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프로그램은 거대한 논란을 일으킵니다. 많은 사람이 프로그램의 효과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법적으로 금지된 마약을 사용하라고 돕는 일에 세금을 쓰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런다고 HIV감염이 줄어들 리 없다‘라는 생각이었지요. 논쟁 속에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사회는 ‘과연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이 HIV 신규감염을 줄일 수 있을까?‘, ‘혹시라도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마약사용이 증가하지는 않을까?"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논쟁 속에서 1996년 역사적인 논문이 학술지「랜싯』에 발표됩니다. 돈 잘레이스Don Jarlais 교수 연구팀은 「뉴욕의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과 마약 사용자 집단에서의 HIV발병률」이라는 논문에서 뉴욕 지역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의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마약사용자들은 연간 100명당 1.56명이나 1.38명이 HIV에 감염되지만, 그렇지 않은 마약 사용자들은 연간 100명당 5.26명이나6.23명이 감염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주삿바늘 무상 교환프로그램이 HIV 신규 감염을 3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결과입니다. 이 논문은 그 논쟁적인 프로그램의 효과를 증명한 최초의 연구입니다. - P181

분노나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를 실제로바꾸는 일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불법인 마약 사용을 모두 막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주삿바늘로 전파되는 HIV 감염 역시 함께 막을 방법이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정책을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뉴욕시 보건담당 부서는 실현 가능하면서도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HIV/AIDS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휘둘리지 않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정책을 고안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P182

이렇게 말하면 HIV는 당뇨나 고혈압 같은 다른 만성질환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그 바이러스의 전파를 바라보는 시각도 획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성관계 시 콘돔을 사용하면 바이러스 전파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놀라운 연구 결과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7년 9월 27일 미국질병관리본부 웹사이트에 공지된 서한을 통해 공식적으로세상에 알려진 내용입니다. 미국질병관리본부 HIV/AIDS 분과 책임자인 유진 매크레이 Eugene McCray는 이 서한에서 HIV 감염인이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아 체내 바이러스 농도가 일정 수준이하로 내려가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도 동성 간이나 이성간 모든 성관계에서 파트너에게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 - P183

HIV 감염인은 특정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HIV 감염인을 PL, 즉 ‘HIV 감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People Living with HIV infection‘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당뇨병 환자Diabetic patient를 ‘당뇨병을 가진 환자 Patient with diabetes‘ 라고, 조현병 환자 Schizophrenic patient를 ‘조현병을 가진 환자 Patient with schizophrenia‘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동의를 얻기 시작한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은 질병 이상의 존재이고, 질병을가지고 살아가는 시간 역시 잘라낼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기때문이지요.
혐오는 쉽습니다. 가장 약하고, 아픈 당사자들을 욕하면되니까요. 어떤 이들은 HIV 감염인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거다. 네 치료에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라고 함부로 손가락질합니다. 인권과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그릇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혐오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증가시키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한국 사회의 HIV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첫걸음은 혐오와사회적 낙인을 거두고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수십 년간 과학 연구를통해 인류가 알게 된, HIV 감염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 P188

김도현 ㅡ 제가 얼마 전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OECD 회원국의 평균 장애인구 비율이 24.5%더군요. 한국은 5분의 1 수준인 5%에 불과하고요. 장애인으로 인정되는 인구가 늘어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한 낙인이 접점 줄어드는 과정과 함께 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PL분들이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을 장애라고 이야기할수 있다는 건, 장애인 운동의 성과 속에서 장애에 대한 낙인이 일정 부분 감소되고 장애가 좀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구 비율과 관련해서 조금 더 주목해 볼 만한 국가들이 존재하는데요. 바로 한국의 장애인 운동이 탈시설지원법을 성안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입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2000년대 중반 탈시설을 완수해서 장애인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인 동시에, OECD 회원국 중 정부에서 공식적인 장애인구 통계를 국제기구에 제출하지 않는 유이한국가들이기도 합니다. 이는 두 나라 정부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적장애 모델에 입각해 장애를 바라보기 때문이에요. 즉, 장애란 어떤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특질(손상) 자체가 아니라 물리적·사회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므로,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장애인구를 산정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두 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기 나라의 인구 중 장애인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서비스 지원 과정에서 꼭 장애라는 개념을 거치지 않더라도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고, 차별 금지의 경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종의 신청주의에 입각해 사례별로 판단하면 되니까요. - P200

김승섭 ㅡ 기득권의 언어는 논리적으로 깔끔하고 잘 정리된 것처럼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명확한 언어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을 말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이는 사회적 약자가 ‘언어의 부재‘로 고통받는 이유이기도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미 고착화된 세계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말하며 그 강고한 장벽에 몸을 부딪치면서 만들어 내는 균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 제 여건이 마땅치 않아 기고 요청에 많이 망설였는데, 김도현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비마이너』에 글을 써달라는 김지영 선생님의 말씀은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쉬운 답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동년배 활동가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두 분 오늘 감사했습니다. - P204

김승섭 ㅡ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조차 동성애자 집단에서 HIV 감염 유병률이 높다는 이유로 동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 집단에서 어떤 질병의 유병률이 높다고 그 집단을 병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또한 예방차원에서 병의 원인은 변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질병은 나이가 들면 발생 위험이 늘어난다. 그러나 나이 듦이 원인이니 나이를 줄이자고 제안할 수도 없고, 제안해서도 안 된다. 나이는 변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 같은 성적지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인정해야 할 존재의 일부이지, 바꿀 이유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오페라리오 ㅡ 동의한다. HIV 감염의 위험 요인 중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성적 지향이 아니라, 사회적 낙인과 배제이다. 더 인도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HIV 감염을 바라봐야 한다.
한편 미시적 수준에서 HIV 감염의 원인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이다.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성매매 등으로 HIV 감염이 많이 퍼진다.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는 이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라고 할 건가? 어떤 사회에서는 대다수 여성의 HIV 감염 경로가 부부 간 성관계이다. 그곳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원인인가? 모든 사회에서 HIV 감염의 원인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이다. - P210

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예민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오갔습니다. "동성애에 대해 교육하면 결국 동성 간 섹스에대해서도 직접 말하게 될 텐데 괜찮을까요?" 제 건너편에 앉은 한 어머니가 던진 질문에 5학년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답했습니다. "물론 그런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있겠지요. 그때마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며 안전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답을 했어요. 지금까지 아이들은 제 답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교에서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이유였습니다. 성적 지향만이 아니라 인종, 성별, 출신 국가, 경제적 상황 등에 따라 다양한 소수자가 학교에 있는데, 이 사건을 방치한다면 다른 소수자들이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P214

한국의 한 거대 정당은 선거 때마다 ‘동성애 반대‘를 구호로 내겁니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세계적 흐름에서 낙오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수십 년을 정치인으로 살아온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진심으로성소수자를 혐오하거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혐오는 저열한만큼 편리하니까요. 전자라면 노예제 찬성론자나 여성차별론자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맞고, 후자라면 자신이 소수자 혐오를 통해서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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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 P108

해고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갑자기 ‘산자‘와 ‘죽은 자‘로 나뉘어 어제까지형, 동생 관계였던 ‘산자들이 "나라 망치는 빨갱이"라고 욕하는것을 경험하며 생겨난 트라우마가 큰 상처였다. 그런데 해고 노동자의 아내들도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어제까지 같은 아파트에서 언니, 동생 하며 함께 다니던 이들이 남편의 ‘생존‘ 여부가 갈리자 길에서 마주쳐도 눈맞춤을 피했던 것이다. 그 인간적 배신감이 때로는 남편의 정리해고 자체보다 더 아팠다.
남편들이 투쟁하는 동안 집안을 감정적·경제적으로 돌보는 것은 아내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정리해고와 그 이후 투쟁과정에서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돌보며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시댁에서는 "너라도 남편 마음 편안하게 해줘야 되지 않겠냐?"라며 격려 아닌 격려를 했고, 친한 친구들은 "그렇게 힘들면 남편과 이혼을 하든지 해라"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상처는 안에서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들에게 "당신은 괜찮은가요?"라고 묻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P112

일하고 살아가는 공간에 나를 위한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화장실이 있더라도 그걸 이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그 공간이 나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사회가 "당신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당신을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가학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수자들이 사회 곳곳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합리적인‘ 근거가되어,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화장실의 부재는 일터와 대학과 국회를 비롯한 공공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근거로 작동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트랜스젠더나 장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 P125

야간 교대 노동이 발암 요인이라는 근거는 학술적으로도 확고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2007년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교대제 근무shift work"를 납과 같은 등급인 유력한 발암물질 IARC 2A(Probable Carcinogens)로 분류했습니다. 전 세계 노동인구 중 20% 정도가 야간 노동이 수반되는 교대제근무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결정이었지요. 2019년 7월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제암연구소에서 주최한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 27명은 2007년의 분류결정 이후 출판된 논문을 재검토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이들은 교대제 근무를 여전히 유력한 발암물질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며,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발암물질의 이름을 "야간 교대제 근무night shift work"로 바꿉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뿐, 야간 교대제 근무는 유력한 발암물질입니다. - P134

같은 인간이지만 경쟁하는 무대 자체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코끼리가 전쟁으로 동료와 부모가 무참히 죽어나가던 고롱고사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코끼리는 안전한 국립공원에서 보호받으며 지내는 것처럼요.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2011년 『지역보건과 역학』에 발표된 이화여자대학교 정최경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사망 불평등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1995~2000년에 태어난 어린이를 기준으로 1~4세 영유아는 아버지가 중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경우,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경우와 비교해 사망률이 2.5배 높았습니다. 5~9세의 경우 이 수치는 2.8배로 증가합니다. 이러한 사망률 차이의 가장 큰 원인은 교통사고를 비롯한 사고성재해입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위험한 지역에서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대개 사고를 당했을 때 즉시 필요한 응급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 환경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더 자주 다치지만 더 늦게 치료받습니다.
진화의 힘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하지요. 한 사회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목숨이 계속 부당하게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인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고롱고사‘는 어디인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지, 이 부조리한 생존경쟁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밀렵꾼은 누구인지 말입니다.
- P136

2022년 8월 8일, 폭우가 내리는 동안 서울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이 숨졌다. 46세 홍 모 씨는 갑자기 쏟아진 빗물에잠겨 발달장애를 가진 언니, 자신의 10대 딸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물이 들이치는 과정에서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해 며칠을 서성였다. 참사 이틀 뒤, 서울시에서는 ‘지하· 반지하‘를 주거 목적으로 짓는 것을 전면 불허하고, 향후 20년 안에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안전대책‘ 발표 다음 날, 숨진 홍 씨가 2018년에 내가 책임연구원으로 진행했던「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근무환경 및 건강 연구」의 참여자였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세월호 참사가 떠올랐다. 가라앉는 배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사망했던 304명처럼, 반지하방에 살던 세 가족은 물에 잠겨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2014년, 살릴 수 있었던사람을 살리지 못했던 참사를 두고 당시 대통령이 내놓았던 대책은 ‘해경 폐지‘였다. 구조 과정에서 무책임했던 해경을 처벌하는 일은 필요했지만, 해상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기관을 성급히 폐지하는 것이 미래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대책일 수는 없었다. 두 사건 사이의 8년을 돌이켜 보면 질문이 남는다. 해경폐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대책‘이었을까.
서울시의 대책은 얼마나 다를까. 장기적으로 반지하방 거주자가 줄어야 한다는 데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반지하를 좋아해서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반지하방은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햇빛이 들지 않는 자리까지 찾아간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반지하방이 없어지면 그들은 더 안전한 곳을 선택해 살 수 있을까. 정책 결정 과정에 지하와 반지하에서 살고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반영됐는가. 그 복잡한 맥락을 헤아릴 시간도 가지지 않은 채 반지하방 주거 금지 정책을 발표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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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우리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는 데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이 시대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께서 (부디 제 신랄함을 용서해 주시길.) 시계의 태엽을 감는 사람 즉 시계 제조 장인이거나 인간의 모습이 아닌 매우 모호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정령‘과 같은 존재라면, ‘영혼‘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불편하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지배자가 이런 덧없고 순간적이고 애매한 것을 다스리려고 하겠습니까? 실험실에서 그 존재가 입증되지 않은 것들을 향해 권력을 휘두르고싶어 하는 계몽군주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폐하, 인간의 진정한 권력은 인간의 육신에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가가 만들어지고 국가 간에 국경선이 수립되었다는 것은 결국 명확히 규정된 공간에만 인간의 육체를 머물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자와 여권이 만들어졌다는 건, 이동과 움직임의 자연적인 필요성을 제한하고 조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금을 부과하는 통치자는 자신의 국민에게 어떤 것을 먹이고 어디서 잠을 재울지, 비단옷을 입힐지 마직 옷을 입힐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 P396

마찬가지로 폐하께서도 어떤 시신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결정하십니다. 모유가 가득 찬 어머니의 가슴이 모든 아이에게 고른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언덕에 자리한 궁궐에 사는 아기가 싫증 날 때까지 젖을 빠는 동안, 계곡의 작은 마을에 사는 아기는 얼마 남지 않은 젖에 만족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 수천 명의 육체를 피바다로 밀어넣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다스리는 것은 삶과 죽음의 왕이 되시는 것이며, 그것은 가장 큰 나라의 황제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저는 당신, 삶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폭군, 압제자에게 이 글을 씁니다. 이제 저는 간청하지 않고, 저만의 방식대로 당당히 요구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을 수 있도록 제게 돌려주십시오. 폐하, 저는 당신을 끝까지 따라다닐것입니다. 어둠 속의 은밀한 음성처럼, 저는 죽어서도 결코 당신에게 평화를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속삭임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요제피네 졸리만 폰 포이히터슬레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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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공간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모든 곳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더욱 거대하게 만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세부 항목들은 사라지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모양을 잃어버리며 쪼그라들어서 불분명해진다. 낮에는 ‘아름답다‘ 혹은 ‘유용하다‘고 말할 수있었던 것들이 밤에는 마치 형태를 잃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가상으로 존재한다. 낮 시간에 드러난 형태의 다양성, 색의 현존, 음영 따위는 전부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크림색 소파 천, 잎사귀 문양이 찍힌 벽지, 커튼의 술 장식 따위가 과연 어디에 쓰인단 말인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드레스의 초록색도 마찬가지다. 상점 진열장에 걸려 있을 때 대체 무엇 때문에 저 빛깔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던졌는지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다. 단추나 후크, 걸쇠는 없다. 어둠 속의 손가락이 마주치는 건 모호한 돌출부, 거친 면, 딱딱한 덩어리뿐이다. - P346

그다음에는 아이와 놀아 주는 게 일과였다. 날씨가 좋으면 손자를 베란다로 데리고 나가곤 했다. 사실 딱히 볼 건 없었다. 물이다 말라 버린 바다에서 자라난 거대한 회색빛 산호초를 연상시키는 아파트 건물들만 사방에 즐비했으니, 그 바다는 움직이는 생물로 가득하고, 거대한 대도시 모스크바의 어슴푸레한 수평선과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시선은 구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구름의 아랫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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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렉시트에 찬성한 사람들 중 다수가 영국에 있는 거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이민자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니 이민자를 없애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회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데도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민자들과 의미 있는 교류를 하는 집단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인구의 거의 50%가 이민자인 런던에서는 브렉시트에 찬성한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매우 낮게 나왔다. 이민자들과 자주 만나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이 끔찍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 P71

윌리엄스 ㅡ  ‘강화된 경계심 측정‘ 설문지로 실제 차별 경험이 아니라 차별을 경험할 것 같다는 우려만으로도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가령 집을 떠나기 전에 미리 오늘 어떤 일을 당할지 걱정하고 무시나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등의 스트레스가 삶을 해칠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문지로 인해 1990년대 중반 내가 가지고있었던 중요한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당시 여러 도시에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정해진 시간마다 혈압을 측정했을 때, 낮에는 젊고 건강한 흑인과 백인의 혈압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았지만 밤에 잠을 잘 때면 백인의 혈압 감소폭이 흑인보다 더 컸다. 밤에도 흑인의 혈압이 많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늘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 긴장에 따른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 마치 잠이 들었을 때도 온전히 긴장을 놓지 못하고한쪽 눈을 뜨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최근에는 낮에 차별을경험한 흑인들의 경우 밤에도 혈압이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가 여럿 나왔다. 차별적인 환경은 삶의 모든 시간에 악영향을 줄 수있다. - P73

김승섭 ㅡ 제도적 차별은 법률로 막을 수 있고, 일대일 관계에서 누군가를 차별하는 행동은 혐오 발언 규제 등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차별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무의식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은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
윌리엄스 ㅡ 내가 타인을 차별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차별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차별적인 행동을 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일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편견은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풀 때 더 쉽게 나타난다. ‘반고정관념 이미지 counter stereotype image‘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만약에 모든 여성이 연약하다고 생각한다면, 저녁에 잠들기 전 강인한 여성은 어떤 모습일지 여러 번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대체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고정관념을 가진 대상을 계속해서 직접 만나 관계를 맺는 것 역시 내재적 편견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공동체에 존재하는 부정적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미디어를 통해 고정관념을 바꾸려는 시도가 더 적극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 TV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을 매우 매력적으로 그릴 때, 동성애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 P76

김승섭 ㅡ 당신은 정신질환과 관련해 서로 다른 두 가지 낙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가진사람들에 대해 갖는 ‘대중 낙인 public stigma‘ 이고 또 하나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갖게 되는 ‘자기 낙인self stigma‘ 이다.
코리건 ㅡ 사회는 유색인종, 여성, 동성애자, 휠체어 사용자와 같은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든다. 그 고정관념에서 편견이 발생하고 편견은 차별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들이 무능력하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편견은 그런 고정관념에 동의하는 것이고, 차별은 "당신을 고용하지 않겠다", "당신이 학교에 오지 못하게 하겠다"와 같은 말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일련의 과정이 모두 대중 낙인이다. 대중 낙인은 차별로 이어진다. 반면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위험하고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낙인은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우울증의 끔찍한 역설은 스스로가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것을 잊을 만큼 심각하게 우울해지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로인해 당사자는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 P86

 그러나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말을 하기 시작하면 훨씬 더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낙인을 줄이려는 교육이나 캠페인에 돈을 쓰기보다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정신질환 당사자가 직접 "나도 똑같은 사람이고, 바로 이 자리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미국 동성애커뮤니티의 경험이 훌륭한 모범 사례다. 한때 미국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소아성애자라는 고정관념으로 이들이 선생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연구자들이 잘못된 낙인이라고 지적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동성애자들이 직접 나서서 "입 다물고 나를 봐라. 나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다"라고 직접 말한 뒤에야 그러한 고정관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아이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낙인 없이 성장했다. 그건 단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성적 지향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두 아이에게 동성애자 삼촌이 있었고, 가까운 동성애자 목사가 있었고, 부모와 친구로 지내는 동성애자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를 혐오하더라도, 옆자리에서 일하는 동성애자에게 "당신이 역겹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 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남은 힘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혐오 발언을 막고, 장기적으로는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정신질환 역시 당사자가 사회에 나오고 존재를 드러내야 낙인을 줄일 수 있다. - P89

세 번째 키워드는 정치입니다. 작년부터 진행된 이동권투쟁을 지켜보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처음에는 그 불편함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던 시민들이 투쟁에 나선 장애인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출근을 위해 지하철을 탄이들이 이동권 투쟁으로 인해 지각하는 일이 반복되자 "왜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를 주느냐"라며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정치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2022년 3월, 대선에서 막 승리했던 당시 국민의 힘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서울 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라고 규정했고, 정부에서는 장애운동 자체를 적대시하며 처벌하고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운영해야 하는 국가 살림에서 모든 요구 사항을 받아들일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정부와 정치인들은 마땅히 거쳐야 할 경청과 조율이라는 과정을 생략한 채 장애인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데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장애인과 시민을 분리시키고 그들이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기를, 그렇게 여론의 불만이 점점 더 커져 장애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시민‘의 범주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 P95

『편견 The Nature of Prejudice을 저술한 고든 올포트 Gordon Allport는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가 외부인과 만날 때,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어떤 만남은 편견과 혐오의 재생산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만남이 상호 이해로 이어지기 위한 네 가지 조건 중 하나는 그 만남이 위로부터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더라도 인종차별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교장이, 기업주가, 대통령이 없다면 그 만남은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의 확대로 이어집니다. 저는 한국의 정치가 지난 2년 동안 이동권 투쟁의 목소리를 방관했다는 몇몇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가장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싸우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악화시킨 적극적 개입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P96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못합니다. 근거는 언어의 형태를 한 지식으로 표현되는데, 그지식의 생산에는 자본과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동권투쟁에 나선 장애인을 비난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모습처럼, 공동체가 오랫동안 누적된 차별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개인에게모든 책임을 부과할 때, 차별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당사자는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와 기회를 빼앗깁니다. 그러한 조건위에서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하는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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