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거대한 그림이고 조화옹(造化翁)은 위대한 화가다. 주황색으로 요염하게 붉게 물든 오구나무의 꽃은 누가 붉은 물감을 칠하고 붉은 빛깔의 돌과 산호가루를 뿌려 그려 놓았는가? 복숭아 꽃잎에는 연지처럼 붉은 즙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같다. 가을 국화꽃의 빛깔은 등황색을 곱게 바른 것만 같다. 눈이 개고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기운에는 푸른 빛깔이 두 겹세 겹 엇갈려 먼 곳과 가까운 곳에 골고루 나뉘었다. 세찬 소낙비가 강 위를 내달려서 수묵(水墨)을 한가득 뿌려 놓으면 더 채색할 틈도 없게 된다. 잠자리의 눈동자는 초록빛이 은은하고,
나비의 날개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천상에채색을 담당한 성관(星官)이 있어서 풀과 꽃과 돌과 금의 정수(精髓)를 모았다가 조화옹에게 제공해 온갖 사물에 빛깔을 입히게 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가을 강 석양의 거대한 그림이 가장 좋다. 이것이야말로 조화옹이 뜻을 얻은 그림이라고 할만하다.

- 여기 세계를 화판 삼아 그림을 그리는 조물주 역시 무슨 위대한 작업과 거룩한 행위를 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아니다. 그냥 놀이삼아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일 뿐이다. 전지전능한 자의 거룩한 역사(役事)로 창조된 세계보다는 차라리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듯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듯 창조된 세계가 훨씬 더낫지 않을까? 최소한 그런 세계에서는 ‘해야만 한다‘는 식의 획일화되고 규범적인 윤리나 명령의 강제보다는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하고싶다‘는 마음처럼 상대적이고 개성적인 욕망이 자유롭게 존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 P27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 말똥구리에게 여의주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용 역시 자신의 여의주가 귀한 만큼 말똥구리에게는 말똥이 귀하다는 것을안다. 비록 상상의 존재지만 우주 만물 중 가장 귀한 동물로 여겨지는 용의 여의주와 가장 미천한 동물로 여겨지는 말똥구리의 말똥의 가치는 동등하다. 이제 우열(愚劣)과 존귀(尊貴)와 시비(是非)의 이분법은 전복되고 해체된다.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이덕무를 비롯한 북학파(北學派) 지식인들은 인성(人性)과물성(物性)이 균등할 뿐만 아니라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표현한 이 구절을 무척 좋아하고 아꼈다. 연암 박지원(燕巖朴趾源)은 <낭환집서문(낭丸集序)에 이 구절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여기에는 영재 유득공(柳得恭)의 숙부였던 기하 유금(幾何柳琴)이 이 말을 듣고 문집의 이름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는기록이 등장한다. 실제로 유금은 자신의 문집을 ‘말똥구리의 말똥구슬‘이라는 뜻에서 낭환집(낭丸集』이라고 이름 붙였다. <낭환집 서문>은 바로 박지원이 이 문집에 써준 글이다. - P35

무더운 여름날 저녁 콩꽃핀 울타리가를 걷다가 기와빛을 띤 거미가 실을 뽑아 거미줄을 엮는 모습을 보았다. 그 신묘한 모습이 부처와 서로 통함을 깨달았다. 실을 뽑고 실을 당기며 다리를 움직이는 방법이 너무나 기막혔다. 때로는 멈춘 듯하다가 때로는 순식간에 거미줄을 엮기도 했다. 마치 사람들이 보리를 심을 때의 발놀림이나 거문고를 퉁길 때의 손놀림과 같았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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