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보인 것은 진주색 등으로, 목뒤로 늘어뜨려진스카프가 홈이 깊이 파인 셔츠를 걸친 등을 반쯤 가리고 있었으나 달빛에 반사되는 단단한 척추와 견갑골이 두드러져이제 곧 거기서 날개가 돋기라도 할 것 같았다. 바깥쪽으로 돌아선 자세로 베란다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사람이 숨기에 고개를 반쯤 돌려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소년을 흘겨보았는데, 그것이 지난 엿새간 가사를 맡아준 도우미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소년은 기억에 입력해야 하는 몇 가지사실들 ㅡ추정 40대 초중반 여성, 마른 단신에 세미 롱의 직모ㅡ을 잊어버린 채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일어난 미풍이 창밖에 휘날리는 꽃잎들을 실어 날라 오는 것만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버지를 저렇게 만들어놓고 어째서 당신의 옷이나 얼굴에는 단 한 방울의 피가 튀지 않고 그토록 깨끗한가요 그것은 대체 무슨 기술인가요, 소년은 이 순간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을지도 몰랐다. - P106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주친 첫 순간 투우는 그녀의 버들눈썹과 옴쏙한 두 뺨이며 강퍅해 보이는 입술을 바로 알아보았고 물론 상대편에서는 소 닭 보듯 멀뚱히 건너다보며 이쪽에서 선배에게 건네는 인사를 거절했다. 우리는 서로 모르고 지내도 되네. 팀워크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알고 지내서 이익 될 만한 사람도 아닐세.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못함이 확실해지자 그의 몸 한 귀퉁이에서 약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시절과, 그것을 이루거나 부순 몇몇 장면들이 요동하며 그의 눈꺼풀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신은 이미 늙었고 완고하며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지.
그렇게 무심히 고개 돌리는 순간 언제라도 내 손가락 다섯개를 펼쳐 당신의 머리를 쥐어 터뜨릴 수 있지. 당신은 방심할까. 당신은 막거나 피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겠지. 시선의 속도와 마음의 움직임을 몸이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걸스스로도 잘 알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시시껄렁한 놈들처럼 최저가 입찰이나 클릭하고 앉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실망스럽겠지.
어떻게, 한때 내 아비의 대갈통을 박살 냈던 여자가 고작 그런 일을 그것만은 있어선 안 되는 일.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뻗은 손을 슬그머니거둬들여 입 맞추며 그는 다만 바라보았다. 끌어당겨 손가락에 감아보고 싶었던 머리카락 대신, 거기엔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이 손 닿지 않는 선반 위의 해묵은 먼지처럼 뭉쳐 있었다.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 P130