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학생들을 뽑을 때 인원을 한정해서 별도로 입학 사정을 한 결과가 20퍼센트니까 결국은 10명이 입학했다면 2명 정도가 우리나라 학생이었어요. 8명은 일본 학생이니까 조선 학생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니까 해방 후에 우선 학생을 복귀시켜야 뭘 하겠는데 학생들이 원천적으로 없는 겁니다. 고작 몇 명밖에 안 되었던 겁니다.
어떡하든지 대학을 복원하긴 해야겠고 학생을 확보하려니 어느 대학 출신이든 상관없다는 거였죠. 원래는 복학생이 제국대학 학생들이어야 되는데, 학생증이나 무슨 수료증 같은 것을 제시하고 간단한 구술 시험만 거치면 다른 대학 학생들도 제국대학에 복학을 한 겁니다. 학년에 따라 편입도 시켰어요. 우리나라 사람이 옛날부터 학구열이얼마나 강합니까? 모두 다 대학에 가려고 그러지요. 그런데 가만히보니까 복학이 간단해요. 증서만 하나 내놓고 몇 마디 하면 입학생이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걸 보고 세상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인쇄소마다 어느 대학 학생증, 어느 대학 무슨 수료증, 그것을 인쇄해서 비슷하게 도장을 새겨서 찍었어요. 그 값이 처음에는 꽤 비싸서 지금 돈으로 하면 뭐 10만 원씩 하더니만 나중엔 만원 아닌 5,000원에도 살 수 있었어요.
1945년 후기부터 1946년, 1947년까지 약 3년 동안 대학생들은 거의 가짜입니다. 조금 충격적이긴 하겠지만, 이거는 내가 직접 목격해서 아니까 증언하는 겁니다. 아마 기록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증서를내면 교수가 면접을 꼭 해요. 면접을 하는데 대학 재학생, 수료생이하도 많이 몰려오니까 이제 진짜와 가짜 구별해야 하는데 방법이 있어야지요. 지금 같으면 그 대학에 우편 등으로 조회를 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때 그게 돼요? 전혀 안되지요. - P171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1세대는 이처럼 미비한 상황에서 사회로 배출되자 당시 황국신민의 교화를 위해 중점을 두었던 사범학교 교유로 배치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사입니다. 일제하에서 사범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하면 그것은 상당한 영예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유들은 당시 학생들을 완전히 일본 식민으로 만드는 중차대한 책임을 지고 있어서 호봉도 높고 월급도 많이 받았거든요. 어디를 가든 대우를 해주었지요. 어느 모임이나 장소에 가면은 사범학교 교사가 맨 앞자리에 앉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어쩌면 친일파중의 친일파인 셈이었는지도 몰라요.
당연히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 어문학 전공 출신자도 졸업하자마자 각처에 있는 사범학교 교사로 전부 발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거기서 거의 해방을 맞이했으니까 이 1세대들은 중등학교 국어 교사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연구 업적이 전혀 없었는데도 해방되고 교수가 부족했던 덕분에 갑자기 교수가 된 겁니다. - P175

●●● 경성제국대학이 결국은 국립서울대학교가 된 셈인데요. 이 학교명이 당시 수도 서울 명칭과도 당연히 연관되어 보입니다. 일본의지배를 받기 전에 조선의 수도는 한양이었고, 대한제국 시절에 한성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이한성이 경성으로 바뀌어 36년간 수도의 고유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조선의 중심 도시 경성은 어떻게 서울로 바뀌게 된 것인지요?
◆◆◆ 학교 명칭과 관련해서 언급할 내용이 있어요. 해방 직후까지는경성이 정식 명칭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민간에서는 이미 한양이든한성이든 경성이든 개의치 않았고 보통사람들은 다 서울이라고 말했어요. 서울의 어원은 서라벌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게 수도의 개념으로 바뀌어 식민지 아래에서도 민간에서 다 서울이라고 사용했어요.
간혹 어떤 필요에 따라서는 경성이나 한양이라고도 한 것 같습니다만 요. 그런 계기로 결국 해방 후에 서울시로 명칭이 바뀌게 됩니다. 국립서울대학교라고 명칭이 붙은 것도 이미 당시에 많은 언중이 서울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그 명칭이 가장 좋겠다 싶어서 결정된 것이겠지요. 해방이 되고 국권을 회복한 상황에서 수도 명칭을 일제시대처럼 경성으로 계속 사용했다면 거부감이 많았을 겁니다. 그렇다고구시대처럼 한양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선호하지도 않았어요. 우리말지명을 최초로 공식화하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서울이라는 명칭으로 고쳐진 것입니다. - P190

 그러나 대혼란의 시기에도 대학은 피란지에서 다시 운영되었으며 학회의 창립과 학회지의 발간 등 학술 활동은 계속이어졌다.
1950년 9월에 서울이 수복되면서 대학들도 다시 운영을 시작했으나 곧 이어진 1.4후퇴에 따라 부산으로 다시 피란했다. 정부는 모든국공립 및 사립대학을 전시연합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결합하여 운영하도록 했다. 부산에서는 서울 소재 대학들을 중심으로 한 전시연합대학이 1951년 2월에 출범하여 운영되다가 1952년 5월에 폐지되었다. 이후각 대학은 기존 건물은 물론 천막, 창고 등을 교사로 이용하여 종전까지 피란처에서 수업을 이어갔다. 강의와 연구에 필요한 자료도 부족하고 시설도 열악했지만 학문에 대한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전란으로 부산에 신진 학자들이 모이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운 교류의 계기를 제공했다. 해방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이른바 2세대로 통칭되었던 신진 학자들은 이미 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학문 공동체를 구상하고 운영하고 있었다. 1948년 7개 대학 국어국문학과의 50여명의 학생이 조선어문학연구회를 결성하고 각 대학을 순회하며 연구 간담회를 개최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피란지 부산에서 다시 만나 학회를 창립하고 학회지 <<국어국문학>>을 발간하게 되었다.
학회지의 발간과 국어국문학회의 창립 과정은 전쟁의 한복판에서모든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분투기이다. 뜻을 같이한 신진학자들은 대학, 고등학교, 출판사에 재직하면서 사비를 모으고 학술지를 직접 판매하여 출판 비용을 마련했다. 이들은 1952년 9월에 첫 모임을 열어 불과 한 달 후에 창간호를 발간하고, 12월에는 국어국문학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그동안 억눌렸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강한 추진력으로 승화시켰다. 국어국문학회는 휴전이 이루어지고 정부와 각대학이 환도한 이후에 학술 발표회를 개최하고 분과회를 만드는 등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국어국문학계의 대표 학회로 성장했다. - P221

 먼저 당시의 시대별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남북 대립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부터였습니다. 남측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안호상을 문교부장관에 임명하고 1949년 3월 중학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창설하여 군대식 조직으로 묶어놓았습니다. 대통령은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외치면서 무력통일을 주장했습니다.
학도호국단은 1949년 10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전국학도체육대회에서 분열식을 거행했습니다. 군대 조직이라 분열식이 거행됐는데, 단장인 안호상 장관이 제복에 제모를 입고 단상에 올라 열병식 경례를 하던 모습이 마치 독일 박사답고 히틀러 유겐트를 연상케 했던기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합니다. 장비나 질과 양 모두 충분하지 않은 군대를 갖고 북진통일, 무력통일을 입으로만 외친 것이 북측이 주장하는 한국전쟁 북침설의 구실이 되기도 했을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19혁명으로 쫓겨나 망명했지만 오히려 그런 것을 잘 모르고 어른으로, 대통령으로 받든 국민이 가엾게 생각됩니다. 6.25사변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방송으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장담했습니다. 혼자 서울을 몰래 빠져나가 안전지대인 대전에 앉아서 방송으로 "서울 사수한다. 서울 시민들은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도 좋다"라고 한 것이지요. - P224

●●●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학회지를 만들고 학회를 창립한일이 기적과 같이 느껴집니다. 대부분 해방 이후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 분들이 학문의 지향점을 스스로 발견하고 주도적으로 앞날을 개척한 대단한 성과인데 허웅 선생이 1956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2세대 학자들의 학문적 방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확고한 방법론의 토대 없는 암중모색 식의 재래의 연구방법을 지양하여 새로운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국어국문학을 수립하고 국수주의적이라고 불리우기 쉬운 국어국문학계에 생신한 생명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우리들이 지향하는 바이었습니다. 생계를지탱하지도 못하는 박봉이면서도 우리들은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그해 11월 1일에 <국어국문학> 제1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사륙배판 16페이지의 팸플릿이었으나 이것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기쁨이란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들만의 기쁨만이 아니라 여러 선배 동지들에게서 감격에 넘치는 환영을 받았던것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회고하신 바 있습니다.
국어국문학에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려는 뚜렷한 의식이 2세대학자들에게 공유되고 있었으며 국어국문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준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 P254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한국어의 어문 규범 정립, 사전 편찬, 한국어 연구와 교육을 위한 토대 마련이라는 근대적 과제는 해방 이후 교과서 편찬, 1950년대의 《큰사전> 발간 등으로 일단락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과제를 완결하는 단계에서 어문 규범을 둘러싼 격렬한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은 의견 충돌은 이른바 ‘한글간소화 파동‘이다. 이 한글 간소화 파동은 근대 초부터 지속되었던 형태주의 표기와 표음주의 표기 간 충돌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에 익숙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충돌의 성격도 있었다. - P267

1930년대에 나온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은 언론과 출판에서 수용되고, 미군정기의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20년 가까이 통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구한말에 출국하여 해방 직후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구한말에 사용했던 익숙한 철자법이 통용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이 있었다. 1953년 4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현행 철자법이 너무 어려워서 한글 전용에 대한 법률이 실효를 얻지 못한다며 철자법을 개정하라고 지시했고, 정부 공문서는 즉시 간이한 구철자법을 사용하라는 국무총리 훈령 8호가 각 부처장 및 도지사에게 전달되었다. 한글 간소화 파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큰사전>의 편찬과 출판 작업을 병행하고 있던 한글학회에 한글 간소화는 일제의 탄압에도 저항하며 편찬하여 완성 단계에 이른《큰사전>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였다. 이런 맥락에서 한글 간소화 정책은 연구자들에게 어문 운동 탄압이자 민족 독립 운동의 소중한 결실을 파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러한 인식은 출신 학교나 소속된 조직을 넘어 국어학 연구자들을 집결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시기를 회고하며 김민수 선생은 당시의 많은 사람이 맞춤법, 외래어 표기, 한글 전용 등 어문 규범과 국어 정책에 다양한 의견을 내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분위기나 공간을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반복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문 규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권력의 돌출적 개입으로 인한 파동은 결과적으로 어문 규범의 논의 폭을 좁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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