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 P108

해고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갑자기 ‘산자‘와 ‘죽은 자‘로 나뉘어 어제까지형, 동생 관계였던 ‘산자들이 "나라 망치는 빨갱이"라고 욕하는것을 경험하며 생겨난 트라우마가 큰 상처였다. 그런데 해고 노동자의 아내들도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어제까지 같은 아파트에서 언니, 동생 하며 함께 다니던 이들이 남편의 ‘생존‘ 여부가 갈리자 길에서 마주쳐도 눈맞춤을 피했던 것이다. 그 인간적 배신감이 때로는 남편의 정리해고 자체보다 더 아팠다.
남편들이 투쟁하는 동안 집안을 감정적·경제적으로 돌보는 것은 아내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정리해고와 그 이후 투쟁과정에서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돌보며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시댁에서는 "너라도 남편 마음 편안하게 해줘야 되지 않겠냐?"라며 격려 아닌 격려를 했고, 친한 친구들은 "그렇게 힘들면 남편과 이혼을 하든지 해라"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상처는 안에서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들에게 "당신은 괜찮은가요?"라고 묻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P112

일하고 살아가는 공간에 나를 위한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화장실이 있더라도 그걸 이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그 공간이 나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사회가 "당신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당신을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가학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수자들이 사회 곳곳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합리적인‘ 근거가되어,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화장실의 부재는 일터와 대학과 국회를 비롯한 공공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근거로 작동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트랜스젠더나 장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 P125

야간 교대 노동이 발암 요인이라는 근거는 학술적으로도 확고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2007년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교대제 근무shift work"를 납과 같은 등급인 유력한 발암물질 IARC 2A(Probable Carcinogens)로 분류했습니다. 전 세계 노동인구 중 20% 정도가 야간 노동이 수반되는 교대제근무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결정이었지요. 2019년 7월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제암연구소에서 주최한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 27명은 2007년의 분류결정 이후 출판된 논문을 재검토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이들은 교대제 근무를 여전히 유력한 발암물질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며,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발암물질의 이름을 "야간 교대제 근무night shift work"로 바꿉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뿐, 야간 교대제 근무는 유력한 발암물질입니다. - P134

같은 인간이지만 경쟁하는 무대 자체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코끼리가 전쟁으로 동료와 부모가 무참히 죽어나가던 고롱고사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코끼리는 안전한 국립공원에서 보호받으며 지내는 것처럼요.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2011년 『지역보건과 역학』에 발표된 이화여자대학교 정최경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사망 불평등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1995~2000년에 태어난 어린이를 기준으로 1~4세 영유아는 아버지가 중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경우,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경우와 비교해 사망률이 2.5배 높았습니다. 5~9세의 경우 이 수치는 2.8배로 증가합니다. 이러한 사망률 차이의 가장 큰 원인은 교통사고를 비롯한 사고성재해입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위험한 지역에서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대개 사고를 당했을 때 즉시 필요한 응급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 환경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더 자주 다치지만 더 늦게 치료받습니다.
진화의 힘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하지요. 한 사회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목숨이 계속 부당하게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인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고롱고사‘는 어디인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지, 이 부조리한 생존경쟁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밀렵꾼은 누구인지 말입니다.
- P136

2022년 8월 8일, 폭우가 내리는 동안 서울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이 숨졌다. 46세 홍 모 씨는 갑자기 쏟아진 빗물에잠겨 발달장애를 가진 언니, 자신의 10대 딸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물이 들이치는 과정에서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해 며칠을 서성였다. 참사 이틀 뒤, 서울시에서는 ‘지하· 반지하‘를 주거 목적으로 짓는 것을 전면 불허하고, 향후 20년 안에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안전대책‘ 발표 다음 날, 숨진 홍 씨가 2018년에 내가 책임연구원으로 진행했던「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근무환경 및 건강 연구」의 참여자였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세월호 참사가 떠올랐다. 가라앉는 배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사망했던 304명처럼, 반지하방에 살던 세 가족은 물에 잠겨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2014년, 살릴 수 있었던사람을 살리지 못했던 참사를 두고 당시 대통령이 내놓았던 대책은 ‘해경 폐지‘였다. 구조 과정에서 무책임했던 해경을 처벌하는 일은 필요했지만, 해상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기관을 성급히 폐지하는 것이 미래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대책일 수는 없었다. 두 사건 사이의 8년을 돌이켜 보면 질문이 남는다. 해경폐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대책‘이었을까.
서울시의 대책은 얼마나 다를까. 장기적으로 반지하방 거주자가 줄어야 한다는 데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반지하를 좋아해서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반지하방은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햇빛이 들지 않는 자리까지 찾아간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반지하방이 없어지면 그들은 더 안전한 곳을 선택해 살 수 있을까. 정책 결정 과정에 지하와 반지하에서 살고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반영됐는가. 그 복잡한 맥락을 헤아릴 시간도 가지지 않은 채 반지하방 주거 금지 정책을 발표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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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우리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는 데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이 시대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께서 (부디 제 신랄함을 용서해 주시길.) 시계의 태엽을 감는 사람 즉 시계 제조 장인이거나 인간의 모습이 아닌 매우 모호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정령‘과 같은 존재라면, ‘영혼‘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불편하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지배자가 이런 덧없고 순간적이고 애매한 것을 다스리려고 하겠습니까? 실험실에서 그 존재가 입증되지 않은 것들을 향해 권력을 휘두르고싶어 하는 계몽군주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폐하, 인간의 진정한 권력은 인간의 육신에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가가 만들어지고 국가 간에 국경선이 수립되었다는 것은 결국 명확히 규정된 공간에만 인간의 육체를 머물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자와 여권이 만들어졌다는 건, 이동과 움직임의 자연적인 필요성을 제한하고 조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금을 부과하는 통치자는 자신의 국민에게 어떤 것을 먹이고 어디서 잠을 재울지, 비단옷을 입힐지 마직 옷을 입힐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 P396

마찬가지로 폐하께서도 어떤 시신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결정하십니다. 모유가 가득 찬 어머니의 가슴이 모든 아이에게 고른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언덕에 자리한 궁궐에 사는 아기가 싫증 날 때까지 젖을 빠는 동안, 계곡의 작은 마을에 사는 아기는 얼마 남지 않은 젖에 만족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 수천 명의 육체를 피바다로 밀어넣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다스리는 것은 삶과 죽음의 왕이 되시는 것이며, 그것은 가장 큰 나라의 황제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저는 당신, 삶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폭군, 압제자에게 이 글을 씁니다. 이제 저는 간청하지 않고, 저만의 방식대로 당당히 요구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을 수 있도록 제게 돌려주십시오. 폐하, 저는 당신을 끝까지 따라다닐것입니다. 어둠 속의 은밀한 음성처럼, 저는 죽어서도 결코 당신에게 평화를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속삭임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요제피네 졸리만 폰 포이히터슬레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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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공간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모든 곳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더욱 거대하게 만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세부 항목들은 사라지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모양을 잃어버리며 쪼그라들어서 불분명해진다. 낮에는 ‘아름답다‘ 혹은 ‘유용하다‘고 말할 수있었던 것들이 밤에는 마치 형태를 잃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가상으로 존재한다. 낮 시간에 드러난 형태의 다양성, 색의 현존, 음영 따위는 전부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크림색 소파 천, 잎사귀 문양이 찍힌 벽지, 커튼의 술 장식 따위가 과연 어디에 쓰인단 말인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드레스의 초록색도 마찬가지다. 상점 진열장에 걸려 있을 때 대체 무엇 때문에 저 빛깔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던졌는지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다. 단추나 후크, 걸쇠는 없다. 어둠 속의 손가락이 마주치는 건 모호한 돌출부, 거친 면, 딱딱한 덩어리뿐이다. - P346

그다음에는 아이와 놀아 주는 게 일과였다. 날씨가 좋으면 손자를 베란다로 데리고 나가곤 했다. 사실 딱히 볼 건 없었다. 물이다 말라 버린 바다에서 자라난 거대한 회색빛 산호초를 연상시키는 아파트 건물들만 사방에 즐비했으니, 그 바다는 움직이는 생물로 가득하고, 거대한 대도시 모스크바의 어슴푸레한 수평선과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시선은 구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구름의 아랫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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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렉시트에 찬성한 사람들 중 다수가 영국에 있는 거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이민자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니 이민자를 없애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회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데도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민자들과 의미 있는 교류를 하는 집단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인구의 거의 50%가 이민자인 런던에서는 브렉시트에 찬성한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매우 낮게 나왔다. 이민자들과 자주 만나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이 끔찍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 P71

윌리엄스 ㅡ  ‘강화된 경계심 측정‘ 설문지로 실제 차별 경험이 아니라 차별을 경험할 것 같다는 우려만으로도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가령 집을 떠나기 전에 미리 오늘 어떤 일을 당할지 걱정하고 무시나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등의 스트레스가 삶을 해칠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문지로 인해 1990년대 중반 내가 가지고있었던 중요한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당시 여러 도시에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정해진 시간마다 혈압을 측정했을 때, 낮에는 젊고 건강한 흑인과 백인의 혈압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았지만 밤에 잠을 잘 때면 백인의 혈압 감소폭이 흑인보다 더 컸다. 밤에도 흑인의 혈압이 많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늘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 긴장에 따른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 마치 잠이 들었을 때도 온전히 긴장을 놓지 못하고한쪽 눈을 뜨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최근에는 낮에 차별을경험한 흑인들의 경우 밤에도 혈압이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가 여럿 나왔다. 차별적인 환경은 삶의 모든 시간에 악영향을 줄 수있다. - P73

김승섭 ㅡ 제도적 차별은 법률로 막을 수 있고, 일대일 관계에서 누군가를 차별하는 행동은 혐오 발언 규제 등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차별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무의식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은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
윌리엄스 ㅡ 내가 타인을 차별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차별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차별적인 행동을 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일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편견은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풀 때 더 쉽게 나타난다. ‘반고정관념 이미지 counter stereotype image‘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만약에 모든 여성이 연약하다고 생각한다면, 저녁에 잠들기 전 강인한 여성은 어떤 모습일지 여러 번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대체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고정관념을 가진 대상을 계속해서 직접 만나 관계를 맺는 것 역시 내재적 편견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공동체에 존재하는 부정적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미디어를 통해 고정관념을 바꾸려는 시도가 더 적극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 TV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을 매우 매력적으로 그릴 때, 동성애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 P76

김승섭 ㅡ 당신은 정신질환과 관련해 서로 다른 두 가지 낙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가진사람들에 대해 갖는 ‘대중 낙인 public stigma‘ 이고 또 하나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갖게 되는 ‘자기 낙인self stigma‘ 이다.
코리건 ㅡ 사회는 유색인종, 여성, 동성애자, 휠체어 사용자와 같은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든다. 그 고정관념에서 편견이 발생하고 편견은 차별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들이 무능력하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편견은 그런 고정관념에 동의하는 것이고, 차별은 "당신을 고용하지 않겠다", "당신이 학교에 오지 못하게 하겠다"와 같은 말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일련의 과정이 모두 대중 낙인이다. 대중 낙인은 차별로 이어진다. 반면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위험하고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낙인은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우울증의 끔찍한 역설은 스스로가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것을 잊을 만큼 심각하게 우울해지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로인해 당사자는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 P86

 그러나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말을 하기 시작하면 훨씬 더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낙인을 줄이려는 교육이나 캠페인에 돈을 쓰기보다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정신질환 당사자가 직접 "나도 똑같은 사람이고, 바로 이 자리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미국 동성애커뮤니티의 경험이 훌륭한 모범 사례다. 한때 미국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소아성애자라는 고정관념으로 이들이 선생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연구자들이 잘못된 낙인이라고 지적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동성애자들이 직접 나서서 "입 다물고 나를 봐라. 나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다"라고 직접 말한 뒤에야 그러한 고정관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아이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낙인 없이 성장했다. 그건 단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성적 지향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두 아이에게 동성애자 삼촌이 있었고, 가까운 동성애자 목사가 있었고, 부모와 친구로 지내는 동성애자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를 혐오하더라도, 옆자리에서 일하는 동성애자에게 "당신이 역겹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 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남은 힘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혐오 발언을 막고, 장기적으로는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정신질환 역시 당사자가 사회에 나오고 존재를 드러내야 낙인을 줄일 수 있다. - P89

세 번째 키워드는 정치입니다. 작년부터 진행된 이동권투쟁을 지켜보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처음에는 그 불편함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던 시민들이 투쟁에 나선 장애인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출근을 위해 지하철을 탄이들이 이동권 투쟁으로 인해 지각하는 일이 반복되자 "왜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를 주느냐"라며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정치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2022년 3월, 대선에서 막 승리했던 당시 국민의 힘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서울 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라고 규정했고, 정부에서는 장애운동 자체를 적대시하며 처벌하고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운영해야 하는 국가 살림에서 모든 요구 사항을 받아들일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정부와 정치인들은 마땅히 거쳐야 할 경청과 조율이라는 과정을 생략한 채 장애인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데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장애인과 시민을 분리시키고 그들이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기를, 그렇게 여론의 불만이 점점 더 커져 장애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시민‘의 범주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 P95

『편견 The Nature of Prejudice을 저술한 고든 올포트 Gordon Allport는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가 외부인과 만날 때,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어떤 만남은 편견과 혐오의 재생산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만남이 상호 이해로 이어지기 위한 네 가지 조건 중 하나는 그 만남이 위로부터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더라도 인종차별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교장이, 기업주가, 대통령이 없다면 그 만남은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의 확대로 이어집니다. 저는 한국의 정치가 지난 2년 동안 이동권 투쟁의 목소리를 방관했다는 몇몇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가장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싸우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악화시킨 적극적 개입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P96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못합니다. 근거는 언어의 형태를 한 지식으로 표현되는데, 그지식의 생산에는 자본과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동권투쟁에 나선 장애인을 비난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모습처럼, 공동체가 오랫동안 누적된 차별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개인에게모든 책임을 부과할 때, 차별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당사자는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와 기회를 빼앗깁니다. 그러한 조건위에서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하는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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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손은 여성의 몸을 통해 수천 번이나 확인한 끝에 그 안에서 어떤 균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거기에는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열 수 있는 마개나 숨겨진 자물쇠 따윈 없었다. 불룩 튀어나온 돌출부도, 그를 내부로 초대하는 비밀스러운 빗장도 없었고, 누르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은 스프링이 튀어나와서 욕망으로 가득 찬 복잡한 내부를 그의 눈앞에 드러내 보이는 버튼도 없었다. 어쩌면 인체의 내부는 전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지도 모른다. 그저 표면이 거꾸로 뒤집혔거나 안쪽으로 휘었거나 나선형으로 휘감긴 것뿐일지도 모른다. 모나드의 표면에는 무한한 신비가 감춰져 있다. 놀랍도록 교묘하게 잘 포장된 이 구조물들은 자신에게 깃든 눈부신 풍요로움의 극히 일부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여행자도 자신의 짐 가방을 이처럼 완벽하게 정리하여 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질서와 안전, 미적 감각을 고려하여 장기들끼리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도록 배치하고 지방 조직으로 내벽을채우고 완충 작용을 유도한다. 불안정한 비행기 안에서 반쯤 잠든 상태로 블라우 박사는 이처럼 열정적인 환상에 빠져들었다. - P204

이곳에서 사내는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랐다. 그의 어깨에 닿는 키 작은 여인들이 앵무새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그를 밀치면서 사람들 무리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그는 불교 신자로서 하루에도 여러 번 시간이 날 때마다 되뇌던 서약의 내용을 떠올리고는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의 기도와 행동으로 감각이 있는 모든 존재를 계몽하기위해 노력하겠다고 맹세했건만 갑자기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두 눈으로 나무를 보았을 때 솔직히 그는 실망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기도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장소에 어울리는 예를 표하기 위해 여러 차례 몸을 숙여 절하고 시주를 두둑이 한 뒤에 두 시간도 안 되어 헬리콥터로 돌아왔다. 오후에 그는 이미 호텔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면서 그는 땀과 먼지, 인파와 노점상들의 들척지근한 냄새, 어디에서나 맡을 수 있는 향불의 독특한 향기, 종이 접시에 담아 파는, 모두가 손으로 집어 먹는 커리 냄새를 물줄기로 씻어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를 전율하게 만든 것들, 그러니까 질병과 노쇠와 죽음을 실은 그가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깨달음을 얻었건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작은 변화의 조짐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는 이미 그러한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희고 폭신한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그는 자신이 정말 깨침을 갈망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한순간에 모든 진실을 보기를 원했던 것일까. 엑스레이를 들여다보듯 세상을 투시해서 그 공허한 뼈대를 확인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바로 그날 저녁 그는 그 관대한 인도인 친구에게 뜻하지 않은선물을 선사해 준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바스러진 나뭇잎 한 장을 꺼냈다. 두 남자가 경건한 자세로 나뭇잎을 향해 몸을 숙였다. - P258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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