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몇 명과 그들의 변호사들은 우리 쪽으로 등을 향하고 앉아있었다. 한나 역시 우리 쪽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그녀가 호명되어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갈 때에야 비로소 그녀를 알아보았다. 물론 그녀의 이름은 금방 알아들었다. 한나 슈미츠. 이어서 그녀의 자태를, 즉 독특하게 틀어 올린 머리 모양과 목덜미, 넓은 등과 튼튼한 두 팔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아주꼿꼿한 자세였다. 두 다리로 탄탄하게 서 있었으며 양팔은 양쪽에 자연스레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소매가 짧은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알아보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아무 느낌이 없었다. - P102

그렇게 나는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와 목덜미와 어깨를 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와 목덜미와 어깨를 읽었다. 재판에서 자신에 대해 언급될 때면, 그녀는 특히 머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중상모략을 받고 있다고, 그리고 공격을 받고 있다고 느껴져 이에대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면,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마다 목덜미가 부풀어 올랐고 근육의 가닥들은 더욱 불거져 보였다. 나름대로 답변을 하려는 시도는 매번 실패했고, 그때마다 그녀의 어깨는 아래로 처졌다. 그녀는 결코 어깨를 으쓱해보이거나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어깨를 으쓱하거나 고개를 가로젓는 가벼운 몸짓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들거나 아래로 숙이거나, 머리를 팔로 받칠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려면 틀림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가끔 단단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서 머리카락 몇 올이 빠져나와 잔물결을 일으키며 목덜미 위로 늘어졌다가는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날리면서 목덜미를 쓸었다. 한나는 가끔 왼쪽 어깨 윗부분의 배냇점이 드러날 정도로 앞가슴이 많이 파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윽고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입으로 훅 불던 것, 그리고 그녀의 배냇점과 목덜미에 입 맞추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기억은 저장된 파일을다시 불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 P107

검사들은 나름대로의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매일매일 똑같은 공격력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못했다. 처음에는 재판의 대상과 결과들이 너무나 경악스러웠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그들에게도 마비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비 증세는 판사와 참심원들에게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재판이 시작된 처음 몇 주 동안에는 때로는 눈물과 함께. 때로는 힘겨운 목소리로, 때로는 흥분과 당혹함이 밴 말투로 소상히 밝혀지는 끔찍한 사실들을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는 놀라움이나 힘겹게 평정을 유지하려는 표정으로 경청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정상적인 얼굴빛을 되찾았고,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서로 무슨 말을 속삭이기도 했으며, 증인이 증언을 하다가 이야기의 맥락을 놓치면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재판 중에 이스라엘로 가서 한 여자 중인의 말을 들어보자는 의견이 나오자, 그들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은 늘 새삼스럽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재판을 보러 왔는데, 그때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그 경악스러움이 그들의 일상 속으로 침입하는 일이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재판에 참석한 나는 거리를 두고 그들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었다. - P110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고 이미 당시부터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질문이 있다. 우리 제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해서는 안 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그 끔찍한 사건들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해도, 그 앞에서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면서 침묵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렇다고 내가 세미나에서 보였던 탐사와 진상 규명의 열성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쉽게 식어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판결을 받고 형을 살고, 제2세대인 우리는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가? - P112

"당신들 중 누구도 뒤로 빼는 사람 없이, 모두들 함께 행동했습니까?"
"네."
"당신은 당신이 수감자들을 죽음 속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아뇨,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왔고, 이전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당신 그리고 당신 그리고 당신은 후송돼서 죽어야 해‘라고 말했나요?"
한나는 재판장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재판장에게 그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듣고 싶었던 것이다. - P119

"그래요. 그녀는 애인들을 두고 있었어요. 언제나 젊고 연약하고 섬세하게 생긴 여자들이었어요. 그녀는 그들을 보호해주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고, 잠자리도 좋은 곳을 내주었어요. 또 필요한 것을 갖다 주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음식을 주었고, 밤이 되면 그들을 자기 방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소녀들은 밤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서는 안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그 짓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마치 재미를 보다가 싫증을 느끼면 그러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아우슈비츠로 후송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어느 날 한 소녀가 말을 해서 알게 되었어요. 소녀들은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거예요. 매일 밤마다 매일 밤마다 말이에요. 그 짓을 하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지요. 또 집 짓는 공사장에 나가서 죽도록 일하는 것보다는 편한 일이었지요. 나는 그게 훨씬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틀림없어요. 안 그랬다면, 내가 어떻게 잊지 않고 있었겠어요? 하지만 그게 더 나은 일이었을까요?"
••••••
재판장은 한나에게 신문을 한 변호사에게 질문이 아직 더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한나의 변호사에게 묻겠다고 말했다. ‘그녀한테 물으시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가그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것이 그들이 어차피 집 짓는 일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인지, 그들이 어차피 다음번 수송 때 아우슈비츠로 후송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참을 만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는지 그녀에게 직접 물으시오. 한나, 어서 그렇게 말해. 당신이 그 여자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참을 수 있게 해주려고 그런 것이라고 말해. 그것이 당신이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바로 그 이유라고.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그리고 있을 수도 없다고.
그러나 그 변호사는 한나에게 묻지 않았고, 한나 역시 먼저 말하려 하지 않았다. - P125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한테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우리의 자전거 여행에서 쓰는 일과 읽는 일을 모두 나에게 맡겨두었고, 호텔에서 맞이한 아침에 내가 남겨놓은 쪽지를 발견하고는, 그 내용을 그녀가 파악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를 짐작하고는 자신의 치부가 노출될 것이 두려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전차 회사에서 도망을 쳤던 것이다. 차장으로 일할 땐 감출 수 있었던 약점이 운전사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지멘스에서 승진하는 일도 마다하고 여자 감시원이 되었던 것이다. 필적 감정사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보고서를 본인이 작성했다고 시인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재판 과정에서 사생결단을 하듯이 진술했던 것일까? 그 모녀 중 딸의 책뿐만 아니라 공소장도 제대로 읽지 못해 방어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방어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 때문에 그녀는그녀의 피보호자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것일까? 그들이 무언가를 눈치 챘을 경우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그 때문에 그런 연약한 소녀들을 자신의 피보호자로 삼은 것일까? 그 때문일까? 그녀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한나의 수치심이 법정과 수용소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자임을 자백한다고?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두려워 범죄를 저지른다고? - P141

한나가 나의 고향 도시를 떠났을 때 그녀의 진짜 관심사와그 당시 내가 그녀에 대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그렸던 것 사이의 괴리가 나의 마음을 이상하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 P144

"하지만......"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돼."
"나중에 가서 그들 스스로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경우에도 말인가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 아니라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있어. 넌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그 차이를 잘 알았잖니. 엄마의 말이 늘 옳은 것이 네겐 별로 마음 편치 않았잖아."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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