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대동소이한 읊조림에 리듬이 실리고 한때의 평온함이 몸속에 번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무용의 등을쓸어내린다. 무용은 촉촉한 코를 그녀의 턱에 비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꼭 개라서가 아니다. 사람한테라고 다를 바 없지. 늙은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늙은이는 질병에 잘 옮고 또 잘 옮기고 다닌다는•••••• 누구도 그의 무게를 대신 감당해주지 않는다는. 다 사람한테 하듯이 그러는 거야. 너를 잘 돌봐주진 못했어도 네가 그런 지경에 놓이는 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죽어서도 마음이 불편하겠지. 그러니 언젠가 필요한 때가 되면 너는 저리로 나가. 그리고 어디로든 가. 알겠니. 살아 있는데, 처치 곤란의 폐기물로 분류되기 전에." - P138

이때 조각의 마음속 시선은 몇 갈래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순차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에 그 모든것을 떠올릴 만큼 머릿속의 신호등이 아직 쓸 만한 것 같았다. 그중 하나는 지금껏 골몰해온 대로 늑골을 다 열어 심장을 꺼내보기 전에는 그 심리를 알지 못할 투우-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기묘한 방해 공작에 대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조금 편찮은 정도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 장 박사에 대한 안쓰러움 비슷한 감정이었는데, 그 느낌은 리어카노인을 거들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궤적을 그렸으며,
서로가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다는데에서 비롯되는 서글픔을 포함하고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선택 특진제도 아닌 다음에야 의사를 골라 진료실에 들어갈수 없는 만큼 남은 두 명의 내과의 가운데 강 박사를 마주칠절반의 확률에 대해서였는데, 이때 그녀는 자포자기인지 일종의 기대감인지 모를 것이 폐에 차올라 세찬 맥놀이와 함께 간섭음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절반의 확률 안에 포섭되었다. - P203

조각은 주인 여자가 내민 손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귤을 받아 껍질을 벗긴다. 말랑말랑한 감촉으로 봐서 그리시지 않을 줄이야 알았지만 입에 넣으니 주인 여자의 말이상이다. 혀에 감긴 귤 알맹이가 부서지자 입안이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감각으로 채워지고, 세로토닌이 한껏 상승한상태에서 조모와 손녀를 바라보니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스럽다. 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지바른곳의 사람들,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는 행위가 좋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 P211

주인 여자의 한숨 앞에 조각은 자기가 강 박사의 어머니를 이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일을 사는 것 말곤 달리 없을 것 같아 귤 한 망태기를 달라고 한다. 여남은 개들어 있는 한 망에 8천 원이면 싸지는 않지 싶으면서도 지갑을 여는 그녀 옆으로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진다. 문득 지폐를 세던 그녀의 손가락이 굼떠진다. 한기가 들면서 불안감섞인 흥분이 땀으로 맺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며, 그녀는 동요하는 눈동자에 힘을 주어 옆으로 밀어본다. 그녀의팔꿈치와 거의 붙을 듯이 서서 바구니에 담긴 단감을 한 개들어 만지작거리는 투우의 옆모습이 거기 있다.
"홍시 있으면 좀 보여주실래요?"
투우는 조각을 짐짓 모른 척하며 주인 여자에게 말한다. - P213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집에 와서 그녀는 꼭 한 개를 먹었을 뿐이고, 그 뒤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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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보인 것은 진주색 등으로, 목뒤로 늘어뜨려진스카프가 홈이 깊이 파인 셔츠를 걸친 등을 반쯤 가리고 있었으나 달빛에 반사되는 단단한 척추와 견갑골이 두드러져이제 곧 거기서 날개가 돋기라도 할 것 같았다. 바깥쪽으로 돌아선 자세로 베란다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사람이 숨기에 고개를 반쯤 돌려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소년을 흘겨보았는데, 그것이 지난 엿새간 가사를 맡아준 도우미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소년은 기억에 입력해야 하는 몇 가지사실들 ㅡ추정 40대 초중반 여성, 마른 단신에 세미 롱의 직모ㅡ을 잊어버린 채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일어난 미풍이 창밖에 휘날리는 꽃잎들을 실어 날라 오는 것만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버지를 저렇게 만들어놓고 어째서 당신의 옷이나 얼굴에는 단 한 방울의 피가 튀지 않고 그토록 깨끗한가요 그것은 대체 무슨 기술인가요, 소년은 이 순간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을지도 몰랐다. - P106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주친 첫 순간 투우는 그녀의 버들눈썹과 옴쏙한 두 뺨이며 강퍅해 보이는 입술을 바로 알아보았고 물론 상대편에서는 소 닭 보듯 멀뚱히 건너다보며 이쪽에서 선배에게 건네는 인사를 거절했다. 우리는 서로 모르고 지내도 되네. 팀워크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알고 지내서 이익 될 만한 사람도 아닐세.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못함이 확실해지자 그의 몸 한 귀퉁이에서 약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시절과, 그것을 이루거나 부순 몇몇 장면들이 요동하며 그의 눈꺼풀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신은 이미 늙었고 완고하며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지.
그렇게 무심히 고개 돌리는 순간 언제라도 내 손가락 다섯개를 펼쳐 당신의 머리를 쥐어 터뜨릴 수 있지. 당신은 방심할까. 당신은 막거나 피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겠지. 시선의 속도와 마음의 움직임을 몸이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걸스스로도 잘 알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시시껄렁한 놈들처럼 최저가 입찰이나 클릭하고 앉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실망스럽겠지.
어떻게, 한때 내 아비의 대갈통을 박살 냈던 여자가 고작 그런 일을 그것만은 있어선 안 되는 일.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뻗은 손을 슬그머니거둬들여 입 맞추며 그는 다만 바라보았다. 끌어당겨 손가락에 감아보고 싶었던 머리카락 대신, 거기엔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이 손 닿지 않는 선반 위의 해묵은 먼지처럼 뭉쳐 있었다.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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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사는 동안 좌절도 많이 겪었지만, 쑹자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했다. 여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식들에게 미국식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고, 실제로 버는 데에 성공했다. 수입의 대부분은 자녀를 교육하는 데에쓰였다. 쑹자수의 딸들은 세 명 모두 미국에서 공부했고, 막내 메이링은고작 아홉 살에 미국으로 가서 10년이나 머물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돌봐주는 어른 한 명 없이 스스로 생활했다는 점이다. 감리 교회와미국 사회에 대한 쑹자수의 신뢰는 그 정도로 두텁고 굳건했다.
쑹자수는 겉으로는 언제나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미국인 친구들 중에는 그를 "진중한 생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들도있었다. 그러나 쑹자수는 이미 굳은 결심을 한 상태였다. 조국 중국을 ‘아름다운 나라‘ 미국(美國)처럼 만드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다짐이었다. 1885년 말 쑹자수는 사랑하는 미국을 뒤로 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 P61

특권에 대한 칭링의 반응은 아이링과 매우 달랐다. 칭링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릴 적에는 일요일마다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에 갔다. 우리가 교회에 도착하면목사와 전도사들은 옷차림이 남루한 여자들을 앞자리에서 서둘러 쫓아냈다. 우리에게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말이다!" 이때의 기억은 칭링이 선교사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훗날 공산주의로 전향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면서도 상냥했던 그녀가 사귄 친구는 몇 명 되지않았지만, 우정은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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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정말로 간호사들이 출근하기전에 몸을 피해야겠다는 듯이 어질러진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조각은 점차 긴장이 풀리며 의사에 대한 작은 믿음이 생겼는데, 이것은 방역업자가 타인을 대할때 갖게 되는 양면의 관점으로서 우선 닥치는 대로 누구든의심하고 보자는 반면에 그가 진실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눈도 발달한 결과로, 이 의사는 물에 빠진 걸 건져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적개심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며, 그 태도에는 방법이 약간 올바르지 않으나 그 상황에 의사로서 할 수밖에 없었던일을 했을 뿐이라는 심상함과 무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 P87

할머니의 말에 아이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어 보인다. 아저 아이가 강 박사의 딸이구나. 저 아이는 그날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아니면 예쁜 옷 한 벌이라도 새로 해입었을까. 요즘 아이들 옷은 터무니없이 비싸다던데 그걸론모자라지나 않았을까.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 P96

"공주님 몇 살?"
"여섯 살이에요."
여섯 살•••••• 강 박사의 딸은 여섯 살. 알면서 물었으나 굳이 아이의 목소리로 듣고 나니 ‘- 쌀‘이라는 발음에 맺힌 수분이 언제까지고 증발하지 않은 채 귓가에 맴돌 듯하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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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현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 같은 이야기‘는 19세기 끝자락에 태어난 상하이 태생 세 자매의 이야기이다. 자매들은 부유하고 유명한 도시의 엘리트 계층인 쑹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어머니의 외가는 중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기독교 가문인 쉬씨 가문이었다(상하이에 이 가문의 성을 본뜬 쉬자후이 지역이 있다). 아버지는 10대일 때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남감리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세 딸 아이링愛齡, 1889년 출생], 칭링[慶齡, 1893년 출생], 메이링[美齡, 1898년 출생])은 어린 시절에 교육을 받기 위해서 미국으로 보내졌는데, 당시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몇 년 후 귀국한 세 자매는 중국어보다 영어에 더 능통했다. 왜소한 체구와 각진 턱을 가진 이 자매들은 전통적인 기준에서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다. 그들의 외모는 참외처럼 둥근 얼굴, 아몬드같은 눈, 늘어진 버들가지 같은 눈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자매들은 고운 살결과 섬세한 이목구비, 우아한 맵시를 갖추었고, 세련된 옷차림은 이들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자매들은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지적이었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들에게는 ‘격조‘가 있었다. - P11

국부의 부상

1894년 7월 4일, 하와이가 공화정을 선포했다. 여왕 릴리우오칼라니가 폐위된 이듬해였다. 중국 해안으로부터 약 9,650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여파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오늘날의 중국을 만드는 데에 일조한 것이다. 스물일곱 살의 급진주의자 쑨원이 하와이 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모두의 입에 ‘공화정‘이라는 단어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왕당파가 릴리우오칼라니의 복위를 노리는 동안 공화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왕당파를 격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뜨거웠다. 조국의 군주제를 무너뜨릴 계획을 꾸미고 있던 청년 쑨원은 중국도 하와이처럼 공화국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P21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만주족은 소수의 이민족 지배자로 간주되었고, 토착 한인(漢人)들의 끊임없는 저항에 시달렸다. 쑨원도 그러한 한인 중의 한 명이었다. 저항 세력들은 대개 만주족 지배 이전의 한족 왕조인 명나라(1368-1644)의 복권을 외쳤다. 그러나 명나라를 부활시키자는 주장에는 문제가 많았다. 명나라 말기에 조정은 이미 뿌리까지 썩은 상태였고, 농협들의 반란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었다. 만주족은 혼란을 틈타 쳐들어와서 사태를 종결했을 따름이었다. 사람들은 명나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구체적인 장래 계획은 없었다. 하와이의상황을 목격한 덕분에 쑨원은 중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명료하고도 전향적인 청사진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해답은 공화정이었다. 그해 11월, 햇볕이 내리쬐는 호놀룰루에서 쑨원은 ‘흥중회(興中會)‘라는 정치조직을 설립했다. 창립총회는 현지의 한 중국인 은행장의 가정집에서 열렸다. 격자 창살과 열대 관목이 그늘을 드리우는 넓은 베란다가 딸린 2층목조 주택이었다. 스무 명 남짓한 회원들은 모두 하와이 방식대로 왼손은 성서에 두고, 오른손은 치켜든 채 쑨원이 작성한 서약문을 낭독했다. "만주족을 몰아낸다.•••••• 그리고 공화국을 수립한다."
두 목표를 결합한 것은 신의 한 수로 드러났다. 공화주의가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11년에 만주족 왕조는 무너졌고, 공화국이 된 중국에서 쑨원은 ‘국부(國父)‘로 알려지게 되었다.
쑨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머지않아서 공화정을 대안으로 떠올렸을것이다. 쑨원은 하와이 덕분에 그 발상을 선점한 것이었다. 이렇듯 쑨원의 야심만만한 성격,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향은 공화국 중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였다. - P22

해외에서 지낸 경험으로 인해서 쑨원은 조국을 경멸했고, 모든 문제를 만주족 정권의 탓으로 돌렸다. 수년 동안 그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만나서 생각을 공유했다. 등 뒤로 땋아내린 변발에서부터 만주족의 중원 정복으로 짓밟힌 치욕스러운 역사에 이르기까지, 만주족이라면 치가 떨린다는이야기였다. 차를 마시고 국수를 먹으며, 그들은 만주족 황제를 끌어내리는 꿈을 꾸었다. 친구들 가운데에는 예전에 마을의 신상을 부수는 데에 함께했던 루하오둥도 있었고, 광저우의 비밀 결사 삼합회(三合會)의 두목이던 새로운 동지 정스량도 있었다. 두 친구의 외모는 정반대였다. 루하오둥은 낯빛이 온화한 반면, 정량은 두꺼운 쌍커풀 아래에 음험한 시선을 숨기고 처진 입꼬리를 꽉 다물고 있어서 범죄 조직의 조직원이 되기에 알맞은상이었다. 쑨원 무리는 시시한 오합지졸로 보였지만, 만주족 왕조를 끝장내고 자신들의 손으로 중국을 다스리기 전까지는 절대 만족하지 않겠다는 대단한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 거대한 국가에 맞서야 함을 알면서도 이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 P30

이렇게 큰일을 벌이려면 많은 돈이 들었다. 폭력배들을 부리고 무기를 사는 데에 필요한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쑨원이 1894년 하와이로 돌아간 것은 반란을 일으킬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만주족을 타도한 이후의 미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바로 공화정이었다.
하와이의 중국인들은 수천 달러를 내놓았다. 쑨원은 더 많은 돈을 모금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바로 그때, 상하이의 친구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즉각 귀국하여 혁명을 개시하라는 것이었다. 중국은 일본의 공세에 신음하고 있었다. 전쟁에 대응하기에는 만주족 정권의 능력이역부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민심은 나날이 사나워져갔다. 쑨원은 지체없이 귀국하는 배에 올랐다.
쑨원에게 편지를 보내서 공화주의 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 일조한 사람은 미국의 남(南)감리 교회의 전도사였다가 지금은 상하이의 부유한 사업가가 된 서른세 살의 쑹자수였다. 쑹자수는 신상 파괴 사건 이후 상하이로 와서 살고 있던 루하오둥의 소개로 쑨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1894년초에 쑨원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세 사람은 밤늦도록 정치를 논했다. 쑹자수는 쑨원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을 증오했고, 불평만 늘어놓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쑨원을 높이 평가했다. 당시 쑨원은 유명하지 않았지만, 이미 절제되면서도 강한 확신을 내비쳤다. 그는 자기 자신을 믿었고,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확신했으며,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보았다. 자신감에 가득찬 쑨원의 태도는 쑹자수와 같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쑨원에게 넉넉한 후원금을 보탰다.
쑹자수는 쑹씨 세 자매의 아버지였다.  - P32

청조는 쑨원의 동정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었다. 런던의 청나라 공사관은 슬레이터 탐정 사무소에 의뢰하여 쑨원의 뒤를 밟았다. 10월 1일 사무소의 소장 헨리 슬레이터는 첫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시하신 사항에 따라서 우리 직원 한 명을 리버풀로 보내 화이트스타 사의 SS 머제스틱 호에 탑승하는 신 우[쑨원의 가명]라는 남성을 추적한 바, 보내주신 인상착의에 부합하는 중국인 남성 한 명이 어제 정오 리버풀 항구의 프린스 잔교에서 상기한 배에 탑승하는 장면을 포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탐정 사무소는 이어서 쑨원의 런던행 일정도 자세히 기록했다. 보고서에는 그가 어떤 기차를 놓치고 어떤 기차를 탔으며,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보관소에서 짐을 찾아 "12616번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는 것까지 꼼꼼히적혔다.
이튿날 쑨원은 런던 중심부의 데번셔 가 46번지에 위치한 캔틀리 박사의 집을 찾아갔다. 캔틀리는 그해 2월에 귀국하여 런던에 머물고 있었다. 나중에 캔틀리는 그가 홍콩을 떠나기 전 쑨원의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는, 쑨원이 호놀룰루에 있는데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했습니다"라고영국 당국에 증언했다. 이 말을 들은 캔틀리는 먼 여행을 감수하면서까지하와이로 가서 옛 제자를 만났다. 그는 쑨원의 진정한 동지였다. - P37

그러나 책을 쓸 때에는 그렇게까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없었다. 쑨원은캔틀리 박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서둘러 책을 집필했다. 런던에서 납치당하다(Kidnapped in London)」라는 간결한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몇몇 언어로 번역되었다. 쑨원은 이제유명 인사였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피해자를 향한 영국 대중의호의적인 여론은 곧 시들해졌다. 그들은 폭력적인 혁명을 꺼렸다. 캔틀리의 친구들은 쑨원을 가리켜 "자네의 그 골칫거리 친구"라고 비웃고는 했다. 쑨원을 지지하는 유럽인은 여전히 캔틀리 부부가 거의 유일했다.
그러나 쑨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중국인 급진주의자들에게 전해져 그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쑨원을 찾아왔고, 그의 말에 열렬히 귀 기울였다. 1897년 7월 마침내 쑨원은 런던을 떠났다. 그의 뒤를 미행하던 사설 탐정의 보고에 따르면, 캐나다를 경유해서 극동으로 향하는 내내 모든 곳의 사람들이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했다. 쑨원의 일정은 빌 틈이 없었고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연설할 때마다
"청중이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은 지갑도 기꺼이 열었다. 금전적으로 여유로워진 쑨원은 밴쿠버에서 캐나다 돈으로 100달러의 차액을 지불하고 2등실 좌석 대신 1등실에 탔고, "이전에는 본 적 없는 근사한 양복을 갖춰 입었다." 그때부터 쑨원의 행보는 그가어린 시절 친구인 루찬에게 활짝 웃으며 전한 그대로였다. "어디를 가든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네." 루찬은 덧붙였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쑨원은 명성 하나로 지구 반대편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탈것과 머물 곳, 먹을 것이 끊이지 않았고, 청하는 족족 기금이 마련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승용차와 보트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공사관에 들어가서 감금되었던 경험 덕분에 쑨원은 중국의 혁명가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 P46

1900년, 외세 배척과 기독교 반대의 기치를 내건 비밀 결사 의화단의 반란으로 중국 북부가 쑥대밭이 되었다. 청조의 의화단 진압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열강은 일본과 미국, 영국 등 8개 국의 연합군을 조직하여 베이징을 점령했다. 청조는 수도에서 쫓겨나 옛 수도였던 서북 지역의 도시시안으로 망명했다. 이 시기에 만주족 황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쑨원은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남부의 성들을 점거한 다음, ‘공화국‘을 수립하겠다며 일본 정부에 후원을 요청했다. 당시 타이완은1894-1895년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쑨원은 자신이 중국 동남부 해안 지방에서 삼합회 반란을 일으키면, 바다 건너 타이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이 "소동"을 빌미로 중국 본토를 침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일본 정부는 심사숙고한 끝에 쑨원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쑨원은 계획을 스스로의 힘으로 실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삼합회의 두목인 친구 정스량에게 해안 지방에서 봉기를 일으키라고 주문한 다음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당시 타이완의 일본인 총독은 중국 본토로 진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10월 초, 정스량은 수백 명을 동원해서 동남부 해안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대규모 항구가 있는 도시 샤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탄약과 군대를 지원하려던 타이완 총독의 계획은 일본 정부의 강경한 제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봉기는 실패했고, 쑨원은 타이완에서 추방되었다. (수 개월 후 정스량은 홍콩에서 식사를 마친 뒤에 갑자기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뇌졸중이었으나, 독살되었다는 의혹은 한참 후까지 이어졌다.) - P48

대신 주변국들은 당시 청조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서태후에게 협력하는 쪽을 택했다. 쑨원이 중국 바깥에서 폭력에 의한 혁명을 부르짖는 동안, 중국 안에서는 서태후의 지휘 아래 비폭력적인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범상치 않은 여성은 선황 함풍제의 후궁으로, 1861년 남편이 승하한 이후 궁정 내부 쿠데타를 통해서 최고 권력자 지위에 올랐고, 그때부터 전근대적인 중국 사회를 근대화하는 사업을 벌였다. 성과는 놀라웠다. 서태후는 1889년 양아들인 광서제가 성인이 되면서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1895년 청일 전쟁의 뼈아픈 패배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1898년부터 개혁을 다시 추진해나갔다. 광서제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서태후 암살 시도, 의화단의 난동 등으로 인해서 개혁이 몇 차례 중단되었지만, 혼란이 잦아들면 서태후는 더욱 강하게 개혁을 밀어붙였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서태후의 개혁은 여러 방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교육 제도가 도입되었고, 언론의 자유라는개념이 소개되었으며, 1902년의 전족 금지령을 위시한 여성 해방 정책이시행되었다. 서태후는 선거를 통해서 의회를 조직하고 중국을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몽 사업의 진척 속도는 무척 빨라서, 쑨원마저 하루에 1,000리를 가는 속도"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쑨원에게 세례를 해주었던 찰스 해거 박사는 1904년 쑨원과 마주친 로스앤젤레스의 한 자리에서 청조가 "당신이 이전에 주장했던 개혁책들을 추진하고 있으니" 만주족 왕조 치하에서도 중국은 충분히 새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쑨원의 대답은 간절했다. "만주족은 반드시 몰아내야 합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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