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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 이름은 수전 트린더였다. 사람들은 날 <수>라고불렀다. 나는 태어난 해는 알지만 태어난 날짜는 오랫동안 알지못했기에 크리스마스를 생일로 삼았다. 나는 내가 고아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어머니는 죽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나는 석스비 부인의 아이였다. 그리고 아버지 역으로는 템스 강 근처 버러에 있는랜트 스트리트에서 자물쇠점을 하는 입스 씨가 있었다. - P11
다시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스 씨가 말했다. 「모두챙겼나? 그럼 이제 조용히 있어라, 얘들아, 움직이지 말도록. 수. 우리 아가, 네가 문을 열어 주면 어떻겠니? 나는 다시 석스비 부인을 보았고,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기에문으로 가서 빗장을 열었다. 문이 너무나 급작스레 열리며 나를 세게 쳤기에 필은 누군가 어깨로 문을 치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필이 벽에 몸을 딱 기대고 칼을 꺼내 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문이 활짝 열린 것은 단지 바람 때문이었다. 부엌으로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면서, 촛불 절반이 꺼지고 화로에 불꽃이 일어나고 내가 펼쳐 놓은 카드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복도에 남자가 서 있었다. 새까만 옷을 입고, 흠뻑 젖어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발치에는 가죽 가방이 있었다. 희미한 불빛에 남자의 창백한 뺨과 구레나룻이 보였지만, 눈동자는 모자그늘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나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수! 수 맞지? 맙소사! 널 보려고 40마일이나 왔어. 날 여기계속 세워 둘 거야? 추워 죽겠어!」그제야 나는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비록 1년 넘게 보지 못했지만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랜트 스트리트에 오는사람은 백 명에 한 명도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리처드 리버스 또는 딕 리버스 또 어떤 때는 리처드 웰스였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석스비 부인이 나를 바라보며<누가 온 거니?>라고 물었을 때 내가 말한 이름이기도 했다. 「젠틀먼이에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이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진짜 신사들이 직접발음할 때처럼 제대로 발음하지 않고, 생선에서 뼈 발라내듯 적당히 발음을 발라내고 <제먼>이라고 불렀다. - P33
그리고 어쨌든, 부인이 옳았다. 마침내 내가 한몫 잡을 기회가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이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젠틀먼을 보았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내가 말했다. 「좋아요. 하겠어요. 하지만 2천이 아니라 3천 파운드에요. 그리고 만약 그 숙녀가 날 맘에 들어 하지 않아 집으로 돌려보내더라도, 어찌되었듯 백 파운드를 주세요. 고생한 대가로요.」젠틀먼은 생각에 잠기며 망설였다. 당연히, 쇼였다. 잠시 뒤, 젠틀먼은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 역시 손을 내밀었다. 젠틀먼은 내 손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껄껄거렸다. 존이 얼굴을 찡그렸다. 「일주일 안에 수가 틀림없이 울며 돌아온다는 데 걸겠어.」 존이 말했다. 「벨벳 드레스를 입고 돌아올 거야.」 내가 대답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장갑을 끼고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은화가 가득 찬 가방을 들고 말이야. 그러면 넌 날 아가씨라고 불러야 할걸. 그렇죠, 석스비 부인?」 존은 침을 뱉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 혀를 뽑고 말겠다! 「내가 직접 뽑아 주지! 내가 말했다. 어린애 같은 말이었다. 나는 어린애였다! 아마 석스비 부인도 내가 어리다고 생각했으리라.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으로는 부드러운 입술을 만지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고뇌가 서려 있는듯했다. 나는 하마터면 부인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할 뻔했다. 아마 부인은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이제야 내게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다음어떤 무섭고 음침한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된 지금에야 말이다. - P52
유리창에는 갓 얼은 눈꽃이 피어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손가락을 얹고 얼음을 녹여 더러운 물로 만들었다. 입스 씨의 휘파람 소리와 데인티의 발 구르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지만, 내앞에 펼쳐진 버러의 거리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거리에는 내가있는 곳 같은 창가 몇 군데에서만 희미한 빛이 보였고, 사륜마차 불빛이 지나가며 그림자를 던졌다. 그리고 누군가 추위를 헤치고 그림자처럼 빠르고 어둡게 달려왔다가 역시 재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저곳에 살고 있을 모든 도둑과, 도둑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집, 다른 거리, 런던의 더 밝은 부분에서자신들의 삶을, 낯설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보통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는 커다란 집에 사는 모드 릴리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나를 몰랐다. 나도 사흘 전까지만 해도 그 여자를 몰랐다. 그 여자는 데인티 워런과 존 브룸이 우리 집 부엌에서 폴카를 추는 동안 내가 이곳에 서서 자신을 망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을 몰랐다. - P72
「부인 목이 매달리면 아플까요?」내 머리를 쓰다듬던 부인의 손이 멈췄다. 이윽고 부인은 다시좀 전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부인이 말했다. 「목 주위 밧줄 말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 같구나. 좀간지럽지 않을까 싶어「간지러워요?」「따끔따끔하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부인의 손이 여전히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바닥이 열리면요?」 내가 물었다. 그땐 뭔가 느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부인이 다리를 움직였다. 「아마 경련이 있겠지. 부인이 인정했다. 바닥이 열리면 말이야.」나는 호스몽거 레인에서 교수형당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던생각을 했다. 그 사람들은 어김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사람들은 흡사 꼭두각시 원숭이 인형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발버둥쳤다. 「하지만 죽음은 빠르게 찾아온단다.」 부인이 말했다. 「내생각에는 그렇게 빠르기 때문에 고통은 금방 사라질 거 같구나. 그리고 여자를 목매달 때는, 너도 매듭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수, 좀 더 빨리 죽을 수 있게 매듭을 매어 주잖니?」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들고 왔던 초를마루에 세워 놓아, 촛불이 아래에서 부인 얼굴을 비췄고, 때문에 부인 뺨이 부풀어 보이고 눈은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몸을떨었고, 부인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벨벳 위로 세게 문질렀다. 이윽고 부인은 머리를 기울였다. 「입스 씨 누이가 다시 정신이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부인이 말했다. 자기 어머니를 부르고 있구나. 지난 15년 동안 어머니를 찾았지. 불쌍한 영혼 같으니. 나는 저런 식으로 살고 싶진 않다. 수. 죽을 땐 무엇보다도빠르고 깔끔하게 죽고 싶어」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찡긋했다. 부인의 말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때때로 부인이 단지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한 건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 P75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문으로 다가가 발로 문을 차 닫았다. 그리고 벽난로 앞으로 가 손을 녹였다. 랜트 스트리트를 떠나온 뒤로 충분히 몸이 따뜻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모드가 보았던 거울을 보며 일어나 얼굴과 주근깨 난 두 뺨과이를 들여다보았다. 혀를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손을 문지르며 낄낄댔다. 모드는 젠틀먼이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젠틀먼에게 완전히 빠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3천 파운드를 잘 포장한 뒤 내 것이라고 써 붙여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구속복을 든 의사가 정신 병원 정문에서 모드를 기다리며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모드를 만난 뒤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웃었던것도 다소 억지스러웠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왜 그런지 꼭 집어 이유를 댈 수는 없었다. 나는 어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드가 나가고 나자 집은 전보다 더 어둡고 조용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벽난로에서 재가 떨어지는 소리, 유리창이 흔들리고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창으로 다가갔다. 외풍이 지독했다. 외풍을 막기 위해 창문턱에 자그마한 빨•간 모래주머니를 놓아두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모래주머니는 모두 젖어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모래주머니에 손을 대어보니 손가락에 녹색이 묻어났다. 나는 그곳에서 몸을 떨며 바깥 경치를 보았다. 이런 것도 경치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바깥에는 평범한 풀밭과 나무뿐이었다. 검은 새 몇 마리가 잔디에서 벌레를 찍어 내고 있었다. 어느 쪽이 런던일까 궁금해졌다. - P108
모드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춥다고 했다. 자기가 겁에질려 깨어날 경우를 대비해 이번에도 내가 자기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드는 다음 날 저녁에도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녁에도 그랬다. 「괜찮아?」 모드가 내게 물었다. 아그네스는늘 괜찮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메이페어에서는 앨리스 부인과 함께 잔 적이 없지?」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잘은 모르지만, 여주인과 하녀가 여자아이들처럼 같이 자다니, 보통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모드와 내가 함께 자는 게 보통이었다. 모드는 그뒤 악몽을 꾸지 않았다. 우리는 자매처럼 함께 잤다. 정말로 자매 같았다. 나는 언제나 언니나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젠틀먼이 돌아왔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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