 약점이 운전사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지멘스에서 승진하는 일도 마다하고 여자 감시원이 되었던 것이다. 필적 감정사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보고서를 본인이 작성했다고 시인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재판 과정에서 사생결단을 하듯이 진술했던 것일까? 그 모녀 중 딸의 책뿐만 아니라 공소장도 제대로 읽지 못해 방어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방어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 때문에 그녀는그녀의 피보호자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것일까? 그들이 무언가를 눈치 챘을 경우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그 때문에 그런 연약한 소녀들을 자신의 피보호자로 삼은 것일까? 그 때문일까? 그녀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한나의 수치심이 법정과 수용소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자임을 자백한다고?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두려워 범죄를 저지른다고? - P141

한나가 나의 고향 도시를 떠났을 때 그녀의 진짜 관심사와그 당시 내가 그녀에 대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그렸던 것 사이의 괴리가 나의 마음을 이상하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 P144

"하지만......"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돼."
"나중에 가서 그들 스스로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경우에도 말인가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 아니라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있어. 넌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그 차이를 잘 알았잖니. 엄마의 말이 늘 옳은 것이 네겐 별로 마음 편치 않았잖아."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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