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학생들을 뽑을 때 인원을 한정해서 별도로 입학 사정을 한 결과가 20퍼센트니까 결국은 10명이 입학했다면 2명 정도가 우리나라 학생이었어요. 8명은 일본 학생이니까 조선 학생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니까 해방 후에 우선 학생을 복귀시켜야 뭘 하겠는데 학생들이 원천적으로 없는 겁니다. 고작 몇 명밖에 안 되었던 겁니다.
어떡하든지 대학을 복원하긴 해야겠고 학생을 확보하려니 어느 대학 출신이든 상관없다는 거였죠. 원래는 복학생이 제국대학 학생들이어야 되는데, 학생증이나 무슨 수료증 같은 것을 제시하고 간단한 구술 시험만 거치면 다른 대학 학생들도 제국대학에 복학을 한 겁니다. 학년에 따라 편입도 시켰어요. 우리나라 사람이 옛날부터 학구열이얼마나 강합니까? 모두 다 대학에 가려고 그러지요. 그런데 가만히보니까 복학이 간단해요. 증서만 하나 내놓고 몇 마디 하면 입학생이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걸 보고 세상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인쇄소마다 어느 대학 학생증, 어느 대학 무슨 수료증, 그것을 인쇄해서 비슷하게 도장을 새겨서 찍었어요. 그 값이 처음에는 꽤 비싸서 지금 돈으로 하면 뭐 10만 원씩 하더니만 나중엔 만원 아닌 5,000원에도 살 수 있었어요.
1945년 후기부터 1946년, 1947년까지 약 3년 동안 대학생들은 거의 가짜입니다. 조금 충격적이긴 하겠지만, 이거는 내가 직접 목격해서 아니까 증언하는 겁니다. 아마 기록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증서를내면 교수가 면접을 꼭 해요. 면접을 하는데 대학 재학생, 수료생이하도 많이 몰려오니까 이제 진짜와 가짜 구별해야 하는데 방법이 있어야지요. 지금 같으면 그 대학에 우편 등으로 조회를 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때 그게 돼요? 전혀 안되지요. - P171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1세대는 이처럼 미비한 상황에서 사회로 배출되자 당시 황국신민의 교화를 위해 중점을 두었던 사범학교 교유로 배치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사입니다. 일제하에서 사범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하면 그것은 상당한 영예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유들은 당시 학생들을 완전히 일본 식민으로 만드는 중차대한 책임을 지고 있어서 호봉도 높고 월급도 많이 받았거든요. 어디를 가든 대우를 해주었지요. 어느 모임이나 장소에 가면은 사범학교 교사가 맨 앞자리에 앉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어쩌면 친일파중의 친일파인 셈이었는지도 몰라요.
당연히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 어문학 전공 출신자도 졸업하자마자 각처에 있는 사범학교 교사로 전부 발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거기서 거의 해방을 맞이했으니까 이 1세대들은 중등학교 국어 교사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연구 업적이 전혀 없었는데도 해방되고 교수가 부족했던 덕분에 갑자기 교수가 된 겁니다. - P175

●●● 경성제국대학이 결국은 국립서울대학교가 된 셈인데요. 이 학교명이 당시 수도 서울 명칭과도 당연히 연관되어 보입니다. 일본의지배를 받기 전에 조선의 수도는 한양이었고, 대한제국 시절에 한성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이한성이 경성으로 바뀌어 36년간 수도의 고유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조선의 중심 도시 경성은 어떻게 서울로 바뀌게 된 것인지요?
◆◆◆ 학교 명칭과 관련해서 언급할 내용이 있어요. 해방 직후까지는경성이 정식 명칭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민간에서는 이미 한양이든한성이든 경성이든 개의치 않았고 보통사람들은 다 서울이라고 말했어요. 서울의 어원은 서라벌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게 수도의 개념으로 바뀌어 식민지 아래에서도 민간에서 다 서울이라고 사용했어요.
간혹 어떤 필요에 따라서는 경성이나 한양이라고도 한 것 같습니다만 요. 그런 계기로 결국 해방 후에 서울시로 명칭이 바뀌게 됩니다. 국립서울대학교라고 명칭이 붙은 것도 이미 당시에 많은 언중이 서울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그 명칭이 가장 좋겠다 싶어서 결정된 것이겠지요. 해방이 되고 국권을 회복한 상황에서 수도 명칭을 일제시대처럼 경성으로 계속 사용했다면 거부감이 많았을 겁니다. 그렇다고구시대처럼 한양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선호하지도 않았어요. 우리말지명을 최초로 공식화하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서울이라는 명칭으로 고쳐진 것입니다. - P190

 그러나 대혼란의 시기에도 대학은 피란지에서 다시 운영되었으며 학회의 창립과 학회지의 발간 등 학술 활동은 계속이어졌다.
1950년 9월에 서울이 수복되면서 대학들도 다시 운영을 시작했으나 곧 이어진 1.4후퇴에 따라 부산으로 다시 피란했다. 정부는 모든국공립 및 사립대학을 전시연합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결합하여 운영하도록 했다. 부산에서는 서울 소재 대학들을 중심으로 한 전시연합대학이 1951년 2월에 출범하여 운영되다가 1952년 5월에 폐지되었다. 이후각 대학은 기존 건물은 물론 천막, 창고 등을 교사로 이용하여 종전까지 피란처에서 수업을 이어갔다. 강의와 연구에 필요한 자료도 부족하고 시설도 열악했지만 학문에 대한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전란으로 부산에 신진 학자들이 모이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운 교류의 계기를 제공했다. 해방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이른바 2세대로 통칭되었던 신진 학자들은 이미 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학문 공동체를 구상하고 운영하고 있었다. 1948년 7개 대학 국어국문학과의 50여명의 학생이 조선어문학연구회를 결성하고 각 대학을 순회하며 연구 간담회를 개최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피란지 부산에서 다시 만나 학회를 창립하고 학회지 <<국어국문학>>을 발간하게 되었다.
학회지의 발간과 국어국문학회의 창립 과정은 전쟁의 한복판에서모든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분투기이다. 뜻을 같이한 신진학자들은 대학, 고등학교, 출판사에 재직하면서 사비를 모으고 학술지를 직접 판매하여 출판 비용을 마련했다. 이들은 1952년 9월에 첫 모임을 열어 불과 한 달 후에 창간호를 발간하고, 12월에는 국어국문학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그동안 억눌렸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강한 추진력으로 승화시켰다. 국어국문학회는 휴전이 이루어지고 정부와 각대학이 환도한 이후에 학술 발표회를 개최하고 분과회를 만드는 등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국어국문학계의 대표 학회로 성장했다. - P221

 먼저 당시의 시대별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남북 대립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부터였습니다. 남측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안호상을 문교부장관에 임명하고 1949년 3월 중학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창설하여 군대식 조직으로 묶어놓았습니다. 대통령은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외치면서 무력통일을 주장했습니다.
학도호국단은 1949년 10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전국학도체육대회에서 분열식을 거행했습니다. 군대 조직이라 분열식이 거행됐는데, 단장인 안호상 장관이 제복에 제모를 입고 단상에 올라 열병식 경례를 하던 모습이 마치 독일 박사답고 히틀러 유겐트를 연상케 했던기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합니다. 장비나 질과 양 모두 충분하지 않은 군대를 갖고 북진통일, 무력통일을 입으로만 외친 것이 북측이 주장하는 한국전쟁 북침설의 구실이 되기도 했을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19혁명으로 쫓겨나 망명했지만 오히려 그런 것을 잘 모르고 어른으로, 대통령으로 받든 국민이 가엾게 생각됩니다. 6.25사변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방송으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장담했습니다. 혼자 서울을 몰래 빠져나가 안전지대인 대전에 앉아서 방송으로 "서울 사수한다. 서울 시민들은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도 좋다"라고 한 것이지요. - P224

●●●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학회지를 만들고 학회를 창립한일이 기적과 같이 느껴집니다. 대부분 해방 이후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 분들이 학문의 지향점을 스스로 발견하고 주도적으로 앞날을 개척한 대단한 성과인데 허웅 선생이 1956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2세대 학자들의 학문적 방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확고한 방법론의 토대 없는 암중모색 식의 재래의 연구방법을 지양하여 새로운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국어국문학을 수립하고 국수주의적이라고 불리우기 쉬운 국어국문학계에 생신한 생명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우리들이 지향하는 바이었습니다. 생계를지탱하지도 못하는 박봉이면서도 우리들은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그해 11월 1일에 <국어국문학> 제1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사륙배판 16페이지의 팸플릿이었으나 이것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기쁨이란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들만의 기쁨만이 아니라 여러 선배 동지들에게서 감격에 넘치는 환영을 받았던것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회고하신 바 있습니다.
국어국문학에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려는 뚜렷한 의식이 2세대학자들에게 공유되고 있었으며 국어국문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준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 P254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한국어의 어문 규범 정립, 사전 편찬, 한국어 연구와 교육을 위한 토대 마련이라는 근대적 과제는 해방 이후 교과서 편찬, 1950년대의 《큰사전> 발간 등으로 일단락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과제를 완결하는 단계에서 어문 규범을 둘러싼 격렬한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은 의견 충돌은 이른바 ‘한글간소화 파동‘이다. 이 한글 간소화 파동은 근대 초부터 지속되었던 형태주의 표기와 표음주의 표기 간 충돌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에 익숙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충돌의 성격도 있었다. - P267

1930년대에 나온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은 언론과 출판에서 수용되고, 미군정기의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20년 가까이 통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구한말에 출국하여 해방 직후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구한말에 사용했던 익숙한 철자법이 통용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이 있었다. 1953년 4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현행 철자법이 너무 어려워서 한글 전용에 대한 법률이 실효를 얻지 못한다며 철자법을 개정하라고 지시했고, 정부 공문서는 즉시 간이한 구철자법을 사용하라는 국무총리 훈령 8호가 각 부처장 및 도지사에게 전달되었다. 한글 간소화 파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큰사전>의 편찬과 출판 작업을 병행하고 있던 한글학회에 한글 간소화는 일제의 탄압에도 저항하며 편찬하여 완성 단계에 이른《큰사전>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였다. 이런 맥락에서 한글 간소화 정책은 연구자들에게 어문 운동 탄압이자 민족 독립 운동의 소중한 결실을 파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러한 인식은 출신 학교나 소속된 조직을 넘어 국어학 연구자들을 집결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시기를 회고하며 김민수 선생은 당시의 많은 사람이 맞춤법, 외래어 표기, 한글 전용 등 어문 규범과 국어 정책에 다양한 의견을 내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분위기나 공간을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반복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문 규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권력의 돌출적 개입으로 인한 파동은 결과적으로 어문 규범의 논의 폭을 좁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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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는 혀를 움직였다. 「입 안이 자꾸 베여.」 모드가 말했다.
「이 하나가 좀 뾰족한 거 같아
「어디 봐요.」 내가 말했다.
나는 모드를 창가로 데리고 가 세운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잇몸 주변을 더듬어 보았다. 거의 즉시 뾰족한 이를 찾아냈다.
「어. 이건 날카롭기가••••••」 내가 입을 열었다.
「뱀 이빨보다 더하지, 수?」 모드가 말했다.
「바늘보다 더하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아가씨.」 내가 대답했다. 나는 모드의 바느질 상자로 가서 골무를 가져왔다. 새 모양가위에 어울리는 은골무였다.
모드는 턱을 어루만졌다. 아는 사람 가운데 뱀에게 물린 사람 있어?」 모드가 내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모드의 생각은 꼭 이런 식으로치달았다. 아마도 시골에 살다 보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다. 모드는 나를 본 뒤 다시 입을 벌렸고, 나는 골무를 손가락에 끼고 뾰족한 이에 대고 날카로운 부분이 사라질 때까지 문질렀다. 석스비 부인이 갓난아기들에게 이렇게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물론 아기들은 다소 버둥거렸다. 모드는 분홍색 입술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굉장히 조용히 서 있었다. 처음에는 눈을 감고 있더니 이윽고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며 뺨을 붉게 물들였다. 모드가 침을 삼키자 울대뼈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모드의 숨결에 내 손이 축축해졌다. 나는 골무로 이를 문지르다가 가만히 엄지로 만져 보았다. 모드가 다시 침을 삼켰다. 눈커플이 파르르 떨렸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 P145

우리는 비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비밀이었고 비열한 비밀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밀이었다. 지금에 와서 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은 누구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사기꾼은 누구인지 정리해 보려 하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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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G는 ACLU에서 활동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임신중절권을 옹호한 사실에 대해서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임신 여부에 대한 결정은 여성의 인생과 행복과 존엄이 달린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성이 자율적으로 내려야 할 결정입니다. 정부가 이런 결정을 통제한다면, 여성은 자기 선택에 책임지는 완전한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 P120

스캘리아는 소수의견에서 대법원이 뒷문을 통해 슬그머니 엄격심사를 ㅍ집어냈다고 비꼬았다. 하지만 RBG의 기쁨을 빼앗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버지니아군사대학 판결이야말로 여성이 아무런 인위적 제약 없이 마음껏 열망하고 성취할 수 있도록 닫힌 문을 열어젖히려고 발버둥 치던 1970년대의 노력이 마침내 열매를 맺은 일대 사건이라고 여겼다." RBG는 자신이 대법관에서 낭독한 판결문 사본을 90세의 전 대법관 브레넌에게 보냈다. 오래전 프론티에로 사건에서 엄격심사 여부에 대해 RBG가 다섯 표를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준 사람이었다. RBG는 이렇게 썼다. "친애하는 빌당신이 비춘 빛이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보세요!"
RBG는 대법관석에서 판결문을 낭독한 바로 그날, 함께 축하하자며 재판연구원 예닐곱 명을 집무실로 불렀다. 샴페인은 없었지만 대법관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당시 재판연구원으로 그 순간을 함께한 데이비드 토스카노가 말했다. "법원에서 일하던 저에게 찾아온 정말 근사한 하루였습니다."
얼마 뒤 RBG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을 1967년도 버지니아군사대학 졸업생이라고 소개한 발신인은 이번 판결을 환영한다고 적었다. 젊은 여성들이 과정을 이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튼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서. 아울러 10대인 자기 딸이 그 대학을 가고 싶어 한다고도 썼다. 몇 달 뒤,
같은 사람에게서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두툼한 봉투에는 물건이 꽁꽁 싸여 있었다. 뜯어보니 주석으로 만든 조그만 장난감 병사가 들어 있었다. 머리핀에 달린 것이었다. 발신인의 어머니가 얼마 전 타계하면서 남긴 것으로,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모든 어머니가 선물로 받은 머리핀이었다. 그는 모친이 이 머리핀을 RBG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25

RBG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인생을 통틀어 마티에게 받은 가장 중요한 조언은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티는 나에게 이런 느낌을 선물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대개 불확실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내가 이 변론취지서를 쓸 수 있을까? 이번 구두변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럴 때면 마티가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그러면 나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만만치 않은 일이군. 하지만 적어도 저 친구들만큼은 할 수 있어‘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마티는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어요. "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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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혼란기에, 해방 후에 급속히 확산된 것은 민족을 의식하는국수주의적 사조였어요. 그런데 요것도 가만히 생각하면 일제의 영향으로 보여요. 일본이 군국주의인데 일제 말기에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국수주의로 흘렀거든요. 그런데 일제시대 일본에서 주장하고 강조하던 국수주의를 해방이 되면서 우리나라 쪽으로 돌린 것 같아요.
이걸 우리나라로 돌려서 국수주의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 거지요.
●●● 선생님 말씀은 일반적인 상식과 다른 좀 뜻밖의 말씀인데요. 일제 말기의 군국주의에 기반한 국수주의적 학문 태도가 해방 이후 우리의 국어 정책을 주도한 조선어학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국어 정책이 국수주의적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이게 조선어학회의 해방 직후 언어 정책의 경향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해방과 동시에 석방된 조선어학회 중진들의 존재감, 그리고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조선어학회활동에 대한 기억은 조선어학회 주도의 국어 정책이 국수주의로 흐르는 데 기폭제가 됐어요. 대중은 이 학회의 운동에 전폭적인 존경과 공감을 표했고 활동에 대해서도 찬동하는 경향이 뚜렷했습니다. - P127

◆◆◆ 게다가 아무런 제한도 없이 독단으로 채택해서 보급시킨 규범인(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이후 제안된 한글 간소화에서 너무 어렵다고거센 도전을 받고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정부 규정이 되었죠. 이렇게이후 진행 과정과 결과를 보면 당시 조선어학회 중심의 국어 정책은당초의 존경과 공감에 비해 기대 이하였다고 하는 것이 조선어학회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올바른 평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선생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결국 국수주의적 태도에 따라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해서 결과가 보잘것없었다는 것이죠? 선생님의 말씀은 민족 독립 운동의 후광이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국어 정책에 대한건강한 비판을 가로막았고, 그것이 국어 정책의 실패로 이어졌다는 점을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건강한 비판을가로막아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 P128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실된 민족적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해방 직후에는 무엇보다 국어 회복 운동이 시급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일제 말기에 심각한 탄압을 받으면서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진 조선어학회에서는 이러한 위상을 십분 활용하여 전국적 규모의 강습회를 열고국어 교사를 양성하며 일제 치하에서 이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좀더 보편적인 규범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또한 국어정책의 기본 골격을 ‘한자 폐지, 한글 전용화‘와 ‘일제 잔재 일소, 우리말 도로 찾기‘의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해나가면서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성과를 일구어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 조선어학회의 행정, 재정 및 학술적 핵심 내용을 구성하는 데 특정인의 영향력이 지나친 측면이 있었고, 모든 정책들이 충분한 내적 고려 없이 조급하게 이루어진 측면이 있었음은 오늘날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반성해볼 측면이 있습니다. 아울러 이 시기의 국어 정책이 남북으로 분리되어 정착하는 과정에 서로를 염두에두면서 규정을 통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나갔어야 함에도 여러상황상 남북 언어 규범의 분기가 점차 더 심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의 많은 언어 정책적 노력들은 그절실함과 진지함. 관심과 환대 속에서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전개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 활동의 의의, 장점과 문제점, 한계 부분을 나눠 함께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이 대담의 국어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P135

대한제국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이라는 국호는 국토의 일부인 남쪽만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이 국호가 내내 불만스럽습니다.
저는 ‘대한大韓‘에 대한 해석이 법률적인 측면에서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용어의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있습니다. 역사적 시점마다 깊은 검토 없이 ‘대한‘이라는 말을 수용한 당사자들의 무지한 소치를 저는 엄중하게 질타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1897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제 중심의 입헌군주정부는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아주 계획적으로 황제의 국가, 제국이라고 부르게 했던 거예요. 우리나라를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중국과의 단절을 꾀했던 거라는 말이지요. 궁성 밖에는일본 군대가 지키고 있고, 낭인이 칼을 차고 왕궁에 들어가서 왕후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한 대한제국이 괴뢰정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제국과 황제라는 이름은 일본 침략자들이 우리에게 아주 그럴싸하게 붙인 거예요. 스스로 나라의 힘을 길러서 독립국을 자처하는 의미의 대한제국이었더라면 모르겠으나,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잖아요. 뜻 있는 사람들이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만, 그사람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했으니 그들도 무지한 것은 마찬가지지요.
도대체 왜 ‘대한‘이라는 말을 썼느냐 그 말이에요. 조선이라는 명칭을 선택했다면 멀리 단군조선, 고조선도 있으니 이 국호는 중국까지도 포괄이 됩니다. 그런데 1948년에 마침 북측의 국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돼버렸으니까 우리가 북쪽 명칭을 선호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당시에 정부를 수립할 때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대한민국이라고 했던 거예요. 이 ‘민국‘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의 명칭에서 따온 것일 터인데, 장개석이라는 자가 중화민국을 망하게 만들어서 이 나라는 흔적도 없어졌잖아요. 그러니까 ‘대한‘이라는 명칭도 그렇고, ‘민국‘이라는 명칭도 저로서는 아주 마음에 안 들고 언짢은 점이 있습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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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 이름은 수전 트린더였다. 사람들은 날 <수>라고불렀다. 나는 태어난 해는 알지만 태어난 날짜는 오랫동안 알지못했기에 크리스마스를 생일로 삼았다. 나는 내가 고아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어머니는 죽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나는 석스비 부인의 아이였다. 그리고 아버지 역으로는 템스 강 근처 버러에 있는랜트 스트리트에서 자물쇠점을 하는 입스 씨가 있었다. - P11

다시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스 씨가 말했다. 「모두챙겼나? 그럼 이제 조용히 있어라, 얘들아, 움직이지 말도록.
수. 우리 아가, 네가 문을 열어 주면 어떻겠니?
나는 다시 석스비 부인을 보았고,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기에문으로 가서 빗장을 열었다. 문이 너무나 급작스레 열리며 나를 세게 쳤기에 필은 누군가 어깨로 문을 치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필이 벽에 몸을 딱 기대고 칼을 꺼내 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문이 활짝 열린 것은 단지 바람 때문이었다. 부엌으로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면서, 촛불 절반이 꺼지고 화로에 불꽃이 일어나고 내가 펼쳐 놓은 카드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복도에 남자가 서 있었다. 새까만 옷을 입고, 흠뻑 젖어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발치에는 가죽 가방이 있었다. 희미한 불빛에 남자의 창백한 뺨과 구레나룻이 보였지만, 눈동자는 모자그늘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나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수! 수 맞지? 맙소사! 널 보려고 40마일이나 왔어. 날 여기계속 세워 둘 거야? 추워 죽겠어!」그제야 나는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비록 1년 넘게 보지 못했지만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랜트 스트리트에 오는사람은 백 명에 한 명도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리처드 리버스 또는 딕 리버스 또 어떤 때는 리처드 웰스였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석스비 부인이 나를 바라보며<누가 온 거니?>라고 물었을 때 내가 말한 이름이기도 했다.
「젠틀먼이에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이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진짜 신사들이 직접발음할 때처럼 제대로 발음하지 않고, 생선에서 뼈 발라내듯 적당히 발음을 발라내고 <제먼>이라고 불렀다. - P33

그리고 어쨌든, 부인이 옳았다. 마침내 내가 한몫 잡을 기회가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이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젠틀먼을 보았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내가 말했다.
「좋아요. 하겠어요. 하지만 2천이 아니라 3천 파운드에요. 그리고 만약 그 숙녀가 날 맘에 들어 하지 않아 집으로 돌려보내더라도, 어찌되었듯 백 파운드를 주세요. 고생한 대가로요.」젠틀먼은 생각에 잠기며 망설였다. 당연히, 쇼였다. 잠시 뒤,
젠틀먼은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 역시 손을 내밀었다. 젠틀먼은 내 손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껄껄거렸다.
존이 얼굴을 찡그렸다. 「일주일 안에 수가 틀림없이 울며 돌아온다는 데 걸겠어.」 존이 말했다.
「벨벳 드레스를 입고 돌아올 거야.」 내가 대답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장갑을 끼고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은화가 가득 찬 가방을 들고 말이야. 그러면 넌 날 아가씨라고 불러야 할걸. 그렇죠, 석스비 부인?」
존은 침을 뱉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 혀를 뽑고 말겠다!
「내가 직접 뽑아 주지! 내가 말했다.
어린애 같은 말이었다. 나는 어린애였다! 아마 석스비 부인도 내가 어리다고 생각했으리라.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으로는 부드러운 입술을 만지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고뇌가 서려 있는듯했다. 나는 하마터면 부인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할 뻔했다.
아마 부인은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이제야 내게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다음어떤 무섭고 음침한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된 지금에야 말이다. - P52

유리창에는 갓 얼은 눈꽃이 피어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손가락을 얹고 얼음을 녹여 더러운 물로 만들었다. 입스 씨의 휘파람 소리와 데인티의 발 구르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지만, 내앞에 펼쳐진 버러의 거리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거리에는 내가있는 곳 같은 창가 몇 군데에서만 희미한 빛이 보였고, 사륜마차 불빛이 지나가며 그림자를 던졌다. 그리고 누군가 추위를 헤치고 그림자처럼 빠르고 어둡게 달려왔다가 역시 재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저곳에 살고 있을 모든 도둑과, 도둑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집, 다른 거리, 런던의 더 밝은 부분에서자신들의 삶을, 낯설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보통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는 커다란 집에 사는 모드 릴리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나를 몰랐다. 나도 사흘 전까지만 해도 그 여자를 몰랐다. 그 여자는 데인티 워런과 존 브룸이 우리 집 부엌에서 폴카를 추는 동안 내가 이곳에 서서 자신을 망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을 몰랐다. - P72

「부인 목이 매달리면 아플까요?」내 머리를 쓰다듬던 부인의 손이 멈췄다. 이윽고 부인은 다시좀 전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부인이 말했다.
「목 주위 밧줄 말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 같구나. 좀간지럽지 않을까 싶어「간지러워요?」「따끔따끔하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부인의 손이 여전히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바닥이 열리면요?」 내가 물었다. 그땐 뭔가 느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부인이 다리를 움직였다. 「아마 경련이 있겠지. 부인이 인정했다. 바닥이 열리면 말이야.」나는 호스몽거 레인에서 교수형당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던생각을 했다. 그 사람들은 어김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사람들은 흡사 꼭두각시 원숭이 인형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발버둥쳤다.
「하지만 죽음은 빠르게 찾아온단다.」 부인이 말했다. 「내생각에는 그렇게 빠르기 때문에 고통은 금방 사라질 거 같구나.
그리고 여자를 목매달 때는, 너도 매듭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수, 좀 더 빨리 죽을 수 있게 매듭을 매어 주잖니?」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들고 왔던 초를마루에 세워 놓아, 촛불이 아래에서 부인 얼굴을 비췄고, 때문에 부인 뺨이 부풀어 보이고 눈은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몸을떨었고, 부인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벨벳 위로 세게 문질렀다.
이윽고 부인은 머리를 기울였다. 「입스 씨 누이가 다시 정신이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부인이 말했다. 자기 어머니를 부르고 있구나. 지난 15년 동안 어머니를 찾았지. 불쌍한 영혼 같으니. 나는 저런 식으로 살고 싶진 않다. 수. 죽을 땐 무엇보다도빠르고 깔끔하게 죽고 싶어」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찡긋했다.
부인의 말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때때로 부인이 단지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한 건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 P75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문으로 다가가 발로 문을 차 닫았다.
그리고 벽난로 앞으로 가 손을 녹였다. 랜트 스트리트를 떠나온 뒤로 충분히 몸이 따뜻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모드가 보았던 거울을 보며 일어나 얼굴과 주근깨 난 두 뺨과이를 들여다보았다. 혀를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손을 문지르며 낄낄댔다. 모드는 젠틀먼이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젠틀먼에게 완전히 빠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3천 파운드를 잘 포장한 뒤 내 것이라고 써 붙여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구속복을 든 의사가 정신 병원 정문에서 모드를 기다리며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모드를 만난 뒤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웃었던것도 다소 억지스러웠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왜 그런지 꼭 집어 이유를 댈 수는 없었다. 나는 어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드가 나가고 나자 집은 전보다 더 어둡고 조용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벽난로에서 재가 떨어지는 소리, 유리창이 흔들리고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창으로 다가갔다. 외풍이 지독했다. 외풍을 막기 위해 창문턱에 자그마한 빨•간 모래주머니를 놓아두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모래주머니는 모두 젖어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모래주머니에 손을 대어보니 손가락에 녹색이 묻어났다. 나는 그곳에서 몸을 떨며 바깥 경치를 보았다. 이런 것도 경치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바깥에는 평범한 풀밭과 나무뿐이었다. 검은 새 몇 마리가 잔디에서 벌레를 찍어 내고 있었다. 어느 쪽이 런던일까 궁금해졌다. - P108

모드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춥다고 했다. 자기가 겁에질려 깨어날 경우를 대비해 이번에도 내가 자기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드는 다음 날 저녁에도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녁에도 그랬다. 「괜찮아?」 모드가 내게 물었다. 아그네스는늘 괜찮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메이페어에서는 앨리스 부인과 함께 잔 적이 없지?」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잘은 모르지만, 여주인과 하녀가 여자아이들처럼 같이 자다니, 보통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모드와 내가 함께 자는 게 보통이었다. 모드는 그뒤 악몽을 꾸지 않았다. 우리는 자매처럼 함께 잤다. 정말로 자매 같았다. 나는 언제나 언니나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젠틀먼이 돌아왔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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