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공간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모든 곳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더욱 거대하게 만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세부 항목들은 사라지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모양을 잃어버리며 쪼그라들어서 불분명해진다. 낮에는 ‘아름답다‘ 혹은 ‘유용하다‘고 말할 수있었던 것들이 밤에는 마치 형태를 잃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가상으로 존재한다. 낮 시간에 드러난 형태의 다양성, 색의 현존, 음영 따위는 전부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크림색 소파 천, 잎사귀 문양이 찍힌 벽지, 커튼의 술 장식 따위가 과연 어디에 쓰인단 말인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드레스의 초록색도 마찬가지다. 상점 진열장에 걸려 있을 때 대체 무엇 때문에 저 빛깔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던졌는지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다. 단추나 후크, 걸쇠는 없다. 어둠 속의 손가락이 마주치는 건 모호한 돌출부, 거친 면, 딱딱한 덩어리뿐이다. - P346

그다음에는 아이와 놀아 주는 게 일과였다. 날씨가 좋으면 손자를 베란다로 데리고 나가곤 했다. 사실 딱히 볼 건 없었다. 물이다 말라 버린 바다에서 자라난 거대한 회색빛 산호초를 연상시키는 아파트 건물들만 사방에 즐비했으니, 그 바다는 움직이는 생물로 가득하고, 거대한 대도시 모스크바의 어슴푸레한 수평선과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시선은 구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구름의 아랫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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